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울부짖는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오라버니!”임원이 간절하게 불렀지만 임학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만이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둘 중 누가 임 씨고 누가 김 씨인지부터 분명히 하시오!”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내리꽂히자 임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임학은 망설임 없이 임씨 부인을 부축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김단은 무릎 꿇고 땅에 주저앉아 있는 임원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낭자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소.”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동래는 생활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그런데도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다니...김단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임원의 몸이 눈에 띄게 들썩였다.이럴 리가 없는데.현실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임학 앞에서 불쌍한 척 연기하면 그가 반드시 자신에게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 줄 거라고 믿었었다.진산군 댁의 울타리 안에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굶주리며 사는 일은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비단옷과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먹고 입는 것만큼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그녀의 생각과 계획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현실에 절망감만이 감돌았다.임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깊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내가 행복해지는 게 그리도 싫소?”김단은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반문했다.“그럼 낭자는 왜 할머니를 죽였소?”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내가 할머니를 죽였다고? 무슨 헛소리하는지 모르겠소. 할머니는 어차피 죽을 몸이었소.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여름을 넘기지 못했을 거란 말이오.”하지만 김단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하지만 할머니는 분명 평온하게 떠나실 수 있었소. 낭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김단은 임원을 가차 없이 나뭇간에 가두라고 명령했다.그 한마디에 저택에 모여 있던 몸종들과 하인들은 숨을 죽였다.그들은 김단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위압감과 기세만으로도 그녀가 이곳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임원은 줄로 단단히 묶인 채 나뭇간으로 끌려갔다.김단은 일렬로 서있는 몸종들과 하인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아마도 너희는 저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소개해 주지. 저 낭자는 얼마 전 동래로 유배를 당했던 진산군 댁 아가씨다.”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유배형을 받은 죄인이 다시 수도에 나타나는 것은 대역죄에 속한다.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들이라 하여도 이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공포에 사로잡힌 이들 중 하나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런 중죄인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저희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김단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말했다.“그러니 더욱 잘 지켜야지. 만약 저 낭자가 도망이라도 치게 된다면 그 낭자의 죄뿐만 아니라 내 할머니를 죽인 죄까지 모두 너희에게 덮어씌울 것이다.”그 말에 몸종들과 하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꼭 지켜볼 겁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아.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너희들이 잘 지켜야 한다. 만약 임 도련님께서 오신다면 절대 풀어주지 말고 나를 찾아오라 전하거라.”“예, 아가씨! 꼭 명심하겠습니다!”사람들의 굳은 맹세를 듣고서야 김단은 만족스럽게 등을 돌렸다.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기다림에 지친 임학은 직접 평양 관저로 찾아왔다.그때 김단은 최지습을 위해 전장에 나설 짐을 꾸리고 있었다.이틀 후면 전장으로 떠나는 그를 위해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때 하인 하나
김단의 말을 들은 임학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휘둥그레졌다.그는 두려움이 가득 찬 시선으로 최지습을 바라보았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임원이 한양으로 돌아왔다고?”그는 임학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내 진산군 댁 사람들이 이렇게 대담한 줄 몰랐군.’그 말에 임학은 창백해진 얼굴로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원군님,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저희도 전혀 몰랐습니다. 부디 원군님께서 현명하게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하지만 최지습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김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김단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먼저 임 도련님의 저택으로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진산군과 임씨 부인도 함께 모셔 오도록 하세요. 오늘 모든 일을 한꺼번에 명확하게 밝히겠습니다.”“모든 일?”김단을 바라보는 임학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피어올랐다.김단의 차가운 눈빛과 느긋한 미소가 도리어 그를 압도했다.“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오?”김단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차가운 목소리가 그를 내려찍었다.“진산군 댁의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면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그 차가운 경고에 임학은 본능적으로 최지습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이제서야 그는 깨달았다.오늘 이 자리에서, 김단 앞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결국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떨군 채 돌아섰다.한 시진 후 저택은 사람들로 북적였다.김단이 저택에 도착하자 몸종들과 하인들이 급히 뛰어나와 고개를 조아렸다.“아가씨! 드디어 오셨군요! 그 아가씨는 아직도 나뭇간에 있습니다. 데려올까요?”“그래, 데려오거라.”김단이 명령하자 몸종들과 하인들이 서둘러 나뭇간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보던 임학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우스운 일이군. 저자들이 낭자에게 보이는 공경이 나보다도 더하다니.”김단은 그저 미소를 머금은 채 대꾸하지 않았다.목숨이 위협받으면 누
그녀의 말을 들은 진산군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의 눈동자 속에는 혼란과 충격이 뒤엉켜 있었다.“너 지금 원이에게 복수하는 것이냐?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이냐? 그해 네가 세답방으로 끌려간 건 우리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아무도 네가 모욕 당하고 학대 당할 줄은 몰랐어. 어찌 그 모든 죄를 원이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느냐?”최지습은 무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차분한 눈동자 속에는 살벌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진산군은 그의 눈빛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을 때 임원의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진산군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아버지,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저 너무 아파요! 어머니…”‘어머니’라는 한 마디가 임씨 부인의 마음을 울렸다.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임원을 쳐다보았다.임원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임씨 부인은 이성을 잃은 듯 임원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힘을 잔뜩 준 탓인지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단아!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냐? 이게 다 어미 잘못이다! 어미가 널 지켜주지 못했어! 엄마가 되어 제 딸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내 눈이 멀었던 게 틀림없다. 전부 내 탓이다. 단아... 우리 단이...”임씨 부인의 품에 안긴 순간 임원은 몹시 놀랐지만 이내 안도했다.그러나 그 기쁨은 임씨 부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김단을 애타게 부르는 순간 임원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가 불길처럼 솟아오르려 했지만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인지한 그녀는 억지로 그 감정을 삼켜냈다.입술을 깨물며 겨우 눈물을 닦아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어머니, 저는 언니가 아니에요. 저를 보세요, 저는 원이에요!”그러나 임씨 부인은 그 말을 듣고도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마치 눈앞의
임가 사람들은 임원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마침내 김단이 입을 열었다.“그래. 나도 알고 싶소. 낭자는 임가에 얹혀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어머니를 때린 것이오?”질문식으로 물어본 말이지만 김단은 이미 임원의 죄를 단정 지어버렸다.임원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다급히 외쳤다.“아니오! 난 아니오! 왜 나를 억울하게 몰아가는 것이오?”“억울하다고?”김단은 비웃으며 얘기했다.그녀는 근처에 서 있던 몇 명의 몸종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너희들, 나와서 말해보거라.”김단의 명령이 떨어지자 몸종들은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아가씨는 매일 밤마다 저희를 잠시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궁금해서 몰래 문밖에 남아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님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아가씨께서 부인의 목을 조르고 계셨습니다.”“거짓말!”임원은 눈을 부릅뜨며 절규했다.그녀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후에야 임씨 부인에게 손을 댔기에 그걸 증언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그때 또 다른 몸종이 다급히 나섰다.“저도 봤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저희에게 마님을 차가운 물로 목욕시키라고 명령하셨어요. 마님은 차가운 물을 싫어하시는데도 억지로 욕조에 눌러 넣고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임원은 서둘러 변명했다.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그건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어요! 오라버니, 제가 말했잖아요!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그런 거라고!”그러자 한 몸종이 무심코 중얼거렸다.“아가씨가 무슨 의원도 아니면서…”그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진산군의 가슴에 꽂혔다.그는 임씨 부인을 부둥켜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의원의 의술이 그렇게 뛰어난데도 냉수욕으로 경혈을 자극해 병을 치료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은 거냐?”임원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재빨리 대답했다.“제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명의 한 분을 만났습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옆에 있던 몸종이 그녀의 변명 따위는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섞여있었다.“저희에게 먼저 막말을 한 건 아가씨였습니다! 그래서 한 번 혼내준 것이 다지요. 저희가 언제 매일 아가씨를 때렸나요?”“맞아요! 저희가 주는 빵은 맛이 없다고 투덜대기만 하시니 음식물 찌꺼지를 준 겁니다.”다른 몸종들도 하나둘씩 중얼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이들은 제대로 된 가문의 몸종들이 아니었다. 임학이 약탈꾼들한테서 사들여 온 아이들이라 기본 예법조차 배우지 못한 채 억지로 몸종 노릇을 하고 있었다.그런 이들이 임원에게 반항한 건 단순한 충동 때문 만은 아니었다.유배형을 당한 그녀가 탈주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혹여라도 자신들이 그녀를 도왔다가 공범으로 몰릴까 두려워 더욱 가혹하게 대했던 것이다.게다가 임원은 평소에도 이들을 멸시하고 모욕했다.어느 날 참다못한 몸종들은 작은 사내아이들과 함께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임원을 한차례 두들겨 팼었다. 물론 심하게 때린 것은 아니었다.몸종 중 한 명은 이를 갈며 비웃듯 눈을 흘겼다. 그 눈빛 속에는 혐오와 경멸이 가득했다.그러나 임원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절박함과 공포가 뒤엉켜 있었다.“거짓말! 다 저를 모함하고 있는 것입니다!”“김단 낭자! 낭자가 몸종들을 매수한 것이오? 이들을 협박하여 나를 몰아가라고 했소? 낭자는 할머니의 죽음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내 목숨을 노리는 거잖소.”“닥쳐라!”진산군의 고함이 대청에서 울려 퍼졌다.그 거친 외침에 임씨 부인마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진산군은 얼른 부인의 등을 토닥거리며 진정시켰지만 눈빛은 여전히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네가 그렇게 김단을 탓한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더냐! 내 어머니의 죽음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느냐? 그리고 네가 김단을 비난하는 것도 참 웃기지 않느냐? 기억하거라. 김 씨는 단이가 아니라 너라는 사실을 말이다.
김단은 서늘한 눈빛으로 임학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낭자가 도련님께 뭐라고 말하던가요?”임학은 순간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그날 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임원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원 낭자는… 포졸들이 자신을 더럽히려 했다고 말했소.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와 거지처럼 구걸하며 한양에 돌아왔고 그 과정에 도적에게 정조를 잃었다고 했소.”그는 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임원을 놓고 말하면 이 모든 비극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임학은 그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한쪽이 미어지듯 아팠다.멀리 앉아 있던 최지습도 그 말을 듣고 잠시 눈빛이 어두워졌다.찻잔을 손에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시더니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짧은 시간에 구걸만으로 한양까지 돌아오다니... 임 아가씨도 참 대단하군.”그 말을 들은 김단은 미소를 감추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임학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최지습을 쳐다보았다.그러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시선을 다시 임원에게로 돌렸다.동래에서 한양까지 오는 길은 험난하고 복잡했다.어림잡아 계산해 보아도 지금쯤 한양에 도착해야 시간이 맞아떨어지는데 벌써 한양에 와 있다니...임학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있었다.그날 밤, 술에 취해 흐릿했던 기억을 되짚으며 자책했다.임원이 눈물을 머금고 평안 고리를 건네주던 순간의 따뜻한 감동이 이제는 배신감으로 변하며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임학은 떨리는 목소리로 임원에게 물었다.“낭자… 대체 어떻게 돌아온 것이오?”임원은 그 질문에 굳어버린 채 눈물을 흘렸다.이제 더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직감했지만 어떻게든 눈물로 동정을 유도하려 애썼다.하지만 그녀의 눈물도 이제는 무용지물이었다.그때 김단이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낭자 대신 대답해드리지요.”그녀는 시선을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임원의 얼굴에 고정시켰다.“포졸들의 손에서 도망친 후
김단이 말한 증인은 바로 두식이를 포함한 거지들이었다.김단은 임원을 나뭇간에 가둔 다음 날 곧바로 두식이를 찾아갔다.조심스레 임원의 정체를 알려주자 두식이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분노와 허탈함에 몸을 떨던 두식이는 그간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그 과정에 그 유랑 상인의 이름도 자연스레 밝혀졌다.그 후 김단은 직접 그 유랑 상인을 찾아갔다.운이 좋게도 그가 한양을 떠나기 바로 전날 그를 만날 수 있었다.그렇게 모든 진실을 알아낸 김단은 그제야 비로소 승리를 직감했지만 그로부터 오는 감정은 기쁨이 아닌 차가운 비애였다.그렇게 모든 진실이 드러나자 임원은 더 이상 변명할 힘조차 잃고 말았다.하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임학이었다.그는 믿기지 않는 듯 허리춤에 소중히 간직해온 평안 고리를 꺼내 들었다.그는 고리에 묻은 혈흔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이 평안 고리는 훔친 돈으로 만든 것이오? 나를 속이기 위해서 일부러 글씨도 정교하게 새기지 않은 것이고? 그럼 이 핏자국은... 설마 이것도 낭자가 일부러 흘린 것이오?”임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눈빛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 무기력하고 공허했다.그녀는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고 연기하려 하지 않았다.“이미 그렇게 믿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십니까?”그 순간 임원은 본 모습을 드러냈다.그동안 쥐어짜내며 연기했던 가련함과 애처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더는 거짓으로 감정을 가장할 필요도, 애써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었다.진산군은 분노로 몸을 떨며 소리쳤다.“네가 이렇게 음험하고 악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 배은망덕한 것!”그러자 임원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비웃었다.“제가 음험하다고요? 제가 악독하다고 했습니까? 그게 과연 제 잘못일까요? 다 당신들 탓 아닙니까?”그녀의 목소리에는 비통함과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3년 전, 제가 친딸이라고 말하자마자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고 제 말을 믿었었죠. 어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