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는 최지습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그에게 최지습은 남아있는 유일한 동생이었다.그런 동생이 여덟 해 동안 실종되었다가 가까스로 돌아왔으니 자기가 한발 물러나야지 뭐 어쩌겠는가?전하는 화가 나서 속이 뒤집히는 듯했지만 그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어휴 마음대로 하거라 이 무능한 놈아. 며칠 뒤 내 구 낭자와의 자리를 마련할 테니반드시 나가거라!”“소인 물러가겠습니다.”최지습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하도 마음속에 억눌렀던 답답한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최지습의 등장으로 인해 전하는 여덟 해 동안 꽁꽁 묶어두었던 감정들을 하나둘씩 드러내기 시작했다.그는 자신의 동생이었다. 이복형제였지만 같은 아버지의 피를 나눈 유일한 혈육이었다.한때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둘렀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홀로 싸웠던 존재이다.그로 인해 많은 사람을 죽였고 여덟 해 동안 죄책감에 몸부림쳤던 사람.자신은 지금 임금이 되어 만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그러니 이제는 그가 최지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비록 최지습이 크고 건장한 사내로 자랐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던 소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어리숙하고 연약했던 그 소년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다.궐에서 나오는 길, 최지습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이 궐은 너무도 많은 추억을 품고 있었다.좋은 기억, 나쁜 기억, 따스했던 순간, 그리고 처참했던 순간까지도그러나 결국 그 모든 기억은 피비린내로 물들어 있었다.청회색 벽돌 하나까지도 피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그는 청석으로 된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바로 이곳에서 그는 여섯 번째 형님을 죽였다.그리고 달빛이 비치는 높다란 궁궐 벽에서 그는 열 번째 형님을 장창으로 죽여버렸다.조금 더 걸어가니 궐문이 보였다.그때 그는 저곳에서 저항하던 여덟 번째 형님을 말에서 끌어내려 그의 가슴을
오늘 연회 자리에서 최지습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하지만 그의 주량으로 봐서는 그 정도로 취할 리가 없었다.그러니 김단은 지금 최지습의 상태가 몹시 걱정되었다.혹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다 중전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로 인해 전하가 그에게 이상한 것을 먹인 건 아닐까?원래는 궐문을 나선 후 쉽게 다시 들여놓지 않지만 궐을 지키는 병사가 마침 소하의 부하였고 최지습과도 잘 아는 사이였기에 김단을 허락해 주었다.조심스럽게 최지습을 부축한 후 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그의 손은 뜨거웠고 맥은 고르게 뛰고 있었다.비록 정식으로 의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소가에서 유 대인과 함께 지내며 맥 짚는 법 정도는 익혀두었기에 맥박을 측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최지습의 맥은 고르고 평온했다.그러니 몸에 해로운 것을 먹은 것은 아닌 듯했다.그렇다면 정말로 술에 취한 것일까?궐 안의 술이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그런데 그 순간, 최지습은 김단이 얇디얇은 어깨로 자신의 팔을 받쳐주려 애쓰느 모습을 보고 문득 그녀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자신의 체중의 반을 실어 그녀에게 기대보았다.뜻밖에도 김단은 그 무게를 감당하며 버티고 서있었다.작은 체구라 힘겨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았다.“대군 자가, 조금만 버티세요. 마차가 바로 밖에 있어요.”김단은 이를 악물고 무게를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최지습의 단단한 근육과 다부진 체격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러 아팠지만 김단은 묵묵히 버텼다.다행히도 궐문까지는 몇 걸음 남지 않았다.최지습은 그런 김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작고 여린 몸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강단과 결의가 느껴졌다.그녀의 땀방울이 이마를 적셨고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최지습의 입가에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나는 괜찮소.”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김단은 어깨에 실린 무게가 줄어든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최지습이 일부러 무리해서 버
최지습은 김단이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아마 형님께서는 낭자와 소한을 이어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소.”그 말을 들은 김단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럴 리가요? 소한 도련님께서 청혼하려 했을 때 전하께서 친히 그 혼인을 막아주셨잖아요.” 그때 전하가 김단에게 얼마나 큰 자유를 주었던가.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소가의 둘째 며느리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또 그 고통 속에 갇혀 평생을 힘들게 살았겠지.김단은 그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최지습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마도 소한이 낭자 때문에 미쳐가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소.”최지습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소한이 전장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기에 오왕의 난을 겪어본 전하마저 크토록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김단에게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김단은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저는 더 이상 소한 도련님과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그 말에 최지습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좋소.”그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그녀를 향한 깊은 신뢰와 존중이었다.이틀 후 전하는 최지습에게 구연평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최지습은 김단을 데리고 나섰다.마차 안에서 김단은 계속 최지습을 곁눈질하며 바라보았다.그가 부탁할 일이 있다며 데리고 나왔지만 정작 그 부탁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만남 장소는 한양 밖의 대나무 정원이었다.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대나무 잎에 걸려 아름다운 금빛 조각이 되어 땅 위로 흩어졌다.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잎은 살랑거리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대나무 정원의 하인이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그들을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정원 깊숙이 자리한 아담한 정자에는 구연평이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그녀는 달빛 같은 흰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부드럽게 흐
말을 마친 최지습은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구 낭자를 좀 돌봐주시오.”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최지습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그의 뒷모습은 여느 때처럼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정자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그저 어색한 눈빛만 주고받았다.김단은 순간 당황했지만 최지습이 자기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아마도 자신이 너무 단호하게 거절하여 구연평이 상처받을까 봐 김단더러 그녀를 위로해 주어라는 의미일 것이다.최지습은 분명 여자들끼리 대화하는 게 더 수월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정작 김단과 구연평은 그날 궐에서 한 번 본 사이일 뿐이었다.서로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두 사람은 그저 대책 없이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함 속에 갇혀있었다.그때 갑자기 구연평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웃음을 터뜨렸다.“그분, 제가 속상할까 봐 낭자를 남겨둔 거지요?”김단도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얘기했다.“사실 대군자가는 마음이 굉장히 따뜻한 분이에요. 다만 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라 차갑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구연평은 고운 손으로 김단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저는 오히려 그런 단호함이 마음에 듭니다. 괜히 돌려 말하면서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한 번에 잘라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사실 저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만남은 전하께서 직접 나서서 주선하신 거라 더 부담스러웠거든요. 할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그분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해 주시니 오히려 속이 시원하네요.”사실 구연평도 이 혼사가 달갑지만은 않았다.김단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에요. 저는 언니께서 상처받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습니다.”그날 궐에서 자신을 위해 증언해 주었던 구연평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구연평이 마음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다.김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며 구연평은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눈빛 속엔 결연함과 자신
구연평의 시선이 김단에게로 옮겨졌다.그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웠고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구연평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사실 처음엔 낭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낭자는 어릴 때부터 ‘소한’이라는 자 옆에 바짝 붙어 다녔었죠. 왜 진산군 댁 귀한 아가씨의 인생이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 눈에는 그저 한심하고 답답하게 보일 뿐이었죠.”구연평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김단을 향한 경멸이 아닌 연민과 동정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낭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그날, 낭자가 구서의 눈을 찔러 멀게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비로소 낭자를 다시 보게 되었거든요.”구연평은 대방(大房)의 사람이었다.그래서 이방(二房)에서 나고 자란 그 망나니를 늘 혐오해왔기에 이름조차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그의 이름을 언급할 때 얼굴에 드리운 불쾌감과 혐오감은 감출 수 없었다.“그 인간이 얼마나 많은 여인을 해쳤는지 낭자도 잘 알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 저항하고 상처를 입힌 건 낭자 하나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답방에서 지냈던 그 3년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지만 그래도 버텨내주셨잖습니까. 그 고통을 이겨냈기에 낭자는 이미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낭자의 인생은 세답방을 떠나던 그날부터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그 말에 김단의 눈동자가 떨렸다.가슴속에 쌓아두었던 덩어리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그녀의 말이 옳았다.견뎌냈고 깨어났다. 그것은 새로운 삶이었다.김단은 줄곧 한양을 떠나야만 비로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구연평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자신의 새로운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세답방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진산군 댁과 소한과의 인연을 끊어낸 그순간부터
최지습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김단을 향해 물었다.“그래, 구 낭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이오?”김단은 잠시 머뭇거리며 기억을 떠올렸다.“구 언니가 그러셨어요. 작은 집안에 갇혀서 평생 남을 위해 사느니 차라리 혼자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고요.”최지습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그는 그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내가 그 낭자를 너무 얕봤던 것 같소.”김단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도령님, 걱정 마세요. 구 언니는 오히려 도령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곤란했을 거라고 말입니다.”최지습은 그제야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다행이군.”구연평을 거절한 것으로 인해 따르는 책임을 자신이 전부 떠안아도 상관없었다.어차피 그는 어떤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다음 날, 최지습은 약속대로 김단을 내의원으로 데려갔다.심지어 내의원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뛰어난 의술을 자랑하는 의원장 수 어의가 직접 김단을 가르치게 했다.김단은 전보다 더욱 집중하여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그녀의 눈빛은 진지함과 결연함으로 빛나고 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중함이 배어있었다.예전에 진산군 댁 어의가 남긴 의서 덕분에 배우는 속도는 빨랐고 이해력도 뛰어났다.수 어의는 매일같이 김단을 칭찬하며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의심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소한의 두 다리는 자신이 직접 진단했고 앞으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었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겠는가?소문에 의하면 그의 다리를 김단이 치료했다고 했다.하지만 김단의 의술은 아직 초보 수준에 불과했다.그녀가 그 어려운 치료를 해냈다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수 어의는 김단을 슬쩍 떠보듯 물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질문에도 여전히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 어의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재빠르게 소한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손끝으로 뼈의 상태를 더듬으며 집중해 보았다.그러나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눈가에는 절망스러운 기운만 감돌았다.옆에 있던 군의관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수 어의님, 소 장군께서는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수 어의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군중에서 이런 상황을 본 적이 많으시겠죠. 알다시피, 소 장군의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군의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순간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이미 그는 소한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기에 급히 수 어의를 모셔온 것이었다.그러나 막상 진단 결과를 직접 듣고 나니 더욱 절망스러웠다.“하지만 소 장군은 체격이 건장하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이 말발굽에 짓밟혔으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 텐데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수 어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하지만 흉골이 다 부러졌고 그 뼛조각이 폐를 깊게 찌른 것 같습니다. 소 장군을 살리려면 가슴을 갈라서 폐에 박힌 뼛조각을 직접 꺼내야 합니다.”그때였다.김단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그렇다면 즉시 가슴을 열어봐야죠!”그녀의 목소리는 결연했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말은 쉽게 했으나 그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한의 숨이 붙어있는 한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제가 만들 수 있는 약이 있습니다. 그걸 먹이면 최소한 한 시간은 깊이 잠들게 할 수 있어요.” 수 어의는 놀란 눈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무슨 약을 만든단 말이오? 그게 가능하오?”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의원님께서 남기신 의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약을 쓰면 한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다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뼛조각을 꺼내면 됩니다.”수 어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슴을 여는 수술이라니... 너무도 무모한 시도였다.그러나 소한의 희미한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점점
소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오늘 소한이 낙마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저 허무맹랑한 소문이라고 생각했다.소한이 어떤 사람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할 리 없었다.그러나 막상 연병장으로 달려와보니 소한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믿기지 않는 현실에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이성을 다잡고 근처에 있던 종사관 오혁에게 물었다.“오혁, 네가 말해보거라.”오혁은 최근에 승진한 종사관이었고 현재 소한의 일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소하에게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소 총령님, 저도 정확한 내막은 모릅니다. 소 장군께서 어디서 구해오셨는지 갑자기 붉은 갈기의 말을 끌고 오셨습니다. 딱 봐도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었습니다.”오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멀리 묶여 있는 붉은 갈기 말이 느긋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말은 키가 크고 늠름했다. 윤기가 흐르는 털이 햇빛 아래에서 예쁘게 반짝였다.특히 이마에 하얀 털이 눈에 띄게 자리 잡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저 말은 평소에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얌전하게 풀만 뜯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누군가 올라타기만 한다면 미친 듯이 날뛰었습니다. 오늘 소 장군께서는 그 말을 길들이시려다가 그만...”그 말을 보는 순간 김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오래전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어린 시절 진산군의 생일 연회에서 누군가가 선물로 팔마군도를 가져왔었고 그녀는 가장 앞에 그려진 붉은 갈기 말을 좋아했었다.그때 김단은 어린 소녀였고 임학과 소한 사이에서 그 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나중에 꼭 저런 말을 탈 것입니다. 저런 말을 타면 정말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어린 시절 마음에 품었던 작은 소망이었고 지금은 잊혀진 추억일 뿐이었다.그 시절 그 작은 소녀의 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 시절 김단은 순진했고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하지만 왜 하필 그 말을 소한이 데려온 것일까?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