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저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불안한 생각들을 억눌렀다.소한은 이미 쓰러지기 직전이라 그마저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았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무사할 거요.”대답을 듣고 나서야 임학은 겨우 기운을 되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그래, 무사할 거야.잠시 쉬고 다시 김단을 찾으러 오면 돼.임학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김단이 강물에 떨어지던 장면을 떠올렸다.너무 멀었다.그녀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녀의 얼굴조차 똑똑히 볼 수 없었다.그런데 어쩌다 둘 사이는 이렇게까지 멀어져 버린 걸까?혹시 그가 조금씩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던 걸까?“도련님.”갑자기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임학은 정신을 차렸다.순간적으로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도련님!”다시 한번 들려온 부름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알지 못했으나 그녀는 임학을 알고 있는 듯했다.그가 시선을 마주하자 여인은 그에게 가볍게 달려왔다.“도련님께 문안 올립니다. 소녀를 류 나인으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큰 아가씨께서 궐에 계실 때… 친구였습니다.”‘친구’라는 단어를 말할 때 류 나인은 약간 머뭇거렸다.사실 그녀와 김단은 세답방에 있을 때 거의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나중에 그녀가 김단에게 몰래 소식을 전해준 것은 단지 김단이 자신을 그 암흑 같은 곳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이었다.만약 김단이 덕빈에게 청을 넣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생각을 마친 류 나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임학에게 내밀었다.“소녀는 덕빈마님의 자비로 궐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아가씨께 작별 인사를 드리려 했으나 이미 며칠 전에 실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사실 그녀도 세간의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김단이 소 장군에게 붙잡혀 갔다는 사실을 말이다.하지만 소 장군 같은 사람한
임학의 몸이 휘청거렸다.마치 삼 년 전 김단이 세답방으로 끌려가며 울부짖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그녀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그곳에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그래서 세답방의 나인들은 그녀를 채찍으로 수없이 내리쳤다.그리고 그녀는 비바람이 들이치는 허름한 방 안에서 몸에 걸친 너덜너덜한 옷을 찢어냈다.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적셔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오라버니, 구해주세요.”가슴이 너무도 아파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임학은 떨리는 손으로 그 조각난 천들을 하나하나 뒤집었다.거의 모든 천 조각에 피로 쓰인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오라버니, 구해주세요.”“오라버니, 데리러 와 주세요.”“오라버니,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피 묻은 천 조각들은 그녀가 보낸 수많은 구조 요청이었다.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그렇다면 그는?그녀가 차가운 나무 바닥 위에서 피로 글씨를 새기며 도움을 요청할 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그는 전하에게 청원하기 위해 궐로 향하려 했지만 아버지가 그를 막으며 대국를 생각하라고 했다.대국이란 무엇인가?진산군 관저의 명예와 임씨 가문의 번영.하지만 그 속에 그녀의 목숨은 없었다.그녀는 그가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아끼던 여동생이었다.그런데 그는 직접 그녀를 지옥 속으로 던져 넣었다.그녀가 학대 당하고 고통받도록 내버려두었다.그녀가 구해달라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을 때,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있었는가?혹은 임원을 달래며 다정한 말을 건네고 있었는가?그녀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애타게 그를 부를 때,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그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그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임학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는 넋이 나간 채로 천 조각을 바라보았다.눈물이 한 방울,또 한 방울,그의 손에 쥔
얼마나 오랫동안 뺨을 때렸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다 문득 정신이 든 임학은 허둥지둥 찢어진 천 조각들을 다시 보따리에 싸서 자신의 품에 넣었다.그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단이를 찾아야만 한다.문을 나서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회화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어릴 적 김단은 저 나무에 올라가 놀기를 가장 좋아했었다.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몇 개의 인공 산 역시 그녀가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한 번은 그곳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임학은 깜짝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김단은 그저 해맑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장난을 쳤었다.그리고 정자에서 김단과 함께 바둑을 두던 기억도 떠올랐다.단이가 갓 바둑을 배우던 시절, 그녀의 주특기는 반칙이었다.한 판을 두는 동안 열 번도 넘게 둔 수를 번복해야 직성이 풀렸다.저 너머에 줄지어 선 몇 그루의 복숭아나무에 탐스럽고 달콤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면 김단은 몸종들을 데리고 가서 복숭아를 따 오곤 했다.그리고 그것으로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 그가 머무는 서재에 가져다주었다.이 작은 오솔길은 단이가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그녀의 거처는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어릴 적 무서운 꿈이라도 꾸면 베개를 꼭 품에 안고 몸종들을 대동한 채 그의 방으로 달려오곤 했었다.임학은 꼭 오라버니와 함께 자겠다고 떼쓰는 그녀를 번번이 받아주었다.“오라버니 곁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걸요.”한때 임학은 김단의 가장 든든한 의지처였다.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매화당에 다다랐다.임학은 손을 들어 천천히 문을 열었다.울창하게 우거진 매화나무들은 싱그러운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었다.김단은 매화꽃을 가장 좋아했었다.겨울이면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매화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오라버니?”나직하고 부드러운,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임학은 꿈을 꾸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임원은 그가 정말 이곳에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그녀가 진산군 관저로 돌려
이때 매화당 밖으로 쫓겨난 임원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옆에 있던 몸종이 조심스레 물었다.“아가씨, 도련님께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계십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임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임학이 갑자기 미쳐버린 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였다.임씨 부인 앞에서 가련한 모습을 보이며 동정을 얻을 기회!임원도 알고 있었다.비록 진산군과 임씨 부인이 한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지만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그렇다면 오늘 이 기회를 이용해 다시 그들의 총애를 되찾을 것이다.그렇게 마음먹은 임원은 곧장 임씨 부인을 찾아갔다.그러나 몸종들은 임씨 부인이 대청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고 전했다.임원은 일부러 손님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 곧장 임씨 부인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어머님, 부디 억울한 저를 헤아려주세요! 오라버니가 갑자기 저를 매화당에서 쫓아냈어요! 오라버니가 저를 밀치는 바람에 발목까지 삐었단 말입니다!”임씨 부인은 곁에서 무릎 꿇고 흐느끼는 임원을 내려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살벌할 정도로 차가웠다.그녀는 손을 들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부인을 가리키며 차갑게 물었다.“저분을 한 번 보거라. 누군지 알겠느냐?”임원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이내 그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 사람은 임원을 향해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역시 원이구나! 네가 정말 많이 컸네! 키도 훨씬 커지고 얼굴에 살도 올랐구나!”“조… 조 할머니”임원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임씨 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역시 알아보는구나!”임원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지금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고 조 할머니가 왜 느닷없이 이곳에 나타났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었다.그때 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땅의 사람들은 아이는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라고 굳게 믿었다.하늘의 선녀가 눈여겨본 집안에만 아이를 하나씩 보내 준다고 말이다.그러다 간혹 아이가 장난꾸러기라 좀처럼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면 노한 선녀가 억지로 땅에 내려보낸다고 했다.아이 몸에 난 작은 반점은 선녀가 손가락으로 콕 찔러 남긴 자국이고조금 더 큰 반점은 선녀가 세게 꼬집은 흔적이며그보다 더 크면 아이가 하도 말을 안 들어 선녀가 참다못해 발로 걷어차서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임씨 부인의 가슴은 미칠 듯이 아려왔다.예전에 유모가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이 아이는 분명 장난꾸러기일 겁니다. 그러니 선녀가 억지로 허리를 꼬집어 이 땅에 보낸 거겠지요.”실제로 아기의 허리에는 태어날 때부터 붉은 반점이 있었다.그 기억이 떠오르자 임씨 부인은 천천히 임원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너, 혹시 몸에 태어날 때부터 있던 반점 같은 것이 있느냐?”임원은 깜짝 놀라 안색이 새파래졌다.그녀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외쳤다. “어머님, 저 여자의 헛소리를 듣지 마세요!”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씨 부인은 싸늘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여봐라! 이 아이를 끌고 나가 옷을 모조리 벗기고 확인해 보거라!”“예!”곁에 있던 몸종들은 즉시 임원을 붙잡아 끌고 나갔다. 임원은 필사적으로 버텨보려 몸부림쳤지만 그들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이윽고 대청 안은 다시금 고요해졌다.임씨 부인은 앉아 있기조차 힘겨운 듯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 할머니에게 말했다.“계속 말씀해 주시지요.”이미 조 할머니의 얼굴에서도 웃음기는 사라지고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때 마님께서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곁에 의원이 돌봐주고 있었기에 저희가 나설 필요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원이 어미도 만삭이어서 제가 부축해 방으로 돌려보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날 밤 원이 어미가 진통을 시작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주변에 다른 사
안돼... 더 이상 생각하면 안돼…그녀는 이제 버티기 힘들었다.바로 그때, 아까 임원을 데리고 나갔던 몸종들이 다시 그녀를 부축하면서 돌아왔다.“마님, 둘째 아가씨의 허리에는 반점이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조 할머니가 급히 나섰다. “원이는 마님의 친딸이 아니니 반점이 있을 리가 없지요.”임원은 울며 부르짖었다.“어머님, 그게 아닙니다! 저 독한 노파의 헛소리를 듣지 마세요!”하지만 임씨 부인은 마치 무거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한때 그녀도 임원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심지어 한때는 임원과 단이가 쌍둥이는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던 적도 있었다.혹시나 아이들을 받아준 산파가 둘 중 한 명을 몰래 빼돌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 아이를 모두 사랑했고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차라리 자신이 쌍둥이를 낳았다고 믿으면 믿었지 임원이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임씨 부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그리고 손을 들어 먼발치에 서있는 몸종에게 명령했다.“얼른 대감님과 임학을 모셔오거라!”그녀는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몸종은 짧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한편 임원은 흐느끼며 애원했다.“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남의 말을 그렇게 쉽게 믿으시면 안 돼요. 어머님…”“입 다물 거라!”임씨 부인은 이미 분노로 인해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대감님과 임학이 오기 전까지 네 말은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구나!”더 이상 그녀의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한 자루 향이 거의 다 타들어갈 무렵 진산군과 임학이 도착했다.임씨 부인은 분한 마음에 가슴이 떨려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이에 조 할머니가 나서서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낱낱이 설명했다.곁에 있던 몸종들도 한마디 거들었다.“방금 둘째 아가씨의 허리를 확인해 보았지만 태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진산군은 크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임씨 부인 역시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임학을 바라보았다.임원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아까부터 임학이 왜 그렇게 평소답지 않게 행동했는지 깨달았다.설마… 이 일 때문에 김단이 죽었단 말인가?그러나 이 순간 임원의 가슴속에는 기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대신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오직 온몸을 뒤엎는 공포와 불안감뿐이었다.김단이 죽어버리면 조 할머니와 관련된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어떻게 발뺌해야 빠져나갈 수 있는 걸까?이제 그 죄를 누구에게 뒤집어씌워야지?임원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속으로만 애타게 울부짖었다.그때 임학이 갑자기 달려들더니 거칠게 그녀의 옷깃을 낚아챘다.“너 대체 정체가 뭐야? 당장 말해!”그는 붉어진 눈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임원은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라버니의 잔혹하고 날이 선 분노였다.그 눈빛은 너무나도 날카로워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그녀는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입술을 파르르 깨물며 끝까지 버텼다“오라버니, 제발 저를 겁주지 마세요. 저는 오라버니의 여동생이라고요!”그녀가 흐느끼며 외쳤다. “저분이 직접 말했어요. 제가 그녀에게 바꿔치기당한 아이라고요! 정말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나 어머니를 꼭 빼닮았는걸요. 오라버니, 절 한번 보세요! 제가 어떻게 어머니의 친딸이 아니겠어요!”임원은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에 모든 걸 털어놓았다가는 분노에 휩싸인 임씨 사람들이 단숨에 그녀를 찢어놓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네가 내 동생이라고?”임학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그렇다면 단이는? 네가 단이의 자리를 빼앗았고 그 때문에 단이가 세답방으로 내몰렸어. 단이를 죽게 만든 장본인은 너야!”이때서야 정신을 차린 임씨 부인이 앞으로 달려가 임학의 팔을 붙들었다.“방금 뭐라고 했느냐? 단이가 어디로 갔다고?
“예!”몸종들은 황급히 대답하고는 임원을 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임원은 애타게 애원했다.“아버님, 저는 정말 아버님의 딸이에요! 남들의 거짓말을 믿으시면 안 돼요!”그러나 진산군은 끝내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보름 후김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들어온 것은 천장의 낡고 허름한 들보였다.여기는 어디지?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기억들이 물밀듯 떠올랐다.그중에서도 장양강에 빠졌던 순간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그러자 심장이 순식간에 미친 듯 요동쳤고 공포에 사로잡혔다.장양강은 잔잔한 강이라 물에 빠져도 금세 헤어 나올 수 있으리라 여겼다.그러나 수면 아래 그렇게 거센 물살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김단은 순식간에 강바닥으로 휩쓸려 내려갔다.몇 차례나 필사적으로 헤어 나오려 발버둥 쳤으나 거센 물살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그러다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그렇다면 지금 여긴 어디일까?김단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러나 왼쪽 다리에서 갑작스럽게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윽…!”그녀는 숨을 들이켰다.급히 이불을 젖혀올리니 왼쪽 다리가 몇 개의 나무판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설마 부러진 걸까?그때 마침 방문이 벌컥 열렸다.소박한 차림의 한 여인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그 여인은 김단이 눈을 뜬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아이고야! 정신을 차렸구먼! 드디어 깨어나셨소?”그렇게 외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그녀가 들고 있던 탕약이 출렁이며 잔뜩 쏟아졌다. “앗 뜨거워라!”입을 삐쭉이며 손등에 떨어진 탕약을 털어내더니 약그릇을 침상 곁의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그러고는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젊은 처자, 정신이 드시오? 혹 자기 이름은 아시오? 사람은 알아볼 수 있겠소?”그 여인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했다.한눈에 보아도 오랫동안 바깥일을 해 온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목소리도 다소 거칠었지만 말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혹여나 목소리를 조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