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뭐라고 하였느냐!”진산군은 크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임씨 부인 역시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임학을 바라보았다.임원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아까부터 임학이 왜 그렇게 평소답지 않게 행동했는지 깨달았다.설마… 이 일 때문에 김단이 죽었단 말인가?그러나 이 순간 임원의 가슴속에는 기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대신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오직 온몸을 뒤엎는 공포와 불안감뿐이었다.김단이 죽어버리면 조 할머니와 관련된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어떻게 발뺌해야 빠져나갈 수 있는 걸까?이제 그 죄를 누구에게 뒤집어씌워야지?임원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속으로만 애타게 울부짖었다.그때 임학이 갑자기 달려들더니 거칠게 그녀의 옷깃을 낚아챘다.“너 대체 정체가 뭐야? 당장 말해!”그는 붉어진 눈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임원은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라버니의 잔혹하고 날이 선 분노였다.그 눈빛은 너무나도 날카로워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그녀는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입술을 파르르 깨물며 끝까지 버텼다“오라버니, 제발 저를 겁주지 마세요. 저는 오라버니의 여동생이라고요!”그녀가 흐느끼며 외쳤다. “저분이 직접 말했어요. 제가 그녀에게 바꿔치기당한 아이라고요! 정말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나 어머니를 꼭 빼닮았는걸요. 오라버니, 절 한번 보세요! 제가 어떻게 어머니의 친딸이 아니겠어요!”임원은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에 모든 걸 털어놓았다가는 분노에 휩싸인 임씨 사람들이 단숨에 그녀를 찢어놓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네가 내 동생이라고?”임학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그렇다면 단이는? 네가 단이의 자리를 빼앗았고 그 때문에 단이가 세답방으로 내몰렸어. 단이를 죽게 만든 장본인은 너야!”이때서야 정신을 차린 임씨 부인이 앞으로 달려가 임학의 팔을 붙들었다.“방금 뭐라고 했느냐? 단이가 어디로 갔다고?
“예!”몸종들은 황급히 대답하고는 임원을 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임원은 애타게 애원했다.“아버님, 저는 정말 아버님의 딸이에요! 남들의 거짓말을 믿으시면 안 돼요!”그러나 진산군은 끝내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보름 후김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들어온 것은 천장의 낡고 허름한 들보였다.여기는 어디지?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기억들이 물밀듯 떠올랐다.그중에서도 장양강에 빠졌던 순간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그러자 심장이 순식간에 미친 듯 요동쳤고 공포에 사로잡혔다.장양강은 잔잔한 강이라 물에 빠져도 금세 헤어 나올 수 있으리라 여겼다.그러나 수면 아래 그렇게 거센 물살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김단은 순식간에 강바닥으로 휩쓸려 내려갔다.몇 차례나 필사적으로 헤어 나오려 발버둥 쳤으나 거센 물살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그러다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그렇다면 지금 여긴 어디일까?김단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러나 왼쪽 다리에서 갑작스럽게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윽…!”그녀는 숨을 들이켰다.급히 이불을 젖혀올리니 왼쪽 다리가 몇 개의 나무판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설마 부러진 걸까?그때 마침 방문이 벌컥 열렸다.소박한 차림의 한 여인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그 여인은 김단이 눈을 뜬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아이고야! 정신을 차렸구먼! 드디어 깨어나셨소?”그렇게 외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그녀가 들고 있던 탕약이 출렁이며 잔뜩 쏟아졌다. “앗 뜨거워라!”입을 삐쭉이며 손등에 떨어진 탕약을 털어내더니 약그릇을 침상 곁의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그러고는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젊은 처자, 정신이 드시오? 혹 자기 이름은 아시오? 사람은 알아볼 수 있겠소?”그 여인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했다.한눈에 보아도 오랫동안 바깥일을 해 온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목소리도 다소 거칠었지만 말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혹여나 목소리를 조
최지습은 꿈에도 몰랐다.오래전 자신이 직접 새겨 두었던 물건이 다시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그 자그마한 평안 고리는 마치 한 자루 열쇠처럼 그가 오래도록 가슴 깊이 봉인해 두었던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피비린내 풍기는 바람, 들판 가득 널린 시신들그 모든 광경이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고맙습니다.”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최지습은 과거의 회상에서 깨어났다.그는 평안 고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여인은 익숙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놀라지 마시오. 저분은 원래 말수가 적으신 분이시니. 그래도 마음은 따듯한 사람이오. 그때 그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마을은 진즉 늑대의 침습을 받았을 거요.”그 여인은 묵혀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려 했다.그러나 김단의 마음속에는 다른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김단은 결국 그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실례지만, 아주머니… 여기서부터 한양까지 얼마나 멀어요?”“한양?”그 여인은 깜짝 놀라 외쳤다.그 소리에 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최지습마저 도끼질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김단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한양에서 여기까지 떠내려온 거요?”김단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제가 실수로 장양강에 빠지고 말았어요.”“아이고 맙소사! 여기서부터 한양까지 족히 삼백 리는 될 텐데. 우리 마을 어귀의 그 조그만 강이 장양강과 이어져 있었다니.”삼백 리라...설령 길이 평탄하다 해도 밤낮으로 말을 달려야 보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김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 여인의 말대로라면 김단은 장양강의 지류를 타고 이곳까지 떠밀려 온 것이 분명하다.지류를 통해 왔다면 소한도 당장에는 눈치를 채지 못할 터.그러니 쉽게 그녀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결론적으로 보면 이제 그녀는 안전하다
거칠게 갈라진 손바닥에는 두터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하지만 그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는 김단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많이 힘들었겠소.”아주머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김단의 온몸에 난 상처 자국들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백우가 말하기를, 김단이 그날 입고 있던 옷차림은 부잣집 몸종 같았다고 했다.부잣집이면 다란 말인가? 어떻게 몸종을 이 지경이 되도록 때릴 수 있단 말인가? 몸종의 목숨은 목숨도 아닌 걸까? 만약 이 어린 것의 부모가 이 꼴을 본다면 대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그러나 아주머니는 이 말들을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김단의 상처 난 마음을 건드릴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의 눈물을 본 김단 역시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졌다.“춘 숙모, 이러지 마세요. 저는 이제 정말 괜찮아요.”이제 그녀는 한양을 떠나 그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아팠던 과거는 모두 지난 일이다.한양에서 며칠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은 분명 그녀가 죽은 줄로 여길 것이다.숙희, 그 아이는 분명 슬퍼하겠지만 이각이 곁에서 보살펴 주고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다. 또한, 소하 역시 그녀를 대신해 숙희를 살펴 줄 테니 이제 더 이상 걱정할 것도, 미련 가질 것도 없었다.앞으로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할지는 일단 몸을 다 추스른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김단의 말에 아주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소. 다 지나간 일이오. 여기서 푹 쉬면서 몸부터 회복하시오! 아 참, 이제 막 깨어났으니 내가 늙은 암탉 한 마리를 잡아 진하게 삼계탕을 끓여 줄 생각이오. 기운 좀 차려야 하지 않겠소.”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아주머니는 벌떡 일어나 총총 밖으로 나갔다.김단이 만류할 틈도 없이 그녀는 어느새 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아주머니가 나오자 최지습은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내려놓고 일어서서 그녀를 배웅하려 했다.“아이고, 괜찮습니다!”아주머니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저는 가
어쩌다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 버린 거지?김단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촉촉해졌다.이 옥팔찌는 정씨 가문에서 그녀를 인정한 증표이자 그녀와 정암의 관계를 증명해 주는 물건이었다.김단이 그동안 이 팔찌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간직해 왔던가.그런데 결국에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가슴 한구석이 시큰하게 저려 왔다.김단은 고개를 푹 숙였다.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백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고맙습니다. 백우님.”말을 마친 김단은 몸을 돌린 후 벽에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백우는 이미 옥팔찌 위로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한편, 같은 시각삼백 리 떨어진 한양에서는 김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이 소식에 놀란 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다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임씨 부인은 가는 내내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진산군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바닥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눈앞에 놓인 커다란 관을 보게 되었다. 그걸 보는 순간 임씨 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분명 김단을 찾았다고 하지 않았었나?그런데 왜 날 맞이하는 것은 김단이 아니라 관인 거지?임학의 두 눈 밑은 검푸르게 물들어 있었다.진산군과 임씨 부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임씨 부인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섰다.“학아… 사람은? 이 어미를 놀라게 하지 말거라... 이... 이 안에 있는 것이……”임학은 여전히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사실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임학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찾아보거라” 혹은 “계속 수색해 보거라”그것뿐이었다.그토록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건만 결국 이런 모습이라니…멀지 않은 곳에는 소한이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시선은 커다란 관에 고정되어 있었고 차가운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관을 여는 순간 코를 찌르는 듯한 지독한 악취가 몰려왔다.진산군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토할 뻔했다.그는 관 속에 든 시신을 확인하고는 너무 놀란 나머지 연거푸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였을까, 시신은 이미 부풀어 오르고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다.여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피부 색마저 변해 있었다.그러나 진산군은 시신을 힐끗 쳐다보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얘기했다.“이건 단이가 아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던 소한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진산군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마치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이 비치는 듯했다.놀란건 임학도 마찬가지였다.진산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것을 보니 정말 단이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소하는 본능적으로 소한을 한번 힐끗 바라본 뒤 조심스레 물었다.“진산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진산군이 떨리는 목소리로 꾸짖었다.“너희들 모두 정신이 나갔느냐? 단이의 몸은 원래 흉터투성이였던 것을 모르느냐? 설마 물에 빠졌다고 해서 흉터가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이냐?”이 관 속의 시신에는 흉터가 없었다!이 점은 소한과 소하 또한 수상쩍게 여기던 부분이었다.소하는 다시 한번 소한을 흘깃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한이가 말하길, 예전에 단이에게 흉터를 없애는 연고를 건넸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 연고 덕분에 단이의 흉터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진산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소한이 줬다고 해서 단이가 그걸 썼을 것 같으냐?”그는 차갑고 무거운 말투로 되물었다.“단이를 몰라서 하는 말이냐? 그 아이가 어떻게 소한의 물건을 쓰겠느냐!”그는 알고 있었다.단이는 소한을 증오하고 자신들까지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그러므로 그녀가 소한이 준 연고를 썼을 리 없었다.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자 진산군은 눈물을 훔치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이 아이는 단이가 아니다! 절대!”그러자 임학이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자리를 떠났다.그 뒤로 소하 역시 사람들을 이끌고 관을 끌고 나섰다.임학은 천천히 돌아서서 자신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계속 찾거라.”비록 그 시신이 단이 일 가능성이 높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그러니 끝까지 찾아야만 했다.그렇게 말한 뒤 떠나려던 찰나, 뜻밖에도 소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조씨 성을 가진 산파라니, 그게 무슨 소리오?”소한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조금 전 임씨 부인이 한 말이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예전에 진산군 댁에서 임원을 데려온 전말에 대해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때 출산을 도왔던 산파가 단이와 임원을 바꿔치기했다고 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또 다른 조씨 성을 가진 산파가 나타났다는 건 무슨 말일까?임학은 무표정하게 소한을 바라보았다.대답할 마음 따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 했다.하지만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하고 다시 멈춰 섰다.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소한을 바라보았다.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그려졌다.“보름전, 단이가 이 장양강에 떨어진 다음 날, 진산군 관저로 한 명의 산파가 찾아왔소. 그녀가 말했지. 단이야말로 진산군 댁의 진짜 핏줄이라고 말이오.”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학은 소한의 두 눈 속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분노를 보았다.그 순간, 소한이 거칠게 다가와 그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격분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뭐라고 했소? 방금 한 말, 다시 말해 보시오.”단이야말로 진산군의 친딸이라고?임학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그저 소한을 향해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못 들었소? 단이는 처음부터 진산군의 진짜 혈육이었단 말이오. 자네가 마땅히 아내로 맞아들여야 할 사람도 처음부터 단이었단 말이오.”단이는 원래 모두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성격을 간직한 채 한결같이 소한을 연모하며 자연스럽게 그의
소한은 임학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았다.피하는 대신 그도 재빠르게 주먹을 날렸다.“그럼 넌? 넌 버린 게 아니야?”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날, 단이가 세답방으로 끌려갈 때 왜 임원만 감싸고 단이는 외면했던 건데?”임학은 강하게 한 방 맞고 뒷걸음질 쳤다.그러나 곧바로 다시 달려들었다.“그럼 넌?”그의 눈이 이글거렸다.“정말로 단이를 좋아했다면 왜 지켜주지 않았어? 무심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감금까지 하면서 욕심을 부려? 결국 네가 죽인 거야!”“닥쳐!”소한은 분노로 이성을 잃고 임학과 뒤엉켰다.두 사람 모두 검을 뽑지 않았고 제대로 된 검술조차 사용하지 않았다.그저 어린아이처럼 한 대 치면 한 대 받고 그러다가 다시 반격하기를 반복했다.얼마나 오래 싸웠을까.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땅바닥에 쓰러졌다.얼굴은 멍투성이였고 코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임학은 무기력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오직 단이 생각만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소한의 말이 옳았다.그는 오라버니가 돼서 어찌 자신의 친 누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어째서 그토록 중요한 사람도 몰라봤던 것일까?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오라버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한편, 소한 또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러나 그의 눈빛은 점점 증오로 물들어갔다.정녕 하늘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일까?원래 그의 것이었는데.그것을 잔인하게 빼앗아간 것도 모자라 이제 와서 확인사살 시켜주는 모습이라니.비웃고 싶은 거였나?자신이 후회하길 바라는 걸까?아니면 기어코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일까?아니.그렇게는 안되지.원래 내 것이었다면 반드시 되찾을 것이다.단이가 살아있든 죽었든 상관없다.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그녀가 살아 있다면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죽었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갈 것이다.신이시여부디 이것 하나만 기억하길 바랍니다.감히 제 것을 빼앗아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그 시각소하는 직접 그 여인의 시신이 묻히는 장면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