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함께한 시간들을 잊지 않으신 장군께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세답방에서 천한 신세로 지냈을 것이지요. 장군의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리나, 다만 한 가지만 청을 드려도 될까요? 부디,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 저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그럴 만한 그릇이 못 되옵니다.” 마지막 한 마디는 무쇠 방망이처럼 소한의 가슴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충격에 뒤로 물러선 소한은 걸상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하였다. 그 소리가 다소 컸던 탓인지, 밖에 있던 혜인과 초아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 소한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가 너희더러 들어오라 하였느냐! 당장 나가라!” 그러나 혜인과 초아는 나란히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아씨, 부디 장군님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장군께서는 진심으로 아씨를 아끼시고 계십니다! 아씨께서 찾으신다는 말에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오셨나이다!” “누가 입을 함부로 놀리라 하였느냐! 물러가라!” 소한은 다시금 날카롭게 꾸짖었다.그들의 은인이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남겨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혜인과 초아는 계속해서 간청하고 싶었으나 소한의 살기 어린 눈빛에 끝내 눈물을 삼키며 밖으로 나갔다.김단은 잠시 멍해졌다.‘부상?’ 다쳤단 말인가?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의 몸을 살폈다. 가슴 쪽에는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나, 팔뚝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벗어둔 옷에는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채찍을 후려친 상처와 비슷했다.탐색하는 듯한 김단의 시선에 그제야 소한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아버지께서 벌을 내리시긴것 뿐이니, 괜찮소.” 그의 팔뚝의 흔적은 사흘 전의 것으로 보이나 옷에 남은 핏자국은 아직도 선명한 것을 보니 이는 단순한 벌이 아니었다. 그제야, 혜인과 초아가 기를 쓰며 항변했던 것이 이해되었다. 김단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소한은 결국 떠났다. 패전한 장수처럼 비틀거리며 물러갔다. 김단은 홀로 방에 앉아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밤새 한숨조차 붙이지 못하였다. 원래는 어젯밤의 다툼 이후, 소한도 분명 깨달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다음 날 아침, 혜인과 초아가 그녀를 모시러 왔을 때, 여전히 입을 모아 그녀를 ‘부인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 닷새가 되던 날, 소한은 아예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고 말았다. 하인들이 책을 한 무더기씩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본 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인들을 따라 서재로 들어서니 책장 앞에서는 하인들이 서책을 정리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문서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군무 관련 서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김단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아예 군에도 나자기 않겠다는 것인가?’ 그녀의 기척을 느낀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부인께 문안드리나이다.” 그러한 호칭들이 귀에 거슬렸지만, 그들에게 화를 낸들 소용이 없음을 알기에 그저 어굴을 굳힌 채 담담히 물었다.“소한은 어디 있느냐?” “나를 찾았소?”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부드럽게 가다듬은 그의 음성에 김단은 눈썹 사이가 더욱 깊이 파였다. 소한은 평상복 차림에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입가엔 푸른 멍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에게 주먹질을 당한 것이 분명하였다. 김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 주변의 하인들을 스윽 바라보았다. “모두 나가거라.” 하인들은 즉시 명을 받들어, 머리를 숙이고는 하나둘 서재를 떠났다. 그제야 소한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그대가 나를 쉬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이 나를 허락하는 그날까지 기다릴 것이오.” 소한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김단
서신은 매우 짧았고 화려한 문장도 없었다. 혜인과 초아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서신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서찰을 소한에게 보여드렸다.소한은 서신을 받아 들고 한번 훑어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에는 단 한 점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전해라.” “예.” 혜인과 초아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소한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김단이 이곳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소한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서신 한 편으로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이제는 누구도 그녀를 그의 곁에서 데려갈 수 없음을 그녀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서신을 받아 든 숙희는 순간 얼이 빠지고 말았다.“이것은 확실히 아가씨의 필체입니다!” 숙희는 감격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요 며칠 그녀는 눈물도 말라 버릴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곁에 있던 왕철이 편지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씨의 글씨체를 알아보진 못하지만, 몸이 평안하다 말씀하셨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소.” 그러나 숙희는 흐느끼기 시작했다.“아씨는 저를 안심시키려고 이리 적으신 겁니다. 아씨를 소한 장군이 데려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왕철 역시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너무나 이상했다.“하지만 말이오, 매화나무는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지 않소? 그런데 어찌하여 굳이 그것을 언급했단 말이오?” 그 말에 숙희도 순간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매화당에서 지낸 아가씨께서 매화나무는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셨단 말인가? 숙희는 얇디얇은 서찰을 손에 쥔 채 몇 번이고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차라리 소하 도련님께 가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녀가
그날 밤. 김단은 침상에 누웠으나, 이리저리 뒤척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숙희가 ‘그 밖’이라는 단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물을 자주 주라’는 당부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숙희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반드시 소하를 찾을 터였다.그리고 ‘그 밖’에 대한 단서는, 소하라면 분명히 파악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단 자신도 이곳이 정말 성 밖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줄곧 여기에 갇혀 있었고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하인들 또한 모두 함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모든 추측은 단지 그녀 스스로가 유추한 것이었다.그녀가 저택의 높은 담장을 지나칠 때마다, 밖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매우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짐작했다. 더불어, 밤을 꼬박 새우고 맞은 새벽, 그녀는 문득 짙은 물안개를 보았다. 이는 분명, 저택 근처에 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강이든, 샘물이든, 어쨌든 반드시 물과 가까이에 있었다. 자신의 추측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다.부디.... 하루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기를. 다음날.소한은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다. 비록 군무를 이곳에서 보고 있었지만, 조정의 조참에 참석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정으로 향하던 그를 누군가가 막아서는 것이었다.그자는 바로 임학이었다.“소한! 내 누이를 어디에 숨겼느냐!” 임학은 말 위에서 소한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눈빛에 분노가 서려 있었고, 수일간 쌓인 피로로 얼굴은 초췌하였다. 거멓게 자란 수염이 그의 피곤한 상태를 대변해 주었다. 며칠 동안, 김단을 찾느라 그는 온몸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도둑이나 장물아비를 찾을 때는 날쌨던 수하들이 정작 김단을 찾아야 할 때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김단이 소한에게 끌려갔다는 것이었다.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온 거리를 헤매며 그녀를 찾고 있을 이는 소한이어야 했다.
임학은 이렇게 순순히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김단의 행방을 캐낼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오랜 고민 끝에, 그는 천천히 길을 내어주었다. 소한도 그제야 말 위로 올라타 궁으로 향했다. 그가 임학의 곁을 지나칠 때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의 이런 행동이 그녀의 미움을 산다는 것을 왜 아직도 모른 것이냐?”소한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역시 당연히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녀가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소한은 왼팔의 상처를 대충 싸매고 조정으로 향했다. 황제는 그를 보자마자, 얼굴빛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참이 끝난 후, 소한을 남겨 두었다. 넓은 대전안에 소한은 단정히 무릎 하나를 꿇었다. 황제는 용상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깊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반드시 그 여인을 가져야겠다는 것이냐?”소한이 입을 열었다.“오직 그녀만을 원하나이다!”“허나 전에 했던 말과 너무 다르지 않느냐! 여기에서 내가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더냐? 한데 그때 너는 어찌 대답하였느냐!”소한은 침묵하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도, 그리고 지금도. 그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은 그가 선택한 길이니 어찌 후회할 수 있겠는가.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형과 다정하게 서 있는 김단의 모습과 형의 눈빛이 점차 사랑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을 때 소한은 깨달았다.그는 한때, 그녀가 아니어도 된다고 믿었다.그러나 그녀를 잃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그녀는 그의 만병통치약이었다.그녀 없이는, 이성을 놓아버리기 일쑤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숨 쉴 수조차 없었다.후회가 밀려왔다.너무나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모든 선택을, 그녀를 위해 끝까지 싸우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
소한은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물러나 궁궐을 나와 말에 올랐다.말이 한양 밖에 도착했을 즘, 소한이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에서 내려 아무도 없는 오솔길을 향해 말했다. “형님, 나오십시오.”어둠 속에 숨어 있던 소하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소한은 소하의 다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형님께서는 회복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푹 쉬셔야 합니다.”소하는 소한의 말 뜻을 이해했다.그는 5년 동안 누워 있었기에 전보다 무술 실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미행 솜씨도 떨어진 상태였다.이각은 어제 한양 외각의 집들을 조사했다. 크고 작은 집이 총 20여 채 있었고, 강변에 있는 집은 10여 채나 된다고 말했다.김단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선 그 집들을 하나하나 조사해야 했다.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래서 소한을 미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쉽게 발각될 줄은 몰랐다.소하는 얼굴을 찌푸린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내 뜻에 따르지 않고 김단 낭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이 형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낭자를 가둬두어서는 아니되지 않느냐!”소한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그는 소하 앞에서 김단을 납치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소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우야,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김단 낭자는 너를 더욱 싫어하게 될 것이야!”오늘 아침 임학도 같은 말을 했었다.소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형님께서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사람을 보내 알아보시지요.”그는 말에 올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따라오지는 마십시오.”그는 말을 마친 뒤 말을 타고 떠났다.소하는 흙먼지와 함께 멀어지는 소한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5년 동안 불구로 지내며 권력을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조차
그녀는 분명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설령 누군가가 꾸며낸 일일지라도, 그 일을 꾸며낸 사람이 김단은 아니었다.유리 그릇은 임원이 깨뜨린 것이다.그녀의 조모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명정 대군은 산적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정암은 도적을 토벌하다 죽었다.김단이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다.그런데 왜 그녀가 모든 사람의 죽음을 책임져야 하는가?소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물음과 함께 평소 감정 없던 그의 눈빛에도 원망 가득한 살기가 감돌았다.소씨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어미가 자은 법사님에게 사주를 봤는데, 그 사주에...”“고작 사주 하나에 사람을 죽음으로 몬 것입니까?”소하는 연이어 물었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고, 소씨 부인을 죽일 듯 노려보며 목이 메어 말했다. “낭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소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비록 소하가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지금이 순간 소하의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크게 당황했고, 심호흡을 한 뒤 그에게 다가가 위로하며 말했다. “소하야, 이 어미가 잘못했다. 너무 어미를 원망하지 말거라...”하지만 소하는 뒷걸음질 치며 소씨 부인의 손길을 피했다. “단이 낭자를 찾으러 가야 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아무리 그녀를 탓해도 그의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더욱이 지금은 소씨 부인을 위로할 때가 아니었다.김단은 그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소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숙희는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 냉큼 달려왔다. “도련님, 아씨 소식은 들으셨습니까?”어제 서신을 보낸 뒤부터 숙희는 소하의 소식을 기다리며 쭉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소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각이 아직 사람을 데리고 수색 중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곧 소식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숙희는 갈수록 더 걱정되었다. “하지만 도련님, 이각이 소 장군님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만약 아씨를 숨
그 말을 들은 주상은 웃으며 덕빈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덕빈! 어찌 짐 앞에서 그리 우기는 것이오? 정말 기이가 그 낭자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거라면 오늘 날까지 그 아이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지 않소?”덕빈은 주상이 자신의 마음을 훤히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화를 내지 않고 그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주상께서 나서시면 소한이 주상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소한은 주상 휘하의 최고의 장수였다. 이 일로 둘 사이에 금이 가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나?주상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덕빈은 그의 맘을 알 수 있었다.주상은 소한이 자신을 원망할까 걱정되어 덕빈의 동생을 보내 구하려 했던 것이었다.덕빈은 그의 뜻을 알면서도 모른 척 그저 희미하게 웃었고,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기이가 낭자를 못살게 굴긴 하였으니, 신첩이 지금 낭자를 구해주는 것이 기이를 위해 덕을 쌓는 것이겠지요. 신첩도 기이가 저승에서 죄를 씻기를 바랍니다.”덕빈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모은 채 진심으로 기도했다.하지만 주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무슨 헛소리오, 짐의 아들이 어찌 저승에 간단 말이오!”그는 한 나라의 임금이자 용의 자식이었다. 그런 그의 아들이 저승에 가 벌을 받을 리는 없었다!덕빈은 그 말을 듣고 손을 내린 채 희미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속 슬픔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기이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그가 수많은 선량한 집안의 낭자들을 때려죽였는데, 어찌 저승에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녀 역시 죽어 저승에 갔을 때 그 죄에 대한 벌을 피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든 덕빈은 화제를 돌려 주상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구실로 수조사에 나서야 합니까?”아무 명분도 없이 강제로 쳐들어갈 수는 없지 않겠나?이에 대해 주상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성남의 산적들이 최근 한양에 출몰하고 있으니 한양 외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