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산 동굴 속 안에 쓰러져 있었다.주위는 깜깜했다.머리도 어지러웠다.이때,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소정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에 김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리고 소정원을 세게 흔들었다.“정원, 일어나 보시오!”혹여 들킬까 봐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하지만 너무 많은 가루를 들이마신 탓에 요지부동이었다.김단은 순간 자신의 머리가 풀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머리를 조금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밑으로 흘러내렸다.누군가가 비녀를 가져간 것이었다.심지어 소정원의 비녀도 사라지고 없었다.어찌 그녀들의 비녀를 가져간 것일까.혹여 비녀로 그들을 공격할 것을 알아챈 것일까.김단은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들을 납치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맞히었다.구서!이전에 김단이 비녀로 그의 눈을 찔러 실명하게 했다.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아직도 안 깬 것이야?”구서의 목소리였다.곧이어 한 사람이 그에게 답했다.“작은 도련님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약에 취해서 정신도 못 차립니다!”구서는 코웃음을 쳤다.“저 계집들이 얼마나 거센 줄 알아? 쓰러진 척하면서 내 눈을 찌른 거라고!”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구서는 깊은 분노가 밀려왔다.또 다른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그래서 노비가 계집들의 비녀까지 다 빼냈사옵니다.”그의 말에 구서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하, 역시 네가 일을 제일 잘 하는구나! 저 ‘김’ 씨 계집, 내가 오늘 결판을 내겠어!”그리고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구서는 먼저 바닥에 누워있는 김단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옆에 있는 소정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죽고 싶어? 이 계집을 왜 데리고 온 거야?”상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니, 둘째 도련님은 여러 명이랑 하시는 걸 즐겨..”“짝!”구서가 상대를 향해 뺨을 내리쳤다.“나는 복수를 하려 했단 말이다! 소정원을 데리고 오면 소
김단이 다시 한번 더 은침을 꺼내 구서의 다리를 향해 찔렀다.매일 소하에게 침을 놓기 때문에, 수법이 손에 익숙했다.구서의 허벅지를 찌른 이유는 제일 아픈 부위이기 때문이다.그는 고통스러움에 바닥을 굴렀다.“아!”비명소리가 동굴 안에 가득 퍼졌다.김단은 무리들에게 들킬까 봐, 구서의 몸에 올라타 그의 입을 막았다.구서는 힘껏 저항했다.그의 힘은 김단보다 훨씬 강했다.김단이 그의 몸 위에 올라탔어도, 온 몸의 힘을 써서 두 손을 눌렀다고 해도 곧 한계였다.이때, 그녀의 눈에 돌이 들어왔다.서둘러 떨어진 돌을 주워 구서의 머리를 향해 공격했다.그러자 살이 벗겨진 탓에 머리에서는 피가 났다.그 탓에 김단의 눈에 피가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곧이어 그녀의 뇌리에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이전에 숲에서 산적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일이 있었다.순간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내던졌다.다행인 것은 구서가 기절했다는 것이다.김단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밖에 나갔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김단은 구서가 그들을 어디에 가두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구서의 하인들에게 잡혀서는 안되었다.잡히면 그의 말대로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해가 빠르게 지고, 하늘이 어두워졌다.숲의 길도 점점 걷기 어려웠다.차가운 바람과 달의 빛이 숲을 비추자 더욱 음산해보였다.허나, 김단은 멈출 수 없었다.분명 구서의 하인들이 자신을 쫓고 있을 것이 아닌가.임원과 오랫동안 계획하였기에 절대로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멈추면 아니된다…멈추면 아니된다…김단은 이 한 마디만 계속 읊을 뿐이다.도망치는 길에서 얼마나 넘어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왼쪽 발목의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 같았다.고통스러움에 발을 절뚝절뚝 걸어야만 했다.얼마 가지 않아, 뒤쪽에서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김단은 구서의 사람들이 쫓아왔을 거라 생각했다.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왼쪽 발목의 고통이
주변이 어두운 탓에 소한은 김단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하지만 쫓아오는 길 내내,나뭇가지에 걸린 천, 나뭇가지에 묻은 피, 심지어 나뭇가지에 걸린 머리카락을 보면서 그녀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몸 어느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것이다.김단은 아프다고 하지만 어디가 아픈 지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다.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소한도 마음이 아팠다.그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마치 십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올라타시오.”그리 익숙한 넓은 등을 보자, 김단은 여러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그리고 익숙하게 그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소한은 그녀를 업었다.한 손으로는 그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춤에 있는 긴 검을 뽑아냈다.검을 휘두르며 가시나무 길을 향해 걸어갔다.달빛이 여전히 얼룩덜룩했다. 동시에 밤의 바람도 유난히 추웠다.하지만 지금 만큼은 달랐다.김단은 열여덟의 소한에게 업혀 있는 것 같았다.이로 말할 수 없게 안심이 되었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숲을 빠져나왔다.그리고 산 동굴 앞에서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몇 명의 아전들이 시체를 밖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바람에 의해 천이 들춰지더니 시체의 얼굴이 드러났다.그 사람은 구서였다.김단이 깜짝 놀랐다.“저, 저 자가 어찌..”혹여 자신이 구서를 돌로 죽인 것일까.그리 세게 힘을 주었나.소한은 김단을 멀지 않은 마차까지 업어다 주었다.그리고 천천히 마차 위에 올려놓고 대답했다.“구서가 원이를 범하려고 하였소, 그래서 원이가 죽였소.”임원이 죽인 것이다.김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임원은 어디 있습니까?”“걱정하지 마시오, 원이는 무사하오. 어머니와 정원이를 데리고 돌아갔소.”소한의 말투는 다정했다.임원을 입에 올려도 며칠 전처럼 차갑게 굴지 않았다.김단의 마음이 내려앉았다.“임원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소한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김단의 몸에 덮어 주었다.“아무 말
과거의 기억이 다시 몰아치자, 김단은 그만 묻혀 버리고 말았다.그 순간 만큼은 저항할 생각도 없었다.마치 상황에 홀린 것 같았다.어찌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라 생각했을까,그가 한 번도 자신의 말을 믿은 적이 있었는 가.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운이 퍼졌다.김단의 자신의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았다.작은 따뜻함이라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차가운 기운은 사방곳곳에서 퍼졌다.김단은 자신을 더욱 감싸안았다.그녀의 몸은 벌벌 떨기 바빴다.옆에 있던 소한은 김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어쩌면 오늘 일에 화가 나서, 순간 차가워졌다고 생각했다.그는 손에 쥐고 있는 겉옷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마부에게 앞으로 가라는 지시만 내릴 뿐이다.진상은 자신이 돌아가서 직접 조사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해시가 되기 전에 마차가 관저 앞에 멈췄다.김단이 가림천을 들췄다.소한이 밖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그녀의 발목이 다쳤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성을 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김단은 그를 무시했다.아픔을 꾹 참고 마차에서 내렸다.소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어찌 된 일 인지 알 수 없었다.숲에서는 자신의 등에 기대어 있었지 않았는 가.그때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 가.“아씨!”큰 목소리가 들려왔다.숙희가 서둘러 관저에서 뛰쳐나왔다.그녀는 김단을 보자 눈물을 쏟아냈다.“흑흑, 아씨, 다쳤사옵니까? 흑흑흑..”숙희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김단도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울 것이라 생각했다.머리가 풀려 있고 치마도 찢어졌으며, 팔목에는 여러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숲에 가시나무가 많았던 탓이다.그저 도망치기 바빠서 상처는 볼 시간도 없었다.숙희가 알려주고 나서야,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김단은 숙희에게 몸을 반쯤 기대었다.농을 하며 웃었다.“울지만 말고, 네 아씨를 데려가야 하지 않겠느냐.”숙희는 그제야 눈물을 닦고, 김단을 부축하여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소
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소정원이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정원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어줄 리가 없다.하지만 소하의 눈빛도 같이 어두워졌다.소정원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노가 들어있었다.“진상을 밝히기 전까지, 말을 아끼는 것이 좋을 것이야.”하지만 소정원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그녀의 말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진상이 어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저는 모친과 있었사옵니다, 자칫하면 그 사람들한테 죽을 뻔했습니다! 만일 작은 형수님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옵니다!”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소정원의 눈가가 붉어졌다.놀란 마음이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그리고 억울한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찾으려고 했는데, 먼저 도망갔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그녀의 말에 소 씨 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정원과 함께 김단을 찾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였다.허나 김단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서운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잠시 감정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그만하거라. 네 형수도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소정원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몸을 돌려 김단을 보지도 않았다.김단은 귀찮은 마음에 자리를 떴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이 돌아오셨습니까?”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임원이었다.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임원은 몸종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얼굴에는 눈물자국이 가득했다.“누이, 어찌 이리 되셨습니까. 홀로 숲으로 도망쳤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흑흑흑..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옵니다..”임원은 엉엉 울었다.진심 어린 행동을 하며, ‘누이’ 라며 친근하게 부르는 모습에 김단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소정원은 화를 내며 다가왔다.“형수님, 저런 사람을 어찌 걱정하시옵니까?”임원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정원,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누이는 어쩔 수 없이 그
소정원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그녀는 눈을 떴을 때, 소 씨 부인과 함께 큰 바위 뒤에 누워 있었다.옆에는 사람 네 명이 망을 보고 있었다.그녀도 저항을 해보았지만, 얼마 못가고 저지 당하고 말았다.이때, 임원이 상대편의 한 사람을 위협하며 다가왔다.소정원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눈살이 찌푸려졌다.“그리 이상할 것이 있습니까? 작은 형수님께서 무술을 배우지 않았다 하셔도, 구서의 빈틈을 노려 공격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포로로 잡힌 놈도 빈틈을 보이는 바람에 잡혔을 수도 있지요, 작은 형수님께서 저와 제 어머니를 구한 것은 사실입니다!”임원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누이가 모르는 것이 있사옵니다. 구서가 저를 덮치려고 하던 찰나 동굴에 있던 돌에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머리에 있는 비녀를 가지고 찔렀습니다. 구서가 숨을 멎고, 저는 무서워서 동굴 모서리에 숨어 있었나이다, 포로로 잡힌 그놈은 동굴 안이 깜깜해서 저를 보지 못했을 겁니다,저에게 잠시 등을 돌리는 찰나에 비녀를 그의 목에 찔렀습니다… 저, 저도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모르겠나이다. 다시 생각해도 여, 여전히 무섭습니다..”임원의 말에 소정원은 마음이 찢어질 지경이었다.그녀는 임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왜 설명을 하시려 하십니까.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표정입니다. 두려움에 우리를 두고 도망친 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옵니까. 그리고 형수께서 저와 제 모친을 구한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작은 형수님, 두려워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저와 제 모친이 지켜 드리겠나이다.”그녀의 말에 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괴롭힘을 당한 며느리 같았다.옆에 있던 소 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원아, 두려워 하지 말거라. 아버님께서는 이미 궁에 들어가시지 않았느냐,태부댁에서도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야.”태부댁 구서가 감히 소 씨 집안의 여인들을 납치한 것은 용서치 못할 일,소 씨 집안을 만만하게 보아서 생긴 일이지 않는가.이번 일은 태부댁이 직접 찾아와 용서를
김단의 눈빛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임원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영희를 바라보았다.구서가 죽었어도 자신이 그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남았지 않았는 가.영희는 김단의 눈빛에 놀라 진정하기도 전에, 김단의 차가운 눈빛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옆에 있던 소정원은 김단을 욕하기 바빴다.“뭐가 인과응보라는 거요? 이상하기도 하지.”임원은 소정원과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친한 친구로 보냈었다.그녀는 소정원을 잘 알고 있었다.“정원, 너무 그러지 마시오. 어쩌면 누이께서 나를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소.”“작은 형수!”소정원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이제 큰 형수 편은 그만 드시오! 오늘 일은..”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상을 찾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늦었으니 어머니를 데리고 들어가거라.”소하는 바퀴를 구르며 자리를 떴다.멀어지는 소하의 뒷모습을 보며 소정원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소하의 말투에는 분노가 들어있기 때문이었다.소정원은 단 한번도 소하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그의 다리가 마비가 되어도, 그가 명을 포기하려는 순간에도 항상 고운 말투로 소정원과 대화를 하곤 했다.헌데…소정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씩씩거리며 소 씨 부인을 바라보았다.“김단 이라는 자가 대체 큰 오라버니께 무슨 짓을 한 것이옵니까? 어머니, 큰 오라버니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시지 않사옵니까?”소 씨 부인도 눈살을 찌푸렸다.“다리 치료를 도와주지 않느냐! 아무리 나쁘다고 하여도 네 형수님이다, 네 큰 오라비와 한 평생을 할 사람이란 말이다! 오라비가 감싸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 그만 되었다, 오늘 다들 놀랬으니 어서 들어가 쉬거라.”소정원은 여전히 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몇 걸음 가기도
하지만 그저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소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예, 그럼 저도 가서 쉬겠나이다. 한이 오라버니도 얼른 들어가 쉬시지요.”말을 끝내고 발걸음을 옮겼다.임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한은 자신의 겉옷을 만지작거렸다.그의 눈동자가 점점 어두워졌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문 닫거라.”영희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그녀가 뒤를 돌았을 때,임원이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거리가 가까운 탓에 영희는 깜짝 놀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두려움에 떠는 영희를 보며,임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못났다, 뭐가 그리 무서운 거야?”그녀는 말하는 도중에 영희의 손을 잡았다.“염려 말거라. 구서가 죽었으니, 우리가 구서와 손을 잡았는 것은 아무도 모를 거야. 네가 입 막음만 잘한다면 우리를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임원은 ‘우리’ 라며 강조했다.영희와 자신을 하나로 묶어 버렸다.영희는 착한 모습의 임원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졌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씨, 노비는 언제나 아씨의 사람이옵니다.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겠나이다.”영희는 말 끝을 흐렸다.두려움에 훌쩍 거린 것이다.이전에 임원은 사람을 시켜 명희를 죽였었다.이 사실만으로도 영희는 임원이 무서웠다.헌데, 임원이 구서마저도 직접 죽였지 않았는 가.영희는 어쩌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임원은 영희의 태도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손을 들어 영희를 볼을 쓰다 듬었다.“나와 구서의 일을 아는 것은 오직 너뿐이야.”영희는 두려움에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문에 부딪혀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영희는 두려움에 떨면서 무언가 생각났다.“노비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나이다. 헌데 아씨, 그 검은 옷 무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까?”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동행자를 찾으려 생각했다.하지만 임원은 크게 웃
이윽고 김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스승님은 지금 귀식환을 연구 중이고 이후에는 통증 완화제까지 만들어야 했기에 시간이 촉박할 것이다.김단은 그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녀는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웠다.맹영지, 서아름, 소 도련님...거기에 서원공주까지 경계해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그런 와중에 임학까지 다쳤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모든 일이 한꺼번에 밀려드니 그녀로써는 혼자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단아...”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김단은 깜짝 놀라 임학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착각이었던 것일까?김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임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단아, 오라버니가 잘못했어...”미약한 소리였지만 조용한 방 안에서는 또렷이 들렸다.“내가 잘못했어.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단아...”김단은 임학이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아마도 슬픈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임학의 눈가에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뚝 떨어졌다.그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졌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오라버니가 널 믿지 못했어. 널 괴롭혀서 미안해... 다 내 잘못이다.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거라.”김단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꿈속에서조차 용서를 구하는 임학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오라버니가 목숨으로 갚을게… 그러니 날 외면하지 말거라. 단아, 제발…”그의 목소리는 다급해졌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술마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김단은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즉시 다가가 확인했다. 그러자 그의 복부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재
이튿날 아침 김단은 일찍이 진산군 댁으로 향했다.단순히 임학의 상태를 살피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지금 진산군 댁에는 의원 한 사람만이 남아 임학을 돌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의원의 의술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신중해서 나쁠 것 없으니 김단은 한동안 진산군 댁에 머물며 임학을 돌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임학이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은 명의의 제자인 김단이 그를 치료했다고 믿을 것이다.김단이 방에 들어섰을 때 진산군은 아직 깨어 있지 않았다.그는 밤새 임학의 곁을 지키며 불안 속에서 밤을 지새우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잠시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김단은 조용히 침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그의 희끗한 머리카락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그 모습을 본 김단의 마음은 저릿하게 무거워졌다.하룻밤 사이에 그의 흰 머리카락은 어젯밤보다 더욱 늘어난 것 같았다.최근 진산군 댁에 닥친 연이은 사건들이 그를 이렇게 지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한때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던 그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다.김단은 문득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그녀는 할머니 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산군과 손바닥을 세 번 맞대며 가족의 연을 끊어버렸다.그때까지만 해도 진산군의 머리는 검은빛이 감돌았다.김단은 가슴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지난 기억들을 떨쳐내려 애썼다.그러고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대감님.”진산군은 잠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는지 그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그러다 눈앞에 김단의 모습이 보이자 그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묻어났다.“대감님, 여기는 제가 지킬 테니 이제 좀 쉬세요.”김단은 부드럽게 얘기했다.지금 이 집에서 몸이 성한 사람은 오직 진산군 한 사람뿐이었다. 만약 그마저도 병이 난다면 진산군 댁은 진짜 무너지고 말
그렇게 말한 뒤 김단은 조용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런데 등 뒤에서 진산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지난번 네가 보내준 약과 아주 맛있더구나. 고맙다.”뜻밖의 말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약과? 그녀가 지난번에 보냈던 건 분명 스승에게 드릴 요량으로 만든 것이었다.그녀는 무심코 시선을 의원에게로 옮겼다.하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결국 진산군의 손에 들어간 것이 맞았군.이런 자리에서 굳이 진상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김단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진산군 댁 바깥에서는 경씨가 마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단이 마차에 오르자 두 도령들도 함께 따라 나왔다. 경씨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눈을 반짝였다.그렇게 김단을 태운 마차는 평양관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그녀는 말없이 마차 안에 앉아 밖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원군님은 요즘 어떻소?”“아주 잘 계시오. 그 돌궐놈들 말이오. 원군님께서 살아 돌아온 걸 보고는 그 자리에서 벌벌 떨더라고.”그 말에 경씨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그럴 만도 하겠지. 아예 다 죽여버리지 그러셨소?”“그건 좀 어렵소. 이미 몇 번 전투를 치러봐서 알지만 돌궐놈들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오. 내 생각에는 곧 항복할 것 같소.”“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셋째 왕자라는 놈, 뭔가 수상하오.”말을 마친 다섯 번째 도령이 갑자기 마차 쪽을 향해 소리쳤다.“단이! 낭자의 오라버니 말이오. 그 셋째 왕자한테 당한 것이오!” 일곱 번째 도령도 옆에서 맞장구쳤다.“맞소. 공을 세우겠다고 앞장서서 돌진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오. 아예 왕부터 잡겠다고 무모하게 달려들었으니... 다행히 원군님께서 제때에 도와주셨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임학은 이미 전장에 묻혔을 것이오.”“그 애를 살리겠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것이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죽을 맛이었지.
김단은 방 안에 하인만 남겨두고 의원을 따라 문밖으로 나섰다. 진산군은 그들이 나오자마자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어떻소? 임학은... 임학은 괜찮은 것이오?”진산군의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조심스럽게 묻는 말 한마디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일단 위기는 넘기셨습니다. 하지만 이틀은 더 지켜봐야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의원의 말에 곁에 있던 일곱 번째 도령과 다섯 번째 도령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단 말입니까?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숨이 넘어갈 뻔했는데요.”“김단 낭자의 의술이 그렇게 뛰어나단 말이오?”두 사람은 김단의 의술에 감탄하며 공을 그녀에게 돌렸다.사실 임학의 목숨을 살린 건 의원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이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이었다.바로 그때 멀리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임학! 우리 학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냐?”임씨 부인이었다.그 모습을 보자 진산군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임씨 부인의 뒤를 따르던 유모에게 소리쳤다.“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부인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임씨 부인의 병은 자극을 받으면 더 악화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진산군은 모든 하인들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었다.유모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변명했다.“노… 노여움 푸십시오, 대감님! 소인은 그저 마님과 매화당에서 지렁이를 캐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님께서 갑자기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면서 이쪽으로 달려오셨습니다.”유모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임씨 부인은 그저 직감적으로 자신의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학아... 학아, 네가 정말 돌아왔구나.”임씨 부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임학이 있는 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진산군은 다급히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임씨 부인에게 말했다.“학이는
김단을 보자 그의 두 눈이 밝아지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단아!”나지막한 부름에 김단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그녀는 한 쪽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섯째, 일곱째 도령님?”뜻밖에도 호랑이군의 두 도령이 있던 것이다!하지만 두 도령은 그녀와 옛이야기를 나눌 겨를도 없이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오!”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김단의 심장이 다시 쿵 내려앉았다. 상황이 정말 이토록 심각하단 말인가?김단은 애써 침착한 척 발걸음을 옮겨 임학의 침실 안으로 향했다.그녀가 진산군 옆을 지나칠 때 진산군은 그녀를 부르지 않았고, 그녀 역시 애써 진산군 쪽을 보지 않았다.하지만 스치듯 보았음에도 그의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분명히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이렇게 흰머리가 많지 않았는데...김단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의원이 침상 앞에 앉아 있었고, 침상에는 임학이 누워 있었다.임학의 머리, 뺨, 그리고 몸에는 수많은 은침이 꽂혀 있었다.김단의 발걸음은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의원의 시침을 방해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의원은 이미 그녀가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비장이 손상되어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겨우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천년 묵은 인삼 조각을 먹여 겨우 숨을 붙여 놓았기 때문입니다.”말을 마친 의원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충 어림잡아 말했다. “하루에 한 조각씩, 아마도 천년 묵은 인삼 반 뿌리 가량을 썼을 것입니다. 아깝지도 않았나 봅니다.”김단은 분명 호랑이군의 두 도령이 매일 같이 임학에게 인삼을 먹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 반 뿌리의 천년 묵은 인삼은 아마 주상이 최지습에게 내린 하사품일 것이다.이에 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의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상태는... 어떠하오?”의원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난번에 제가 드렸던 귀한 환약이 아직 남
공주가 침소에서 나온 후, 김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태훈이 공주에게 모욕을 당했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었고, 그녀 또한 그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가능하다면 그녀는 그런 일들을 피하고 싶었다.그녀는 차라리 하만촌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근심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이 이 궁궐에 남아 수많은 간사한 자들의 마음을 마주하는 것보다 나았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등 뒤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녀를 그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듯했다.이에 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좋다. 이미 이렇게 내몰린 이상, 그녀 역시 전력을 다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속으로 자신을 격려한 김단은 발걸음을 옮겨 어의원으로 향하려 했다.잠시 뒤에 서미인을 보러 가야 했기에, 우선 어의원으로 돌아가 준비를 해야 했다.하지만 어의원 문턱에 다다르기도 전에, 어린 내관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왔다.“낭자! 낭자, 잠깐 기다리시오!”어린 내관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김단 앞에 섰다. 낯선 얼굴이었다. 중전이나 서원 공주의 사람은 아닌 듯했다.숨을 헐떡이는 어린 내관을 보며 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시오?”“낭자, 강녕하셨소? 임씨 가문 장남 도련님께서 중상을 입고 돌아오셨소. 주상 전하께서 구두로 명하시길, 낭자께 즉시 진산군 댁으로 가 그를 구하라고 하셨소!”임씨 가문 장남?임학?그는 최지습을 따라 전쟁터로 가지 않았던가? 분명 며칠 전 주상이 최지습이 승전했다고 말하였다!그런데 어찌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는 말인가?김단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린 내관이 그녀를 불렀다. “낭자, 인명이 달린 일이오. 임씨 도련님은 어쨌든 낭자의 친 오라버니이기도 하니, 부디, 부디 마지막 얼굴만이라도 보러 가시오!”김단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초조한 어린 내관의 표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도 주상 전하께서 자네에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오?”이 말을 들은 어린
뜨거운 차가 그녀의 다리에 튀었다.김단은 서원 공주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화가 났으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공주 마마, 노여움을 푸시지요!”“노여움을 풀라고? 낭자는 내가 화병이 나 민태훈은 물론 민씨 가문 전체를 혼내주기를 바라던 것이 아니오?”서원 공주가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김단은 다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소신이 감히, 소신은 그저 공주 마마께서...”“그만!”서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 “공주가 바보인 줄 아는 것이오?! 낭자가 나를 손에 든 칼로 쓰려거든, 먼저 낭자가 그 칼을 쥘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김단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서원 공주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김단은 이미 서원 공주의 성격을 꿰뚫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말했다. “공주 마마,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소신이 공주 마마의 힘을 빌려 민태훈을 혼내주려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민태훈이 지나치게 소신을 안하무인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궁궐 안의 그 누가 소신이 공주 마마의 사람인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어디를 가든 모든 사람들이 공손하게 대하는데, 유독 저 민태훈만이 시종일관 소신을 업신여기니, 소신도 자연스레 저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나이다!”여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김단은 고개를 들어 서원 공주를 슬쩍 쳐다보았다.공주의 얼굴에 있던 분노는 많이 가라앉은 듯했다.자신의 휘하 사람들이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고, 서원 공주가 어찌 그런 것을 모르겠는가?김단이 자신이 서원 공주 덕분에 외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김단이 진심으로 자신을 그녀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서원 공주의 화는 자연히 조금 누그러졌다.이에 김단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 소신이 습격당한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소신은 정말이지 민태훈과 소신 사이에 무슨 깊은 원한이 있어 소신에게 그렇게 경
민태훈의 표정을 본 김단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감께서는 제가 이 일을 공주 마마께 말씀드릴 거라 생각 못 하신 겁니까?”일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정말 고작 몇 개의 무기로 그녀를 겁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그녀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끝까지 부인했다.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어쨌든 떳떳한 일은 아니었기에 어사대부인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벌할 빌미를 줄 수 없었다.그들에게는 어떠한 증거도 없지 않은가!서원 공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감이 부인한다고 해서 내가 자네를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오?”그녀가 주상에게 말하면 증거가 없더라도 민태훈에게 호된 벌을 내릴 수 있었다!민태훈도 이를 똑똑히 알고 있기에 끝내 고개를 숙였다. “공주 마마께서는 소신이 어찌해야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공주가 그를 불렀음에도 곧장 주상에게 고하지 않은 것을 보니, 공주는 아직 이 일을 주상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니 이 일에는 아직 반전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과연 공주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간단하오. 김씨 낭자에게 사과하시오.”이 말을 들은 민태훈은 깜짝 놀랐다.영의정의 손자인 그가, 일개 칠품 의녀에게 사과하라니?그는 죽기보다도 싫었다.하지만 서원 공주의 심술궂은 표정을 본 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김 낭자, 미안하오.”김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서원 공주가 굳이 민태훈을 불러낸 이상 단순한 사과만으로 끝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원 공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성의가 없어서야 되겠소? 사과는 머리를 조아려야 하지 않소?”민태훈은 깜짝 놀랐다. 김단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이는 명백히 그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닌가?!순간 그의 두 눈이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김단은 서원 공주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서원 공주가 정말로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을
이 일 때문에 그녀는 주상과 몇 번이나 다투긴 했으나, 민씨 가문 사람들이 맹영지를 이렇게 대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그녀가 맹영지와 가깝든 그렇지 않든, 맹영지는 그녀를 이모라고 불러야 했다.민태훈이 맹영지를 학대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녀를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중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도 더 이상 공주를 막지 않았다.이에 서원 공주가 입을 열었다. “민태훈을 불러오거라!”“예!”하인 하나가 대답을 한 뒤 물러갔고, 민태훈의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주의 침소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하지만 서원 공주는 그를 바로 만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민태훈은 꼬박 한 시진을 기다렸으나 끝내 인내심이 바닥나 옆에 있는 소복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공주 마마께서 오늘 신을 뵐 겨를이 없으신 듯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국사를 그르칠까 염려되오니, 다음 기회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예를 표하고 떠나려 했다.하지만 소복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이런 무례한! 공주 마마께서 자네를 보려 하시는데 감히 핑계를 대고 거부하다니, 마마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오?”민태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공주 마마께서 한참을 기다려도 안 만나주시지 않습니까! 소인은 아직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국사를 그르친다면 대감께서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하지만 소복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이 어사대부지, 매일 다른 사람 잘못을 들추거나 약점을 잡아 주상 전하께 아뢰어 이간질이나 하는 자가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오?”“대감!”민태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감히 우리 본관을 모욕하는 것입니까?!”“굳이 내 앞에서까지 관직을 내세워 거들먹거릴 필요 없소. 대감은 영의정 대감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에 조정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오. 하지만 아무리 대감이 영의정 대감의 친손자라 할지라도, 우리 공주 마마께서는 주상 전하의 친따님이시자 우리 대정의 유일한 공주 마마시오! 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