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치고 소하가 김단을 바라보며 함께 떠나자고 눈짓을 보냈다.김단은 모든 침을 거두어 소하를 따라 걸어갔다.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약간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네다섯 번의 침도 견디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소한은 끝까지 견뎌냈으니, 그는 얼마나 강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일까?하지만 문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소한 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소정원은 김단이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어찌 된 영문인지 순간 그녀는 소한이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약간의 동정심이 묻어났다. “둘째 오라버니...”“나가거라.”낮게 쉰 그의 목소리는 듣기에도 몹시 거칠었다.자세히 들으면 약간의 흐느낌도 들릴 것 같았다.소정원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방문이 닫히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오른쪽 다리에는 방금 침을 맞았을 때의 통증이 남아 있는 듯했다. 마치 실을 뽑아내는 듯했고, 그 실이 그의 심장과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다.그렇게 그의 가슴도 조금씩 아파왔다.그는 고개를 젖힌 채 두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꽉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솟아올랐고 한동안 긴장을 풀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소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색 서까래였다.그의 두 눈이 서까래에 찔리는 듯 몹시 아파왔다.눈가에서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이내 머리카락 사이로 사라져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한편, 소씨 부인은 임원을 데리고 소씨 저택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날씨가 따뜻해져서 정원에는 푸르고 다채로운 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만개했다.임원은 소씨 부인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몹시 싸늘했다.소씨 부인은 이내 임원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발걸음을 멈추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억울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 한마디에 임원이 꾹 참고 있던 억울함이 터져 나왔고, 눈물이 봇물처럼
이틀 후.김단은 오전에 돌멩이 백 개를 던지는 연습을 마치고 오후에 소한에게 침을 놓을 준비를 하러 방으로 돌아왔다.벌써 세 번째 시험 침술이었다.어제 시험 침술의 감이 매우 좋았기에 김단은 한두 번만 더 시험하면 소하에게 침을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때 숙희가 급하게 방으로 뛰어 들어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집 밖에 훈장님이 아가씨를 찾으러 왔습니다. 혹시 쇠돌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쇠돌이는 예전에 거지 꼬마였고, 그 일이 있은 후 김단은 돈을 내고 서당 훈장님께 쇠돌이를 맡겼다.숙희의 말을 듣고 김단도 긴장하기 시작했다.그날 돈을 충분히 줬기에 쇠돌이의 일 년치 생활비 정도는 충당할 수 있을 터인데, 훈장님이 지금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곧장 숙희와 함께 집을 나섰다.정말 훈장님은 집 밖에서 초조해하며 서성이고 있었다.김단을 보자 훈장님은 곧장 다가왔다. “김단 아씨, 아, 아니, 큰 며늘 아씨...”훈장님은 김단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김단이 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훈장님께서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쇠돌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쇠돌이가 사라졌습니다!”훈장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매우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아침 일찍 서당 밖에 어떤 아가씨가 와서 쇠돌이를 안다며 쇠돌이의 상황을 자세하게 술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제가 믿고 쇠돌이와 만나게 하였는데, 쇠돌이가 나간 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훈장님은 말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가 바로 사람들을 불러 사방팔방 찾아봤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되어 큰 며늘 아씨를 찾아온 것입니다.”그 말을 들은 김단과 숙희도 긴장하기 시작했다.김단은 다급히 물었다. “그 낭자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나이는 얼마나 됐습니까?”훈장님은 기억을 회상하며 말했다. “나이는 이 아가씨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는 숙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부가 약간 검
김단은 점점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임학을 찾아가 봐야겠어요!”소하도 이번에는 그녀를 막지 않았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웠다.……임학은 김단이 자신을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래서 하인의 보고를 들었을 때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나를 찾아왔다고?”“큰 아가씨입니다!”하인은 급히 말했다. “매우 다급해 보이셨습니다.”그 말을 듣고 임학은 의아해하며 김단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걸까?임학은 골똘히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섰다.시집을 간 후 김단은 친정에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고, 진산군 댁과 완전히 절연하였다.그런데 이제와 급한 일이 생겼다고 그를 찾아왔다는 말인가?진씨 가문을 무엇으로 생각한단 말인가?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도 되는 곳으로 여기는 것 아닐까?그는 당당한 진씨 가문의 장남이고, 김단이 보고 싶다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임학은 김단을 골탕 먹이기로 마음먹었다.최소한 향 한 개비가 다 탈 때까지는 기다려야 줘야 김단에게 진씨 가문이 그녀 뜻 대로 안 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사실 임학은 향 한 개비가 다 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김단이 먼저 자신을 찾아온 것은 관계를 개선하려는 행동인데, 그가 일부러 그녀를 못살게 군다면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었다.김단이 이렇게 뜻밖에 그를 찾아온 것이라면,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그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를 만나러 나가기로 결심했다.그런데 차를 다 삼키기도 전에 그의 방 문이 발로 차여 벌컥 열렸다.김단이 화가 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임학 도련님! 당장 나오시지요!”임학은 깜짝 놀랐다. 그는 방금까지 그녀를 걱정해 주었는데, 정작 그녀는 이런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한양 외곽의 허름한 사당 밖에서 명희는 쇠돌이를 포박하여 건장한 사내들에게 넘겼다.사내들이 덩치가 너무 컸기에 명희는 불안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데려왔으니 빨리 한양을 떠나 멀리 가시게. 평생 한양에 돌아오지 마시오. 아시겠소?”우두머리 사내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아가씨.”그리고 쇠돌이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쇠돌이는 손발이 묶였을 뿐만 아니라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두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고, 몹시 두려웠다.그는 명희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애원하는 듯했다.하지만 명희는 쇠돌이를 노려보고 사내들에게 말했다. “나는 먼저 가보겠소!”그녀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그런데 갑자기 두 명의 사내가 성큼 다가와 사당 문을 닫았다.명희는 깜짝 놀라 낮은 목소리로 경계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우두머리 사내가 냉소하며 말했다. “자네 아씨가 돈을 두배로 줬으니, 오늘은 못 가!”그 말을 들은 명희는 곧장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마시오! 우리 아씨가 나한테 그럴 리 없소!”하지만 문을 닫았던 두 사내가 다가와 명희를 붙잡았다.명희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두 사내는 힘이 엄청나게 셌고,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내 묶여 질 수밖에 없었다.“우리 아씨를 만나게 해주시오!”명희는 소리쳤지만 이내 입이 헝겊으로 틀어막혀졌다.“읍! 읍!”우두머리 사내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너를 속여서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겠어? 솔직히 말하면, 네 아씨는 돈을 두 배로 줬을 뿐만 아니라 네 목숨마저 가져가라고 했다고!”“읍, 읍!”명희는 힘껏 소리쳤다. 커진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의심이 가득했다.우두머리 사내는 더욱 크게 웃었다. “어때? 아직도 못 믿겠어? 이런 일을 난 많이 봤지. 보통 너희 하인들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아서 그래. 잘 생각해 봐, 맞지 않아?”그 말을 들은 명희는 정
쇠돌이의 손이 뒤에 묶여 있어, 끈을 끊기 힘들었다.그러나 쇠돌이는 손이 기와 조각에 긁혀 피가 나도 개의치 않고 포기하지 않았다.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명희는 쇠돌이가 도망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갑자기, 쇠돌이가 몸에 묶여 있는 끈을 끊었다.그는 재빨리 기와 조각을 버리고 발에 묶인 끈을 풀더니, 벽에 뚫린 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우,우!”명희의 부르는 소리가 쇠돌이의 시선을 끌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명희를 보자, 명희는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그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전에, 그가 명희에게 그랬듯이.그는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나쁜 사람인 명희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구멍으로 반쯤 기어가다 다시 돌아왔다. 분노로 가득 찬 표정으로 서둘러 명희의 뒤로 다가섰다. 그냥 가버리면, 자신도 명희처럼 남이 죽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는 나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작은 손은 아주 민첩하게 명희의 끈을 풀었다.두 사람은 신속하게 구멍에 기어들어 갔다.쇠돌이는 체구가 작아서 순리롭게 통과했지만, 명희는 좀 애를 먹었다.명희는 억지로 기어나가다 허리가 뚫린 벽에 긁혀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아!”그녀의 소리는 밖에서 술 마시고 있는 남자들을 놀라게 했다.그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무슨 소리야?”놀란 명희와 쇠돌이는 서로 손을 잡고 황급히 산속으로 뛰어들었다.그들 뒤에서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 서!”명희는 놀라서 막 쇠돌이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갈라서 뛰자!”그러고는 쇠돌이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쇠돌이가 아직 어려서 빨리 뛰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자신 대신 남자들의 시선을 끌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남자는 그녀를 따라잡았다.명희는 놀라서 눈물을 줄줄 흘렸고, 발걸음을 늦추지 못했다.하지만, 그녀는 산길을 뛰어 본 적이 없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그녀가 일어서기도 전에 뒤에
임학은 아는 하등인에게서 소식을 듣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김단을 데리고 서둘러 왔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었다!김단은 급히 명희에게 달려갔다.임학은 소리치며 그 남자를 공격했다.그러나 그 남자 역시 무예를 익힌 자였기에, 임학의 공격에 맞서면서도 도망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실력에서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김단은 그런 상황을 관계할 여지도 없이 두 손으로 명희 가슴의 상처를 꼭 눌렀다. 손가락 사이에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전에 납치당한 굴에 돌아간 것 같았다.그녀는 지금과 같이 죽을힘을 다해 명정대군의 상처를 누르고 있었지만, 결국에는...“임, 임원은 가짜...”명희는 갑자기 말하더니, 김단의 회상을 멈추게 했다.그녀는 멍하더니 명희가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명희는 이어서 말했다.“아씨, 아씨가 진짜입니다.”명희는 가슴에서 전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자기가 더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죽기 싫다.그녀는 자기의 일생이 임원의 디딤돌이 된다는 것에 너무 분했다! 그녀는 그동안 임원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해왔고, 모든 것이 오직 임원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임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임원을 끌고 함께 지옥으로 가고 싶었다!그녀의 소원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김단뿐이다!그래서 그녀는 모든 사실을 김단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그러나, 김단은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김단은 두 눈을 부릅뜨고 명희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멍해져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다시 되물었다.“뭐라고?”“우리 어머니도 어쩔 수 없었어요. 임원이 마님이랑 닮은 것 같아서, 임원한테 친딸인 척하라고...”명희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죽기 싫은 것도 있지만, 김단에게 미안한 것도 있었다.그해, 그들이 사는 촌에 큰 재해를 입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진짜 그녀의 오라버니다!진산군댁에 있는 그 두 사람도 진짜 그녀의 부모다!그녀는 임원의 15년을 뺏지도 않았고, 원래 그녀의 것이었다!모든 것이 원래 그녀의 것이었다!그럼, 그녀가 겪은 그 3년은 무엇인가?그녀가 받은 모욕은 또 무엇인가?눈물은 그저 줄줄 흘러내렸다. 임학은 놀라서 김단이 명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명희는 나쁜 놈 손에 죽었어, 너랑 상관없어!”그는 명희의 피로 가득한 채로 죽은 모습을 떠올리며, 그것이 김단의 악몽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예전 15년 동안처럼 그녀를 위로하고 보호하려 했지만, 그때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임원이 등장한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는 혈연 관계 때문에 임원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김단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임학에게 명희가 한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하고 싶었지만, 떨리는 입술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임학은 김단의 그런 모습을 보고 당황해하며, 급히 그녀를 끌고 산림 밖으로 나갔다.그가 데려온 사람이 다른 나쁜 놈들을 처치한 것을 보고, 임학은 사람을 시켜 명희의 시신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쇠돌이를 보더니, 임학은 김단을 위로하며 다가갔다.“적어도, 쇠돌이는 괜찮잖아.”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김단이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봤다. 김단의 눈빛은 마치 그에게 박힌 것 같았고, 그녀의 눈물은 제방이 무너진 듯 쏟아지고 있었다. 김단은 임학에게, 도대체 누가 그의 친여동생인지 조금이라도 알아보지 못하는지 묻고 싶었다.그저 임원의 눈이 임씨 부인을 닮았다고 김단을 그 지경으로 만들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인가?참으로 우습지 않은가?임학은 김단의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어릴 적 그녀가 억울할 때도 이러지 않았다.심지어 전에,
끝내 모든 사람이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소씨네 대청에는 김단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진산군과 임씨 부인도 왔다.임원은 대청에 무릎을 꿇고, 얼굴에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제가 그러지 않았어요. 아버님, 어머님, 제발 믿어주세요.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소하는 의자에 앉아 표정이 아주 어두웠다.“잡힌 사람이 모두 당신의 지시라고 말했고, 쇠돌이도 당신이라고 지목했소.”“정말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임원은 억울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제가 무서워한 것은 맞아요. 어머님께서 소씨네 집안일을 도맡으라고 하셨는데, 언니가 계속 쇠돌이를 이용해 저를 협박했어요. 제가 전에 잘못한 일이 들통나면 어머님이 실망할까 봐 두려워서 명희에게 쇠돌이를 데리고 가라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사람을 시켜 쇠돌이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쇠돌이를 좋은 가정에 입양 보내려고 했을 뿐입니다!”임원은 일이 이렇게 빨리 들통날지 몰랐고 쇠돌이가 아직 살아 있을 줄도 생각 못했다!그러나 일이 들통난 마당에 그녀는 모든 죄를 뿌리쳐야 한다!소씨 부모님의 얼굴도 역시 어두워졌다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은 임원이 전에 거지를 매수하여 결국 거지들의 목숨을 해친 일도 알게 되었다. 거지를 해친 일은 무심이라 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살인을 지시한 것이었다.소씨 부모님은 임원이 이런 사람일 줄 상상도 못했다!그러나, 그들은 임원의 변명도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임원은 쇠돌이를 입양할 사람을 찾으려고 했으나, 김단의 위협이 두려워서 이런 짓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임원의 눈물에 마음이 움직인 듯했다.그러나 임학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명희도, 네가 자기를 해쳤다고 했어.”명희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노여움을 가득 담아서 한 말이다. 임원을 죽을 만큼 원망하지 않으면, 명희는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임원은 멍하더니 바삐 임학을 보면서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큰 아가씨, 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소 아가씨? 소정원을 그러는 것일까? 김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김단은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고 마당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경쟁자였던 소정원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임학 때문일 것이다. 김단은 조심스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사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오라버니들이 말리셨습니다. 임학 도련님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제가 와봤자 방해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에야...”그녀는 말을 흐리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임학 도련님은… 지금은 어떠세요?”김단은 살짝 웃으며 얘기했다.“맥박은 안정되었고 상처도 서서히 아물고 있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깨어나질 않소.”그 말을 들은 소정원의 이마가 즉시 찌푸려졌다. 김단은 그녀가 임학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김단은 부드럽게 말했다.“도련님을 좀 봐주시오. 나는 물 한 잔 가져오겠소.”김단이 찻잔을 들고 물을 따르는 순간 소정원의 외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김단 낭자! 어서 와서 보세요!”갑작스럽게 들리는 큰 목소리에 김단은 놀라 물을 흘리고 말았다.하지만 김단은 물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황급히 침대 옆으로 뛰어갔다.김단은 임학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았다.하지만 소정원은 임학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보세요. 도련님께서 울고 계십니다.”임학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김단은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자신이 했던 말은 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의 눈물을 보니 어쩌면 김단이 방금 전에 했던 모든 말들, 즉 그를 향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들이 그의 가슴을 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나
그는 소한의 거침없는 기질이 가끔 부러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할까?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자신이 소한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소한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삼일 뒤, 김단은 평소처럼 임학의 상태를 보기 위해 진산군 댁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승이 임학의 맥을 짚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스승님, 어떻습니까?”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독은 이미 다 해독되었고 맥도 안정적이오. 그래서 호흡도 고르고 안색도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졌소. 그런데 이상하오. 이쯤 되면 일어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김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진맥해보았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깨어나야 할 시점인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임학을 바라보며 스승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조심스레 물었다.“스승님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신가요?”그는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예전에 약왕곡 주인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이어졌다.“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면 아무리 육신이 다 나았다 해도 정신은 죽음의 문턱에 머물러 있다고 했소.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끌어내려 해도 본인이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는 뜻이오.”지금 임학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김단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까무잡잡한 피부와 앙상한 빰이 병사의 길을 걸었던 그의 지난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화려한 옷을 입고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듣던 진산군 댁의 장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왔다.“낭자, 잠시 이 아이를 봐주시오. 나는 약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 사이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그때 방 안 가득 흩어진 염주 구슬들이 소한의 뇌리를 스치자 비로소 자신의 감정이 격해졌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소한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소하에게 되물었다.“형님의 마음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그 말에 소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무슨 뜻이지?”그는 자신이 김단에게 품은 감정이 순수하다고 믿고 있었고 그녀를 향한 감정에 있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소한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최지습이 떠나기 전에는 김단에게 무관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왜 지금처럼 다정하게 행동하지 않은 겁니까?”소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친 감정은 당혹감이었다.소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자신감 있게 밀어붙였다.“제 앞에서는 공정한 경쟁이라며 정의로운 척은 혼자 다 하시더니 최지습 앞에서는 순순히 물러서더군요. 그 사람이 형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사랑하는 여인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겁니까?”그 순간 두 형제의 상황은 역전된 듯했다. 이제는 소한이 자신의 형을 질책하고 있었다.한참을 침묵하던 소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나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물러난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늦가을 바람처럼 서늘하면서도 깊숙이 마음을 두드리는 음색이었다.그가 물러선 이유는 분명했다.그녀가 최지습 곁에 있을 때 보여준 편안한 미소, 그가 펼쳐준 우산 아래에서 한 줄기 바람조차 닿지 않게 보호받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그래서 돌아선 것이다. 그녀는 이미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기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선택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자신이 생각한 최고의 선택이 어쩌면 그녀의 기준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자기 눈에는 최지습이 그녀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
김단은 결국 자신이 소한을 억울하게 몰아붙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어디 그뿐인가?단순한 오해를 넘어 소한에게 상처가 되는 말까지 퍼부었다.소한이 화를 내며 떠났던 그 모습이 떠오르자 김단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소하 역시 그녀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음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소?”김단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소한을 오해한 일을 조심스레 소하에게 털어놓았다.“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그 염주를 차고 있는 걸 보자마자 괜히 화가 치밀어서 그만...”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가 묻어났다.하지만 소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그녀가 그렇게 격하게 반응했던 건 단지 염주 때문만은 아니었다.소한이 이전에 저지른 일들로 인해 김단은 그를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소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한이는 그리 속 좁은 사람 아니오. 내일쯤 되면 금세 풀릴 것이오.”그 말에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소하는 그녀가 평양관저의 마차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안심하고 돌아섰다.그가 집에 도착하자 겸인이 반갑게 그를 맞이해 주었다.“큰 도련님, 오늘 일찍 돌아오셨군요. 마침 작은 도련님께서도 일찍 귀가하셨습니다. 부엌에는 이미 저녁을 준비해 두었으니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실 수 있겠네요.”소가는 형제가 서로 다른 곳에서 근무하다 보니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일이 드물었다.소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겸인에게 물어보았다.“한이도 돌아왔느냐?”“네. 작은 도련님께서는 아침부터 집에 계셨습니다.”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소한의 거처로 향했다.소한은 마당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그의 검놀림은 예사롭지 않았고 검끝에는 분노가 서려있었다.소하는 그의 감정이 격앙되어 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소하의 기척을 눈치챈 소한은 말도 없이 검을 들어 그에게 달려들었다.소하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옆에 있던 검집을 들어 소한의 공격을 막아냈다.두 사람은 한참
김단은 다시금 임학의 침상 곁에서 반 시진 가량 머문 뒤 자리를 떴다.곧장 궐로 향하지 않고 평양관저로 돌아가 도령님들한테 해독약을 건넸다.“이런 흉악한 놈들, 온갖 비열한 수를 다 써대는군!”다섯 번째 도령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일곱 번째 도령은 김단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원래는 며칠 더 머물 생각이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서둘러 떠나야겠소.”김단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그러자 이번에는 다섯 번째 도령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궐에서 일어난 일은 다 들었소. 서원공주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오. 낭자가 참을 수 있으면 참으시오. 나중에 원군님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해결해 줄 것이오.”그제야 김단은 그들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걱정 마세요, 도령님들. 명심하겠습니다.”“그래, 스스로 조심하시오.”두 사람은 다시 몇 마디 당부를 덧붙인 뒤 서둘러 길을 떠났다.김단은 그들을 배웅한 후 궐에 들어갈 채비를 마쳤다.전하를 알현하고 중전의 진맥을 끝마친 뒤 마지막으로 전하의 명에 따라 서아름을 찾아갔다.그렇게 모든 일을 끝내고 내의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김단이 그제야 숨을 돌리며 물 한 모금 마시려는 찰나, 소하를 마주쳤다.피로에 지친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오라버니!”소하의 눈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근무를 마쳤소? 그럼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도록 하지.”“네! 이제 끝났습니다.”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소하에게 다가갔다.“오라버니도 이제 끝난 겁니까?”하지만 소하는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낭자 오라버니의 일은 들었소. 상태는 좀 어떻소?”김단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임학의 상태를 설명했다.소하는 줄곧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김단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요즘 낭자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소.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자신부터 돌보아야 하지 않겠소?”그 말에 김단은 걸음을
김단은 자신에게 빈 그릇을 건네주는 소한의 손을 보자마자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그녀는 그릇을 받는 대신 그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도련님, 정말 뻔뻔하시네요. 제가 소하 오라버니한테 준 염주가 왜 도련님 손목에 있는 겁니까?”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의심이 가득했다.그 염주는 분명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소하가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었다.소한은 그제야 김단이 자신의 손목 위로 드러난 염주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형이 나한테 준 것이오.”그러나 김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 없습니다.”소하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절대 다른 이에게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김단은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강한 부정에 소한의 얼굴에도 서서히 분노가 번졌다.그는 김단의 손에 붙잡힌 채 한 걸음씩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낭자가 준 물건이 싫어서 나한테 준 걸 수도 있지 않소?”김단은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면서도 눈빛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오라버니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소한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형을 그렇게 믿는 이유가 무엇이오? 형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강하면서 왜 나에 대한 믿음은 하나도 없는 것이오?”“이건 도련님께서 훔쳤거나 억지로 빼앗은 걸 겁니다. 오라버니께서 그냥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훔쳤다, 빼앗았다...김단이 그 단어들을 말하는 순간 소한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그의 음성도 깊은 어둠처럼 낮고 차가웠다.“낭자의 눈에는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되는 놈이었소?”그는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그럼 형은? 형은 바른 사람이고 나는 못 믿을 인간이란 말이오? 대체 왜 나한테만 그렇게 모질게 구는 것이오?”소한의 눈에는 억울함과 함께 짙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믿느냐는 소한의 물음에 김단은 확실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그녀도 자신의 직감만으로 내뱉
김단은 약을 들고 돌아가는 내내 최지습과 호랑이군 도령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만약 돌궐인들이 무기마다 독을 발랐다면 한양 병사들이 그 칼에 맞았을 경우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아 목숨을 잃을 수 있을 것이다.김단은 그들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그녀는 평양관저로 돌아가면 다섯 번째 도령과 일곱 번째 도령에게 스승님이 연구해낸 해독약을 전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임학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게 되었다.방 안을 지키고 있던 이는 하인이 아니라 바로 소한이었다.“도련님께서 왜 여기에?”김단은 무의식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소한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임학이 중상을 입고 한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임학의 오랜 친구로서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소?”그럴듯한 말이었다. 김단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발걸음을 옮겨 임학의 곁으로 다가갔다.“돌궐인의 칼에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도련님의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일 겁니다.”소한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그는 조용히 이를 악물며 말했다.“돌궐놈들의 수법은 늘 잔인하오. 평양원군도 고전하겠군.”소한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돌궐인들과의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기에 평양원군이 같은 위험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다행히 해독약이 있어 도령님들에게 전해주려고요.”소한은 김단이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못마땅해 났다.“서로 안 지 몇 달밖에 안 됐는데 도령님이라니, 꽤 다정하군.”정작 자신의 친 오라버니는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그러나 이 투정 섞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괜히 말했다가 김단에게 쫓겨날까 두려웠던 것이다.김단은 그를 흘겨보더니 침상 옆에 앉아 임학에게 약을 먹이려 했다.그러자 소한이 황급히 나섰다.“내가 하겠소.”그는 오늘 김단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그녀에게
이윽고 김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스승님은 지금 귀식환을 연구 중이고 이후에는 통증 완화제까지 만들어야 했기에 시간이 촉박할 것이다.김단은 그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녀는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웠다.맹영지, 서아름, 소 도련님...거기에 서원공주까지 경계해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그런 와중에 임학까지 다쳤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모든 일이 한꺼번에 밀려드니 그녀로써는 혼자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단아...”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김단은 깜짝 놀라 임학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착각이었던 것일까?김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임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단아, 오라버니가 잘못했어...”미약한 소리였지만 조용한 방 안에서는 또렷이 들렸다.“내가 잘못했어.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단아...”김단은 임학이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아마도 슬픈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임학의 눈가에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뚝 떨어졌다.그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졌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오라버니가 널 믿지 못했어. 널 괴롭혀서 미안해... 다 내 잘못이다.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거라.”김단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꿈속에서조차 용서를 구하는 임학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오라버니가 목숨으로 갚을게… 그러니 날 외면하지 말거라. 단아, 제발…”그의 목소리는 다급해졌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술마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김단은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즉시 다가가 확인했다. 그러자 그의 복부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재
이튿날 아침 김단은 일찍이 진산군 댁으로 향했다.단순히 임학의 상태를 살피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지금 진산군 댁에는 의원 한 사람만이 남아 임학을 돌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의원의 의술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신중해서 나쁠 것 없으니 김단은 한동안 진산군 댁에 머물며 임학을 돌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임학이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은 명의의 제자인 김단이 그를 치료했다고 믿을 것이다.김단이 방에 들어섰을 때 진산군은 아직 깨어 있지 않았다.그는 밤새 임학의 곁을 지키며 불안 속에서 밤을 지새우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잠시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김단은 조용히 침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그의 희끗한 머리카락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그 모습을 본 김단의 마음은 저릿하게 무거워졌다.하룻밤 사이에 그의 흰 머리카락은 어젯밤보다 더욱 늘어난 것 같았다.최근 진산군 댁에 닥친 연이은 사건들이 그를 이렇게 지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한때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던 그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다.김단은 문득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그녀는 할머니 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산군과 손바닥을 세 번 맞대며 가족의 연을 끊어버렸다.그때까지만 해도 진산군의 머리는 검은빛이 감돌았다.김단은 가슴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지난 기억들을 떨쳐내려 애썼다.그러고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대감님.”진산군은 잠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는지 그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그러다 눈앞에 김단의 모습이 보이자 그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묻어났다.“대감님, 여기는 제가 지킬 테니 이제 좀 쉬세요.”김단은 부드럽게 얘기했다.지금 이 집에서 몸이 성한 사람은 오직 진산군 한 사람뿐이었다. 만약 그마저도 병이 난다면 진산군 댁은 진짜 무너지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