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해봐야 알 것 아니냐!”김단은 치료할 방법이 생겼으니, 섣불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서책의 침 치료는 약왕곽의 것이 분명하다.그렇기에 의원이 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준 것이다.의원에게 빚진 은혜를 복수로 갚아서는 안 된다. 더하여 의원의 신분도 지켜야만 한다.김단은 침을 놓을 줄 모른다.허나, 배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적어도 다른 의원을 찾아 배우면 되는 것이다.그 다음, 서책에 적힌 방법 대로 시도하면 된다.어차피 삼 년이나 남지 않았는 가.잠시 뒤, 두 사람은 찻집을 나갔다.혼인을 하고 김단은 관저를 나온 적이 없었다.더하여 오랜만의 외출이라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숙희를 데리고 거리를 돌아다녔다.날씨가 좋은 덕에 거리도 시끌벅적했다.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익숙한 그림자가 김단의 눈에 들어왔다.다름 아닌 구서였다.구서는 그녀에 의해 한 쪽 눈이 실명되었다.오늘날 그의 오른쪽 눈가는 움푹 들어가 흉측했다.한 쪽 눈을 실명한 탓일까.구서는 김단을 보지 못하고 옆에 있던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아직 오찬을 먹으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아무래도 아침 일찍 술을 마시러 온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잠시 생각하다가 김단은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어차피 귀한 가문에서 방탕하게 산 놈들은,먹고 자고 싸는 것 밖에 모르지 않는가.이때, 숙희가 옷 소매를 당겼다.“아씨, 저 분은 작은 아씨가 아니옵니까?”김단은 숙희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임원이었다.이상한 점은 임원이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옆에 있는 몸종 영희도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만약 그들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내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두 사람은 이리저리 살펴보며,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마치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 두려워 보였다.상황을 보고 김단이 숙희를 잡았다.그리고 거리에서 물건을 고르는 시늉을 했다.임원은 다급한 마음에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그들을 지나쳐 영희와
두 사람은 소 씨 가문 관저로 돌아왔다.김단은 소하에게 자신이 다리를 직접 치료하겠다 이야기했다.“허나, 배우는 것이 늦을 지도 모르옵니다. 하물며 서책이 한 권이라, 서방님께서 믿지 않을 수도 있사옵니다.”김단은 서책을 소하에게 건네주었다.그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소하가 서책을 펼쳤다.그도 알아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책 안에는 글뿐만 아닌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이해의 도움을 돕기 위한 작가의 정성이 보였다.눈에 띄게 줄어든 고통에 소하는 한번도 보지 못하고, 성명도 모르는 의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이때, 이각이 입을 열었다.“서책이 있다면 관저의 의원을 불러,시도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아씨는 복덩어리가 맞다.소 씨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도련님을 괴롭혔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게 해주었다.허나, 아씨도 침을 놓을 줄 모르지 않는가.막무가내로 시도를 할 수는 없다.김단은 이각의 생각을 미리 예상했었다.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사실 의원 분께서 말씀 하시 길, 의술을 밖으로 세어 나가지 않게 신신당부하셨소. 내가 배우면 서방님의 다리를 고치는 것뿐이요. 허나, 다른 의원이 의술을 배워간다면...”김단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소하가 중간에 끼어 들었다.“알겠소, 나도 해보고 싶네.”그는 말하는 도중에 서책을 김단에게 건네주었다.준수한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그날 낭자의 말처럼, 결코 상황이 나빠질 거라 생각하지 않소.”그의 하반신은 이미 마비되었다.김단이 치료를 잘못하여도 결국 마비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소하의 빠른 대답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반응이 제일 큰 사람은 이각이었다.“큰 도련님! 아씨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사옵니까!”“아무것도 모른다고 누가 그럽니까!”숙희가 김단의 옆에서 이각을 노려 보았다.“우리 아씨가 십자수를 얼마나 잘하시는지 아시오?”이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게 어떻게 같소? 우리 도련님의
숙희가 자신의 머리를 찰싹 때렸다.“아, 깜빡했다! 지금 가겠소!”덜렁거리는 숙희의 모습에 이각은 고개를 저었다.“도련님, 아씨, 노비가 가서 돕겠나이다.”그리고 숙희를 따라 나갔다.이각의 뒷모습을 보며, 소하는 웃음을 터뜨렸다.“소 씨 집안에서 이각이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당한 적은 없었소, 낭자의 몸종이 처음이네.”김단의 시선도 숙희의 뒷모습을 향했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숙희는 제가 부당한 일을 당할까 두려운 것이옵니다.”진산군 관저에 있을 때, 숙희는 항상 나서서 김단을 지켜 주곤 했다.그녀는 김단의 유일한 빛이다.숙희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추억이 뇌리에 스쳤다.김단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저 아이를 만난 것은, 제 평생의 행운 이옵니다.”소하는 자신도 모르게 김단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그는 김단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그녀를 만난 것도 그의 평생의 행운이라고, 말이다.하지만 남사스러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이때, 김단이 고개를 돌려 소하를 바라보았다.방금 온화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소하 오라버니께 말씀 드려야 할 일이 있사옵니다. 저와 숙희가 관저로 돌아오는 길에, 구서와 임원을 마주쳤나이다.”구서와 임원?소하가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소하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김단이 말을 이었다.“같이 이동하지 않았으나, 같은 주점에 들어갔나이다. 더하여 임원과 그녀의 몸종은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 같사옵니다.”소하의 표정이 굳어졌다.“두 사람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김단이 고개를 끄덕였다.“저와 구서의 일은 소하 오라버니께서 아실 터, 제가 그놈의 눈 한쪽을 실명시켰나이다. 분명 제게 원한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임원은... 구서와 엮일 정도로 질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옵니다. 하지만 진정 구서와 무언가를 꾸
임원이 돌아왔을 때는 김단, 소하 그리고 소 씨 부인이 대청에 모여있었다.그들은 소하의 다리 치료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임원의 등장에 김단과 소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아챘다.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임원의 안색도 평소와 같았다.마치 잠시 외출을 하다가 돌아 온 모습이었다.허나, 그의 몸종은 한층 겁을 먹은 모습이다.김단과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몸종의 행동에 김단과 소하는 확신을 내렸다.임원은 구서를 만나기 위해 주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소 씨 부인은 임원을 보고 기뻐했다.그리고 손을 저어보였다.“원아, 어서 오거라!”임원은 그제야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녀는 소 씨 부인에게 예의를 차렸다.“어머님께서 무슨 일 있으시옵니까?”소 씨 부인은 임원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김단을 가리키며 말했다.“네 처형이 말하기를, 명의 하나가 네 매형의 다리를 고쳐 주려 한다고 하더군.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소 씨 부인은 임원이 그들을 말리기를 원했다.하지만 임원은 깜짝 놀랄 뿐 이었다.“명의 라니요?”그녀는 진산군 관저의 의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저 두통과 발열을 고쳐 주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조모의 치료에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죽었지 않았는 가.그러니 임원은 의원이 높은 의술을 가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허나, 김단이 이런 의견을 낼 줄은 몰랐다.소하의 질병은 내의원이 모여서도 해결할 수 없었다.의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김단이 어찌 치료를 할 수 있는가.임원은 김단을 위아래로 훑었다.어쩌면 며칠 전에 소 씨 부인 앞에서 총애를 잃고, 소하를 이용하여 이런 수를 쓰는 것일 지 모른다.임원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그리고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누이..처형이 아시는 명의가 누구신지요? 이름이 무엇이고, 거처가 어찌 되십니까? 제가 서방님께 조사해보라, 하겠사옵니다. 그러하면 어머님도 안심하실 수 있겠나이다.”소 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소 씨 부인에게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어머니께 사실대로 고하자면, 제가 서방님을 치료한 적이 있사옵니다.서방님께서는 어머니께서 염려하실 까 싶어, 이 자리를 마련하여 알려 드렸나이다.”김단은 말하면서 임원을 바라보았다.“제수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속상하옵니다.”임원의 얼굴이 굳어졌다.혹여 소 씨 부인에게 자신의 속셈을 들킬 까 두려웠다.“저,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사옵니다.”하지만 소 씨 부인은 임원을 보지도 않았다.그저 눈을 크게 뜨고 소하에게 물어보았다.“그것이 사실이냐?”소하의 차가운 눈빛에 다정함이 묻어났다.“혹여 어머니를 속상하게 만들었다면,부디 저를 꾸짖어 주시옵소서.”오 년 동안, 소하는 자신을 가두기 급급했다.대화는 물론이고, 어머니 또는 아버지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소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 씨 부인은 마음이 녹아내렸다.임원의 손을 놓고는 서둘러 소하의 앞으로 다가갔다.소하의 손을 잡자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못난 놈. 너는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다. 어미가 어찌 네 뜻을 몰랐겠느냐.”방금 임원의 말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새파랗게 질린 임원의 얼굴을 보자,김단은 웃음이 나오려했다.소하가 고개를 들어 소 씨 부인을 바라보았다.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다행이옵니다.”소 씨 부인은 더 가까이 다가갔다.그녀는 소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보아하니, 네 얼굴이 훨씬 좋아졌구나.”다리를 치료했을 뿐이다.허나 발작에 느끼는 고통이 줄어들었기에, 수면과 식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동시에 안색도 며칠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눈에 보일 만큼 혈색이 돌았다.소하가 대답했다.“다 단이 덕분이옵니다.”소 씨 부인은 소하가 김단을 위해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다.허나 마음 한켠에는 걱정이 떨쳐 지지 않았다.“아니면 아버지께서 돌아오시고…”“어머니께서는 저를 믿으시지요?”소 씨 부인을 바라보는 소하의 눈이 반짝거렸다.소 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소하는 걱
임원은 침실로 돌아갔다.그녀는 영희가 방문을 닫자마자 가슴속에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렸다. “방금 그 여자 표정 봤느냐? 분명 고의로 그런 것이다!”영희도 임원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 “큰 아씨께서 아무리 어릴 때부터 무술을 배우셨다 해도 겨우 겉핥기 수준일 텐데, 거기다 갑자기 큰 도련님을 치료하시겠다니요? 그 정도 실력으로 제대로 치료하실 수 있겠어요?”“일부러 시어머니 앞에서 착하고 사려 깊은 척하는 게지!” 임원은 말하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와 안주인 자리를 놓고 경쟁하려는 것이다!”오랜 시간이 지나, 김단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그녀가 진산군 댁에 있을 때는 남이 듣기 좋은 말만 하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었다.하지만 소 씨 가문에 오자마자 소한을 빼앗고, 이제는 소 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까지 넘보려 한다!재수 없는 것!임원은 분노에 휩싸여 눈시울이 붉어졌다.영희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모시는 아씨가 수모를 겪는 걸 안타까워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아가씨, 구 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과는...”“입 다물 거라!” 임원은 영희를 제지하며 무의식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비록 지금 방문이 굳게 닫혀 있고 영희도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두려웠다.영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임원의 감정도 점차 진정되었고, 이내 탁자의 모서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한편, 김단은 소씨 부인의 지지를 얻은 후 소씨 가문의 전담 어의인 유 대인을 찾아가 침술의 기본을 배우기 시작했다.유 대인은 매우 세심하게 가르쳤고 김단도 열심히 배웠다. 그녀는 단 이틀 만에 가장 기본적인 침 놓는 법과 염증 완화 기술을 익혔다.하지만 배우는 것과 숙달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유 대인은 김단에게 매일 주방에 큰 돼지고기 덩어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김단은 돼지고기에 침을 놓는 연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연습했는데 어찌 실패할 수 있겠는가?김단의 두 눈은 열댓 개의 은침에 고정되어 있었고, 강렬한 성취감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녀는 기뻐하며 말했다. “유 대인에게 가봐야겠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황급히 방을 나섰다.당연하게도 그녀는 소하의 빛나는 눈동자가 온통 자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보지 못했다.그녀의 노력의 결과는 당연하게도 유 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그렇게 침술 학습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바로 사람에게 침을 놓아보는 것이었다.소씨 부인은 한 번에 은 열 냥이라는 높은 가격으로 하인들을 고용해 침을 놓아보게 했다.은 열 냥은 하인들의 일 년치 품삯과 같았다. 순식간에 지원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소하의 정원도 오랜만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소하는 이런 북적거림을 싫어했기에 방 안에서 이각과 바둑을 두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비명 소리가 소씨 저택 전체에 울려 퍼졌다.소하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황급히 문을 나섰고, 이내 다리를 절뚝거리며 밖으로 도망치는 하인 한 명을 보았다. 마치 붙잡혀 돌아갈까 봐 두려워 서둘러 도망치는 것 같았다.옆에 서서 기다리던 다른 하인들도 눈만 끔뻑거리며 두려움에 떨었다.용감한 하인 하나가 물었다. “큰 며늘 아씨, 바, 방금 제대로 놓으신 거 맞으신지요?”김단은 의서에 나온 혈자리를 비교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정확하네.”그러면서 뒤에 줄 서 있는 하인들을 힐끗 보고 말했다. “부르기 전에 말하였 듯, 이번 침술은 큰 도련님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네. 모든 침은 다리의 혈자리를 자극해야 하므로 통증이 남다를 것이야. 방금 보았듯이,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빨리 가시게.”의원이 준 의서에는 해당 침술이 매우 고통스럽다고 명백히 쓰여 있었다. 하물며 그녀는 지금 시험 삼아 침을 놓는 것이었고, 각 혈자리의 깊이와 침을 놓는 힘도 다르며, 어떻게 혈자리를 제대로 자극
그러나 잠시 뒤, 그가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다섯 번째 침이 놓아 지기도 전에 이각은 아파서 기절했다.그러자 숙희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이 침술이 정말 맞는 건가요?”김단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황급히 이각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모두 회수하고 소하를 보며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내일 다시 의원을 찾아가 여쭤보겠습니다!”그녀는 말을 마치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방문이 닫혔고, 이내 엄청난 좌절감이 밀려왔다.김단은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앞에 놓인 몇 개의 은침을 바라보며 우울한 기분에 빠졌다.빨리 침술만 배우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줄 알았다.그런데 첫날 시험 삼아 침을 놓은 것이 이정도로 실패할 줄은 몰랐다.은침 네댓 개를 부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열댓 명의 하인 중 단 한 명조차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이각조차 소하를 위해 참으려 애썼지만, 다섯 번째 침도 채 놓기 전에 고통스러워하며 기절했다.이런 식이면 그녀가 어떻게 숙달할 수 있겠나?소하의 다리에 직접 시험해 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소하가 통증이 없을 때는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혈자리를 제대로 자극했는지 알기 위해선 시험자의 의견이 필요하다!지금 그녀에게 의견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아파서 기절하거나 도망친 사람들뿐이었다.도망갈 수 없었던 사람들마저도 아무런 의견을 줄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았고, 물러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소하의 다리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눈앞에 보이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김단은 자신 스스로를 격려했다.그녀는 내일 다시 의원을 찾아가 이런 식으로 침을 놓는 것이 정말로 사람을 기절시킬 정도로 아픈 것인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김단은 숙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그러다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큰 아가씨, 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소 아가씨? 소정원을 그러는 것일까? 김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김단은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고 마당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경쟁자였던 소정원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임학 때문일 것이다. 김단은 조심스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사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오라버니들이 말리셨습니다. 임학 도련님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제가 와봤자 방해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에야...”그녀는 말을 흐리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임학 도련님은… 지금은 어떠세요?”김단은 살짝 웃으며 얘기했다.“맥박은 안정되었고 상처도 서서히 아물고 있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깨어나질 않소.”그 말을 들은 소정원의 이마가 즉시 찌푸려졌다. 김단은 그녀가 임학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김단은 부드럽게 말했다.“도련님을 좀 봐주시오. 나는 물 한 잔 가져오겠소.”김단이 찻잔을 들고 물을 따르는 순간 소정원의 외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김단 낭자! 어서 와서 보세요!”갑작스럽게 들리는 큰 목소리에 김단은 놀라 물을 흘리고 말았다.하지만 김단은 물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황급히 침대 옆으로 뛰어갔다.김단은 임학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았다.하지만 소정원은 임학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보세요. 도련님께서 울고 계십니다.”임학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김단은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자신이 했던 말은 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의 눈물을 보니 어쩌면 김단이 방금 전에 했던 모든 말들, 즉 그를 향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들이 그의 가슴을 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나
그는 소한의 거침없는 기질이 가끔 부러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할까?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자신이 소한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소한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삼일 뒤, 김단은 평소처럼 임학의 상태를 보기 위해 진산군 댁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승이 임학의 맥을 짚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스승님, 어떻습니까?”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독은 이미 다 해독되었고 맥도 안정적이오. 그래서 호흡도 고르고 안색도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졌소. 그런데 이상하오. 이쯤 되면 일어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김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진맥해보았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깨어나야 할 시점인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임학을 바라보며 스승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조심스레 물었다.“스승님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신가요?”그는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예전에 약왕곡 주인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이어졌다.“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면 아무리 육신이 다 나았다 해도 정신은 죽음의 문턱에 머물러 있다고 했소.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끌어내려 해도 본인이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는 뜻이오.”지금 임학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김단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까무잡잡한 피부와 앙상한 빰이 병사의 길을 걸었던 그의 지난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화려한 옷을 입고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듣던 진산군 댁의 장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왔다.“낭자, 잠시 이 아이를 봐주시오. 나는 약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 사이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그때 방 안 가득 흩어진 염주 구슬들이 소한의 뇌리를 스치자 비로소 자신의 감정이 격해졌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소한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소하에게 되물었다.“형님의 마음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그 말에 소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무슨 뜻이지?”그는 자신이 김단에게 품은 감정이 순수하다고 믿고 있었고 그녀를 향한 감정에 있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소한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최지습이 떠나기 전에는 김단에게 무관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왜 지금처럼 다정하게 행동하지 않은 겁니까?”소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친 감정은 당혹감이었다.소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자신감 있게 밀어붙였다.“제 앞에서는 공정한 경쟁이라며 정의로운 척은 혼자 다 하시더니 최지습 앞에서는 순순히 물러서더군요. 그 사람이 형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사랑하는 여인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겁니까?”그 순간 두 형제의 상황은 역전된 듯했다. 이제는 소한이 자신의 형을 질책하고 있었다.한참을 침묵하던 소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나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물러난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늦가을 바람처럼 서늘하면서도 깊숙이 마음을 두드리는 음색이었다.그가 물러선 이유는 분명했다.그녀가 최지습 곁에 있을 때 보여준 편안한 미소, 그가 펼쳐준 우산 아래에서 한 줄기 바람조차 닿지 않게 보호받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그래서 돌아선 것이다. 그녀는 이미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기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선택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자신이 생각한 최고의 선택이 어쩌면 그녀의 기준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자기 눈에는 최지습이 그녀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
김단은 결국 자신이 소한을 억울하게 몰아붙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어디 그뿐인가?단순한 오해를 넘어 소한에게 상처가 되는 말까지 퍼부었다.소한이 화를 내며 떠났던 그 모습이 떠오르자 김단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소하 역시 그녀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음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소?”김단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소한을 오해한 일을 조심스레 소하에게 털어놓았다.“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그 염주를 차고 있는 걸 보자마자 괜히 화가 치밀어서 그만...”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가 묻어났다.하지만 소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그녀가 그렇게 격하게 반응했던 건 단지 염주 때문만은 아니었다.소한이 이전에 저지른 일들로 인해 김단은 그를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소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한이는 그리 속 좁은 사람 아니오. 내일쯤 되면 금세 풀릴 것이오.”그 말에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소하는 그녀가 평양관저의 마차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안심하고 돌아섰다.그가 집에 도착하자 겸인이 반갑게 그를 맞이해 주었다.“큰 도련님, 오늘 일찍 돌아오셨군요. 마침 작은 도련님께서도 일찍 귀가하셨습니다. 부엌에는 이미 저녁을 준비해 두었으니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실 수 있겠네요.”소가는 형제가 서로 다른 곳에서 근무하다 보니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일이 드물었다.소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겸인에게 물어보았다.“한이도 돌아왔느냐?”“네. 작은 도련님께서는 아침부터 집에 계셨습니다.”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소한의 거처로 향했다.소한은 마당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그의 검놀림은 예사롭지 않았고 검끝에는 분노가 서려있었다.소하는 그의 감정이 격앙되어 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소하의 기척을 눈치챈 소한은 말도 없이 검을 들어 그에게 달려들었다.소하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옆에 있던 검집을 들어 소한의 공격을 막아냈다.두 사람은 한참
김단은 다시금 임학의 침상 곁에서 반 시진 가량 머문 뒤 자리를 떴다.곧장 궐로 향하지 않고 평양관저로 돌아가 도령님들한테 해독약을 건넸다.“이런 흉악한 놈들, 온갖 비열한 수를 다 써대는군!”다섯 번째 도령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일곱 번째 도령은 김단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원래는 며칠 더 머물 생각이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서둘러 떠나야겠소.”김단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그러자 이번에는 다섯 번째 도령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궐에서 일어난 일은 다 들었소. 서원공주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오. 낭자가 참을 수 있으면 참으시오. 나중에 원군님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해결해 줄 것이오.”그제야 김단은 그들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걱정 마세요, 도령님들. 명심하겠습니다.”“그래, 스스로 조심하시오.”두 사람은 다시 몇 마디 당부를 덧붙인 뒤 서둘러 길을 떠났다.김단은 그들을 배웅한 후 궐에 들어갈 채비를 마쳤다.전하를 알현하고 중전의 진맥을 끝마친 뒤 마지막으로 전하의 명에 따라 서아름을 찾아갔다.그렇게 모든 일을 끝내고 내의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김단이 그제야 숨을 돌리며 물 한 모금 마시려는 찰나, 소하를 마주쳤다.피로에 지친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오라버니!”소하의 눈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근무를 마쳤소? 그럼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도록 하지.”“네! 이제 끝났습니다.”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소하에게 다가갔다.“오라버니도 이제 끝난 겁니까?”하지만 소하는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낭자 오라버니의 일은 들었소. 상태는 좀 어떻소?”김단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임학의 상태를 설명했다.소하는 줄곧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김단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요즘 낭자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소.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자신부터 돌보아야 하지 않겠소?”그 말에 김단은 걸음을
김단은 자신에게 빈 그릇을 건네주는 소한의 손을 보자마자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그녀는 그릇을 받는 대신 그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도련님, 정말 뻔뻔하시네요. 제가 소하 오라버니한테 준 염주가 왜 도련님 손목에 있는 겁니까?”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의심이 가득했다.그 염주는 분명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소하가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었다.소한은 그제야 김단이 자신의 손목 위로 드러난 염주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형이 나한테 준 것이오.”그러나 김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 없습니다.”소하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절대 다른 이에게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김단은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강한 부정에 소한의 얼굴에도 서서히 분노가 번졌다.그는 김단의 손에 붙잡힌 채 한 걸음씩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낭자가 준 물건이 싫어서 나한테 준 걸 수도 있지 않소?”김단은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면서도 눈빛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오라버니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소한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형을 그렇게 믿는 이유가 무엇이오? 형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강하면서 왜 나에 대한 믿음은 하나도 없는 것이오?”“이건 도련님께서 훔쳤거나 억지로 빼앗은 걸 겁니다. 오라버니께서 그냥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훔쳤다, 빼앗았다...김단이 그 단어들을 말하는 순간 소한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그의 음성도 깊은 어둠처럼 낮고 차가웠다.“낭자의 눈에는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되는 놈이었소?”그는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그럼 형은? 형은 바른 사람이고 나는 못 믿을 인간이란 말이오? 대체 왜 나한테만 그렇게 모질게 구는 것이오?”소한의 눈에는 억울함과 함께 짙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믿느냐는 소한의 물음에 김단은 확실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그녀도 자신의 직감만으로 내뱉
김단은 약을 들고 돌아가는 내내 최지습과 호랑이군 도령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만약 돌궐인들이 무기마다 독을 발랐다면 한양 병사들이 그 칼에 맞았을 경우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아 목숨을 잃을 수 있을 것이다.김단은 그들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그녀는 평양관저로 돌아가면 다섯 번째 도령과 일곱 번째 도령에게 스승님이 연구해낸 해독약을 전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임학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게 되었다.방 안을 지키고 있던 이는 하인이 아니라 바로 소한이었다.“도련님께서 왜 여기에?”김단은 무의식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소한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임학이 중상을 입고 한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임학의 오랜 친구로서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소?”그럴듯한 말이었다. 김단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발걸음을 옮겨 임학의 곁으로 다가갔다.“돌궐인의 칼에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도련님의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일 겁니다.”소한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그는 조용히 이를 악물며 말했다.“돌궐놈들의 수법은 늘 잔인하오. 평양원군도 고전하겠군.”소한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돌궐인들과의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기에 평양원군이 같은 위험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다행히 해독약이 있어 도령님들에게 전해주려고요.”소한은 김단이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못마땅해 났다.“서로 안 지 몇 달밖에 안 됐는데 도령님이라니, 꽤 다정하군.”정작 자신의 친 오라버니는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그러나 이 투정 섞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괜히 말했다가 김단에게 쫓겨날까 두려웠던 것이다.김단은 그를 흘겨보더니 침상 옆에 앉아 임학에게 약을 먹이려 했다.그러자 소한이 황급히 나섰다.“내가 하겠소.”그는 오늘 김단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그녀에게
이윽고 김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스승님은 지금 귀식환을 연구 중이고 이후에는 통증 완화제까지 만들어야 했기에 시간이 촉박할 것이다.김단은 그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녀는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웠다.맹영지, 서아름, 소 도련님...거기에 서원공주까지 경계해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그런 와중에 임학까지 다쳤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모든 일이 한꺼번에 밀려드니 그녀로써는 혼자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단아...”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김단은 깜짝 놀라 임학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착각이었던 것일까?김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임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단아, 오라버니가 잘못했어...”미약한 소리였지만 조용한 방 안에서는 또렷이 들렸다.“내가 잘못했어.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단아...”김단은 임학이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아마도 슬픈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임학의 눈가에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뚝 떨어졌다.그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졌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오라버니가 널 믿지 못했어. 널 괴롭혀서 미안해... 다 내 잘못이다.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거라.”김단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꿈속에서조차 용서를 구하는 임학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오라버니가 목숨으로 갚을게… 그러니 날 외면하지 말거라. 단아, 제발…”그의 목소리는 다급해졌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술마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김단은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즉시 다가가 확인했다. 그러자 그의 복부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재
이튿날 아침 김단은 일찍이 진산군 댁으로 향했다.단순히 임학의 상태를 살피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지금 진산군 댁에는 의원 한 사람만이 남아 임학을 돌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의원의 의술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신중해서 나쁠 것 없으니 김단은 한동안 진산군 댁에 머물며 임학을 돌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임학이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은 명의의 제자인 김단이 그를 치료했다고 믿을 것이다.김단이 방에 들어섰을 때 진산군은 아직 깨어 있지 않았다.그는 밤새 임학의 곁을 지키며 불안 속에서 밤을 지새우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잠시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김단은 조용히 침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그의 희끗한 머리카락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그 모습을 본 김단의 마음은 저릿하게 무거워졌다.하룻밤 사이에 그의 흰 머리카락은 어젯밤보다 더욱 늘어난 것 같았다.최근 진산군 댁에 닥친 연이은 사건들이 그를 이렇게 지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한때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던 그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다.김단은 문득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그녀는 할머니 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산군과 손바닥을 세 번 맞대며 가족의 연을 끊어버렸다.그때까지만 해도 진산군의 머리는 검은빛이 감돌았다.김단은 가슴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지난 기억들을 떨쳐내려 애썼다.그러고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대감님.”진산군은 잠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는지 그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그러다 눈앞에 김단의 모습이 보이자 그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묻어났다.“대감님, 여기는 제가 지킬 테니 이제 좀 쉬세요.”김단은 부드럽게 얘기했다.지금 이 집에서 몸이 성한 사람은 오직 진산군 한 사람뿐이었다. 만약 그마저도 병이 난다면 진산군 댁은 진짜 무너지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