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얼굴을 찌푸렸고,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오늘 일은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네 혼인 상대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내 반드시 그리 할 것이다. 네가 나를 오라버니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나는 널 줄곧 누이동생처럼 여겨왔다. 절대 너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무력한 남자에게 시집보낼 수 없어!”임학의 말을 들은 김단은 몇 번이나 웃음이 터질 뻔했다.그가 항상 그녀를 누이동생처럼 여겼다고?하지만 그가 한 행동들을 보면 어느 하나 오라버니로써 누이에게 해줘야 했던 것이 없지 않나?하지만 김단은 비슷한 말을 이미 많이 해왔기에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말한다 해도 임학의 성격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오늘 그 분께서는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는 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정암이 치명적인 공격을 대신 맞아주지 않았다면, 그녀가 지금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하지만 임학은 정암이 그다지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한과 나는 2층에서 뛰어내렸어! 오늘 정암이 없었더라도, 서씨 그 자식은 너에게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다!”임학은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게다가 오늘 그놈이 너를 구했다고 한들 어쩌라는 것이냐? 그놈이 다치게 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특히 구서는 정암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쯤 식은 죽 먹이란 말이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정암은 감옥에 갇혀 참형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아직도 그런 남자와 혼인을 하고 싶은 것이냐? 꿈 깨거라!”김단은 그 말을 듣고 놀라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 분은 단지 상해를 입힌 것일 뿐인데, 어찌 그 분을 참형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이렇게 초조하고 걱정하는 모습은 앞서 보여주었던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과는 극명하게 대조되었다.소한의 아래를 향하고 있던 시선이 순간 김단에게 향했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했다.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어 깨져버릴 듯했다.그녀는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마음이 없는 사람이 진심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겠나?김단이 아무 말이 없자, 옆에 있던 임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단아, 이 어미는 네가 예전 일 때문에 우리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정말 너를 위해서 한 일이란다! 정 종사관은 좋은 사람이야. 보통 집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좋은 신랑감이지. 하지만 너에게는 맞지 않단다.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단 말이다...”“그분이 저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집안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까?”김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임씨 부인의 말을 끊었다.임학은 마음이 저릿하며 곧장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김단,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다! 은혜 모르는 소리 하지 말거라!”걱정이라고?김단은 비웃으며 말했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그분에게 있고, 얼마든지 주실 수 있습니다.”그 말과 함께 김단은 임씨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고는 조소 가득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그분에게 없지요.”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권력, 그 두 글자였다.그들은 김단을 이 집안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집안의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다.정암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비웃음을 알아차렸다.임씨 부인은 화가 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진산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네 결혼은 내가 결정할 것이다! 너와 정암은 절대 결혼할 수 없어! 꿈도 꾸지 말거라!”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김단이 진산군보다 더 강경했다. “제가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저 모두에게 알리러 온 것이지, 동의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대감 마님, 잊지 마십시오. 앞으로 저희는 연을 끊을 것입니다.”어차피 연을 끊는다면, 그녀의 혼사는
임원은 계속해서 울면서 불쌍한 척을 했다. 아마도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는지, 임씨 부인은 마음이 약해져 결국 입을 열었다.“이 세상에 자신의 정절을 스스로 더럽히려는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 보아하니 원이가 억울하게 당한 것 같구나.”하지만 오히려 김단은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까 임씨 낭자께서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워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오늘 일이 사실이라면 임씨 가문 여러분은 분명 저를 비난하고 임씨 낭자를 옹호하며 소 장군님과의 혼인을 서둘렀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임씨낭자는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셈이겠지요.”김단은 이 말을 하며 시선을 임원에게 고정하였다.임원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하지만 김단은 비웃으며 가볍게 웃었다. “게다가 낭자는 이미 도련님께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도련님이 곧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진짜로 변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요.” “아니야!” 임원은 끝내 소리쳤다. 마치 김단의 말을 덮어버리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를 낸 것 같았다.하지만, 어떻게 덮을 수 있겠는가?그녀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그녀는 가장 가까이 있던 임학의 다리를 붙잡고 애걸복절했다. “오라버니, 저를 믿어주세요. 김씨 낭자가 말한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하지만,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임학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그녀를 위해 사람을 죽이지 않았나!늘어져 있던 손에 주먹 꽉 쥐었다.만약 평소였다면 임학은 주저 없이 임원을 일으켜 세웠겠지만, 오늘만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은 내가 직접 조사해 보겠다.”과연 그 거지들이 악의를 품었던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임원의 계략이었는지, 그는 확실히 밝혀낼 것이다.진산군 역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네 오라버니가 진상을 밝히기 전까지, 너는 매화당에 머물며 반성하도록 해라!”이 말을 들은 김단과 임원
그녀의 말은 둘을 위해서라면 언제까지고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는 뜻이었다.정암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동과 동시에 자격지심을 느꼈다.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그때 김단이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정암.”정암이 고개를 들자 김단은 인상을 찌푸린 채 정암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마세요. 나는 앞으로의 삶을 당신에게 의지할 겁니다. 당신이 자신을 잘 지켜야 나를 지킬 수 있어요.”정암은 깜짝 놀랐다. ‘앞으로의 삶을 당신에게 의지하겠다’라는 말이 그의 가슴에 무거운 짐처럼 내려앉았다.그가 머리를 다쳐서 그런지, 그는 김단이 그에게 청혼했을 때부터 모든 것이 모호하게 기억되며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그의 어깨에 얹는 순간, 그는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김단은 계속해서 말했다. “종사관님이 저를 걱정하여 서둘러 어린 거지를 찾으러 나간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종사관님을 걱정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종사관님이 저 때문에 다치셨습니다. 만약 거지를 찾는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정암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는 단지 그녀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행동이 정말 어리석었던 것 같았다.이에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군의관을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 김단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봤다. “아직도 농담할 기분이십니까?”정암은 그제야 웃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잘 할겠습니다!”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가 자신을 잘 지켜야 그녀의 남은 생을 지킬 수 있었다.정암의 눈빛 속 진심을 본 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얼른 들어가서 쉬시지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정암은 호방하게 대답하며 돌아서려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김단
하지만 김단은 소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별로 궁금해할 것 없습니다. 저는 그저 그분을 선택한 것뿐입니다. 소 장군님이 꼭 이유를 알고 싶으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저 점점 깊어진 것이라고.”그 말을 들은 소한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의 눈에도 서리가 내린 듯했다.점점 깊어졌다고?정말 절절한 사랑이군!하지만 정말 그녀가 서서히 사랑에 빠진 것이라면, 지금처럼 갑자기 정암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소한은 비웃으며 말했다. “김씨 낭자의 사랑은 정말 변덕스럽소!”그의 말투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김단은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소 장군님에 대한 저의 마음은 어린 시절의 어리석은 감정이었습니다. 소 장군님은 예전부터 저를 마음에 두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어째서 지금 이렇게까지 신경 쓰시는 겁니까?”김단이 그렇게 말하는데, 소한이 어찌 자신이 신경 쓰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그는 이를 악물고 싸늘한 표정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김씨 낭자, 농담하는 것이오? 나는 그저 김씨 낭자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고 싶어서 온 것이오. 이번 일은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김단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제 일에 소 장군님이 왜 이렇게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소 장군님께서 그렇게 심심하신 거라면 임씨 낭자를 얼른 신부로 맞이해 또 누군가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시지요.”소한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김단을 흘긋 보고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은 비록 임씨 낭자가 잘못했지만, 그 거지들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소.”소한은 임원이 돈을 주고 거지들에게 김단의 명예를 훼손하도록 시켰다기보다는, 거지들이 먼저 나쁜 마음을 먹었을 것이라고 믿었다.설령 거지들이 임학을 찾아갔다 해도, 임원은 임학이 언제 올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위험한 일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원래 겁이 많은
그녀는 임학이 아가씨에게 해를 입힐까 봐 정말 두려웠다.김단은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하지만 갑자기 숙희가 놀라 소리쳤다. “아가씨, 다치셨잖아요!”김단은 당황하여 말했다. “아닌데?”임학이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쳤겠는가?하지만 숙희가 김단의 왼손을 들어 올리자, 왼쪽 소매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피가 많이 묻었어요?” 숙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누구 피예요?”자신의 소매에 묻은 붉은 피를 보며, 김단의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아려왔다. “소 장군님의 피야.”그 말과 함께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소한이 이렇게 유치할 줄이야, 그녀도 처음 알았다.그는 정암의 저택 밖에서부터 아주 조심스러웠고, 심지어 임원의 방 안에서는 손을 등 뒤에 숨긴 채 상처를 감추려고 했었다.그런데 방금 전에는 일부러 그녀 앞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일부러 옷에 피를 묻히려고 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처럼 말이다.그는 그녀가 그의 부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예전에 그녀는 그가 다치기만 하면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 울곤 했다.그녀는 정암의 방에서 나올 때 깨진 약병과 피 묻은 자국을 발견했었다.게다가 오늘 그는 옅은 색 옷을 입었는데, 그 붉은 피가 소매에 선명하게 묻어 있으니, 어떻게 못 볼 수 있겠는가?그녀는 더 이상 그를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다.소한을 안타까워하던 사람은 임단이다.임단은 이미 죽었다.깊게 숨을 들이쉰 김단은 방 안으로 들어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피 묻은 옷을 숙희에게 던지며 말했다. “버리거라.”이 말을 듣고 숙희는 놀라서 소리쳤다. “버리라고요? 아가씨, 이정도 피는 쉽게 지워지는데요.”이렇게 좋은 옷을 버리다니?하지만 김단은 입꼬리를 올리며 경멸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더러워졌어. 빨아도 깨끗해질 수 없을 거다. 그냥 버려!”그녀는 한번 더러워진 것은 다시 사용하지 않
큰 마님은 잠시 깨어났다가 금세 피곤해하며 다시 잠에 들었다.김단은 조모의 이불을 정리해 드리고 나서 수 나인과 함께 방을 나섰다.방문이 닫히자, 김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의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구나.”수 나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의원님이 말씀하시길, 큰 마님께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소 장군님께서 매달 보내주시는 귀한 약 덕분에 버티고 계신 거였습니다.”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김단 역시 마음속으로 소한에게 감사를 표했다.주상이 소한에게 하사한 귀한 약재의 절반은 모두 진산군 댁으로 들어왔다.만약 그 약재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위태로운 진산군 댁에서 큰 마님을 이렇게 오래 모실 수 없었을 것이다.김단이 아무 말이 없자, 수 나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가씨, 소인이 듣기로는 마음에 드시는 분을 찾으셨다고 하던데요?”조모를 걱정하느라 마음이 무거웠던 김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수 나인은 말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아가씨께서 빨리 혼인하셨으면 좋겠어요. 큰 마님의 가장 큰 소원은 아가씨께서 혼례복을 입는 모습을 보는 것이랍니다. 아가씨께서 결혼을 미루시면...” 여기까지 말하고 수 나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김단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둘 다 그녀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와 정암의 일이 그리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순간 김단은 조모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밀려오는 강한 죄책감에 숨쉬는 것조차 힘들었다.김단의 모습을 본 수 나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소 장군님은...”말을 하다 말며 수 나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자신이 단지 하녀일 뿐, 주인들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소 장군이 큰 마님에게 특별히 당부하기를, 큰 아가씨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 큰 마님도 말씀하지 않으시는데, 그녀가 어떻게 감히 입을 열 수 있겠는가?이에 그저 크게 한
숙희는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만약 안 계신다면요?”만약 그가 없다면 진산군이 이미 정암에게 해를 입힌 것이라는 뜻이다!하지만 김단은 숙희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숙희도 걱정할까 봐 그저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숙희는 돌아오자마자 재빨리 사람을 시켜 목전촌으로 보냈다.그동안 김단은 쭉 집에서 기다리며 마음을 편히 놓지 못했다.저녁때가 되어서야 목전촌에 다녀온 하인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김단이 서둘러 물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정 종사관님을 만났느냐?”하인은 고개를 저으며 약을 그대로 가져다주며 말했다. “목전촌에서는 정 종사관님을 찾지 못했고, 심지어 정 종사관님의 가족분들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어젯밤 경조부 사람들이 와서 정 종사관님의 아버지를 데려갔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정 종사관님을 찾으러 한양으로 갔다고 합니다.”역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김단은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경조부 사람들이 정 종사관님의 아버지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했느냐?”“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였습니다.”하인의 말에 김단은 깜짝 놀랐다!살인이라니?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였다!진산군이 그녀를 굴복시키기 위해 이리 아무렇지 않게 사람까지 죽였단 말인가!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숙희가 허둥지둥 따라오며 물었다. “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경조부.”김단이 경조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두워졌다.붉게 물든 노을이 경조부 밖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고, 하얀 붕대 위 핏자국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김단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두 차례 깊이 숨을 들이쉬고 감정을 다스린 후, 그제야 그의 앞에 섰다. “정 종사관님.”부드러운 목소리에 정암의 몸이 굳어버렸다.정암은 놀란 표정으로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 여기 계십니까?”김단은 정암에게 다가갔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정암에게 왜 이런 큰일이 있었는데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