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 따지지 않고 술만 마셔대는 망나니들이 진정한 살의를 본 적이나 있을까,그들은 두려움에 얼어붙었다.피 흘리는 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람도 없었다.위층의 임학과 소한도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하청도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다.하지만 자신에게 협박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결국 그는 체면이 구겨졌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그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마냥 크게 소리 질렀다.“무엄하다! 네가 감히 사람을 해치다니?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모두 고귀하신 분들이시다.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내가 네놈을 관청에 고발하여,십팔 년 동안 갇혀 두겠다고 말이다!”“예, 그렇게 하시지요.”정암의 안색이 어두웠다.그는 죽일듯이 서하청을 바라 보았다.또한 목소리는 낮아서 무섭기 그지없다.“그렇게 되어도 개의치 않소이다.”정암은 서하청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서하청은 계속 뒷걸음을 치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유난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정암은 차가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눈빛이 두려워 하나둘씩 도망가는 사람이 생겼다.잠시 뒤, 취향각에는 사람이 몇 명 남지 않았다.남은 몇 사람들은 한양에서 나쁜 짓만 골라 하는 망나니들이었다.그들은 막강한 집안이 바쳐 주고 있었다.그리하여 정암을 두려워하지 않았다.특히 구태부의 손자, 구서가 눈에 띄었다.그는 자리에 앉아 반찬을 집어먹고 있을 뿐이다.정암과 눈을 마주치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곧이어 젓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내가 종사관이라면, 저 자를 데리고 의관으로 향했을 것이야. 잘못해서 죽기라도 하면, 자네의 부모는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는가?”그의 말에 정암의 분노가 억눌렸다.다시 이성을 되찾은 듯 보였다.김단은 자신 때문에 그의 앞길을 망치기 싫었다.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더 이상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수는 없다.김단은 정암의 소매를 끌어 당겼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
김단은 서둘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조심하라는 다정한 말투가 정암의 가슴에 박혔다.사람들에게 에워 싸여 있어도, 상황이 위험해져도, 정암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하지만 상대에게는 그저 시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곧이어 구서가 외쳤다.“죽여라!”남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암에게 달려 들었다.한편, 위 층에 있던 임학과 소한은 움직이지 않았다.정암은 빠르다.그는 소한과 함께 여러 전쟁을 겪었다.때로는 만 명이 넘는 적들을 상대하기도 했다.그는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바닥에 쓰러졌다.다행히도 정암은 다친 곳이 없었다.김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얼굴에는 부끄러운 듯한 표정이 비쳤다.마치 무엇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다.이때, 서하청이 김단의 뒤에 나타났다.그는 의자를 들고 있었다.서하청은 김단을 매우 싫어한다.어렸을 때 임학에게 맞은 이유도 김단 때문이었다.지금까지 살면서 그녀를 피해 다니기 위해 받았던 비웃음은 셀 수 없다.오늘 체면이 구겨진 이유도 모두 김단 때문이다.그는 김단을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위 층에 있던 소한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난간을 뛰어넘어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의자가 김단의 뒷통수를 향했다.절체절명의 순간에 정암이 김단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그리고 몸을 돌려 자신의 품 안으로 안았다.거대한 몸은 마치 두터운 벽을 연상케 했다.김단은 벽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그저 펑펑,이라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결국 서하청이 내리친 의자가 정암의 머리에 맞았다.의자는 산산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한편 서하청은 정암의 발차기로 인해 날아갔다.상처가 심해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정암이 그녀를 살린 것이었다!김단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만약 정암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서하청에게 죽었을 것이다.곧이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김단이 작게 정암을 불렀다.“정암
임학이 깜짝 놀랐다.다급하게 거지 앞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거지의 옷깃을 잡아들었다.“누구한테 잡혀 간 거야? 어디로 잡혀갔지?”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거지가 놀랐다.두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임학이 다시 한번 더 크게 소리쳤다.“피부 다 벗겨 버리기 전에 얼른 답하거라!”거지는 그제야 전전긍긍하며 답했다.“거, 거지들한테 잡혀서 한양 밖으로 나갔다 하옵니다.”임학은 손을 놓았다.그리고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거지는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김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김단도 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거지를 위아래로 훑었다.그리고 그의 볼록한 가슴 위로 시선이 멈추었다.거지는 당황해하며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그의 눈빛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쭈뼛쭈뼛 거렸다.곧이어 김단을 한번 더 보고 자리를 떠났다.김단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그녀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하지만 임원의 생사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지금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은 정암의 안위다.다행히도 군대의 의원은 외상을 치료하는 것이 능숙했다.소한은 서둘러 정암을 데리고 군의를 찾아갔다.김단은 정암은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면 스스로를 다독였다.곧이어 쓰러진 부잣집 도련님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오늘 연회는 모두 진산군 댁에서 초래 한 일이오, 치료비나 약값을 청구하려든 진산군 댁으로 나를 찾아 오시오. 또한 정암은 소한 장군의 사람이오. 다음번에 때리기 전에는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소, 소 장군의 사람은 자네들이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말을 끝내고 서둘러 취향각을 빠져나갔다.오늘 정암의 행동은 결국 그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 뻔하다.더하여 정암의 신분은 결코 그들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자신의 말로 하여금 경고를 주고 싶었다.정암의 뒤에는 소한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김단이 병영에 도착했을 때,정암은 이미 깨어 있었다.그
김단은 정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의 미소를 보자 취향각에서 자신을 보호하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때 정암이 손님에게 했던 말이 있다.그녀를 욕하면 각오하라는 말이었다.또한 위험에 천했을 때는 그녀를 옆으로 대기시켰다.정작 제일 중요할 때에는 자신의 몸으로 김단을 보호하기 바빴다.갑자기 얼굴 반이 피로 덮였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피가 묻은 옷에 시선이 갔다.정암은 김단의 눈빛을 알아챘다.그는 서둘러 자신의 옷을 정리했다.다급하게 혈흔을 숨기기 바빴다.이때, 김단이 그에게 다가갔다.뜨거운 눈물이 고인 두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곧이어 작은 손이 머리의 붕대 위로 올려졌다.혹여 아플까 봐 살살 쓰다듬었다.정암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그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심지어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김단이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마치 부서질 것 같았다.“아프십니까?”정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김단을 바라보았다.고운 얼굴에 뺨 옆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마치 그의 심장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김단의 우는 모습에 정암도 마음이 아팠다.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입가에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가 걸려있다.“괜찮사옵니다.”하지만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그는 두골이 깨질 뻔했다.더하여 바닥에 피가 흥건할 정도로 다쳤다.정암은 김단을 안심시키려 했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 눈치를 챘다.그가 그럴수록 마음이 더 아팠다.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정암은 당황하면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몸이 큰 탓에 무릎을 꿇고 앉아도 서있는 김단보다 컸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정암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정암은 두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전장에 나서면 이보다 깊은 상처도 수없이 당하옵니다. 그러하오니 낭자, 부디 눈물을 거두시옵소서. 낭자의 슬픔을 보고 있자니, 소인의 가슴 또한 찢어질 듯 아프옵니다.”그는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
정암이 자리에 얼어 붙었다.자신이 김단에게 산사를 준 사실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사실도 잊어버렸다.심지어 방금 김단이 한 말까지 잊어버리고 말았다.그가 쥐고 있던 산사도 어느새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정암의 모습을 보고 김단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곧이어 산사를 건네 들고 입안으로 넣었다.볼이 볼록볼록하게 올라왔다.이때, 그녀가 다시 물었다.“저와 혼인하기 싫으신 겁니까?”정암은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하고 싶사옵니다!”혹여 몰라 서둘러 대답했다.그 탓에 소리를 조절하지 못했다.그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하지만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허나 소인은 권력도 세력도 없는 자로서, 낭자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 같사옵니다. 소인은 낭자와 어울리는 사내가 아니 옵니다.”그는 힘이 풀린 듯 고개를 숙였다.또한 정암은 숙희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그는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다.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그저 능력이 닿는 대로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이때, 김단이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부드러운 감촉에 정암이 다시 얼어 붙었다.놀란 표정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눈물 자국이 가득한 작은 얼굴에는 장난기라고는 없었다.“저와 혼인을 하실 의사가 있으신지만 알려 주십시오.”만약 혼인을 한다면 두 사람은 진산군 관저라는 큰 장애물을 넘어야만 한다.곧 무엇이든 같이 해야만 한다.정암은 그제야 김단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벽이 있다.하지만 김단이 먼저 용기를 갖고 한 발자국 다가갔다.이런 그녀를 어떻게 실망시킬 수 있을까.정암이 맹세한다는 모습을 취했다.“나 정암은 김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김 낭자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이를 어길 시, 하늘의 벌을 받겠나이다.”김단의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그리고 얼굴을 잡고 있던 손으로 볼을 잡아당겼다.“왜 김 낭자라고 부르십니까?”정암이 멈칫했다.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
소한은 거부하고 싶었다.무사히 돌아왔다면 결코 심각한 일은 아닐 것이다.또한 임원은 눈물이 많다.그는 이 일이 군영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소한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그는 김단을 한번 보고 걸음을 옮겼다.김단은 가만히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이때, 정암이 물었다.“같이 따라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김단의 눈빛이 차가웠다.“예, 임원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야겠습니다.”그녀의 말에 정암이 미간을 찌푸렸다.“짓이라니요? 짚이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취향각에서 본 거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정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보아하니, 무언가 있는 모양입니다.하지만 아씨가 왜 그런 짓을 꾸몄는 지요?”김단은 대답하지 않았다.사실 임원은 그녀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곧이어 정암을 향해 몸을 돌렸다.“한번 가보겠나이다. 종사관님은 얼른 들어가 휴식을 취하시지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정암이 고개를 끄덕였다.찌푸린 미간 사이로 걱정이 가득했다.“조심 하셔야 합니다.”“예.”김단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그녀는 말을 타고 왔었다.갈 때도 말을 타서 관저로 돌아갔다.잠시 뒤, 관저에 도착했다.곧이어 숙희가 그녀를 맞이했다.“아씨! 드디어 돌아오셨나이다!”숙희는 다급한 표정이었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 있는 게야?”숙희는 항상 별당에서 그녀를 맞이한다.하지만 밖에서 김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일이 작지 않다는 뜻이다.숙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작은 아씨 께서 깨자마자 울고 불고 난리 입니다. 노비가 듣기로 그러는 이유가 다 아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아씨를 기다린 겁니다.아씨, 지금 대감 마님과 도련님께서 많이 노하셨습니다. 방금 전만 해도 도련님께서 아씨 입을 찢어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꼭 조심 하셔야 합니다!”김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임원은
김단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사실이기 때문이다.그들도 소한의 주량이 얼마나 강한 지 알고 있다.소한은 결코 취하지 않았으며,사람을 착각 할 일도 없다.임학이 아니라 소한도 어떠한 변명조차 없었다.진산군은 소한을 꾸짖고 싶었지만 참았었다.하지만 김단의 말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소 장군, 장군의 소 씨 가문과 우리 임 씨 가문은 혼인을 약조한 사이입니다. 허나 18년 전 여식이 바뀌는 바람에 혼동이 있었지요, 그래도 소 씨 가문과 혼인하는 사람은 여식 하나입니다. 오늘 일은 소 장군께서 제대로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리하지 못하면 두 가문의 혼사는 없던 것이 되겠지요.”“아버지!”임원이 울면서 소리 질렀다. 그녀는 혼인을 풀고 싶지 않았다.그저 모두에게 김단이 자신의 혼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그리하면 양 쪽 부모들이 서둘러 혼인을 진행 시킬지도 모른다.그녀의 고함소리에 진산군의 기세가 약해졌다.진산군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임원을 꾸짖었다.이때, 소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오늘 일은 제 과오이옵니다.”“당연히 자네의 잘못이네!”임학이 화를 냈다.그리고 김단을 가리켰다.“하지만 저 계집이 아무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네.”그는 김단을 노려 보았다.분노가 같이 터져 나왔다.“소한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원이한테 알려 줘야만 했느냐? 소한이 너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알려주고, 원이를 괴롭히고 싶었느냐?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그 거지들한테…”임학은 말을 하다가 끊었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렸다.“거지들이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임원은 김단의 눈을 마주치기 두려웠다.그녀의 눈은 송곳마냥 예리하다.금방이라도 자신의 속셈을 들킬 것만 같았다.김단의 질문에도 임원은 임 씨 부인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그녀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임 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원이가 연약하고, 외모가 뛰어나지 않느냐.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도 못하는 것이냐? 그리고 네 오라버니 말이 맞다. 네
임학은 김단이 사건의 발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원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 번 김단을 향해 손을 휘두르려 했다.“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는것이냐?!”숙희는 이를 보고 다급히 달려 들어 김단을 보호하려고 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소한이 한 발 빨랐다.소한은 임학이 내리치려던 주먹을 붙잡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이번 일에는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소.”이는 소한이 스스로 판단한 것이었다. 임원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를 보아 이번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소한이 김단 앞을 가로막자, 진산군은 곧바로 화를 내며 소리쳤다. “소 장군, 자네 지금 제정신인 것이오?”그에게 딸은 둘뿐이었고, 소한에 의해 이들이 휘둘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바로 그때, 밖에서 작은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외쳤다. “대감마님, 정 종사관 나리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이 말을 들은 김단은 가슴이 조여들었다.정암은 아까 부상을 입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까?진산군은 취향각에서 일어난 일을 아직 몰랐기에, 정암이 소한을 찾아와 중요한 군사 문제를 얘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저 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라 하게!”얼마 지나지 않아 정암이 들어왔고, 그의 뒤로 어린 거지가 따라왔다.바로 며칠 전 임학에게 소식을 전했던 그 거지 아이였다.이 상황에 임학마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임원을 바라보았다.임원은 임학이 왜 그런지 알지 못했지만, 임학의 눈빛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정암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소한이 정암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정암이 말했다. “신이 둘째 아가씨 일을 듣고 미심쩍게 여겨 이 아이를 찾았는데,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여기까지 말하고, 정암은 김단을 바라보며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김단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