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랑 함께 갈 수 없구나... 그럼 집에만 있어야 해.’ ‘매일 혼자 놀다니, 정말 지루해.’ “그럼 아줌마랑 오빠는 먼저 갈게.” 심미연은 강상미의 텅 빈 눈빛을 보며 가슴이 아려오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칼로 자신의 살을 조각내는 것처럼 아프고 그 고통은 쓰라리게 퍼져 나갔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품에 안고 있던 강상미를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일어섰다. 옷자락을 정리한 뒤 심태하의 손을 살짝 잡았다. “태하야, 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상미의 애처로운 표정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상미야, 엄마랑 오빠는 먼저 갈게. 내가 학교 끝나면 다시 와서 놀자. 알겠지?” 심태하는 강상미에게 손을 흔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네. 아줌마 안녕, 오빠 안녕.” 강상미는 웃으려 애썼지만 결국 웃음을 짓지 못하고 눈물이 터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강상미를 안아주고 싶었다. 데려가고 싶었다.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퍼지며 들려왔다. “왜 내 아들을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거야?” 심미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심태하를 몸 뒤로 숨기고 돌아서서 강지한을 마주했다. “강지한, 우리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든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해. 아이들 좀 놔줘.” 강지한은 그녀의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고 짜증이 밀려왔다.‘이 여자가 꼭...’ ‘우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래?’ ‘분명 일방적으로 나를 싫어하면서...’ 그가 심태하를 곁에 두기로 한 것도 그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이는 데리고 못 가.”강지한은 심미연을 강제로 남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양보를 한 거였다. 만약 심미연이 더 이상 그와 흥정하려 한다면 그는 그녀까지 같이 못 가게 할 수도 있었다. 공기
강상미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 가득한 눈으로 아빠를 올려다봤다. “아줌마가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는데... 아빠가 너무 무서워서 아줌마가 싫다고 할 것 같아요.” 세 살짜리 아이가 조리 있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강지한은 딸이 심미연을 감싸는 걸 깨닫고 속으로는 ‘이 배은망덕한 녀석!’이라며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상미한테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상미야, 네가 아줌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으면 직접 아줌마한테 말해 봐. 응?” 딸이 이렇게까지 심미연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예전에는 늘 심서연과 함께 있었는데도 단 한 번도 애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심서연을 꺼리는 듯한 모습이 자주 보였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는 단순히 강상미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쉽게 친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미연과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따르는 걸까?’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강지한은 딸이 심미연을 좋아하는 게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중에 심미연을 집으로 데려올 때 강상미가 거부감을 가지진 않을 테니까.“아줌마가 아까 그러셨어요. 바빠서 일하러 가야 하니까 저녁에 퇴근하고 다시 와서 나랑 놀아준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빠... 아줌마 보내주세요. 네?” 강상미는 아빠가 또 아줌마를 붙잡고 못 가게 할까 봐 걱정됐다. 아줌마가 이 집에서서 더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냥 빨리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저녁에 아줌마가 진짜 다시 올지, 그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심미연은 강상미가 자신을 위해 나서는 걸 보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심미연이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고?’ ‘그럼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뜻인가?’ “네!” 강상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한 번에 쏟아낼 줄은 몰랐다. 강지한이 강상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딸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금방 적응할 거예요.” 강상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심태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강지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나는? 아빠인 나는? 남보다 못한 거야?’ 순간 속상함이 치밀어 올랐다. 괜히 마음이 씁쓸해졌다. “엄마, 그럼 동생도 저랑 같이 유치원에 가게 해주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제일 먼저 엄마한테 전화할게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어른스러울 수 있나?’ “그건 엄마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상미 아빠한테 물어봐야 해.” 심미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사실 강지한을 설득해 강상미를 유치원에 보내려는 생각은 없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강지한이 그녀를 원망할 게 뻔했으니까. 괜히 나설 필요가 없었다. “아... 알겠어요.” 심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엄마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강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입을 열었다.“알겠어. 그럼 아줌마랑 오빠랑 같이 가.” 그의 차가운 시선이 심태하를 향했다. “심태하, 동생 잘 지켜야 해. 알겠지?” 강상미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강상미에게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던 말투가 심태하에게는 갑자기 단호하고 엄격한 톤으로 바뀌었다. 심태하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강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상미는 제가 잘 돌볼게요.” 겨우 세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 어른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니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강지한이 나서자 심태하는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싫어요. 엄마
심미연은 더 이상 그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 앞에서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 오늘 로펌에도 가야 해. 차 없이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난 택시 타는 거 싫어.” 사실 그녀는 다른 차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 차 안에 배어 있는 알 수 없는 냄새가 불쾌했고 어지러움까지 느껴졌다. 강지한은 반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녀의 얼굴에서 단서를 찾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흔들림도 읽을 수 없었다. 심미연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 없어. 서둘러야 해. 늦으면 안 돼.” 그녀는 항상 아이가 8시 반 전에 유치원에 도착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하지만 지금은 8시 반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으면 하루가 엉망이 될 것만 같았다. “아빠, 우리 빨리 아줌마 차 타요.” 강상미가 고개를 들어 강지한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재촉했다. ‘아빠가 안 타면 아줌마랑 오빠는 그냥 가버릴 텐데...’ 아이는 빨리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고 오빠가 다니는 유치원이 어떤 곳인지도 궁금했다. 강지한은 기대에 가득 찬 강상미의 얼굴을 보며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만약 강상미가 심장에 문제가 없었다면 벌써 유치원에 다니고도 남았을 나이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심미연의 차에 올랐다. 강상미는 심태하와 함께 앉고 싶어 했고 강지한은 조수석에 자리 잡았다.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G클래스는 심미연의 부드럽고 우아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강지한은 문득 예전의 심미연이 떠올랐다. 그녀가 운전하는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해 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4년 만에 다시 마주한 그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하지만 지금
심태하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힘을 빌려 가볍게 몸을 날려 차에서 뛰어내렸다. 심미연은 깜짝 놀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에는 분명히 화가 서려 있었다. “심태하! 다신 이렇게 위험한 짓 하지 마. 손에 무리가 가면 탈구될 수도 있어.” “죄송해요. 엄마.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심태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엄마를 걱정시키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모든 게 다 자기 잘못이었다. 그때 강지한도 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강상미를 품에 안았다. 심미연은 심태하의 손을 잡고 유치원 쪽으로 걸어갔다. 강지한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잠시 숨을 들이쉬고 강상미를 안은 채 빠르게 그들을 따라갔다. “아빠, 나도 오빠랑 같이 걸어갈래.” 강상미는 오빠가 엄마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무엇보다 오빠의 엄마는 정말 예뻤다. 강지한은 조심스럽게 강상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강상미는 그의 손을 잡고 작은 발걸음으로 심태하를 향해 달려갔다. 곧 강상미의 손이 심태하의 손을 잡았다. 심미연이 심태하의 손을 잡고 심태하가 강상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강상미는 강지한의 손을 잡았다. 네 사람은 마치 한 가족처럼 길을 걸어갔다. 그들 중 세 명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고 네 사람 모두 뛰어난 외모 덕분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야, 한 가족이 다 이렇게 잘생기고 예쁠 수 있는 건가?” “애기 엄마 아빠, 분위기부터가 다르네.” “아이 엄마는 갓 대학 졸업한 것처럼 어려 보이는데 쌍둥이가 벌써 이렇게 컸다고?” 행인들의 속삭임이 귀에 파고들자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쌍둥이?’ 그녀가 처음 임신했을 때도 쌍둥이었다. 하지만 그 중 딸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갓 태어난 아이의 작고 여린 몸은 움츠러들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고 푸르스름했다. 그 아이를 단 한 번이라도 안아보
심미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강지한, 여긴 아들 유치원 앞이야. 제발 여기서 이런 짓 그만해. 창피해...” 그녀의 눈빛 속에는 감추기 힘든 증오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강지한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녀는 최소한 체면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증오를 보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갑고 아픈 통증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예전엔 그 눈빛 속에 사랑만 있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부터 심미연은 나를 이렇게 미워하게 된 걸까?’ “나는 태하의 아버지고 네 남자야. 우리가 이렇게 친밀하게 행동하는 게 뭐가 창피하다는 거야?” 강지한은 마치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심미연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가까워질 때마다 그는 심미연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강지한, 여기서 이런 의미 없는 말로 싸우고 싶지 않아. 열 시에 법정에 가야 해. 지금은 서류 정리하러 사무실에 가야 하니까 제발 손 좀 놔.” 오늘 다뤄야 할 사건은 이혼 사건이었다. 자료는 이미 다 준비됐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실수나 빠진 부분이 없는지 점검만 하면 되었다. 그 후 법정에 가서 잠시 숨을 돌리고 피곤하지 않게 변론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랑 얘기하면 싸움이 되고 박유진이랑 얘기하면 다 애정 표현이냐?” 박유진이 오랫동안 심미연과 함께 지낸 사실을 떠올린 강지한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강지한은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심미연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왜 박유진이 그녀 곁에 있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강지한은 본능적으로 심미연의 턱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순간, 심미연은 숨이 턱 막
심미연의 눈에는 고집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강지한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팔에 단단히 사로잡힌 채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마치 그가 그녀를 자신의 일부로 삼으려는 듯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집착이 느껴졌다. 차창 밖의 세상은 점점 흐려졌고 그녀의 의식도 서서히 희매해져 갔다. 그 순간, 심미연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생각은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었다.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죽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심미연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강지한은 그녀가 축 처진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걸 보고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심미연, 눈 떠! 지금 장난칠 때 아니야!” 그러나 그가 아무리 불러도, 세게 꼬집어도 그녀는 끔쩍도 하지 않았다. 강지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주저할 겨를도 없이 그는 곧장 그녀를 뒷좌석에 눕히고 핸들을 움켜쥐며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엑셀을 깊이 밟았다. 앞장선 경찰차가 길을 터주었고 그는 쉴 틈 없이 병원으로 내달렸다. 병원 앞에는 이미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휠체어, 소송 침대, 응급 장비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원장이 급히 뛰어나와 그를 맞이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이건 정말 죄송...”“닥치고 침대부터 가져와.”강지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응급실로 바로 옮겨.” 심미연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의료진이 침대를 끌고 오자 강지한은 즉시 차 문을 열었다.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올려 하얀 침대 위에 눕혔다. 새하얀 시트 위에 누운 심미연의 얼굴은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도화지처럼 창백했다. 입술은 핏기 없이 바싹 말라 있었고 숨결조차 희미해 제대로 숨
“스승님!”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그 한마디를 내뱉으며 주저하지 않고 남자의 앞에 달려갔다. “저 미연이에요. 스승님... 저 기억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이 살아 있었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분명 사부의 얼굴이었다. ‘틀림없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절대...’ 남자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목소리 속에 날카로운 분노를 담아 말했다. “비켜 주세요. 제 아내가 기절했어요. 여기서 막고 있다가 제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수 있겠어요?” 심미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몸이 굳어가는 듯 모든 것이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스, 스승님...” 그 순간, 심미연의 심장은 마치 거대한 북처럼 울려 퍼지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그 남자의 얼굴을 놓칠세라 집요하게 쫓았다. 마치 그 얼굴을 가슴 깊이 새기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확신했다. 눈앞의 남자, 뚜렷한 윤곽과 깊은 눈빛을 가진 이 얼굴. 한때 그녀가 존경하며 따랐고 그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사부, 진운혁의 얼굴이었다.기억 속의 장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날, 하늘은 흐릿하고 어두웠다. 마치 하늘마저 비극을 애도하는 듯, 구름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녀는 군중 속에서 사부의 몸이 고층 빌딩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그대로 지켜봤다. 끊어진 줄에 매달린 연처럼 결국 아무 힘 없이 차가운 땅에 내팽겨쳐졌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 군중의 떠들썩한 소리, 그리고 그때 가슴 깊숙이 울려 퍼진 아픈 울음소리가 뒤엉켜 처참한 교향곡을 이뤘다. 그 해, 그녀는 사부의 시신이 하얀 천에 덮여져 장례차에 실려 떠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부가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런 낙하에 살아남을 리 없었다. ‘그럼 스승님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수많은 의문이 머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