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뭐죠?” “지유가 당신이 보면 알 거라고 했어요.” 육현성은 앞에 있는 마스크를 쓴 남자를 바라보며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결국 그는 온지유를 구할 힘이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에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물건은 남기고 이만 돌아가세요.” 남자는 손에 든 물건을 옆에 있던 사람에게 넘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현성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본능적으로 한기를 느꼈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마치 숲속의 맹렬한 늑대처럼 그 눈빛만으로도 그의 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지유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알지?’ “왜 안 갑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육현성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떠났다. 그는 늦게 가면 남자에게 죽을까 봐 두려웠다.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았다. 육현성이 멀어지자 남자는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명령했다. “열어봐.” 온지유가 그곳에 갇힌 지 몇 년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누군가를 통해 그에게 물건을 보낸 이유가 궁금했다. 그 남자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말라버린 손가락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강 도련님, 손가락 하나입니다. 위에는 반지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남자의 눈에는 어두운 먹물이 흘러 들어간 듯 깊고 차가운 색이 감돌았다. “조사를 해볼까요?” “온지유의 지금 상황을 조사해 봐.” 남자는 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감싸며 자세히 살펴봤다. 그것은 여성의 손가락이었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면 아마 온지유의 손가락일 것이다. 감옥 안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은 분명히 누군가 그녀를 겨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 이 손가락을 보내게 된 것은 그
그녀는 가정부에게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지, 일꾼처럼 부려먹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백선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신미연의 말을 이해하고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먼저 갈게요. 집에 일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집을 나섰다. 백선영은 눈물을 훔치며 바로 진은숙에게 다가가 심미연의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서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은 부유한 집에서 반 평생을 하인으로 일했지만 어떤 주인은 하루 종일 20시간 일해도 모자란 듯 요구하며 집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정리하도록 강요했다. 심미연처럼 이렇게 좋은 고용주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심미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끝내고 문 앞에 도착했다. 경비원은 그녀를 보고 바로 경례를 하며 정중히 말했다. “박 부인, 밖에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미연은 경비원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원래도 절세미인인데 웃을 때는 나라를 흔들 정도네.’ 경비원은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심미연이 대문을 나서자 입구에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멋지게 세워져 있었다. 굉장히 눈에 띄는 차였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게 누구지?’ 그 순간, 차문이 열리더니 큰 뒤통수를 하고 요염한 얼굴을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정장과 넥타이는 그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신미연은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이 얼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심미연이 그를 누구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 앞에 다가와 공작새처럼 자신을 드러내며 말했다. “심미연 씨, 안녕.” 비싼 정장을 입었는데 그 말은 그 옷이 너무 아깝게 보였다. “누구시죠?” 심미연은 그의 정체를 떠올리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박시훈은 살
박시훈은 심리학을 공부했기에 심미연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자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녀에게 정말 일이 있다면 그는 억지로 강요할 수 없었다.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면 이후에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참자.’ “알았어요. 연락처는 남겨주실 수 있나요? 오후에 약속을 좀 더 편하게 잡을 수 있잖아요.” 박시훈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저한테 당신 연락처를 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연락처를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박시훈은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심미연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연락처도 안 남겨준다고?’ 심미연은 그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강요하지 않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박시훈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심미연 씨, 잠깐만요. 연락처 남겨줄게요.” 그는 뒤에서 뛰어가며 외쳤다. 심미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박시훈은 그녀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제 명함이에요. 일 끝나고 연락 주세요.” 심미연은 명함을 받으며 빠르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박시훈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이 텅 비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달려가서 사실은 그녀를 좋아한 지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심미연은 차에 앉아 명함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옆에 놓고 시동을 걸었다. 그 시각, 심태하는 잠에서 깨어 보니 여전히 원래의 방에 누워 있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엄마는 나를 버린 걸까?’ ‘하지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생각을 하던 중 심태하의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심태하는 얼굴에 기쁨이 번지며 침대에서 벌떡 일
집사는 사진을 보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가씨랑 작은 도련님이 쌍둥이 같지 않나요?” 두 얼굴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정말 똑같았다. 혈연 관계가 없다면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강준형은 집사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확대경을 집어 들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이 두 얼굴은 기한이의 축소판 같네. 완전 똑같아.” 강준형이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상미는 소영이가 데려왔잖아. 소영이가 말하길 상미는 심서연이 길가의 쓰레기통에서 주워왔다고 했지. 뭔가 이상한 거 아닌가?” 만약 이 아이가 강지한과 관련이 있다면 강지한은 벌써 알았을 것이다. DNA 검사만큼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없으니까. ‘지한이가 이 아이랑 자신이 이렇게 닮은 걸 보고 의심했을 테고 아마 검사를 해봤겠지?’ “혹시 두 아이 모두 사모님이 낳은 게 아닐까요? 아가씨가 누군가에게 빼앗겨서 도련님에게 주어진 건 아닐까요?” 집사가 대담하게 추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두 아이가 나이도 같고 이렇게 닮을 수는 없었다. 강준형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지한이에게 말해야겠어.” 집사의 말에 강준형은 그런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소영이 아이를 데리고 심서연과 함께 돌아왔을 때 심서연이 요구한 것이 바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 몇 년 동안 강씨 가문에서 살았고 강 부인이 아니었지만 강 부인의 모든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이 일은 거의 문소영과 심서연이 짜고 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심미연은 죽음을 가장했고 모두가 그녀가 진짜 죽었다고 믿었다. ‘문소영은 미연이가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미연이가 아이를 언제 낳았는지는 어떻게 알았지?’ 강준형은 오랫동안 집안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이가 많아져서 어떤 일들은 그냥 눈 감고 넘어가도 괜찮았다. 겉보기에 괜찮으면 된다고
그 순간, 심미연의 심장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눈앞의 이 어린 소녀와 자신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이인데 그 작은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저며왔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임혜자는 강상미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짠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심미연에게 말을 건넸다. “사모님, 잠깐이라도 더 머물러 주시면 안 될까요? 아가씨가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어제 막 돌아온 거라... 도련님 말씀으로는 몸이 좀 회복되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던데...” 임혜자는 말끝을 흐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이 잘될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들은 바로는 만약 상황이 나빠지면 강상미는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겨우 세 살짜리 아이가 그런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강상미의 수술을 직접 집도할 사람은 바로 심미연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이 수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 강상미를 잃게 두지는 않겠다고. “엄마, 여기서 상미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심태하는 몇 시간 동안 강상미와 함께 지내면서 몇 가지를 깨달았다. 강지한이 자신에게 화내는 모습을 본 이후로 강상미에게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해도 다정하게 대해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강상미는 엄마도 없었다. 진짜 너무 불쌍했다. 엄마를 좋아하는 강상미가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미연은 조용히 무릎을 굽히고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태하야, 엄마가 상미랑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엄마도 해야 할 일이 많고 무엇보다 지금 시간이 너무 늦었어. 너도 이제 유치원에 가야 하잖아.” 그녀는 이내 강상미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상미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라 아줌마야. 그리고 아줌마는 지금 일이 있어서 상미랑
‘아줌마랑 함께 갈 수 없구나... 그럼 집에만 있어야 해.’ ‘매일 혼자 놀다니, 정말 지루해.’ “그럼 아줌마랑 오빠는 먼저 갈게.” 심미연은 강상미의 텅 빈 눈빛을 보며 가슴이 아려오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칼로 자신의 살을 조각내는 것처럼 아프고 그 고통은 쓰라리게 퍼져 나갔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품에 안고 있던 강상미를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일어섰다. 옷자락을 정리한 뒤 심태하의 손을 살짝 잡았다. “태하야, 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상미의 애처로운 표정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상미야, 엄마랑 오빠는 먼저 갈게. 내가 학교 끝나면 다시 와서 놀자. 알겠지?” 심태하는 강상미에게 손을 흔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네. 아줌마 안녕, 오빠 안녕.” 강상미는 웃으려 애썼지만 결국 웃음을 짓지 못하고 눈물이 터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강상미를 안아주고 싶었다. 데려가고 싶었다.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퍼지며 들려왔다. “왜 내 아들을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거야?” 심미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심태하를 몸 뒤로 숨기고 돌아서서 강지한을 마주했다. “강지한, 우리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든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해. 아이들 좀 놔줘.” 강지한은 그녀의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고 짜증이 밀려왔다.‘이 여자가 꼭...’ ‘우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래?’ ‘분명 일방적으로 나를 싫어하면서...’ 그가 심태하를 곁에 두기로 한 것도 그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이는 데리고 못 가.”강지한은 심미연을 강제로 남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양보를 한 거였다. 만약 심미연이 더 이상 그와 흥정하려 한다면 그는 그녀까지 같이 못 가게 할 수도 있었다. 공기
강상미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 가득한 눈으로 아빠를 올려다봤다. “아줌마가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는데... 아빠가 너무 무서워서 아줌마가 싫다고 할 것 같아요.” 세 살짜리 아이가 조리 있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강지한은 딸이 심미연을 감싸는 걸 깨닫고 속으로는 ‘이 배은망덕한 녀석!’이라며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상미한테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상미야, 네가 아줌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으면 직접 아줌마한테 말해 봐. 응?” 딸이 이렇게까지 심미연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예전에는 늘 심서연과 함께 있었는데도 단 한 번도 애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심서연을 꺼리는 듯한 모습이 자주 보였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는 단순히 강상미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쉽게 친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미연과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따르는 걸까?’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강지한은 딸이 심미연을 좋아하는 게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중에 심미연을 집으로 데려올 때 강상미가 거부감을 가지진 않을 테니까.“아줌마가 아까 그러셨어요. 바빠서 일하러 가야 하니까 저녁에 퇴근하고 다시 와서 나랑 놀아준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빠... 아줌마 보내주세요. 네?” 강상미는 아빠가 또 아줌마를 붙잡고 못 가게 할까 봐 걱정됐다. 아줌마가 이 집에서서 더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냥 빨리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저녁에 아줌마가 진짜 다시 올지, 그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심미연은 강상미가 자신을 위해 나서는 걸 보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심미연이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고?’ ‘그럼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뜻인가?’ “네!” 강상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한 번에 쏟아낼 줄은 몰랐다. 강지한이 강상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딸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금방 적응할 거예요.” 강상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심태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강지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나는? 아빠인 나는? 남보다 못한 거야?’ 순간 속상함이 치밀어 올랐다. 괜히 마음이 씁쓸해졌다. “엄마, 그럼 동생도 저랑 같이 유치원에 가게 해주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제일 먼저 엄마한테 전화할게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어른스러울 수 있나?’ “그건 엄마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상미 아빠한테 물어봐야 해.” 심미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사실 강지한을 설득해 강상미를 유치원에 보내려는 생각은 없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강지한이 그녀를 원망할 게 뻔했으니까. 괜히 나설 필요가 없었다. “아... 알겠어요.” 심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엄마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강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입을 열었다.“알겠어. 그럼 아줌마랑 오빠랑 같이 가.” 그의 차가운 시선이 심태하를 향했다. “심태하, 동생 잘 지켜야 해. 알겠지?” 강상미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강상미에게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던 말투가 심태하에게는 갑자기 단호하고 엄격한 톤으로 바뀌었다. 심태하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강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상미는 제가 잘 돌볼게요.” 겨우 세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 어른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니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강지한이 나서자 심태하는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싫어요. 엄마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