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이 입술을 짓이겼다. 얼마 전 심서연이 전화로 딸 얘기를 꺼낸 것을 떠올린 심미연은 혹시 심서연은 진작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은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심서연이 심미연은 살아있고 심지어 아이까지 낳았다는 정보로 거래를 해 강씨 가문에 들어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만약 강지한이 정말 심미연이 살아있고 그의 아들까지 낳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왜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아냐. 원호 선배가 내 모든 흔적을 지웠어. 강지한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었을 거야.’침묵으로 일관하는 심미연을 보며 신하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심미연이 뭔가를 떠올렸다. 잠시 후, 깊은 숨을 들이쉰 심미연이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내가 조사해보면 알겠지.””그래. 우리도 너무 오래 자리 비웠어. 일단 내려가자. 나중에 박지윤이 알면 우리가 뒤에서 몰래 험담이라도 한 줄 알겠어.”신하린이 심미연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너 심서연 조심해. 태하 곁에서 경호원 더 붙여야겠어. 아니면 내가 마음이 안 놓여.”신하린은 그 순간 심태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하는 대체 강지한 그 쓰레기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누가 알려준 거지?’그런 생각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신하린이 손에 힘을 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화가 났어? 너 때문에 내 손 부러질 것 같아.”귓가에 심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신하린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보던 신하린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신하리는 심태하와의 대화 내용을 심미연에게 전했다. 얘기를 들은 심미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연아, 혹시 심서연이 가르쳐준 거 아닐까?”신하린은 박유진의 인성의 100% 신뢰했다. 그는 절대 심태하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심미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도 있지.”‘아무래도...’‘심서연이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네 부모님과 심서연처럼 악독한 인
“그 사람들 누구에게나 잘해주면서 정작 너한테만 그렇게 구는 거야! 혹시 네가 그 집 친딸이 아닌 거 아니야?” 신하린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몰래 DNA 검사를 해봤는데 결과는 당연히 그들의 딸이었지.” 신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부모님도 정말 드물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다행히 외할머니가 계셔. 외할머니는 나한테 정말 잘해주시거든.” 다만 조은하는 양경자에게 전혀 잘해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양경자의 병이 그렇게까지 악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경자를 떠올리니 심미연의 마음이 아려왔다. 돌아온 지 이틀째인데 아직 양경자를 찾아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양경자라면 심미연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외할머니는 온지유가 죽인 거야. 이제 온지유도 마땅한 대가를 받았으니 외할머니도 편히 잠들 수 있겠지.” 신하린은 그 날의 재판을 떠올렸다. 임현은 법정에서 당당하게 나서서 온지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임현은 그 일 이후 유명세를 타며 변호사로서 승승장구했다.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임현의 뒤에는 줄곧 심미연이 있었다는 걸. 진짜 대단한 사람은 심미연이었다. 그 후 그녀는 심미연에게 당시 그렇게 많은 증거가 있었는데 왜 온지유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무기징역으로 만든 거냐고 물었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온지유가 평생 고통 속에서 살게 할 거야. 그리고 내 성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할 거고.” 그리고 심미연은 그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임현 씨를 찾아간 건 일종의 도박이었어. 그런데 임현 씨가 법정에서 내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해줬지!” 심미연은 임현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 몇 년간 둘은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때 나한테는 왜 안 찾아왔어! 흥! 나는 진짜 네가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지금도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땐 정말
신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녀와 이진영은 원래 사랑 때문에 함께한 게 아니었다. 당시엔 그저 서로 필요한 것이 있어서였을 뿐 이미 오랫동안 연락도 없었으니 더 이상 얽힐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이진영은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녀가 갑자기 끼어드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절 열 개를 부수는 한이 있어도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깨뜨리지 말라는 말도 있다. 이진영의 결혼을 망치는 그런 비도덕적인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넌 진영 도련님을 사랑하지 않아?” 심미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신하린이 이진영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신하린은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함께 있을 때부터 우리 둘이 불가능하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어. 그 후로 연락이 끊겨서 나도 그냥 헤어진 거라고 생각했어. 특별히 슬프다는 느낌도 없었어. 가끔씩 떠올리긴 했지만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심미연은 잠시 침묵했다. 신하린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진영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느껴 이미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 심미연은 그런 신하린이 안타까웠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가야겠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이진영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박유진과 심태하가 매트 위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진지했다. 그들은 마치 부자처럼 보였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 정말 사이가 좋다니까!” 아마도 박유진처럼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신경 써주는 남자는 많지 않을 거다. 게다가 이 아이는 친아들도 아니었다. “응, 태하가 오빠를 정말 잘 따른다니까.” 심미연은 자신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박유진은 심태하를 돌보면서 동시에 그녀까지 챙겨줬다. 그녀는 여러 번 도우미를 고용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도우미가 그들을
이진영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졌다. “신하린, 한 마디만 더 해봐!” 신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저는 당신을 몰라요. 이만 가주세요!” 그가 한유나와 함께한 그날부터 그녀는 이미 헤어지자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끌고 늘어지며 헤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아있던 약간의 인내심은 이미 다 소진된 지 오래였다. 이제 그녀는 그냥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싶을 뿐이었다. “신하린,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 이진영의 얼굴은 어두웠다. 눈빛도 엄청 사나웠다. “너 혼자 탈래, 아니면 내가 안아서 차에 태워줄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저는 진영 씨랑 가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신하린은 돌아서서 뛰어갔다. 그녀는 이진영을 보기 싫었다. 이진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몸에서 소름 끼치는 냉기를 풍겼다. ‘신하린이 도망을 치다니, 그렇게 내가 보기 싫었나?’ 그 순간, 갑자기 눈 부신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차 한 대가 옆을 빠르게 지나가며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그가 차량 번호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차는 이미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진영 씨, 살려줘요!” 신하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영은 즉시 생각을 접어두고 재빨리 달려갔다. 신하린은 땅에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선홍색 피가 장미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 선명한 붉은색이 이진영의 눈을 찔렀다. 그는 서둘러 몸을 굽혔다. “너, 너...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그는 다소 횡설수설했다. 이진영은 두려웠다. ‘만약 신하린이 죽으면 어떻게 하지?’ “제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요. 조심해요!” 신하린은 힘을 다해 이 말을 마치고는 눈을 감고 그대로 기절했다. 이진영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를 차에 조심스럽게 눕힌 후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전원 준비해, 10분 후 대문
“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 오빠가 한번 물어봐 줘.” 심미연은 옷을 여미며 신발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박유진은 그녀보다 한발 앞서 신발을 집어 들고는 쪼그려 앉아 그녀 발 앞에 놓았다. “발 들어, 신어.” 심태하는 매우 주관이 강한 아이라서 말하기 싫으면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 갈게. 만약 늦게까지 안 돌아오면 신하린 상태가 심각해서 그런 거야. 기다리지 말고 태하랑 일찍 자.” 박유진의 도움으로 신발을 신은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박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심미연은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고 발끝을 들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가볍게 맞댄 후 ‘쪽' 하고 소리를 내며 키스했다. “오빠가 한 말 다 기억했어!” 매번 외출할 때마다 박유진은 이렇게 계속해서 그녀에게 당부했다. 정말로 그녀를 아이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따뜻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항상 걱정해 주면 행복한 기분이 드는 법이다. 박유진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또 꼬시면 안 보내줄 거야!” 심미연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빠는 날 잡을 수 없어!”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그녀가 즐겁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박유진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함께 하든 안 하든, 이렇게 그녀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심미연이 떠나자 그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심미연을 따라가도록 사람을 보냈다. 심미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심미연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이진영은 그녀를 보자마자 일어섰다. “하린이는 아직 안에 있나요?” 심미연이 물었다. “네!” “가서 전해줘요. 제가 직접 수술할 거예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이진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신하린은 평소 아름다움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다. 그런 그녀라면 한쪽 다리를 잃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심미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의료진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 모든 검사를 마친 후 심미연은 비로소 안심하고 신하린을 의료진에게 맡겼다. 그녀는 몸을 돌려 이진영을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잠깐 밖으로 나와요. 물어볼 게 있어요!” 이진영은 병상으로 걸어가 몸을 굽혀 침대 위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은 손바닥만 해 보였다. 너무나도 허약해 보였다.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은 마치 언제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심미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린이를 지키지 못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하고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에요! 나와요, 물어볼 게 있다고요!” 이진영은 시선을 거두고 심미연을 따라 병실을 나왔다. “이진영 씨가 왜 거기에 있었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심미연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신하린이 그런 상태가 되자 그녀는 가슴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상당히 관대한 것이었다. “저는 하린이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하린이가 저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더니 도망치더라고요. 그러다가 차에 치였어요.” 이진영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진영 씨가 준비한 사람 아니에요?” 심미연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이진영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는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이진영 씨가 한 게 아니라면 이 일은 제가 직접 조사할 거예요. 하지만 미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이게 당신 부모나 약혼녀가 한 짓이라면 저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예요! 그때 와서 저한테 봐달라고 하지 마세요!” 심미연은 말을 마치고는 돌아서서 떠났다. 지난 2년간 회사는 안정적
누군가가 고의로 번호판을 떼어냈는지 번호판이 없었다.‘진짜 번호판 없으면 차주를 못 찾아낼 줄 알았나? 헐...’이 아파트는 입주민의 차가 아니면 입구에 정보를 등록해야 들어갈 수 있다.만약 이 차가 이 동네의 것이라면, 정보를 빨리 찾아야 하고, 이 차가 밖에 있는 차라면 등록 정보도 볼 수 있다.그러나 이 사람이 신하린을 치어 죽이려 한 이상 틀림없이 가짜정보를 사용했을 것이다.또 다른 가능성은 동네 업주가 나서서 직접 차를 들여보냈다는 것이다.어떤 상황이든 그녀는 최단 시간 내에 차주 정보를 찾을 것이다.계속 조사하려던 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껐다.“네.”일어나 문을 열자 남자의 다정한 눈매가 한눈에 들어왔다.심미연은 순식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벌써 다 했어? 가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뭐 좀 먹자.”심미연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고 아래층으로 걸어갔다.식탁 위에 만두 한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냄새가 유난히 향기로웠다.“언제 만두를 빚었어?”심미연은 만두를 좋아하지만 냉동만두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박유진이 직접 빚는다.“네가 외출한 후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소를 다졌고 방금 다 빚었어.”전에 그는 밀가루를 반죽할 줄 몰랐는데, 후에 심미연이 만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배우기 시작했다.앞의 몇 번은 실패했지만 갈수록 솜씨가 점점 좋아져 지금은 만두를 빠르고 예쁘게 빚을 수 있었다.“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심미연은 마음속으로 감동했고, 눈에는 안개가 자욱했다.박유진은 그녀에게 이렇게 잘해 주었지만 그녀는 보답할 방법이 없었기에 이런 다정함이 불안했다.“내가 너에게 잘해주는 건 네 보답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부담을 가질 필요 없어.”박유진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대신해서 눈물을 닦았다.“빨리 앉아서 만두를 먹어. 식으면 정말 맛이 없거든.”그는 심미연을 좋아하고, 심미연에 잘해주는 것에 대해 여태껏 그녀에게 보답받을 생각을 한 적이 없다.심미연은 앉
그는 걸어가서 그녀의 곁에 앉았다.마음이 평온하기만 하고 편안해지며 그녀가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다.이튿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심미연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다가 주먹으로 한 사람을 때렸다.순간 심미연은 멍해졌다.“깼어?”곧 그녀는 다정한 눈동자를 마주했다.“오빠, 왜 내 침대에 있어?”그녀는 어젯밤에 소파에 누워서 잠들었는데 그 후의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네가 잠들어서 내가 안고 올라갔어. 그런데 침대에 내려놓으니 네가 내 허리를 안고 가지 못하게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은 거야.”박유진이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어젯밤에 늦게 잤는데 좀 더 자. 나는 먼저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게. 음식이 되면 올라와서 깨울게.”심미연이 말을 하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심미연 씨, 빨리 와요. 신하린이 깨어났어요. 지금 화를 내고 있는데 나 혼자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요.”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심미연은 놀라 일어나 앉았다.“알았어요, 금방 갈게요.”그녀는 마취제의 효과가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몰랐다. 그녀가 소홀히 한 것 같다.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일어나지 말고 좀 더 자. 난 지금 서둘러 병원에 가야 해. 신하린의 상황이 안 좋아.”그녀는 말하면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침대 위에 있던 박유진은 얼른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으로 갔다.심미연이 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박유진은 보온통 하나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매트에는 흰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속으로 어떤 느낌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 성큼성큼 걸어가 슬리퍼를 벗고 흰 신발로 갈아신은 뒤 손을 뻗어 보온통을 받았다.“가자,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마침 차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심미연은 그제야 박유진이 옷을 갈아입은 것을 보았다.‘참 빠르네.’차에 오른 심미연이 보온통을 열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