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고의로 번호판을 떼어냈는지 번호판이 없었다.‘진짜 번호판 없으면 차주를 못 찾아낼 줄 알았나? 헐...’이 아파트는 입주민의 차가 아니면 입구에 정보를 등록해야 들어갈 수 있다.만약 이 차가 이 동네의 것이라면, 정보를 빨리 찾아야 하고, 이 차가 밖에 있는 차라면 등록 정보도 볼 수 있다.그러나 이 사람이 신하린을 치어 죽이려 한 이상 틀림없이 가짜정보를 사용했을 것이다.또 다른 가능성은 동네 업주가 나서서 직접 차를 들여보냈다는 것이다.어떤 상황이든 그녀는 최단 시간 내에 차주 정보를 찾을 것이다.계속 조사하려던 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껐다.“네.”일어나 문을 열자 남자의 다정한 눈매가 한눈에 들어왔다.심미연은 순식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벌써 다 했어? 가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뭐 좀 먹자.”심미연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고 아래층으로 걸어갔다.식탁 위에 만두 한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냄새가 유난히 향기로웠다.“언제 만두를 빚었어?”심미연은 만두를 좋아하지만 냉동만두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박유진이 직접 빚는다.“네가 외출한 후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소를 다졌고 방금 다 빚었어.”전에 그는 밀가루를 반죽할 줄 몰랐는데, 후에 심미연이 만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배우기 시작했다.앞의 몇 번은 실패했지만 갈수록 솜씨가 점점 좋아져 지금은 만두를 빠르고 예쁘게 빚을 수 있었다.“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심미연은 마음속으로 감동했고, 눈에는 안개가 자욱했다.박유진은 그녀에게 이렇게 잘해 주었지만 그녀는 보답할 방법이 없었기에 이런 다정함이 불안했다.“내가 너에게 잘해주는 건 네 보답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부담을 가질 필요 없어.”박유진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대신해서 눈물을 닦았다.“빨리 앉아서 만두를 먹어. 식으면 정말 맛이 없거든.”그는 심미연을 좋아하고, 심미연에 잘해주는 것에 대해 여태껏 그녀에게 보답받을 생각을 한 적이 없다.심미연은 앉
그는 걸어가서 그녀의 곁에 앉았다.마음이 평온하기만 하고 편안해지며 그녀가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다.이튿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심미연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다가 주먹으로 한 사람을 때렸다.순간 심미연은 멍해졌다.“깼어?”곧 그녀는 다정한 눈동자를 마주했다.“오빠, 왜 내 침대에 있어?”그녀는 어젯밤에 소파에 누워서 잠들었는데 그 후의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네가 잠들어서 내가 안고 올라갔어. 그런데 침대에 내려놓으니 네가 내 허리를 안고 가지 못하게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은 거야.”박유진이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어젯밤에 늦게 잤는데 좀 더 자. 나는 먼저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게. 음식이 되면 올라와서 깨울게.”심미연이 말을 하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심미연 씨, 빨리 와요. 신하린이 깨어났어요. 지금 화를 내고 있는데 나 혼자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요.”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심미연은 놀라 일어나 앉았다.“알았어요, 금방 갈게요.”그녀는 마취제의 효과가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몰랐다. 그녀가 소홀히 한 것 같다.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일어나지 말고 좀 더 자. 난 지금 서둘러 병원에 가야 해. 신하린의 상황이 안 좋아.”그녀는 말하면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침대 위에 있던 박유진은 얼른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으로 갔다.심미연이 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박유진은 보온통 하나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매트에는 흰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속으로 어떤 느낌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 성큼성큼 걸어가 슬리퍼를 벗고 흰 신발로 갈아신은 뒤 손을 뻗어 보온통을 받았다.“가자,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마침 차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심미연은 그제야 박유진이 옷을 갈아입은 것을 보았다.‘참 빠르네.’차에 오른 심미연이 보온통을 열
심미연은 놀라 물었다.“뭐라고 했어요?”임현은 심호흡을 하고서 더 강한 말투로 말했다.“강지한 대표님께서 저에게 심태하를 빼앗을 소송을 부탁했어요.”그제야 똑똑히 들은 심미연은 마침내 반응을 보이며 안색이 냉랭해졌다.“다른 사람을 섭외해 내 아들을 빼앗으라고 하세요. 그때가 되면 난 재판 현장을 생방송으로 진행해 달라고 신청할 거예요. 내가 어떻게 강지한 대표가 경성시에서 쪽팔리게 하는지 두고 보라고 하세요.”강지한이 무슨 염치로 그와 아들을 빼앗겠다고 하는가!“저는 이미 대면으로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제가 경성시 변호사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큰소리쳤어요.”이젠 변호사계에서 명성을 떨친 고급 변호사이고 연봉도 낮지 않았던 임현은 강지한이 수작을 부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더군다나 그녀의 배후에는 심미연이 있으니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어떻게 망신시키는지 똑똑히 보여줄 거예요.”심미연은 쌀쌀하게 웃었다.“또 임현 씨를 찾아오면 직접 나를 찾으라고 하세요.”심미연은 강지한이 얼마나 파렴치한지 보려고 했다.온지유를 위해 그녀를 여러 번 모함했고 결국 가짜 죽음을 통해서야 탈출할 수 있었다.너무 역겨웠다.“변호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무조건 변호사님 편이에요.”임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변호사님이 주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없었다.“네. 알고 있어요. 저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이만 끊을게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차 안에 앉아 있던 박유진은 휴대폰이 울리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비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박 대표님, 방금 강 대표님 쪽에서 태하 도련님의 양육권을 빼앗기 위해 소송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박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었다.“그래, 알았어.”‘강지한이 심태하를 빼앗으려 한다고? 네 딴 데 뭔데?’“회사에 급히 사인해야 할 문서가 있는
이진영이 대답했다.“담배 피우러요.”마음속의 괴로운 감정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심미연은 알았다고 하며 이진영이 떠나가게 놔두고는 성큼성큼 병상으로 걸어가 신하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하린아.”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신하린도 울었다.“미연아, 난 이젠 폐인이 됐어.”“아니야, 넌 폐인이 아니야. 넌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정상인처럼 걸어 다니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심미연이 위로했다.“난 다리가 없어.”앞으로 의족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보통 사람처럼 짧은 치마와 반바지를 입을 수 없었고 생활도 불편해질 것이다.“하린아...”심미연은 그녀를 꼭 껴안고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심태하가 깨어나 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세수하고는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먹은 후 위층에 올라가서 짐을 챙겼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거실에 박유진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멍해졌다.“아빠, 일하러 가지 않았어요? 어떻게 돌아왔어요?”예전에 엄마 아빠는 일이 바쁠 때 항상 그를 집에 두고 혼자 놀게 했다.그래서 깨어나 보니 집에 그들이 없는 것을 보고 심태하는 바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오늘은 처음 유치원에 가는 날이니 당연히 데려다줘야지!”박유진은 그가 책가방을 메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책가방도 다 준비했어? 참 잘하네.”심태하는 2살 때부터 혼자서 샤워하고 세수하며 양치했을 뿐만 아니라 옷도 정리했다.3살이 된 그는 자립 능력이 아주 훌륭했다.노인들은 늘 한 아이가 너무 총명하고 유능하면 빨리 하늘나라로 간다고 말하곤 한다.그래서 심미연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갖춘 아들을 보고 늘 불안해했다.오늘 유치원에 가야 하는 줄 몰랐던 심태하는 원래 강지한을 찾으러 갈 계획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노트북과 휴대폰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심태하는 곧 침착하게 웃으며 박유진을 보며 부드럽
유치원에서 심태하는 착했고 말도 잘 들었으며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어떤 아이들은 자지 않으려고 훌쩍거렸고 어떤 애들은 분유를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다.세 명의 선생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심태하는 선생님이 방심한 틈을 타서 가방을 메고 조용히 교실을 나섰다.오후의 햇살이 듬성듬성한 구름에 가려져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드리워 더욱 조용하고 신비로워 보였다.심태하는 혼자 학교를 걷고 있었다.마침내 그는 교실에서 멀리 떨어진 모두에게 잊힌 것만 같은 구석을 찾았다. 그곳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갈라진 바닥 사이로 들꽃이 고개를 내밀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왜 왔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심태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어깨에 메고 있던 약간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장난감이 든 게 아니라 가볍지만 강력한 공능을 가진 휴대용 컴퓨터가 들어 있었다.그의 동작은 전쟁터를 오랫동안 겪은 병사처럼 신속하고 숙력되었다.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살며시 누르니 화면이 밝아지면 어두운 구석에서 청자색 빛이 유난히 빛났다.심태하의 눈빛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는데 마치 전 세계의 소란은 이미 차단되고 그와 눈앞에는 코드 세계만 남은 것 같았다.키보드는 그의 손끝에서 점프하며 매번 두드릴 때마다 가벼운 ‘다다다’ 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고 이 조용한 공간에서 더욱 잘 들렸다. 이 소리는 마치 전쟁터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자극을 불러일으켰다.화면에는 줄줄이 코드가 물 흐르듯 나타났다가 곧 새로운 지시에 덮어졌다. 이것은 그의 지혜와 노력의 결과로서 소리 없이 수많은 미지의 기적을 쌓고 있었다.심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기도 하며 자신의 세계에 완전히 빠졌다. 가끔 미풍이 불어와 주변의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마치 그의 이 특별한 ‘일’을 응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기서 시간은 마치 의미를 잃은 것 같았는데 그저 화면에 있는 커서만 계속 반짝이
그 사람은 강 대표의 라이벌일까?이런 말을 성무진은 감히 강 대표님에게 할 수 없었다. 말만 하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지금 회사 내부에서는 새로운 상황이 계속 전해지고 있으며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강지한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빛이 횃불처럼 밝아졌다.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그는 창가에 서서 시끌벅적한 도시를 굽어보며 지난번 사이버 공격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공격이 자동으로 풀리면서 회사는 거의 손실을 보지 않았다.그러나 이번 공격은 기세가 등등했고 회사의 손실은 적어도 백억을 넘었을 것이다.시간이 생명이다. 그는 1초의 망설임이라도 회사를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해커를 찾아봐. 반드시 반 시간 내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해. 값은 그가 부르는 대로 준다고 해.”강지한의 말소리는 마치 이빨 사이로 밀려 나오는 것처럼 낮고 단호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다.성무진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사무실에서 나와 사람을 찾으러 갔다.50분이 흘렀을 때 심태하는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메일을 다 읽어본 그는 400억을 십분 안에 준비하라는 회신을 보냈다. 먼저 200억 예약금을 내고 일을 완성한 다음 나머지 200억을 내라는 내용이다.‘흥, 엄마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괴롭힌 대가야. 400억은 작은 벌에 속할 뿐이야.’성무진이 메일 내용을 강지한에게 알려주자 그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이제야 그는 이름을 S라고 지은 이 해커가 일부러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제 증거를 찾으면 꼭 돈을 되돌려받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보낼 것이라고 다짐했다.성무진은 가장 빠른 속도로 돈을 해커의 계좌로 보냈다. 그 해커는 돈을 받자마자 처리하기 시작했다.시간이 1분 1초씩 지나갔고 1초가 무한히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9분 59초가 되었을 때 원래 혼란스럽게 흘러 다니던 데이터가 기적처럼 안정되었고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마지막 방화벽도
신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우리 양아들 찾으러 가봐! 난 바보짓을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아까 오른쪽 다리가 텅 빈 것을 발견했을 때 신하린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이상한 눈빛이 두려웠고 그녀를 장애인이라고 부를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살아갈 용기마저 잃었다.그러나 이때 심미연은 다른 사람의 눈빛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어쩐지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신하린은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알았어. 나 먼저 갈게.”심미연은 아들이 걱정되어 더 말하지 않고 곧장 떠났다.계단을 내려갈 때,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박유진에게 전화했다. 심태하가 실종됐다고 말하자 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이 멘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하지 마. 태하는 괜찮을 거야! 똑똑한 아이니까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을 거야. 지금 어디지? 내가 데리러 갈게, 함께 유치원으로 가보자.”오늘따라 심태하가 너무 얌전해서 꼭 사고를 칠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고가 발생했다.“아니야, 난 직접 갈 테니 오빠도 빨리 학교로 곧장 와!”심미연은 전화를 끊은 후 미간을 찌푸리며 피곤한 생각이 들었다. 심태하가 그를 찾게 하지 않으려 한다면 아마 학교의 감시 시스템에도 손을 썼을 것이다.아이가 너무 똑똑해도 골치가 아팠다.그녀는 제일 빠른 속도로 운전해서 학교에 갔다.선생님은 그녀를 보자 연신 사과했다.“태하 어머니, 미안해요. 우리가 소홀했어요.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어요.”만약 아이가 정말 사고라고 생긴다면 그녀들의 책임은 정말 컸다.가장과 소통이 잘 되면 그나마 괜찮지만 소통이 잘 안 되면 그때는 분명히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유치원도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인데 그러면 모두 일자리가 없게 된다.“감시실로 데려가 주세요.”심미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그중 한 선생님이 손을 내밀어 방향을 알려주면서 말했다.“저희도 감시 모니터를 통해
심미연의 긴장됐던 마음이 그제야 풀리며 마음속에서는 쓰고 떫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아 아들의 나른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박유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고 시름을 놓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 순간, 혼란스럽고 걱정했던 마음이 눈앞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자 사르르 녹았다.눈앞의 그림자를 느낀 심태하는 부드러운 소용돌이에서 눈을 떴는데 마침 낯익고 엄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한 일이 생각난 심태하는 놀라서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려 얼른 낮은 소리로 불렀다.“엄마...”그의 목소리는 아직 덜 깨어있어 멍했고 그녀에 대한 의지가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그의 외침에 눈가가 붉어졌다. 오랫동안 쌓아둔 감정이 돌파구를 찾은 것 같았으나 이내 억누르고는 엄숙하게 꾸짖었다.“심태하! 누가 너더러 함부로 뛰어다니라고 했어? 너 때문에 전체 유치원의 직원들이 손에 하던 일을 내려놓고 널 찾으러 다녔어! 나와 네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걱정이 섞여 있었고 말마디마다 무거운 방망이처럼 심태하의 마음을 두드렸다,주변의 공기가 굳어진 것 같았다. 심태하는 그제야 자신이 따듯한 꿈나라에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표정을 한 사람들에게 단단히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심태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이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그를 파묻었다.그제야 그는 자신의 순간적인 충동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켰는지 깨닫고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며 자책했다.“미... 미안합니다...”심태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뉘우치며 사과했다. 이 다섯 글자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했고, 성의와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심미연을 바라보았는데 비난과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며 그는 더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심미연은 표정이 약간 사그라들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녀는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