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마침 집청소를 하던 심미연은 집으로 돌아온 박유진의 손에 물건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가 손에 든 물건을 받으려 했다.박유진이 그녀의 다정한 모습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들게. 네 일 다 끝났으면 같이 요리나 할까?”“그래!”심미연은 흔쾌히 대답했지만 마음은 조금 복잡했다.삼 년 동안, 박유진은 아무리 바빠도 늘 집에서 그들에게 요리를 해줬다.그런 박유진의 모습이 예전의 그녀와 너무 닮아 있었다.“왜 말이 없어? 무슨 생각 해?”그녀가 너무 조용하게 있자 이상함을 느낀 박유진이 한마디 물었다.심미연이 고개를 저었다.“아무 생각 안 했어, 그냥 피곤해서 그래.”박유진이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피곤하면 좀 쉬어. 이제 우리 부족한 거 없잖아. 그러니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마.”“하지만 앞을 보며 살아야지. 멈춰 있을 순 없잖아.”과거 그녀는 강지한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지만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다시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절대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박유진이 무심결에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미연아, 난 너만큼 훌륭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싫어지면 어떡하지?”두 사람은 말을 하며 부엌에 들어섰다.박유진이 그녀의 손을 놓은 뒤 채소를 싱크대에 내려놓았다.심미연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그에게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박유진이 그녀의 소매를 정리해주며 말했다.“넌 그냥 옆에서 보다가 잘못된 게 있으면 알려줘.”심미연은 얌전히 서서 박유진이 요리하는 걸 바라보았다.이때 집으로 들어온 신하린은 따뜻하고 로맨틱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고는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생활의 향기가 가득한 부엌, 어둡지만 부드러운 조명, 박유진은 스토브 앞에 서서 냄비 안의 요리를 볶고 있었다. 집중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요리에 얼마나 큰 정성을 쏟는지 알 수 있었다.곁에 서서 방금 씻은 토마
참지 못하고 풉, 웃음을 터뜨린 신하린은 손을 뻗어 깜찍한 아이의 작은 볼을 꼬집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이모한테 전부 얘기해. 이모가 사줄게.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만큼 이모 돈 많아.”거짓말은 아니었다. 신하린에게는 정말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다. 작업실을 막 오픈했을 땐 매일 기도를 올리면서 여기저기 부탁해 프로젝트를 가져왔었다. 하지만 지금 작업실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전부 클라이언트가 직접 계약서를 들고 찾아온 것들이었다. 신하린은 더 이상 일이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법률 사무소의 수입까지 더해져 지금의 신하린은 온전한 부자라고 할 수 있었다. 책 몇 권이 아니라 집 몇 채, 차 몇 대를 사달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쁜 치마도 몇 벌 사줘요. 입원한 동생에게 선물하고 싶어요.”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여동생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픈 건 왜일까?“그 동생이 그렇게 좋아? 왜?”신하린은 그런 심태하가 이상하기만 했다. 심미연은 분명 심태하는 차가운 아이라 밖에선 누구를 보든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꼬마 아가씨한테는 과분하게 잘 해주는 것 같은데?’‘대체 뭐가 쌀쌀맞다는 거야.’“왜냐하면 저랑 똑같이 생겼으니까요!”심태하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깜빡이며 신하린을 쳐다보았다. “이모, 아니면 내일 저와 같이 쇼핑해요. 제가 직접 예쁜 원피스로 고르고 싶어요.”신하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뜨고 심태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급하게 선물하려고?”“저 다음 주면 생일이잖아요. 제가 사준 원피스를 입고 제 생일파티에 오라고 하고 싶어요.”심태하가 진지하게 말했다. “좋아!”신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강지한을 꼭 닮은 얼굴은 아무리 봐도 잘생긴 것 같았다. 만약 아이가 강지한을 만난다면 바로 아빠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럼 약속한 거예요. 이모, 먼저 잠깐 놀고
어린 아이라 아직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몰랐다. 화가 나는 상황에 기쁜 척을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얘기해 봐. 이모가 해결해줄게.”말이 없는 심태하의 모습에 조바심을 느낀 신하린의 말투가 조금 조급해졌다. “제 아빠 이름이 강지한이예요? 이노하이브의 대표?”심태하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알려줬어?”신하린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심미연, 추진력도 빠르지.’“그 사람, 혹시 완전 나쁜 남자예요? 엄마에게 하나도 안 잘해줬어요?”심태하가 또 물었다. 신하린은 그만 멍해졌다. ‘미연이가 자기 아들에게 이런 말은 안 했을 텐데.’게다가 심태하에게 아빠의 존재를 알려줬다고 해도 이렇게 강지한을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누가 알려준 거야? 설마 박유진 씨?’‘아냐, 박유진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제 말이 맞나 보네요, 그렇죠?”신하린의 표정을 본 심태하의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신하린이 얼른 대답했다. “그건 엄마와 아빠 사이의 일이야. 엄마 입에서 나온 것만이 사실이고 믿을 수 있는 얘기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했든 그냥 듣고 넘겨. 믿을 필요 없어.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의 한 가지 모습만 봤거든. 그건 진짜 그 사람이 아니야.”신하린의 말을 알아들은 심태하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제가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볼래요.”“그러면 지금은 웃으면서 기분 좋게 지내볼까?”신하린이 심태하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아이를 달랬다. 몽글몽글한 얼굴을 꼬집을 때의 촉감이 너무 좋았다. ‘또 꼬집고 싶네.’하지만 심태하는 신하린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모, 가요.”말을 마친 심태하는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의 손을 힐끔 내려다보던 신하린이 피식, 웃어버렸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심미연은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고 박유진이 서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하린은 괜히 부러워졌다. ‘행복해 보여.’심태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린아, 태하가 하는 얘기 들었어? 얼른 움직여. 태하 이모부 찾으러 가야지.”말하며 심미연은 신하린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저 꽤 괜찮은 남자들 많이 알고 있는데, 소개해줄까요?”박유진이 국그릇을 심미연 앞에 놓으며 늘 그렇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좋지. 오빠가 하린에게 소개해줘. 잘생기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밖에서 이상한 짓하는 사람은 안 돼. 이왕이면 식스팩도 있는 남자로.”단번에 모든 조건을 말한 심미연은 그제야 몇 쌍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다들 왜 그렇게 봐?”“네가 그런 남자를 소개 받고 싶은 거야, 아니면 하린 씨가 받고 싶은 거야?”박유진 눈가의 미소는 사자질 줄 몰랐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건 네 요구사항이잖아. 난 그거 아냐.”심미연에게 책임을 떠넘긴 신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심태하는 큰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식스팩이 뭐예요?”‘나 어려서 못 알아듣는다고 일부러 이러는 걸까?’흥!“아빠한테 옷 올려서 만지게 해달라고 해 봐. 복근이 여섯 개가 있는지 세어보면 알 수 있어.”신하린이 음식을 집어 그릇에 놓으며 심태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심태하가 박유진을 쳐다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식스팩이 어떻게 생긴 건지 보여줄 수 있어요?”심미연도 박유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식스팩의 존재 여부를 알고 싶은 표정이었다. 심미연의 눈빛을 마주한 박유진의 눈빛이 그윽하게 짙어졌다. “왜? 너도 보고 싶어? 아니면, 만지고 싶은 건가?”신나게 구경 중이던 심미연은 저도 모르는 사이 구경의 대상이 되자 순간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아냐. 헛소리 하지 마.”‘애가 뭘 배우겠어.’심태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심미연을 쳐다보았다. “엄마, 왜 안 만지고 싶어?”심미연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태하, 말 말고 얌전히 밥 먹어.”
심미연과 강지한은 이미 오래 전 지나간 과거였다. 진작 깨끗하게 헤어졌고 심미연의 마음엔 강지한의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강지한이 남자를 거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미연은 박유진과 잠자리를 가질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건 어때?”심미연의 이런 상황에 신하린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의사에게 희망을 걸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엔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 좋을지 내가 알아볼게.”매번 그런 상황이 오면 심미연은 늘 박유진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 역시 이런 심리적 거부감을 치료해 박유진과 잘 시작해 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 더는 박유진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잘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심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 “내일 파티가 있어. 내가 몰래 경성에서 제일 유능한 정신과 의사를 알아봐 올게.”신하린은 진심으로 심미연이 행복하길 바랐고 그래서 그녀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갓 박유진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늘 한결같이 심미연을 대했다. 만약 심미연이 박유진과 결혼까지 가게 된다면 그녀는 분명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너 예전엔 강지한 엄청 싫어했었다. 그래서 내가 강지한과 만나는 걸 마땅치 않아 했었고. 하지만 오빠와 내 일에는 오히려 지극정성이네. 그러고 보니 네 마음속에 오빠는 꽤 괜찮은 사람인가 봐.”심미연이 웃는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신하린이 그런 심미연을 힐끔 노려보았다. “강지한 씨는 너와 있을 땐 늘 차가운 모습이었어. 외식할 때도 늘 네가 그 사람을 챙겨줬었고. 그런데도 그 인간은 늘 당연하다는 듯이 네 모든 사랑을 받고만 있었어. 그게 전부 네가 본인을 좋아하니까 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잖아. 그러니 그 인간은 네가 보이지도 않고 널 마음에는 더더욱 두지도 않았던 거야. 그런 인간을 내가 어떻게 좋아해.”강지한의 얘기에 마음속 분노가 들끓었다. ‘그런 개 같은 인간은 미연이가 모든 걸 내려놓고 사
심미연이 입술을 짓이겼다. 얼마 전 심서연이 전화로 딸 얘기를 꺼낸 것을 떠올린 심미연은 혹시 심서연은 진작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은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심서연이 심미연은 살아있고 심지어 아이까지 낳았다는 정보로 거래를 해 강씨 가문에 들어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만약 강지한이 정말 심미연이 살아있고 그의 아들까지 낳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왜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아냐. 원호 선배가 내 모든 흔적을 지웠어. 강지한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었을 거야.’침묵으로 일관하는 심미연을 보며 신하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심미연이 뭔가를 떠올렸다. 잠시 후, 깊은 숨을 들이쉰 심미연이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내가 조사해보면 알겠지.””그래. 우리도 너무 오래 자리 비웠어. 일단 내려가자. 나중에 박지윤이 알면 우리가 뒤에서 몰래 험담이라도 한 줄 알겠어.”신하린이 심미연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너 심서연 조심해. 태하 곁에서 경호원 더 붙여야겠어. 아니면 내가 마음이 안 놓여.”신하린은 그 순간 심태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하는 대체 강지한 그 쓰레기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누가 알려준 거지?’그런 생각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신하린이 손에 힘을 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화가 났어? 너 때문에 내 손 부러질 것 같아.”귓가에 심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신하린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보던 신하린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신하리는 심태하와의 대화 내용을 심미연에게 전했다. 얘기를 들은 심미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연아, 혹시 심서연이 가르쳐준 거 아닐까?”신하린은 박유진의 인성의 100% 신뢰했다. 그는 절대 심태하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심미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도 있지.”‘아무래도...’‘심서연이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네 부모님과 심서연처럼 악독한 인
“그 사람들 누구에게나 잘해주면서 정작 너한테만 그렇게 구는 거야! 혹시 네가 그 집 친딸이 아닌 거 아니야?” 신하린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몰래 DNA 검사를 해봤는데 결과는 당연히 그들의 딸이었지.” 신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부모님도 정말 드물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다행히 외할머니가 계셔. 외할머니는 나한테 정말 잘해주시거든.” 다만 조은하는 양경자에게 전혀 잘해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양경자의 병이 그렇게까지 악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경자를 떠올리니 심미연의 마음이 아려왔다. 돌아온 지 이틀째인데 아직 양경자를 찾아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양경자라면 심미연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외할머니는 온지유가 죽인 거야. 이제 온지유도 마땅한 대가를 받았으니 외할머니도 편히 잠들 수 있겠지.” 신하린은 그 날의 재판을 떠올렸다. 임현은 법정에서 당당하게 나서서 온지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임현은 그 일 이후 유명세를 타며 변호사로서 승승장구했다.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임현의 뒤에는 줄곧 심미연이 있었다는 걸. 진짜 대단한 사람은 심미연이었다. 그 후 그녀는 심미연에게 당시 그렇게 많은 증거가 있었는데 왜 온지유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무기징역으로 만든 거냐고 물었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온지유가 평생 고통 속에서 살게 할 거야. 그리고 내 성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할 거고.” 그리고 심미연은 그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임현 씨를 찾아간 건 일종의 도박이었어. 그런데 임현 씨가 법정에서 내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해줬지!” 심미연은 임현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 몇 년간 둘은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때 나한테는 왜 안 찾아왔어! 흥! 나는 진짜 네가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지금도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땐 정말
신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녀와 이진영은 원래 사랑 때문에 함께한 게 아니었다. 당시엔 그저 서로 필요한 것이 있어서였을 뿐 이미 오랫동안 연락도 없었으니 더 이상 얽힐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이진영은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녀가 갑자기 끼어드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절 열 개를 부수는 한이 있어도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깨뜨리지 말라는 말도 있다. 이진영의 결혼을 망치는 그런 비도덕적인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넌 진영 도련님을 사랑하지 않아?” 심미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신하린이 이진영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신하린은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함께 있을 때부터 우리 둘이 불가능하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어. 그 후로 연락이 끊겨서 나도 그냥 헤어진 거라고 생각했어. 특별히 슬프다는 느낌도 없었어. 가끔씩 떠올리긴 했지만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심미연은 잠시 침묵했다. 신하린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진영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느껴 이미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 심미연은 그런 신하린이 안타까웠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가야겠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이진영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박유진과 심태하가 매트 위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진지했다. 그들은 마치 부자처럼 보였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 정말 사이가 좋다니까!” 아마도 박유진처럼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신경 써주는 남자는 많지 않을 거다. 게다가 이 아이는 친아들도 아니었다. “응, 태하가 오빠를 정말 잘 따른다니까.” 심미연은 자신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박유진은 심태하를 돌보면서 동시에 그녀까지 챙겨줬다. 그녀는 여러 번 도우미를 고용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도우미가 그들을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