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던 중 휴대폰 벨이 울렸다.이진영이 눈썹을 찡그렸다.‘설마 신하린 이 여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음식을 들고 와서 같이 밥을 먹자는 건가? 흥! 그러면 태도가 좋은 걸 봐서 그렇게 심하게 굴지 말아야지.’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꺼냈다.하지만 화면에는 강지한이라는 이름이 떴다.‘왜 강지한이 갑자기 전화한 거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술 마시러 나와.”강지한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왜 갑자기?”이진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강지한이 기분 나쁜 건가? 오죽하면 나를 찾아 술을 마시려는 거지?’“말이 너무 많아. 늘 가던 곳으로 와.”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이진영은 휴대전화를 접고 젓가락을 들어 탁자 위의 야채 요리를 다 먹은 후에야 집을 나섰다.차를 몰고 클럽에 도착하자 그는 그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듯했다.그는 미간을 비비고 나서야 여자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한유나 씨.”그는 주동적으로 말을 꺼냈지만 표정은 냉담했다.“어제 저를 바람맞혔어요.”여자는 긴 머리를 쓸어넘겼는데 분위기가 싸늘했다.“어제 급한 일로 출장을 가서 전화하는 걸 깜빡했어요. 미안해요.”이진영의 제대로 설명했다.한유나는 명문가 아가씨이고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많은 남자 마음속의 여신이었다. 그래서 아마 감히 그녀를 바람맞힌 사람이 그가 처음일 것이다.한유나는 정말 화를 내 마땅했다.“사과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한유나는 청초한 얼굴에 하는 일까지 좋아 사람들에게 늘 깔끔한 여자라는 느낌을 줬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초대해서 같이 술 한잔할까요?”이진영은 까칠함을 거두며 온화하게 말했다.“이진영 씨, 물어볼 게 있어요.”평생의 큰일에 관해 한유나도 이진영과 함께 있는 것이 사랑 때문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속마음을 분명히 묻고 싶었다.손님 대하듯 서로 존경하는 것이 매일 싸우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이진영은 웃
한유나는 이진영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코끝에 전해지는 남자의 은은한 재스민 향을 맡았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이진영이 도대체 어떤 남자인지 상상하게 되었다.“앉으세요.”소리를 듣고서야 한유나는 정신을 차렸다.어느덧 두 사람은 룸에 들어섰다.“왜요? 제가 잘생겼어요? 왜 계속 이렇게 쳐다봐요?”이진영이 웃으며 조롱하는 걸 보니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느껴졌다.분명히 두 사람은 오늘에야 처음 만났는데 말이다.한유나는 허리를 숙이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이진영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 종업원이 술과 간식을 배달해 왔다.이진영은 잔을 들고 술을 따랐다.그를 바라보는 한유나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호감이 조금 생겼다.얼굴도 잘생기고 상냥한 그런 남자는 아마 모든 여자가 좋아할 것이다.“마실 수 있으면 조금 마시고 아니면 음료수를 다시 주문할게요.”이진영은 술을 다 따르고 방금 그 일이 생각난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아까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한유나는 손을 뻗어 술 한 잔을 들고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조금 마실 수 있으니 음료는 주문 안 해도 돼요.”이진영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 술은 사과의 의미로 마실게요.”한유나는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이 사람이 책임감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적어도 그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다.다른 남자였으면 벌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을 텐데 말이다.이진영은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고 그녀와 함께 마신다는 말도 없이 한 잔을 단숨에 해치웠다.한유나도 그의 모습을 보고 술잔을 비우고 티슈를 꺼내 입을 닦으며 이진영과 눈을 마주쳤다.“이진영 씨, 나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 이제부터 심각한 질문을 할 거예요.”이진영은 다시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내가 총각인지 묻고 싶은 거라면 진지하게 말해줄게요. 아니에요.”한유나가 무엇을 물어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가
이진영은 몸을 움직여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영롱한 술잔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는데 그 동작 속에는 끝없는 이야기와 못다 한 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한유나의 마음속에 좋지 않은 생각이 스쳤다.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귓전에 들려왔다.“우리 같은 가정에서 태어나면 결혼의 선택은 종종 개인적인 감정의 경계를 넘어 가족의 책임과 기대 때문에 꽁꽁 묶인다는 것을 한유나 씨도 알잖아요. 그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사랑하는 여자가 숨겨져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결혼이 양가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있고 한유나 씨와 나 사이에는 적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에요.”그는 이 말을 할 때 눈빛을 알 수 없는 곳에 두었는데 마치 그곳을 꿰뚫고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런 눈빛이 한유나의 마음을 이유 없이 옥죄게 했다.그녀는 사실 이진영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면했을 때 그녀는 마음이 유난히 아팠다.“한유나 씨, 이 문제는 내가 직접 대답할 수 없어요.”이진영은 시선을 거두며 술 한 잔을 마셨다.신하린에 대한 소유욕도 있고 침대 위에서의 느낌도 좋아하지만 신하린과의 관계를 여자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기껏해야 침대 동반자라고 할 수 있었다.서로 환심을 사며 몸의 위로를 찾는 그런 관계 말이다.한유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매운맛이 위까지 올라와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겉으로 보이는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가볍게 웃었다.“그렇다면 제 이해를 말할게요. 이진영 씨에게 여자가 있지만 여자친구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결혼한다면 이진영 씨는 그녀와 연락을 끊어야 해요.”그녀는 자신과 이진영이 아마도 이 가족의 혼인에 있어서 세심하게 배치된 두 개의 바둑알처럼 자신의 방향과 귀착점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 인식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남은 인생이
그 뒤를 이어 육현성이 캐주얼한 차림이지만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한 채 들어왔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어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듯했다.박인우는 갓 취직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평가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룸에 들어선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이 한유나로 쏠렸다.한유나는 테이블에 단정히 앉아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간단하게 묶었는데 잔머리 몇 가닥을 뺨에 늘어뜨려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더했다. 탐구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미소로 화답하는 한유나의 여유와 대범함이 호감을 자아냈다.인사와 자기소개를 주고받자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바뀌었다.이진영은 한유나와의 관계, 그리고 앞으로 부부가 될 가능성이 큰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했다.한유나 역시 이 감정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거침없이 언급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와 태연함을 드러냈다.그녀의 솔직함에 이진영은 부끄러웠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지한은 친구로서 어깨를 툭툭 치며 함께 화장실에 가자고 손짓했다.은밀하고 조금 비좁은 공간에서 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뿜으며 엄숙하지만 관심 어린 어투로 물었다.“진영아, 넌 항상 신하린과 함께 있지 않았어? 왜 갑자기 한유나와 이런 관계가 생겼어?”그의 눈빛에는 의심과 걱정이 섞여 있었는데 이진영의 감정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게 분명했다. 이진영은 복잡한 얼굴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마음가짐과 현재 상황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짧지만 깊어 오랜 우정의 깊은 호흡을 드러냈다.그 시각 경궁.신하린은 기분이 좋아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지고 눈동자에 희미하고 억척스러운 빛이 반짝이며 알코올이 주는 짧은 즐거움과 끝없는 근심이 뒤섞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쓰레기! 개자식!”취해서 약간 쉰 듯한 목소리였지만 말끝마다 또박또박 감정적으로 모든 불만과
“신하린? 무슨 일이야?”이진영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오자 심미연이 입술을 깨물고 말을 하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왜? 네 여자가 조사 중이야?”“신하린, 말을 해!”이진영은 강지한을 힐끗 쳐다보더니 여자가 놀랄세라 말투를 부드럽게 했다.심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신하린이 술에 취했는데 지금 시간이 있으면 구연궁으로 데리러 와요.”이진영은 곁에 있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대답했다.“알았어요. 금방 갈게요.”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혼자 오면 돼요. 강지한이 따라오지 못하게 해요. 보고 싶지 않으니.”외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강지한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의 변명 따위 더는 듣기 싫었다.해명해도 가슴에 자국이 남는 일이 있는데, 지나간 일에 얽매이기보다는 마음을 추스르고 배 속의 아기를 잘 돌봐야 한다.이진영은 누군가에게 강요당해 억지로 스피커폰을 켰는데 심미연의 말은 그대로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다.누군가가 곧 얼굴을 붉혔다.이 여자는 이진영에게 데리고 오지 말라고 특별히 부탁했다.그녀는 얼마나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이진영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움을 느끼며 얼른 대답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돌렸을 때 강지한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쳤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슬픔 가득한 모습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차인 줄 알겠어.”“심미연이 이혼하재.”강지한은 차가운 얼굴로 그 말을 할 때 마음속에 짜증이 났다.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출장중이었는데 먼저 전화해서 이 일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이일은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그러나 심미연은 이 기회를 빌려 그와 이혼하려고 했다.결혼 3년 만에 처음으로 심미연이 이혼 얘기를 꺼낸 것은 두 달 전이었다.그는 그녀가 단지 투정 부리는 거로 생각했다.오늘 밤 문 앞에서 그녀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심미연은 처음 이혼을 제의했을 때부터 그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실례할게요. 미안해요.”이진영은 태도가 좋고 표정도 온화해서 오히려 한유나가 함부로 추측하기 미안하게 했다.“급한 일이면 어서 가보세요.”“진영 형,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유나 누나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줄게요.”박인우는 이진영이 그를 믿지 않을까 봐 가슴을 치며 다짐했다.“한유나 씨, 괜찮겠어요?”이진영은 서둘러 떠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한유나에 물었다.남자가 너무 부드러웠는지 한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가 봐요.”이진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고 말했다.“참 착해요.”한유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어서 가요.”그들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 남자의 행동이 너무 다정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금 마음에 들었다.“그럼 나 먼저 갈게요. 더들 즐겁게 마셔! 이 술은 내가 살게!”이진영은 호기롭게 말하고 갔다.한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후에 그녀는 돌아가서 엄마에게 부탁해 사람을 찾아 알아보라고 했다.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그녀는 아직 사랑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한유나 씨, 계속 마셔요.”육현성은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고는 잔을 들어 그녀와 부딪쳐 고개를 들어 단숨에 마셨다.엄마는 그에게 이진영의 여동생과 접촉해서 그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했다. 원래는 이따가 이진영과 이 일을 이야기해서 이진영의 태도를 보려 했는데 이진영이 떠났으니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둘이 술을 마시는 동안 박인우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육현성은 술에 취해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다가 박인우에게 물었다.“강지한이 어디 갔어?”박인우는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방금 진영 형이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요? 설마 진영 형 집에 따라갔나?”이진영이 집에 일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육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강지한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한유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이씨 가문과 한씨 가문이 조건이 맞으니 제가 이진영 씨와 선을 본 것도 당연해요.”그녀는 이진영과 선을 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도 선을 봐야 한다.오늘 저녁에 이진영과 지내보니 이진영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그녀는 만족했다.육현성은 조용히 술을 마셨다.한유나의 말이 맞았다. 그들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결혼은 가문끼리 조건이 맞아야 한다.온씨 가문은 이미 초라해졌고 온지유는 과부라는 신분까지 있다...그와 온지유는 함께 있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서 좀 괴로웠다.한유나는 그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여 얼떨결에 말했다.“술로 근심을 풀기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해요.”무슨 일이든 해결 방법이 있으니 당장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걱정할 필요 없다.육현성은 고개를 들어 컵 속의 술을 다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문제가 좀 있는데 답이 없어요. 하지만 저도 이미 포기했어요.”온지유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이미 해결책을 찾았나 봐요.”잘 모르는 사이라 한유나는 계속 물을 이유가 없었다.그때 박인우이 돌아왔다.“지한이는 찾았어?”육현성이 물었다.“못 찾았어요. 하지만... 전화했더니 졸려서 벌써 집에 가서 잔대요.”박인우가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항상 어딘가 이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그만 헤어지죠. 네가 한유나 씨를 집에 데려다줘.”육현성이 술잔을 놓고 일어서자 한유나도 따라 일어섰다.“제가 전화해서 기사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테니 데려다줄 필요 없요.”“그건 안 돼요. 진영 형이 떠날 때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당부했어요.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박인우가 다가가 가방을 들어주고 외투를 건넸다.이진영이 분부한 일을 그는 당연히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평소 연구소에서 밤늦게
남자는 곧 답장했다.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본 후에 알려 주겠다고 말이다.한유나는 휴대전화를 쥐고 손끝으로 화면 글씨를 쓰다듬으며 안심했다.질문을 하는 대로 바로 대답하는 이것이 아마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이진영은 힘겹게 신하린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한유나의 문자를 받았다. 그는 백미러 속 여자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보고 문자를 빠르게 편집해 답장했다.그와 한유나의 관계가 좋을수록, 안정적일수록 차 뒷좌석의 여자도 안전해진다.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녀를 평생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굳이 그녀를 묶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박유진만 있는 것을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문자를 보낸 후 그는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진영아, 늦은 시간에 전화한 건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엄마, 나 오늘 한유나 씨랑 만났는데 서로 느낌이 괜찮았어요. 아빠랑 시간을 내서 유나 씨 부모님이랑 같이 밥 먹으면서 관계를 정하는 게 어때요?”이진영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듯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바로 네 아빠와 상의해 보고 이따가 답장할게.”길게 내뱉는 방혜자의 목소리에 희열이 역력했다.그녀는 정말 꿈에서라도 이진영과 한유나를 맺어주고 싶었다.“알았어요.”이진영은 응낙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방혜자는 당사자보다 더 조급해져 반드시 빨리 결정하리라 마음먹었다.그는 결혼식에 나오기만 하면 되고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전화를 끊자마자 뒷자리에 누운 여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긴 머리카락이 그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둠 속에서 조금 무서웠다.“이진영, 개자식! 지질남!”여자는 목청을 돋우어 욕했는데 술을 마신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이진영의 안색이 갑자기 보기 흉하게 변했다.그는 그녀 외에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는데 쓰레기라니.“이진영, 안아줘...”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
“미연아...” 박유진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낮고 부드럽게 입을 떼며 적막을 깨뜨렸다. “응?” 심미연이 가볍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눈빛도 온통 부드러웠다. 박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미연아, 오늘... 괜찮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깊었다. 온전히 그녀만을 향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유진은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왔다. 특히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던 그때 그는 한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너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릴까 봐 24시간 내내 곁을 지키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박유진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순순히 치료를 받아들이고 의사의 말에 성실히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우울증을 극복해냈다. 지금 그때의 힘든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박유진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상처투성이인 마음과 불완전한 몸으로는 완벽한 박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오늘 그녀는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박유진은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결국 아직도 그 벽을 넘지 못한 듯했다.그는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술을 살짝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가 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예전 진성에 있을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