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던 중 휴대폰 벨이 울렸다.이진영이 눈썹을 찡그렸다.‘설마 신하린 이 여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음식을 들고 와서 같이 밥을 먹자는 건가? 흥! 그러면 태도가 좋은 걸 봐서 그렇게 심하게 굴지 말아야지.’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꺼냈다.하지만 화면에는 강지한이라는 이름이 떴다.‘왜 강지한이 갑자기 전화한 거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술 마시러 나와.”강지한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왜 갑자기?”이진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강지한이 기분 나쁜 건가? 오죽하면 나를 찾아 술을 마시려는 거지?’“말이 너무 많아. 늘 가던 곳으로 와.”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이진영은 휴대전화를 접고 젓가락을 들어 탁자 위의 야채 요리를 다 먹은 후에야 집을 나섰다.차를 몰고 클럽에 도착하자 그는 그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듯했다.그는 미간을 비비고 나서야 여자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한유나 씨.”그는 주동적으로 말을 꺼냈지만 표정은 냉담했다.“어제 저를 바람맞혔어요.”여자는 긴 머리를 쓸어넘겼는데 분위기가 싸늘했다.“어제 급한 일로 출장을 가서 전화하는 걸 깜빡했어요. 미안해요.”이진영의 제대로 설명했다.한유나는 명문가 아가씨이고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많은 남자 마음속의 여신이었다. 그래서 아마 감히 그녀를 바람맞힌 사람이 그가 처음일 것이다.한유나는 정말 화를 내 마땅했다.“사과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한유나는 청초한 얼굴에 하는 일까지 좋아 사람들에게 늘 깔끔한 여자라는 느낌을 줬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초대해서 같이 술 한잔할까요?”이진영은 까칠함을 거두며 온화하게 말했다.“이진영 씨, 물어볼 게 있어요.”평생의 큰일에 관해 한유나도 이진영과 함께 있는 것이 사랑 때문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속마음을 분명히 묻고 싶었다.손님 대하듯 서로 존경하는 것이 매일 싸우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이진영은 웃
한유나는 이진영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코끝에 전해지는 남자의 은은한 재스민 향을 맡았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이진영이 도대체 어떤 남자인지 상상하게 되었다.“앉으세요.”소리를 듣고서야 한유나는 정신을 차렸다.어느덧 두 사람은 룸에 들어섰다.“왜요? 제가 잘생겼어요? 왜 계속 이렇게 쳐다봐요?”이진영이 웃으며 조롱하는 걸 보니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느껴졌다.분명히 두 사람은 오늘에야 처음 만났는데 말이다.한유나는 허리를 숙이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이진영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 종업원이 술과 간식을 배달해 왔다.이진영은 잔을 들고 술을 따랐다.그를 바라보는 한유나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호감이 조금 생겼다.얼굴도 잘생기고 상냥한 그런 남자는 아마 모든 여자가 좋아할 것이다.“마실 수 있으면 조금 마시고 아니면 음료수를 다시 주문할게요.”이진영은 술을 다 따르고 방금 그 일이 생각난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아까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한유나는 손을 뻗어 술 한 잔을 들고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조금 마실 수 있으니 음료는 주문 안 해도 돼요.”이진영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 술은 사과의 의미로 마실게요.”한유나는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이 사람이 책임감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적어도 그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다.다른 남자였으면 벌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을 텐데 말이다.이진영은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고 그녀와 함께 마신다는 말도 없이 한 잔을 단숨에 해치웠다.한유나도 그의 모습을 보고 술잔을 비우고 티슈를 꺼내 입을 닦으며 이진영과 눈을 마주쳤다.“이진영 씨, 나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 이제부터 심각한 질문을 할 거예요.”이진영은 다시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내가 총각인지 묻고 싶은 거라면 진지하게 말해줄게요. 아니에요.”한유나가 무엇을 물어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가
이진영은 몸을 움직여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영롱한 술잔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는데 그 동작 속에는 끝없는 이야기와 못다 한 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한유나의 마음속에 좋지 않은 생각이 스쳤다.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귓전에 들려왔다.“우리 같은 가정에서 태어나면 결혼의 선택은 종종 개인적인 감정의 경계를 넘어 가족의 책임과 기대 때문에 꽁꽁 묶인다는 것을 한유나 씨도 알잖아요. 그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사랑하는 여자가 숨겨져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결혼이 양가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있고 한유나 씨와 나 사이에는 적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에요.”그는 이 말을 할 때 눈빛을 알 수 없는 곳에 두었는데 마치 그곳을 꿰뚫고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런 눈빛이 한유나의 마음을 이유 없이 옥죄게 했다.그녀는 사실 이진영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면했을 때 그녀는 마음이 유난히 아팠다.“한유나 씨, 이 문제는 내가 직접 대답할 수 없어요.”이진영은 시선을 거두며 술 한 잔을 마셨다.신하린에 대한 소유욕도 있고 침대 위에서의 느낌도 좋아하지만 신하린과의 관계를 여자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기껏해야 침대 동반자라고 할 수 있었다.서로 환심을 사며 몸의 위로를 찾는 그런 관계 말이다.한유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매운맛이 위까지 올라와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겉으로 보이는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가볍게 웃었다.“그렇다면 제 이해를 말할게요. 이진영 씨에게 여자가 있지만 여자친구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결혼한다면 이진영 씨는 그녀와 연락을 끊어야 해요.”그녀는 자신과 이진영이 아마도 이 가족의 혼인에 있어서 세심하게 배치된 두 개의 바둑알처럼 자신의 방향과 귀착점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 인식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남은 인생이
그 뒤를 이어 육현성이 캐주얼한 차림이지만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한 채 들어왔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어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듯했다.박인우는 갓 취직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평가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룸에 들어선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이 한유나로 쏠렸다.한유나는 테이블에 단정히 앉아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간단하게 묶었는데 잔머리 몇 가닥을 뺨에 늘어뜨려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더했다. 탐구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미소로 화답하는 한유나의 여유와 대범함이 호감을 자아냈다.인사와 자기소개를 주고받자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바뀌었다.이진영은 한유나와의 관계, 그리고 앞으로 부부가 될 가능성이 큰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했다.한유나 역시 이 감정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거침없이 언급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와 태연함을 드러냈다.그녀의 솔직함에 이진영은 부끄러웠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강지한은 친구로서 어깨를 툭툭 치며 함께 화장실에 가자고 손짓했다.은밀하고 조금 비좁은 공간에서 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뿜으며 엄숙하지만 관심 어린 어투로 물었다.“진영아, 넌 항상 신하린과 함께 있지 않았어? 왜 갑자기 한유나와 이런 관계가 생겼어?”그의 눈빛에는 의심과 걱정이 섞여 있었는데 이진영의 감정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게 분명했다. 이진영은 복잡한 얼굴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마음가짐과 현재 상황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짧지만 깊어 오랜 우정의 깊은 호흡을 드러냈다.그 시각 경궁.신하린은 기분이 좋아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지고 눈동자에 희미하고 억척스러운 빛이 반짝이며 알코올이 주는 짧은 즐거움과 끝없는 근심이 뒤섞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쓰레기! 개자식!”취해서 약간 쉰 듯한 목소리였지만 말끝마다 또박또박 감정적으로 모든 불만과
“신하린? 무슨 일이야?”이진영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오자 심미연이 입술을 깨물고 말을 하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왜? 네 여자가 조사 중이야?”“신하린, 말을 해!”이진영은 강지한을 힐끗 쳐다보더니 여자가 놀랄세라 말투를 부드럽게 했다.심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신하린이 술에 취했는데 지금 시간이 있으면 구연궁으로 데리러 와요.”이진영은 곁에 있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대답했다.“알았어요. 금방 갈게요.”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혼자 오면 돼요. 강지한이 따라오지 못하게 해요. 보고 싶지 않으니.”외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강지한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의 변명 따위 더는 듣기 싫었다.해명해도 가슴에 자국이 남는 일이 있는데, 지나간 일에 얽매이기보다는 마음을 추스르고 배 속의 아기를 잘 돌봐야 한다.이진영은 누군가에게 강요당해 억지로 스피커폰을 켰는데 심미연의 말은 그대로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다.누군가가 곧 얼굴을 붉혔다.이 여자는 이진영에게 데리고 오지 말라고 특별히 부탁했다.그녀는 얼마나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이진영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움을 느끼며 얼른 대답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돌렸을 때 강지한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쳤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슬픔 가득한 모습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차인 줄 알겠어.”“심미연이 이혼하재.”강지한은 차가운 얼굴로 그 말을 할 때 마음속에 짜증이 났다.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출장중이었는데 먼저 전화해서 이 일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이일은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그러나 심미연은 이 기회를 빌려 그와 이혼하려고 했다.결혼 3년 만에 처음으로 심미연이 이혼 얘기를 꺼낸 것은 두 달 전이었다.그는 그녀가 단지 투정 부리는 거로 생각했다.오늘 밤 문 앞에서 그녀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심미연은 처음 이혼을 제의했을 때부터 그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실례할게요. 미안해요.”이진영은 태도가 좋고 표정도 온화해서 오히려 한유나가 함부로 추측하기 미안하게 했다.“급한 일이면 어서 가보세요.”“진영 형,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유나 누나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줄게요.”박인우는 이진영이 그를 믿지 않을까 봐 가슴을 치며 다짐했다.“한유나 씨, 괜찮겠어요?”이진영은 서둘러 떠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한유나에 물었다.남자가 너무 부드러웠는지 한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가 봐요.”이진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고 말했다.“참 착해요.”한유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어서 가요.”그들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 남자의 행동이 너무 다정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금 마음에 들었다.“그럼 나 먼저 갈게요. 더들 즐겁게 마셔! 이 술은 내가 살게!”이진영은 호기롭게 말하고 갔다.한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후에 그녀는 돌아가서 엄마에게 부탁해 사람을 찾아 알아보라고 했다.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그녀는 아직 사랑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한유나 씨, 계속 마셔요.”육현성은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고는 잔을 들어 그녀와 부딪쳐 고개를 들어 단숨에 마셨다.엄마는 그에게 이진영의 여동생과 접촉해서 그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했다. 원래는 이따가 이진영과 이 일을 이야기해서 이진영의 태도를 보려 했는데 이진영이 떠났으니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둘이 술을 마시는 동안 박인우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육현성은 술에 취해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다가 박인우에게 물었다.“강지한이 어디 갔어?”박인우는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방금 진영 형이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요? 설마 진영 형 집에 따라갔나?”이진영이 집에 일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육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강지한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한유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이씨 가문과 한씨 가문이 조건이 맞으니 제가 이진영 씨와 선을 본 것도 당연해요.”그녀는 이진영과 선을 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도 선을 봐야 한다.오늘 저녁에 이진영과 지내보니 이진영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그녀는 만족했다.육현성은 조용히 술을 마셨다.한유나의 말이 맞았다. 그들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결혼은 가문끼리 조건이 맞아야 한다.온씨 가문은 이미 초라해졌고 온지유는 과부라는 신분까지 있다...그와 온지유는 함께 있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서 좀 괴로웠다.한유나는 그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여 얼떨결에 말했다.“술로 근심을 풀기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해요.”무슨 일이든 해결 방법이 있으니 당장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걱정할 필요 없다.육현성은 고개를 들어 컵 속의 술을 다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문제가 좀 있는데 답이 없어요. 하지만 저도 이미 포기했어요.”온지유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이미 해결책을 찾았나 봐요.”잘 모르는 사이라 한유나는 계속 물을 이유가 없었다.그때 박인우이 돌아왔다.“지한이는 찾았어?”육현성이 물었다.“못 찾았어요. 하지만... 전화했더니 졸려서 벌써 집에 가서 잔대요.”박인우가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항상 어딘가 이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그만 헤어지죠. 네가 한유나 씨를 집에 데려다줘.”육현성이 술잔을 놓고 일어서자 한유나도 따라 일어섰다.“제가 전화해서 기사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테니 데려다줄 필요 없요.”“그건 안 돼요. 진영 형이 떠날 때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당부했어요.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박인우가 다가가 가방을 들어주고 외투를 건넸다.이진영이 분부한 일을 그는 당연히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평소 연구소에서 밤늦게
남자는 곧 답장했다.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본 후에 알려 주겠다고 말이다.한유나는 휴대전화를 쥐고 손끝으로 화면 글씨를 쓰다듬으며 안심했다.질문을 하는 대로 바로 대답하는 이것이 아마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이진영은 힘겹게 신하린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한유나의 문자를 받았다. 그는 백미러 속 여자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보고 문자를 빠르게 편집해 답장했다.그와 한유나의 관계가 좋을수록, 안정적일수록 차 뒷좌석의 여자도 안전해진다.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녀를 평생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굳이 그녀를 묶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박유진만 있는 것을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문자를 보낸 후 그는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진영아, 늦은 시간에 전화한 건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엄마, 나 오늘 한유나 씨랑 만났는데 서로 느낌이 괜찮았어요. 아빠랑 시간을 내서 유나 씨 부모님이랑 같이 밥 먹으면서 관계를 정하는 게 어때요?”이진영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듯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바로 네 아빠와 상의해 보고 이따가 답장할게.”길게 내뱉는 방혜자의 목소리에 희열이 역력했다.그녀는 정말 꿈에서라도 이진영과 한유나를 맺어주고 싶었다.“알았어요.”이진영은 응낙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방혜자는 당사자보다 더 조급해져 반드시 빨리 결정하리라 마음먹었다.그는 결혼식에 나오기만 하면 되고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전화를 끊자마자 뒷자리에 누운 여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긴 머리카락이 그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둠 속에서 조금 무서웠다.“이진영, 개자식! 지질남!”여자는 목청을 돋우어 욕했는데 술을 마신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이진영의 안색이 갑자기 보기 흉하게 변했다.그는 그녀 외에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는데 쓰레기라니.“이진영, 안아줘...”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