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머릿속이 하얘졌다.온지유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얼굴에 계속 가져다 대며 스스로를 때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심미연은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강준형은 그 장면을 보며 속이 답답했지만, 한편으로는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기를 바랐다.‘속이 조금이라도 시원해진다면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그는 이 상황을 일부러 막지 않았다.문소영은 강준형의 화살이 온지유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이 기회에 온지유가 제대로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그래서 그녀 역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방관했다.주변의 다른 가족들 또한 온지유의 행동을 어이없어하며, 심미연의 대응을 하나의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지켜봤다.그들은 이미 온지유의 얄팍한 행동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강준형이 심미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온지유를 변호하거나 심미연을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강지한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심미연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차갑고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 그만해라.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심미연은 손목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냈다.“아프잖아... 손 놔!”하지만 강지한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내려다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아까 네가 그녀를 때릴 땐 아플 거란 생각은 안 했나?”그의 차가운 말투와 날카로운 시선은 심미연의 마음을 무참히 찔렀다.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그녀는 비틀거렸고, 가까스로 의자를 붙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봤잖아. 그녀가 내 손을 잡아서 자기 얼굴을 때린 거야. 그런데 내가 때렸다고? 강지한, 너 눈이 멀었어?”심미연의 목소리는 격해진 감정으로 떨렸다.‘늘 그렇듯, 강지한은 온지유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언제나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거야.’그녀는 자신이 어떤 증거를 내밀어도, 심지어 영상 자료를 보여줘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당장 나가!”문소영은 매서운 눈빛으로 온지유를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러면서도 눈짓으로 그녀에게 빠져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문소영의 속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지만, 온지유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강지성의 아이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만약 오늘 강준형이 그녀를 때려 아이까지 잘못된다면, 아들을 잃은 데 이어 손주까지 잃게 될 것이었다.그런 비극은 문소영조차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김 집사가 부드러운 채찍을 들고 와 강준형에게 건네는 순간, 문소영은 속으로 매우 놀랐다.‘이번엔 정말로 강준형이 손을 대겠다는 거야!’온지유가 지금 나가지 않으면 정말로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문소영은 다급히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나가라니까! 못 알아듣겠어?”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붙잡고 간청하기 시작했다.“지한 씨, 제발 손 놔. 다 내 잘못이야. 미연 씨를 벌주지 마!”그녀는 문소영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강지한 곁에 남아 함께 벌을 받는 척하며 그에게 동정과 미안함을 끌어내려 했다.그렇게 하면 강지한이 자신에게 더 잘해 줄 것이고,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거라 믿었다.강지한은 온지유의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대신 그는 심미연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가슴 한쪽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이게 뭐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을 다잡았다.가족들 모두가 온지유의 뻔뻔한 행동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정말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강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더니, 이제는 우리의 상식까지 무너뜨리는구나.’강준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채찍을 높이 들어 그녀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강씨 가문에 너 같은 뻔뻔한 사람은 필요 없어! 당장 나가! 그리고 잘 들어라. 앞으로 이 집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 누구 집에도 네가 들어오지 못하게 할
강씨 가문의 둘째 부인은 남편을 재빠르게 흘겨보며 눈치를 주었다.“아버님이 전화하라면 그냥 하라고 해요!”강준형은 이미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반항했다가는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둘째 부인은 셋째 부인을 향해 손짓하며 심미연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셋째 부인이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다가 실수로 구겨진 휴지까지 함께 끌어내고 말았다.휴지가 풀리면서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흰 약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셋째 부인은 순간 얼굴이 새파래지며 황급히 사과했다.“아버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전화부터 걸고 약은 바로 치우겠습니다!”그녀는 급히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준형은 바닥에 떨어진 약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차갑게 강지한을 향해 물었다.“미연이 어디 아픈 거냐?”강지한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몰라요...”그의 대답은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강준형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넌 미연이의 남편이란 놈이면서, 아내의 상태를 전혀 모른단 말이냐? 강지한, 너 이혼할 준비가 다 된 거야?”강준형은 원래 두 사람이 계속 함께하길 바랐다. 그러나 오늘의 일을 겪으며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미연이 같은 예쁘고 착한 아이가 이런 결혼 생활 속에서 점점 망가지는 걸 더는 지켜볼 수 없어...’강지한은 대답하지 못했다.강준형의 말은 뼈아프게 와닿았고 심미연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예전에는 그녀가 집에 돌아오면 사건 이야기나 의뢰인들에 대해 종종 얘기하곤 했다.그러나 그는 늘 짜증스럽게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대화가 줄어들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기쁨이나 슬픔도 점차 사라졌고, 그는 그 변화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그저 일이 많고 항상 바빴기에, 집에서는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의 존재를 외면했을 뿐이었다.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관심했는
늙은이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빠르게 통증이 밀려왔고 순간 이 복수는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되었다.문소영은 온지유가 차에 앉자마자 담담하게 시동을 걸고 대문 쪽을 향해 운전하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지유야,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 봐. 지금 네 뱃속의 아이 아빠가 대체 누구야?”순간 깜짝 놀란 온지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지성 씨 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설마 지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그녀의 대답에 문소영이 백미러로 보이는 온지유에게 차갑게 답했다.“지금 그 대답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만약 저게 거짓말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순간 온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속으로는 강지한이 먼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와 결혼해야만 문소영뿐만 아니라 강준형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어르신은 지금 화가 단단히 난 상태니까 넌 잠시 병원에 있어. 어차피 이노하이브 산하라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나중에 어르신께서 화가 다 풀리면 다시 가서 말해 보고 허락받으면 내가 집에 데리고 갈게.”사실 문소영도 온지유가 썩 달갑지 않았지만 지금 뱃속에 자기 친손주를 품고 있기 때문에 따지더라도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어머니, 지한 씨가 제 명의로 집 한 채 마련해주겠다고 해서 이제 거기서 지내려고요. 어머니도 괜찮으시면 그 집에서 저랑 같이 살아요!”온지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구슬렸다.강지한이랑 결혼하기만 하면 문소영쯤이야 쉽게 구슬릴 수 있었다.“지한이가 사준 집에서 굳이 살겠다면 나도 말릴 생각 없어. 그리고 도우미도 두어 분 보내줄게. 난 지금 사는 집이 익숙해서 갈 필요 없을 것 같아.”문소영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었다.“어머니, 이 일은 제가 꼭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일인데요.”온지유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문소영의 반응을 살폈다.“무슨 일?”“제가 듣기로는 지금 심미연도 임신했다던데
그 모습을 본 강지한이 냉큼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중심을 잃고 금방에라도 넘어질 것 같은 느낌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는데 무의식중에 의자를 잡으려다가 그만 강지한의 손을 잡게 되었다.순간 잠깐 멈칫하다가 그녀는 재빨리 다시 똑바로 앉았다.깜짝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현정은 심미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사과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혹시나 심미연이 화를 낼까 봐 매우 긴장한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렸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다정하게 답했다.“덕분에 살았는데 오히려 제가 고맙다고 해야죠. 감사합니다!”강씨 가문에서 지현정은 그 누구든 모두 살갑게 대해야 했다.또한 강형준이 심미연을 매우 아낀다는 사실을 지현정도 알고 있어서 더욱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에 연신 손을 저으며 답했다.“별말씀을요.”심미연은 한눈에 봐도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지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말했다.“제 생일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로 식사 자리는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말을 마친 뒤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신하린 쪽으로 걸어갔다.사실 심미연은 진작에 강지한이 지금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오늘 일로 강지한에 대해 철저히 단념하게 되었다.또한 하루빨리 외할머니를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거나 병이 빨리 낫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이 지긋지긋한 경성을 떠나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신하린이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미연아, 괜찮아?”심미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 빨리 나가자.”그렇게 두 사람은 자리를 떴고 이진영도 강지한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떠나가
그저 혼자 평생 지내려고 했지, 심미연이랑 결혼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강준형이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난 미연이랑 십여 년 동안 알고 지냈고 또 내 목숨도 살려줬던 애야. 그래서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아주 잘 알아. 또한 너랑 함께 지낸 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내 앞에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너에 대한 나쁜 말도 한 적이 없어!”강지한은 그의 말에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심미연이 그 일에 대해 고자질한 게 아니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계시지?’‘설마 일부러 떠본 건 아닐 텐데?’“미연이가 나한테 일러바쳤다고 생각하지? 미르 파크에 우리 쪽 사람들이 있어서 너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내 귀에 흘러들어오게 되어있어. 그래서 저번에 미연이한테 혹시 이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는데 똑바로 대답해 주지 않더라. 그때 난 이미 그 애가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어.”강준형은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자꾸 그가 심미연을 억지로 불구덩이에 떠민 바람에 그녀가 지금처럼 불행하게 지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강지한은 강준형의 엄숙한 얼굴을 보고 그제야 그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걸 알아챘다.지금까지 줄곧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심미연이 그저 온지유한테 질투심을 느껴 일부러 쇼한다고만 생각했다.하여 그녀의 이혼 제안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방금 강준형의 말을 들어보니 심미연은 진심으로 그와 이혼하고 싶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돈이 부족한 사람이라 분명 이혼하게 되면 빈털터리로 집에서 나오게 되고 또한 외할머니는 더 이상 치료를 못 받게 되어 죽는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텐데 이 모든 걸 다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예전에 네가 미연이를 살갑게 대하지 않는 원인이 그저 억지로 결혼시킨 게 억울해서 일부러 심술부린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네. 네가 진짜 사랑하는 여자는 온지유란걸.”강준형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
강지한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지면서 그에게 되물었다.“할아버지, 무슨 뜻이에요?”‘심미연과의 이혼?’그가 어떻게 심미연과 이혼한다는 말인가?더구나 온지유와 그런 사이도 아니기에 그녀와의 결혼도 더더욱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강준형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지난번에 심미연에게도 똑같은 물음을 물었는데 그녀는 강지한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답했다.하지만 오늘 강지한의 행동은 누가 봐도 선을 넘었고 이에 따라 심미연이 혹시나 이혼하는 걸로 마음을 굳힌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단 한 번도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그런 비겁한 짓은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더구나 유일하게 잠자리에서 흥미를 돋게 하는 사람이 바로 심미연인데 혹시나 이혼하게 되면 혼자 해결해야 한다.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면 분명 심적으로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아무튼 절대 이혼은 말도 안 돼!’“하지만 너랑 온지유는 이미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어선 관계가 되었어. 또한 오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연이를 구박한 행동은 누가 봐도 그 애한테 큰 상처였을 거야. 네가 이혼하기 싫다고 해도 미연이는 이미 마음을 굳혔을 거라고! 그 애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사실 강준형은 그가 이혼하기 싫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안심되었다.구제 불능한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미연이가 다시는 이혼에 대해 말도 못 꺼내고 제 옆에 꼭 붙어 있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요.”어쨌든 지금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자기 의료팀에서 치료받고 있기에 강지한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자기 앞에서 절대 이혼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다면 한 번 더 믿어볼게. 그러나 오늘 미연이가 받은 수모를 보상해 주기 위해 난 이노하이브 주식 1%를 그 애한테 주기로 마음먹었어. 그리고 이 일은 네가 직접 처리해. 지난번처럼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무조건 넘겨. 안 그러면 내
기절한 척하느라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잊어버렸다.“미연아, 할아버지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넌 좀 어때? 병원에 가 봤어? 의사가 뭐래?”강준형은 혹시나 수화기 너머의 심미연이 놀랄까 한껏 다정하게 물었다.“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 저도 괜찮아요. 가봤자 괜히 돈만 낭비해요.”심미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돈으로 차라리 할아버지께 맛있는 음식 사드릴게요.”그 말에 강준형도 활짝 웃었다.“착하다.” 심미연은 언제나 심성이 착한 아이였고 그의 앞에서는 항상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할아버지, 오늘 제 생일상을 마련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비록 마무리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하고 싶었어요.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 꼭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약 강지한과 온지유만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오붓한 생일잔치를 아마 평생 기억했을 것이다.하지만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것 때문에 확실히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았다. 또한 이번이 아마 강씨 가문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일일 것이다.“오늘 밤의 일로 내가 지한이를 호되게 혼내줬는데 많이 다쳤어. 그러니까 네가 옆에서 잘 돌봐줘. 혹시나 열이라도 나면 주치의 부르고.”강준형의 목적이 바로 오늘 밤 심미연과 강지한이 함께 있는 것이다.아직은 부부인데 떨어져 지내면 마음도 자연히 멀어진다고 생각했다.심미연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답했다.“알겠습니다.”강준형이 오늘 강지한을 혼낸 건 심미연을 대신해서 화를 내준 것과 동시에 그녀가 얌전히 집에 돌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아니면 강준형도 이렇게까지 티 나게 귀띔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미연아, 나도 지한이가 너를 많이 힘들게 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난 여전히 네가 우리 지한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강준형은 말하면서도 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강지한이 오늘 심미연을 어떻게 대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를 용서하라고 요구하는 자신이 너
강지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네가 말하는 그 오빠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의 엄마는 그의 엄마일 뿐이야. 네 엄마가 될 수는 없단다, 알겠지?” 아직 어린 상미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원하는 사람이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릿하기도 했다. 강상미는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구나...” 강지한은 딸의 그런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음에 그 오빠를 만나 그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 엄마를 너랑 나눠 쓸 수 있는지.” 강상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바로 그때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시훈의 전화였다. 그는 조용히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그 명의가 드디어 요청을 받아들였어. 직접 병원에 와서 네 딸 상태부터 확인하겠다고 하더라.” “언제 오는데?” 강지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상미에게 드디여 희망이 생겼어!’ “약속한 시간은 오늘 오후 세 시. 병실로 직접 찾아간다고 했어.” “알겠어.” “내가 이렇게까지 힘 써서 의사를 찾아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냐?” 박시훈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강지한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원하는 거 있으면 성 비서한테 말해.” 그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핸드폰을 꽉 쥔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딸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수록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결국 그는 또 한번 흡연실로 향했다. 그는 담배를 한 개비 얻어 물고 벽에 기대어 연기를 내뿜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우리 상미가 살 수 있어.’‘정말 다행이야.’“형님, 지금 기분 좋은 거에요. 안 좋은 거야?”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이진영의 입꼬리가 비웃음으로 살짝 올라갔다. “그러니까 아버지 말은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 자식도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다는 거네요?” 어릴 때만 해도 그는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건 그저 어린 시절의 착각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이상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그가 거대한 존재처럼 보였던 것뿐이었다. 이진영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이진영, 네가 이제 좀 컸다고 해서 내가 널 통제 못 할 거라 착각하지 마라. 한유나와의 결혼은 무조건 그대로 진행돼야 해.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나가!” 이진영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짙은 피로를 느끼듯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불쾌함과 초조함이 뒤섞인 감정이 그를 덮쳤다. 그는 그제야 이진영은 더 이상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 정상에 서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다. 반평생을 바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정말 꼭대기가 보이는데 이 순간에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진영은 차고로 가서 운전석에 앉자마자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꽤 오래 기다린 끝에야 강지한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데?” “어디야?” “병원. 딸이 열나서 입원했어.”“그럼 먼저 딸부터 잘 돌봐. 나중에 괜찮아지면 만나서 얘기하자.” 전화를 끊자마자 이진영은 갑자기 인생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한편 강지한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딸에게 죽을 떠먹였다. 강상미는 또랑또랑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빠, 일 많이 바쁘지? 그냥 일하러 가도 돼요. 나 혼자서도 괜찮아요.” 딸의 사려 깊은 말에 강지한은 가슴 한구석이 짠해졌다. “아빠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어도 우리 상미를 돌보는 건 아빠밖에 못 해.” 다른 누구에게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머물 필요도 없었다. 한유나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곧장 주방을 나섰다. 거실을 지나치려던 순간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이진영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녀가 집에 있는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신문을 내리며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 왔구나. 이리 와서 앉아라.” 한유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려고요.” 사실 그녀는 이진영의 아버지를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앉아서 얘기나 하고 가라. 하인에게 진영이를 내려오라고 하겠다.” 그는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한유나는 부드럽게 인사를 건넨 뒤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문을 나서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이진영은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자 어머니에게 한마디 전하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아버지 곁에 다가가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너 한유나한테 파혼하자고 했냐?” “네.”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등을 곧게 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했다. 아버지는 아까 거실에 앉아 있었고 그가 주방에서 한유나와 나눈 대화를 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그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서 왜 이제 와서 따로 부르는 걸까?’“안 된다!”
한유나는 잠시 멈칫한 후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약혼을 취소하고 싶으면 그냥 직접 말해줘요. 굳이 이렇게 돌려 말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화가 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이진영은 그녀의 모습에서 어디가 이상한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당신이 동의한다면 약혼 취소는 당신이 먼저 말하는 거예요. 이유는 당신 마음대로 정해도 괜찮아요.”이진영은 마음속으로 신하린을 떠올리며 절대 한유나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유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결혼 취소를 내가 제안하게끔 하면 내 체면을 지켜주긴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경성 사람들에게 나 한유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네요.” 2년 전 아버지가 퇴직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진영은 예비 사위로서 장례식을 주관했다. 그때 그는 장례식을 엄청 성대하게 치렀고 모두가 그에게 의리와 정이 넘친다고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성의 모든 여인들은 그녀가 좋은 남자에 든든한 의지처를 만났다고 부러워했다. 그래서 비록 이진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가기로 결심했다. 이진영같은 이런 사람을 놓치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진영이 갑자기 결혼을 취소하자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그들 사이는 늘 아무 일 없이 잘 지내왔는데 말이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요. 그러면 당신은 피해자가 될 거니까 아무도 당신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거에요.” 이진영은 사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한유나가 제안하면 좀 더 체면이 서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한유나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그는 한유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까지 모두 그가 주관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만약 그가 먼저 결혼을 취소한다고 말하면 한유나는 역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진
결국 그녀와 이진영은 약혼한 사이였고 지금 경성의 모든 이들이 그들이 미혼 부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약혼을 취소하면 그녀는 경성에서 다시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삼 년 동안 그녀는 이진영에게 매우 관대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자기 앞에 데려오지 않는 한 그녀는 모든 것을 눈감아 주었다.방혜자의 방에 도착한 한유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를 보고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뭐 보고 계세요?” 방혜자는 정신을 차리고 한유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유나야, 언제 왔니? 진영이도 집에 있어. 먼저 진영이한테 가 볼래?”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을 천천히 뒤로 빼며 마치 한유나와의 접촉을 피하려는 듯 보였다. 한유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빠르게 감정을 누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진영 씨와 함께 왔어요. 어머니가 점심도 안 드셨다고 하던데 입맛이 없으세요?” 그제야 방혜자는 눈을 들어 이진영을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왜 다 유나에게 말해주냐? 대체 누구 편인게냐.”그녀가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다정했다. 이 아들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럼 제가 뭐 좀 만들어 올게요. 나중에 내려와서 드세요. 네?” 한유나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방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나는 일어나서 이진영에게 다가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랑 얘기 좀 해주세요. 저는 뭐 좀 만들어 올게요.” “알겠어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나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만약 아버지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면 한씨 가문은 여전히 번창했을 것이고 그녀는 이씨 가문에서 이렇게 홀로 소외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는 여전히 억누를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하인들은 한유나를 보고 공손하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