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의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현장에 많은 사람이 있어 그녀는 감히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차갑게 말했다.“남편을 돌봐주는 건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야. 무슨 불평이 있어?”심미연은 화를 참으며 그녀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했다.방금 강지한이 말로 그들을 일깨워줬으나 그녀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떤 때 심미연은 심지어 조은하가 친엄마가 맞는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 10개월의 임신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낳은 아이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엄마는 심서연을 사랑했고 그녀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셨지만 반대로 심미연을 대할 때는 잔인하고 모질었다.심미연은 줄곧 자신이 언제 엄마의 미움을 샀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강지한은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 그윽한 눈동자로 심미연을 쳐다봤다. 방금 도와줬는데도 이 양심 없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주다니.“심미연, 술을 따르라고 했으면 얼른 해야지.”심미연이 움직이지 않자 조은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심미연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심미연이 어렸을 때 조은하는 심미연의 머리채를 잡고 땅바닥에 누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한 번은 심미연의 이마를 찧은 적도 있었다.그녀의 손이 다가오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잡혔다.“그만 해요.”심미연이 그녀를 보는 눈빛은 칼 두 자루를 품은 것처럼 서늘하고 무서웠다. 심미연은 강지한과 함께 오래 있어서인지 점점 닮아갔는데 일하는 스타일은 물론 눈빛까지 비슷했다.조은하는 그녀의 눈빛에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망할 계집애가 어찌 이리도 사나울까!’“심미연, 이 불효녀야. 엄마를 때리다니!”심서연이 역성을 들었으나 옆에 있던 박유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잡아당겼다.손이 잡히자 심서연은 고개를 돌려 박유진을 노려보았다.“뭐 하는 거야!”심미연이 엄마와 손찌검을 하려는 모양이니 당연히 말려야 했으나 박유진이 손을 놓지 않으니 말릴 수 없었다.‘박유진이 일부러
그리고 심동현은 한 사람과 바람난 게 아니다.만약 조은하가 때리려 하지 않았다면 이 부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절대 이 일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심미연, 정말이야?”조은하는 심미연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나쁜 계집애! 아빠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이런 날에 말하며 난처하게 만들다니! 나쁜 계집애, 속셈이 정말 보통이 아니네.’“말해도 믿지 않는데 저더러 어떡하라고요. 모른 척하고 싶은 거면 어쩔 수 없어요.”심미연은 웃으며 술병을 들고 술을 석 잔 따랐다.강지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건 뭐 하는 거지?’심미연은 술잔을 들어 조은하와 심동현에게 드린 후 자신도 술잔을 들었다.“이 술은 저를 낳고 키워줘서 고맙다는 의미예요. 이제부터 우리는 관계를 끊고 당신들은 더는 지한 씨를 찾아 돈을 달라고 하지 마세요.”지난 3년 동안 그들은 강지한으로부터 수십억 원을 가져갔지만 점점 요구가 높아졌고 금액도 커졌다.그들은 그녀에게 기대어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도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어렸을 때 그녀는 반항할 힘이 없었지만 이젠 그들을 그대로 날뛰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과 관계를 끊으면 더는 강지한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할 면목이 없고 강지한이 그녀의 약점을 잡아 괴롭힐 수 없다.잔에 담긴 술에는 끝없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처럼 손을 가볍게 떨던 심미연은 고개를 젖혀 단숨에 다 마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알코올에 물들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감정이 이 순간 카타르시스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마치 그 눈물에는 지난날에 대한 작별을 담은 듯 고집스럽게 흘리지 않았다.주변 공기가 굳어가는 듯했고 심미연의 동작 하나하나가 무겁고 단호해 보였다. 부모님의 경악하고 복잡한 얼굴을 훑어본 그녀의 시선은 결국 텅 빈 술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안에는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집이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이젠 차가운 술 냄새만
험상궂은 얼굴로 달려오는 조은하를 보며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배를 감쌌다.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뒤로 끌어당기며 조은하에게 발길질했다.“무슨 배짱으로 미연이를 건드려요!”그가 조은하에게 술을 권한 것도 심미연의 체면을 봐서였다.심미연에게 감사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감히 손찌검하려고 하다니! 이렇게 양심 없는 사람은 체면을 줄 필요가 없었다.조은하는 그의 발길에 걷어차여 날아올랐다 땅에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심동현은 얼른 가서 그녀를 잡아당겼고 심서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분명히 이 더러운 년이 일부러 강지한을 부추겼을 거야!’심미연은 강지한의 뒤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봤다. 그들과 관계를 끊었으니 앞으로 더는 그녀를 상처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이것도 일종의 해탈이다.강지한은 돌아서서 심미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 집으로 돌아가.”박유진과 심서연의 혼기가 정해졌으니 더는 남아 있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집에 가는 것이 낫다.심미연은 알았다고 대꾸한 후 박유진을 한번 보고는 시선을 거두며 강지한 곁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는데 너무 얌전하여 아이 같았다.강지한은 그녀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짜증이 났다.이 여자는 법정에 서면 말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왜 지금은 바보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걸까?“음식이 나왔으니 밥 먹고 가.”심동현이 급히 심미연 앞으로 다가왔다.“미연아, 우린 핏줄을 섞은 가족인데 어떻게 관계를 끊을 수 있겠어? 그만해. 방금 했던 말은 못 들은 거로 치고 앞으로 집에 자주 돌아와.”만약 심미연과 관계를 끊는다면 그가 강지한을 찾아서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을 테니 이것보다 더 큰 손실은 없었다.내연녀와 아들도 키워야 하는데 돈이 없이 어쩌란 말인가!심미연은 강지한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심동현의 긴장한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저를 학대할 때는 잊었나 봐요. 제가 결혼한 3년 동안 당신들은 지한 씨를 찾아가 그렇게 많은
박유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심미연을 향해 걸어갔다.그는 방금 조은하가 그녀를 무는 것을 똑똑히 지켜봤는데 그녀의 표정에는 한이 가득했다.심미연이 6살 때 부주의로 여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그들은 심미연을 뼈저리게 미워하며 어려서부터 그녀를 잘 대해주지도 않았다.그는 심미연 앞으로 다가가 차분하게 말했다.“다쳤어. 병원에 데려다줄게.”그녀의 상처는 한 입 물린 것처럼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심했다.강지한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당신 여자나 신경 써요. 내 여자는 당신이 상관할 필요 없어요.”그의 목소리는 뼈저리게 차가웠다.다리가 지끈지끈 아파 난 심미연은 심호흡을 하며 통증을 누르려고 했지만 점점 더 아파 안색이 창백해졌다.“유진 오빠, 병원에 갈 필요 없어. 난 괜찮아.”온몸이 아파 난 심미연은 말하는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심미연,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몰라? 무슨 일이라도 생긴 다면 난 너에게 갚아줄 기회가 없어져.”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마음이 괴로워진 박유진은 엄숙하게 말하며 표정도 굳어졌다. “유진 오빠, 난 괜찮아.”심미연이 고집을 부렸는데 강지한이 있어 병원에 갈 수 없었다.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지한은 화가 치밀어 올라 심미연의 팔목을 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심미연의 남편으로서 그가 있으면 박유진은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갈 필요가 없었다.“괜찮아, 병원 안 가!”심미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급히 말했다. 병원에 가면 임신한 사실을 들켜버릴 수 있지만 지금 강지한과의 관계로 보아 잠시 임신한 사실을 알리기 싫었다.“안돼!”박유진과 강지한이 동시에 말하자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두 사람은 뭐 하는 거야.’심서연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심미연을 깨물고 싶어 하는 기세다.‘이 나쁜 년이 감히 내 남자를 꾀다니!’이미자도 눈살을 찌푸리고 박유진 곁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말했다.“유진아, 너 뭐 하는 거야? 심미연은 강 대표님이 돌봐주고 있는데
심미연은 그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웃으며 물었다.“내가 사정하면 이자를 좀 깎아 주실 수 있어?”최근 몇 년 동안 그녀의 부모는 강지한에게서 수십억 원을 가져갔지만 병원에 있는 외할머니를 돌보지 않았고 병원비도 내지 않았다.이렇게 흉악한 부모를 그녀가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아마 심동현은 그녀를 바보로 여기는 것 같다.강지한은 입술을 감빨더니 천천히 말했다.“네가 말했으니 그럼 이자는 적게 쳐줄게.”두 사람이 맞장구를 치자 심동현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심미연 이 계집애! 그를 돕지 않으면 그만이지. 감히 강지한과 함께 그를 비웃다니. 열받아 죽겠네!’“아빠, 들으셨어요? 이자를 조금 깎아 드린다잖아요. 제가 아빠에게 잘해주죠?”심미연은 얼굴의 웃음기를 거둬들이며 정색해서 말했다.“우린 이미 관계를 끊었으니 이건 마지막으로 당신을 돕는 거예요. 앞으로 알아서 잘하세요.”‘돈이 없으면 어떻게 내연녀와 사생아를 키우고 또 어떻게 심서연에게 명품을 사줄지 두고 볼 거야.’“심미연, 우리가 널 키웠으니 넌 이 은혜를 갚아야 해. 감히 나를 상관하지 않으면 소송할 거야!”심동현은 바로 일어서며 연기조차 하기 싫어 이젠 정색해서 말했다.“심미연, 너 기다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음산한 눈빛으로 지켜봤다.불과 몇 년 사이에 이노 하이브를 글로벌 500대 기업으로 발전시킨 그는 다양한 사람을 봤지만 심동현처럼 친딸에게 모질고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다.“감히 미연에게 무슨 짓을 해봐요? 제가 갑절로 갚게 할 테니!”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꺼져요!”심동현은 놀라 허둥지둥 도망쳤다.심동현이 떠나자 심미연은 강지한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고마워.”그녀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끈질기게 달라붙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방금 강지한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절대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강지한은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나에게 시집오기 전에 저 사람들이 너를 이렇게 욕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임신 사실을 알릴 수 없어 핑계만 댔다.강지한은 차갑게 말했다.“억지 부리지 마!”그래도 휴대전화를 꺼내 개인 의사에게 전화를 건 후 손을 뻗어 심미연의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다리 위로 살갗이 벗겨질 듯 축 늘어져 있었고 주위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험상궂어 보였다.강지한은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확 타올라 휴대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했다.“심미연의 부모님을 혼내줘!”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이런 사람이 어찌 부모가 될 자격이 있겠는가. 악마보다 더 사악했다. 어느 엄마가 딸의 다리를 물어뜯어 살갗이 벗겨지게 할 수 있겠는가.심미연은 강지한이 전화하는 것을 듣고 멍해졌다.사실 그녀는 다리 상처를 다 치료한 후에 어머니를 찾아가 결판을 내려고 생각했는데 강지한이 직접 성무진을 시켜 그들을 혼내라고 할 줄은 몰랐다.간단하고 거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두 사람의 결과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전화를 끊은 강지한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자 분노의 감정이 싹 풀리며 자신이 방금 건 전화 한 통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앞으로 그들이 감히 너를 괴롭힌다면 너도 참지 마. 어떤 난장판이든 내가 뒷수습을 도와줄게.”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 여자도 지켜주지 못하면 남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심미연은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알았어. 고마워.”강지한은 차에 오른 후 시동을 걸었다....룸에서 박유진은 식탁 앞에 선 후 검은 눈동자로 많은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생각났는데 법무법인 대명이 갓 오픈해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아요. 또 회사에서도 몇 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니 잠시 결혼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요. 저랑 심서연 씨 결혼식은 잠시 미루는 게 좋겠어요.”조은하가 심미연의 살갗을 물어 뜨다니 정말 지독하고 악랄하다.그는 오히려 심서연도 같은 사람일까 봐 걱정이 됐다. 이런 여자를 곁에 남겨두면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른다.어렵게 구
“파혼하면 안 돼!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된다고!”조은하는 감정이 격해졌고 말투도 급해졌다.경성의 4대 가문 중 박씨 가문은 강씨 가문에 버금가는데 심서연이 박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은 심씨 가문에 도움이 컸다. 일단 파혼하게 되면 아무런 이득도 챙길 수 없지 않은가!심동현도 얼른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파혼하면 안 돼! 번복하다가 소문이 나면 서연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어? 손가락질받게 돼.”결혼일까지 잡았던 멀쩡한 결혼식에 변덕이 있을 줄이야!“대외로 파혼 선언을 하세요. 제가 모든 결과를 감당할뿐더러 강지한에게 진 빚을 갚아주고,그외로 4억을 더 드릴게요. 이 돈이 있으면 절약하면 남은 생은 살 수 있어요.”박유진의 표정도 목소리도 다 차가웠다.심서연과 심씨 가문에서 심미연을 못살게 굴더라도 그는 이 파혼하려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심미연을 보호해줄 것이다.심동현은 눈알을 굴리며 조은하와 심서연을 보더니 말했다.“강지한에에 빚진 돈을 갚아준 후 20억을 더 주면 동의할게.”20억이 있으면 작은 가게도 차릴 수 있고 집과 차를 사서 애인과 아들을 데리고 남은 인생을 잘 보낼 수 있다.조은하는 달려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심동현! 파렴치한 놈! 네가 뭔데 나와 딸을 위해 결정을 내려? 우린 파혼 안 해! 서연이는 박씨 가문에 시집가야 해!”심동현에게 내연녀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심미연이 말했는데 그녀는 아직 진상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젠 믿을 수 있었다.지난 몇 년 동안 심동현이 어떻게 그녀를 대했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예전에는 그가 나이가 들었고 이젠 사랑하는 사람에서 가족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심미연의 말을 듣고 정신이 들었다.그녀와 심동현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랑이 없어졌을 뿐이다. 어쩐지 심동현이 항상 돈이 없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내연녀를 둔 것이다.그래도 조은하는 지금 심동현과 결판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내연녀와 사생아를 찾은 후 다시
이미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일어섰다.“심 대표님, 사모님, 아니면 두 분 먼저 돌아가서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상의해 보세요. 내일 다시 시간을 내서 만나 일을 한꺼번에 해결해요.”그동안 박유진과 심서연이 결혼할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늘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박유진이 직접 파혼을 제기하는 것을 들으니 당연히 찬성했다.심씨 가문이 돈을 요구하는데 그들은 줘도 상관없었다.조금이라도 더 줘도 심서연만 떨쳐버리면 됐다.박지훈도 따라서 일어나며 말했다.“비록 유진이가 당신들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박씨 집안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아요. 적당히 하죠?”그런 후 박유진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간다.”수십 년 동안 이웃으로 살아온 그는 헤어져도 떳떳하기를 바랐다.그러나 방금 심동현이 한꺼번에 몇십억을 요구하자 박씨 가문을 바보로 여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박유진은 한마디 대답하고는 여전히 예의 바르게 심서연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이번에 그는 유난히 확고했다.심서연이 뒤쫓아와 그를 안았다.“나는 돈을 원하지 않아. 한 푼도 원하지 않는다고. 나는 유진 씨랑 결혼할 거야. 박유진, 나랑 결혼해줘. 응?”박유진은 잘생기고 성격도 좋아서 그녀는 죽어도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심서연 씨, 자중하지?”박유진은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쪼개고 소원한 어투로 말했다.“박유진, 네가 정말 나와 파혼한다면 나는 곧 심미연을 찾아 함께 죽을 거야!”감정이 격해진 심서연의 목소리는 매우 높고 날카로워서 원한을 숨길 수 없었다.박유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심서연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 온화하고 검은 눈동자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죽을 용기가 있다면 미연이를 찾아 함께 죽어.”그는 심서연이 감히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죽고 싶겠는가.“미연이와 함께 죽을 용기가 없으면 그럼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다시 돌아가서 예전의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
“미연아...” 박유진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낮고 부드럽게 입을 떼며 적막을 깨뜨렸다. “응?” 심미연이 가볍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눈빛도 온통 부드러웠다. 박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미연아, 오늘... 괜찮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깊었다. 온전히 그녀만을 향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유진은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왔다. 특히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던 그때 그는 한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너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릴까 봐 24시간 내내 곁을 지키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박유진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순순히 치료를 받아들이고 의사의 말에 성실히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우울증을 극복해냈다. 지금 그때의 힘든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박유진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상처투성이인 마음과 불완전한 몸으로는 완벽한 박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오늘 그녀는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박유진은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결국 아직도 그 벽을 넘지 못한 듯했다.그는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술을 살짝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가 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예전 진성에 있을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