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박유진 사이...한두 마디로 해명할 수 없다.그러다가 강지한은 배를 어루만지고 있는 심미연을 보더니 차갑게 물었다.“배는 왜 쓰다듬고 있어, 임신이라도 했어?”순간 심미연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차분하게 해명했다.“그저 위가 불편할 뿐이야. 그리고 매번 조심했는데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어딘가 많이 당황해 보이는 모습에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말했다.“좋기는 임신이 아니어야 할 거야. 아니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심미연의 말대로 두 사람은 매번 열심히 피임했고 어쩌다 너무 급해서 콘돔을 사용하지 못한 날에도 이튿날 꼭 약을 먹었다.그런데도 만약 심미연이 임신한다면 그 아이의 아빠는 누구일까?심미연은 그런 강지한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어떻게 하면 임신 사실을 속일까만 고민하고 있었다.혹시나 들키기라도 하면 분명 병원에 데려가 애를 지워버리라 할 것이다.이 아이는 오직 심미연의 아이였고 누구도 뱃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없다.임혜자가 국을 들고 왔는데도 심미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사모님, 식사하세요.”그녀의 작은 속삭임에 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지한의 팔을 끌며 말했다.“같이 올라가서 옷부터 갈아입자.”심미연은 일부러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척,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는데 강지한은 입맛을 다시다가 그녀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임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강지한의 성질은 날이 갈수록 살벌해지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심미연이 마음이 넓어서 그나마 그의 화를 받아준다고 생각했다.만약 온지유였다면 진작에 집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이토록 살가운 사모님이면 소중히 받들어 모셔도 모자랄 판에 왜 저리도 냉정하게 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강지한이 위층에 올라가자마자 침실 문을 열어보니 은은한 장미향이 코를 간지럽혔고 침대 위에도 장미꽃으로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심미연은 강지한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에게 물었다.“우리 정원에서 잘
깜짝 놀란 심미연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남자는 한껏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심미연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낮은 소리로 해명했다.“배고파서 그러는데 먼저 먹고 하면 안 될까?”“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대체 왜 그래? 설마 박유진 때문이야?”강지한은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그의 말대로 예전에는 남자가 신호만 보내면 심미연은 순순히 협조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유달리 속궁합이 잘 맞았다.하지만 며칠 전, 그녀가 이혼 얘기를 꺼낸 후로부터 계속 남자와의 잠자리를 거절했다.이러면서 딴마음이 없다고 하니 믿을 수가 있나!강지한이 의심의 눈초리로 심미연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워낙 의심도 많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알아차린다.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배를 또다시 어루만졌다.설마 임신한 사실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왜 말이 없어? 내 말이 맞다는 건가?”강지한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심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그게 아니라 난 진짜 배가 고픈 것뿐이야. 그 사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금 절대로 강지한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 아니면 신하린의 회사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박유진한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강지한은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심미연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다시 변명하려던 순간,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불구덩이 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급히 강지한에게 말했다.“핸드폰!”그러자 강지한은 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차갑게 경고했다.“심미연, 좋기는 방금 했던 말들이 거짓이 아니어야 할 거야. 아니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온지유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아까까지 살벌하던 그의 눈빛이 순간 핑크색 하트로 변했다.심미연이 다른 남자랑 통화만 했는데도
심미연 이 여자, 설마 지금 강지한한테 꼬리치려는 건 아니겠지?어림도 없어!“저녁에 회사로 또 나가봐야 해서 시간이 없어.”“아니면 내 옆에서 회사 일 보면 안 될까? 지한 씨, 나 너무 무서워...”온지유는 말하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이따 저녁에 다시 보자. 지금 밥 먹어야 해서 끊을게.”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우는 온지유가 가끔은 짜증났다.하지만 이 시각, 수화기 너머의 온지유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꽉 쥐었다.심미연, 그 여우같은 계집애가 강지한 앞에서 무슨 험담을 늘어놨기에 여기로 오지도 않겠다고 하지?간병인 안현자는 밥을 배달해 오다가 그녀의 어두워진 낯빛을 보고 순간 깜짝 놀라 물었다.“지유 씨...”이때 온지유가 갑자기 옆에 있던 물컵을 그녀에게 던지며 불같은 화를 냈다.“전 사모님이지 지유 씨가 아니에요!”안현자는 어깨를 맞고 그만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쟁반 위의 음식들을 바닥에 쏟으면서 순간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쟁반 하나를 못 들어서 이 난장판을 만들어요? 이런 쓸모도 없는 사람을 간병인이라고, 그냥 꺼져요!”온지유는 신경질적으로 안현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강지한에게 받은 설욕을 전부 그녀에게 풀었다.그렇게 안현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쫓기듯 병실 밖으로 뛰쳐나왔다.더 있었다가는 목숨마저 위험할지도 모른다.정말 이상한 여자라니까.안현자가 떠나간 뒤에도 온지유는 분이 안 풀려 병실안의 물건들을 집히는 대로 다 깨부셨다.심미연 저 빌어먹을 계집애, 감히 온지유가 입원해 있는 틈에 강지한한테 꼬리치려 들다니!...박씨 가문의 식사자리.식탁에는 박유진의 부모님과 심서연의 부모님이 앉아 있었다.박유진이 파혼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심서연의 부모는 재빨리 자기 딸을 데리고 여기까지 쫓아왔다. 하여 식사 분위기는 다소 어두웠다.박지훈은 박유진을 한번 힐끔 보더니 먼저 입을 뗐다.“저희쪽에서 먼저 파혼을 제기했던 원인은 확실히 제가 점쟁이한테 여쭤보고 두
이미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일은 나중에 처리하면 안 되겠니? 지금은 너와 서연의 일을 이야기해야지!”사실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심미연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와는 고부가 될 인연이 없었다.이미자는 심서연과의 결혼도 바라지는 않았지만 박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오랜 이웃이자 사업 파트너였기에 혼사가 깨지면 바렐 그룹도 큰 손해를 볼 터였다.그녀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있었다.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이미자는 아들에게 결정권을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결혼 생활은 아들이 할 것이고 아들의 감정이 가장 중요했으니까.“잠깐 택배 받고 올게요. 금방 올게요!”박유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나갔다.“유진 오빠, 같이 가!”심서연도 따라 일어서며 다급하게 불렀다.그러자 심동현은 그녀를 쏘아보며 호통쳤다.“앉아!”심서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아빠!”‘어렵게 유진 오빠를 만나서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아빠는 왜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거야.’조은하는 심서연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얌전히 앉아 있으렴!”박지훈은 입술을 오므렸다.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심서연은 버릇없이 자랐고 속이 좁았다. 그런 아이가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아들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게 뻔했다.남자에게 좋은 아내를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현명한 아내는 남편이 더 높이 올라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돕지만 어리석은 아내는 남편의 발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패배자로 만들어 버린다.심씨 가문의 두 딸 중 아들이 심미연과 결혼한다면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이지만 정말 심서연과 결혼한다면 그의 미래는 뻔했다.“엄마, 난 그냥 누가 오빠한테 택배를 보냈는지 궁금해서요.”방금 박유진이 허둥지둥 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심미연이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심미연 그 몹쓸 년은 결혼까
집사는 발걸음을 뒤로 물리며 그녀가 내민 손을 피했다.박씨 가문에서 이미 파혼을 제안했는데, 이 심서연 씨는 어디서 이런 자신감으로 자신을 이 집의 안주인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택배를 빼앗지 못한 심서연은 극도로 분노하며 손을 들어 집사를 때리려고 했다.“넌 박씨 가문에서 기르는 개일 뿐이야! 주인도 못 알아보는 주제에!”박유진은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호통쳤다.“심서연, 당장 입 다물어!”그도 집안의 도우미들을 결코 낮게 본 적이 없는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욕한단 말인가.심서연은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파 엉엉 울었다.“박유진, 감히 날 괴롭혀! 미연이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 거 맞지!”그녀의 말에 박유진은 마음이 심란해졌다.“너는 꼭 모든 일에 미연이를 끌어들여야겠니! 미연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네게 이런 모함을 당해야 해?”분명 심미연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인데 심서연의 입에서는 마치 극악무도한 죄인처럼 매도당하고 있었다.심서연은 경악한 눈으로 눈앞의 온화한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오빠가 감히 그 천한 계집 때문에 나한테 소리를 질러! 박유진, 너 아직도 마음속에 그년을 품고 있는 거지?”박유진은 천천히 마음속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손을 놓았다.“약혼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생각 정리되는 대로 연락할 테니 미연이를 찾아가거나 방해하지 마.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심미연을 위해 그는 타협했다.그의 바람은 언제나 그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비록...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말이다.그의 말을 똑똑히 들으며 심서연은 가슴속의 분노가 온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박유진이 심미연 때문에 자신에게 경고하다니.“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조용히 계시는 걸 좋아하시니 앞으로는 어머니를 방해하지 마.”박유진은 분노로 일그러진 심서연의 얼굴을 못 본 척하며 나지막이 말했다.“식사 끝나면 돌아가. 바렐 그룹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박지훈은 복잡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박유진을 보며 말했다.“이건 네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니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박유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하겠습니다.”어차피 심미연과 결혼할 수 없다면 누구와 결혼해도 상관없었다.그의 대답에 심서연은 마음이 설렜다.이제 드디어 박유진과 결혼해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천천히 드세요. 저는 서재에 가서 이메일 답장 좀 하고 오겠습니다.”박유진이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그는 빨리 택배를 뜯어보고 싶었다.“나도 갈래!”심서연은 박유진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녀는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서연아, 그만 좀 해!”심동현이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유진은 일하러 가는 데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그는 박유진이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사랑에 빠진 그의 딸은 박유진의 마음속 거부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유진 오빠, 같이 가면 안 돼?”심서연은 집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져 부모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게다가 곧 박유진과 결혼할 사이인데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정을 쌓는 게 뭐가 잘못됐다는 말인가?박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회사 기밀이 관련된 일이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수 없어.”“나는 봐도 몰라. 그러니 회사 기밀을 누설할 걱정은 안 해도 돼.”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먹고 마시고 놀기만 했을 뿐 회사에는 단 하루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재무제표는 물론 전문 용어는 외계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어차피 집에 돈이 있으니 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으로는 또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테니 더더욱 일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없었다.박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겉으로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속에서는 분노가 용암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끈질긴 파리처럼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심서연은 정말 짜증
소포 안에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상자를 꺼내 열자 카드 한 장이 떨어져 나왔다.상자를 내려놓고 카드를 집어 들자 박유진은 카드에 적힌 '심'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기쁜 마음에 얼른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조심스레 넥타이를 꺼내 든 그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심미연이 가장 좋아하는 색인 걸 보니 그녀가 보낸 게 분명했다.그는 넥타이를 맨 후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었다.심미연에게 사진을 보내고 싶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그녀에게는 이제 강지한이 있으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선물을 간직하기로 했다.*강지한은 오랜만에 심미연이 해 준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저녁을 유난히 많이 먹고 와인 한 병도 다 비웠다.물론 와인은 전부 그 혼자 마셨다.임신 중인 심미연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다행히 기분이 좋았던 강지한은 심미연이 물을 마시는 것에 대해 굳이 트집을 잡지 않았다.저녁 식사 후, 심미연은 강지한의 손을 잡고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갔다.정원에는 꽃이 많이 심어져 있어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심미연은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감탄했다.“향기 너무 좋다!”강지한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렴풋한 그림자 속에서 심미연의 얼굴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이 여자의 얼굴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다웠다.그렇지 않았다면 로펌의 사람들도 그렇게 그녀의 미모와 재능을 질투하지 않았을 것이다.“지한 씨, 이 꽃들은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야?”정원의 꽃들은 모두 강지한이 심은 것이었다.그녀는 이 꽃을 심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좋아하는 꽃이라서 심은 걸까?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다쳐!”정원의 모든 꽃은 예전에 죽은 형의 것이었다.이전에는 아무도 그 꽃들의 유래를 묻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아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심미연이 알게 되
심미연은 속으로 당황했다.이대로 강지한에게 안겨 방에 들어가면 그는 틀림없이 바로 잠자리를 가지려고 할 것이다.그리고 오랫동안 참아왔으니 얼마나 격렬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미리 생각해 둔 계획을 실행할 틈도 없었다.“왜? 싫어?”강지한은 그녀의 거부를 느끼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심미연은 황급히 그의 목을 껴안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목젖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오랜만인데 당연히 좋지... 근데 배가 좀 아픈 것 같아. 생리인 것 같기도 하고.”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그녀는 이미 이 핑계를 생각해 두고 있었다.어쨌든 실제로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아이에게는 해가 없을 테니까.강지한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생리라고 하지 않았나?”한눈에 그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심미연은 들킨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지난번이라니 언제?”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똑같은 핑계를 댔었고 그때 마침 온지유의 전화가 와서 강지한을 불러나갔던 것 같았다.지금도 온지유가 전화를 걸어와 강지한을 데려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지한은 입술을 오므리며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미연아, 나랑 자기 싫어?”요즘 그녀는 그를 밀어냈고 다가가려 하면 슬쩍 피했다. 그는 그녀의 이런 변화를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대체 누구 좋으라고 정조를 지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심미연은 다급하게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너무 다급한 대답은 오히려 거짓처럼 들렸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녀의 수상쩍은 행동은 그를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았다.심미연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한은 속이기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그녀는 몰래 심호흡을 하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지한 씨, 정말 당신이랑 자기 싫은 거 아니야!”남자가 이미 의심을 사버렸으니 생리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이제 두 번째 계획을 써야 할 때였다.먼저 그의 흥미를 돋운 다음
[한 잠 자고 일어났을 때 위치 정보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어요. 여러 번 시도했지만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동생분의 핸드폰에 접근해 통화 기록을 확인했죠.][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강씨 사모님이었어요.] 심미연은 눈을 반쯤 감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심서연은 무슨 일로 문소영을 찾았을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친한 관계였나?’[보스, 지금 심서연 씨가 소식이 끊긴 상태인데 계속 추적할까요?] [네. 추적하세요.] 심미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느꼈다. ‘심서연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을 찾아서 추적하겠습니다. 그럼 신하린 씨 교통사고는 어떻게 할까요?] [제가 일이 끝나면 그 사람 정보를 다시 확인하고 진짜 신원을 정확히 파악해볼게요.] [네. 알겠습니다.]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벽에 기대 섰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때 병실 안에서 심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빨리 와요!”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급히 생각을 정리한 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엄마, 빨리 와서 이모 다리 어디 갔는지 찾아봐요.” 심태하가 그녀를 보고 급하게 달려왔다.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 심미연을 애타게 바라봤다.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부드럽게 안아 올리며 심태하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이모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어. 이제 의족으로 대신해야 해. 그러니까 이모 앞에서 다리가 없다고 말하면 안 돼.”심태하는 눈가가 갑자기 붉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이모는 다리를 잃었어. 이모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 이모가 요즘 그렇게 기운도 없고 얼굴이 안 좋았던 거구나.’ ‘다리를 잃은 거였어.’어린 아이는 마음이 먹먹하고 아픈 감정이 밀려왔다. “태하가 불어주면 이모가 안 아플 거야.” 신하린은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에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간병인은 이미 출근해 신하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고 있었다. 심태하는 병실 문을 열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나 왔어요!”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치며 병상으로 달려가자 신하린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간병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침 준비해 주세요.” 간병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심태하는 침대 곁으로 뛰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침대에 누워 있는 신하린을 바라봤다. “이모, 저 보고 싶었어요?” 부드럽고 귀여운 목소리에 신하린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엄청엄청 보고 싶었지.” 심태하는 까치발을 들고 침대에 올라가려고 애썼지만 키가 닿지 않자 포기하고 조그만 얼굴을 숙여 신하린의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저도 엄청 보고 싶었어요.”심미연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시리게 아려왔다. 손에 든 죽을 옆의 서랍장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혹여 자신의 감정이 신하린에게 전해질까 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짧은 말만 남긴 채 병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신하린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담긴 쓸쓸함이 선명하게 느껴져 마음 한쪽이 시큰해졌다.지금 심미연이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신하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미연이 조금이라도 덜 걱정하도록 신하린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묵묵히 치료에 임했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서 병원을 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심미연이 더는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을 테니까.심미연은 병실을 나온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보스, 신하린 씨 사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심미연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누구예요?] [한유나 씨 아버지입니다.]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경비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박유진과 언젠가는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박유진은 심미연이 멍하니 있는 걸 보며 잠시 마음이 조금 씁쓸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갔다. “농담이야. 결혼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어. 이렇게 하자. 오후에 시간이 되면 같이 보러 가자. 마음에 들면 내일 바로 이사도 가능해. 어때?”그는 심미연의 마음속에 강지한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건 심미연이 그와 함께 평생을 살아갈 만큼 감정이 깊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심미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오빠...” 심미연은 박유진이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 모습에 마음속 깊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박유진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지금은 오빠한테 결혼을 약속할 수 없어.” 그녀는 아직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박유진을 평생 고통 속에 두고 싶지 않았다. “알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돼.” 박유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심미연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마음의 병이 있다고 말하며 그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유진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진성에 있을 때였다면 이렇게 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경성에 돌아온 후 강지한이 언제든지 심미연과 심태하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아 점점 더 초조해졌다.“나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치료 받을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확신시키려 애썼다. 매번 의사 말을 순순히 따르며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심미연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심미연은 세수를 하고 간단히 준비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유진은 이미 아침을 준비해 놓고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 조금 더 자.” 박유진은 청소기를 끄고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할 일이 많아서 더 이상 못 자. 정신없이 바쁠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먼저 아침 먹어. 나는 위층 가서 태하 깨울게.” 박유진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알겠어. 오빠가 태하 깨워줘.” 심미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살짝 비벼댔다.박유진과 함께하는 시간은 평온하고 따뜻했다. 그저 이런 일상이 이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아침 먹어. 난 위층 가서 좀 보고 올게.” 박유진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으며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심미연은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걸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박유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깊은 숨을 내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심미연의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심태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박유진의 마음은 저절로 따뜻해졌다. 심미연과 심태하를 돌보는 건 그에게 큰 행복이자 기쁨이었다.심미연은 식탁에 앉아 보온병을 열었다. 따뜻한 우유와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기가 퍼졌다. 빵은 부드럽고 입 안에서 살살 녹으며 그 맛이 정말 좋았다. 박유진은 예전엔 찐빵이나 만두 같은 것만 만들 줄 알았고 빵과 케이크는 나중에 배우게 된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와 심태하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심미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무거웠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심미연은 복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아침을 마치고 거실로 나가자 박유진이 심태하를 안고
신하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에 스친 냉소는 차갑고 깊었다. ‘내가 멀쩡할 때는 단 한 번도 결혼 얘기 안 하더니. 이제 다리 하나 못 쓰게 되니까 그제야 날 데려가겠다고?’ ‘날 데려가서 네 부모한테 실컷 조롱당하게 하려고?’“왜 그렇게 봐?” 이진영은 신하린의 시선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숨을 삼키듯 숨을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물었다. 신하린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이진영 씨, 난 예전에도 당신과 만나겠다고 한 적 없어요.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 없을 거고요.”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예요.”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내뱉는 말들이 조금의 여지도 없이 이진영을 꿰뚫었다.이진영은 허리를 숙여 수건을 적셨다. 꾹 짜낸 뒤 조용히 걸음을 옮겨 신하린 앞에 섰다. 수건을 조심스럽게 들어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데려가겠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갈 거야.” “예전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너한테 약속할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제 모든 일 정리되는 대로 너랑 결혼할 거야.” “한 말은 반드시 지킬 거야.”지난 4년 동안 이진영은 많은 일을 해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만들어낸 적도 많았다. 그의 곁에 신하린이 있으면 그만큼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고싶어도, 미칠 듯 그리워도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전 안 해요. 절대 당신이랑 결혼 안 해요.”“이진영 씨, 당장 나가세요.” 그날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억지로 눌러왔던 감정이 터져 나오듯이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이 쏟아졌다. 그녀가 견뎌온 모든 고통은 전부 이진영 때문이었다. 이진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낸 뒤 손까지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네가 기분 안 좋다는 거 알아. 그럼 나 한 대 쳐서라도 기분 풀래?” 신하린은 그 손을 냉정하게 뿌
강지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의 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심미연은 분명 병실에 와서 강상미를 만났지만 의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 독한 여자야.’“시간도 늦었고 나도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먼저 간다.” 이진영은 담배를 끄고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다. 강지한은 술을 따라 마시며 심미연에 관한 생각에 잠겼다. ‘심미연은 언제 의술을 배운 거지?’ ‘이 3년 동안 이 여자는 도대체 뭘 했던 걸까?’이진영이 차에 올라타자 기사가 물었다. “도련님,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이진영은 미간을 문지르며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순간 마음 속이 답답해졌다. “병원으로 가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엔진을 돌렸다.신하린의 병실 앞에 도착한 이진영은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이진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들어가서 잠깐 보고 올게요.” “신 대표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심미연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론은 한 마디였다. 그들은 명령을 따랐기에 규칙을 어길 수 없었다.이진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여기는 내 병원인데 병실도 맘대로 들어가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돌아가 주세요.” 경호원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하지만 그때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말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어요. 들어가게 해줘요.” 경호원은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때 또 한 번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경호원도 놀라서 급하게 병실 문을 열었다.이진영은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신하린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조명 아래서 그 모습은 다소 섬뜩하게 보였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다가가 신하린을 침대에 눕히고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면서 옆에 멍하니 서 있던 경호원에게는 급히 소치쳤다. “의사
“너희 아버지가 최근에 한석훈과 많이 가까워졌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로 한석훈과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더라.” 강지한은 박시훈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이진영에게 전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사실 지난 4년 동안 그는 한석훈의 배후 세력을 조사해왔고 조사할수록 그 배후는 점점 더 복잡하고 충격적인 사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너와 한유나 씨 사이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야?” 이진영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혼약을 해제할 생각이야.” 그는 이미 한유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한유나는 최근 들어 그를 피하는 듯했다. 그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구아정은 어떻게 할 거야?” 강지한이 다시 물었다. “네 첫사랑이라고 했지?”“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고 그 뒤로 그냥 끝났어.” 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신하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지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신하린이었다.이제 그녀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느꼈다. 그녀의 다리가 이렇게 된 지금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를 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구아정,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해본 적 있어?” 강지한이 상기시키듯 말했다.“조사 중이야.” 이진영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겠어.”구아정은 분명 그를 찾으러 온 거였다.‘왜일까?’“신하린 씨의 일은 잘 해결됐나?” 강지한은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물었다.“하린이 오른쪽 다리가 절단됐어.” 이진영은 말하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흡입했다. 연기가 흩어질 때 그는 다시 한 번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강지한은 잠시
문소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두 명의 아들을 뒀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할 거야. 그럼 당신도 명예를 잃고 끝장날 거라고.” 그녀는 지금 이 남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두 아들을 뒀다고? 증거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며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당시 내 임신 검진서도 여전히 남아 있고 병원에 가면 내 출산 기록도 확인할 수 있어. 그 아이들의 혈액형은 당신이랑 똑같아.” 문소영은 그동안 이 모든 것을 철저히 보관해 왔다.“문소영, 나를 망치려고 하는 거야?” 남자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나는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래.” 문소영은 감정을 정리한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나에게 유리해.” “내가 원칙을 깨고 너를 돕기를 바란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남자는 술잔을 비운 후 탁자 위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소영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며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그에게 경고만 준 것뿐이다.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대로였다.잠시 후 문소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모님, 지시하신 대로 사람을 공해에 던졌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해외로 잠시 숨어 있어. 여기 상황이 정리 될 때까지 기다려.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된다.] 문소영의 얼굴엔 차가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들이 돌아올 때쯤 심서연의 죽음은 이미 잠잠해지고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문소영은 전화를 끊고 술을 따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진영은 술을 많이 마셨고 잠간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버지를 닮은 듯해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발걸음
문소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있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TV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미칠 듯했다. 문소영은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믿어왔다.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문소영은 깊은 생각을 떨쳐내고 몸을 곧게 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필요해서 왔어. 우리 아들에 관한 일이야.” 남자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아들이 있다고? 그럴 리가...” “쌍둥이였어. 작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납치됐고 큰 아이는 강지성.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었어.” 문소영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급히 이어갔다.이건 그녀가 삼십 년 넘게 숨겨온 비밀이었다. 그녀는 이 생에서 절대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 이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내뱉게 되었다. 문소영의 말은 마치 폭탄처럼 남자의 가슴 속에 떨어졌고 남자는 동공이 급격히 축소되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문소영과 자신이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사실 처음 내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당신에게 말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집에서 강제로 나를 강우석과 결혼시키려 했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러자 부모님은 나를 감금하고 내 핸드폰도 압수했어.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어.” 문소영은 말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그녀는 부모님의 강요로 강씨 가문에 보내졌었다. 강우석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우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강우석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 상대가 바로 강지한의 어머니였다. 7개월 후 그녀는 쌍둥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그 중 한 명이 사라졌다. 그녀는 30년 동안 그 아이를 훔쳐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그 사람이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