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맞아요.”현정우가 사랑한다는 사람은 방금 그를 개라고 했다.그의 짝사랑과 헌신이 그런 모욕적인 말로 돌아오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나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한민영을 쳐다보았다. 모닥불에 비친 그녀의 뺨은 발그레하고 따뜻해 보였다.평소에 보던 한민영과는 사뭇 달랐다.저 여자는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예쁘면서도 오만했다. 게다가 이미 마음을 준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고 입만 벌리면 쏘아붙이고 세상 무서울 게 하나 없는 태도였다.이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약점도 없고 무서울 게 없으니까.나는 원래 그녀를 싫어했지만 지금은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냥 말투가 좀 싸가지 없을 뿐이었다.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현정우는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천천히 말했다.“그분은 좋은 분이에요. 의리 있고 절친과 석 대표님께는 진심으로 헌신적이거든요. 다만 사람들이 그분을 잘 몰라서 그래요.”나는 그녀를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네.”내가 대답했다.현정우는 그의 한두 마디 말로 한민영에 대한 나의 오해가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하긴 가끔은 좀 재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분 입장에서는 굳이 여러분께 잘 보일 필요가 없잖아요. 마치 가주님께서 유서정과 석나은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마다 각자의 상황과 생각이 있는 법이라고요! 한민영 씨는... 그냥 말이 좀 험할 뿐이에요. 그나마 여러분께는 꽤 예의를 차리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욕했을 거예요!”그럼 내가 한민영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건가?나는 한민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현정우는 계속 내 앞에서 그녀의 편을 들었다... 현정우는 내 사람이고 한민영은 그가 짝사랑하는 사람이었니 그는 아마 중간에서 제일 난처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의 입장을 배려하여 나는 한민영에 대한 험담은 하지 않고 그에게만 조용히 말했다.“네
한민영은 행동파답게 나랑 현정우를 짜증 섞인 눈으로 흘끗 보고는 산에서 서둘러내려갔다.원태웅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왜 저렇게 급하게 가? 약속 있는 것처럼. 아까 그 전화가 애인한테 온 거 아냐?”한민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몰라. 근데 요즘 진짜 남자들이 자주 전화하더라. 아마 누가 쫓아다니는 거겠지. 아무튼 걔가 석지훈만 안 쫓아다니면 그만이야.”한민수의 말에 나도 마음이 놓였다. 나도 요즘 한민영이 석지훈을 쫓아다니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자기도 잡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한민영이 간 지 두 시간쯤 지나서 석지훈과 왕자현이 왔는데 잘생긴 남자 둘이 동시에 나타나자 나와 최희연만 눈이 휘둥그레졌다.여기 여자는 우리 둘뿐이었으니까.원태웅이 떠들어댔다.“윤아야, 네 남자 안 맞아? 그리고 희연 씨, 너 지금 왕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다며? 얼른 가서 아는 척해야지. 왜 이렇게 가만히 있어?”원태웅은 분명 윤 비서에게서 들었을 것이다.나와 최희연은 일부러 태연한 척하면서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최희연은 내 옆에 쪼그린 채 앉아있었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기 싫어서 그냥 두 남자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왕자현이 먼저 말을 걸었다.“희연아.”왕자현은 항상 최희연을 부인 아니면 희연이라고 부드럽게 불렀다. 이런 남자는 정말 온화하지만 눈썹 사이에는 깊은 고요함이 서려 있어 속세와 동떨어진 차가움이 느껴졌다.그는 최희연한테만 다정한 것 같았다.최희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빠.”왕자현은 은근히 최희연이 자기한테 오빠라고 불러주길 바랐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문자를 씹어버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오빠라고 불렀으니 엄청 뿌듯했을 듯했다.그 뿌듯함을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가 만들어줬으니 왕자현의 눈에서는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는 최희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어. 그래.”
“선생님, 저예요.”그랬다. 예지한이 걸려온 전화였다.한민수 옆에 있던 예유진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한민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지한아, 또 무슨 일이야?”'또'라는 말을 쓰는 걸 보니 예지한이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는 것 같았다.“선생님, 저 좀 심심해요.”한민수가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심심하다고 나한테 전화하는 거야?”예지한도 솔직하게 말했다.“친구가 없어서 그래요. 지금 연락할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어요. 그러니 전화 끊지 마세요!”“지금 캠핑 나왔어.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예지한이 말했다.“알았어요. 끊을게요.”그녀는 전화도 터프하게 끊었다. 전화가 끊자마자 예유진이 물었다.“지한이가 요즘 너한테 자주 연락해?”“응, 애가 심심해서 수다 떨 사람 찾는 거지.”예유진: “심심하면 너한테 연락한다고?”예유진은 질투하는 게 분명했다.원태웅이 말했다.“됐고, 카드 게임이나 하자!”우리 일곱 명은 둥글게 앉았다. 원태웅이 불빛이 너무 어둡다고 밖에 있는 현정우한테 스탠드 몇 개 더 가져오라고 시켰다.내가 웃으면서 말했다.“오빠는 내 사람을 아주 자연스럽게 부려먹네요.”원태웅이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너 쟤 되게 감싸고도는 거 알아? 이상할 정도로.”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무슨 소리예요?”마침 현정우는 스탠드 가지러 가고 없었다.원태웅이 말했다.“너 걔 자존심 되게 세워주더라.”“당연하죠. 내 사람인데.”난 한민영이 현정우를 무시하는 게 싫었다.한민영이 가고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한민영이 언제 그를 높이 평가한 적이 있었던가.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씁쓸해졌다.“됐어. 카드 게임이나 해.”한민수가 모두를 보면서 말했다.“진실게임이니까 다들 규칙 잘 지켜야 한다. 무슨 질문을 하든 거짓말하면 안 되고 뭘 시키든 미루면 안 돼! 물론, 너무 심한 건 안 할 거고 선은 지킬 테니까 안심해도 돼!”원태웅이 주도하는 자리에서 한민수가 갑자기 몇 마디 하자 나는 마음이 불안
원태웅의 장난이 좀 심했다. 게다가 이런 요구는... 사실 진실 게임이나 벌칙 게임에서는 그리 심한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아마 옆에 있는 남자가 석지훈이기 때문일 것이다.이런 건 사적으로는 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는...다섯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다. 원태웅은 전혀 봐주는 게 없었다.“형, 빼기 없어!”석지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이건 벌칙 몇 개로 치는 거야?”원태웅은 잠시 생각하더니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했다.“두 개. 형이랑 윤아 서로 벌칙 주는 거야. 쳇, 둘이 뽀뽀하고 싶어 죽겠으면서 억지로 싫은 척하는 거 좀 봐!”원태웅은 제 무덤을 파는 줄도 모르고 우리를 놀리기 시작했다.석지훈 걱정도 됐지만 나도 엄청 긴장됐다. 원태웅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다른 벌칙으로 바꿔 달라고 할 핑계를 찾고 있을 때, 석지훈이 갑자기 내 머리를 잡아당기더니 내 입에서 사과를 베어 물었다. 나는 완전 얼어버렸다.“오... 오빠...”석지훈은 태연하게 그 사과를 먹었다. 원태웅은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형, 이건... 이건 반칙이야! 내가 말한 건 입술끼리 키스해야 한다고!”석지훈은 차갑게 원태웅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는 겁을 먹고 말을 바꾸었다.“뭐,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 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하면 안돼! 자자, 다음 게임 시작하자.”원태웅이 먼저 주사위를 굴려 3이 나왔다.이어서 한민수는 4가 나왔고 최희연과 왕자현의 주사위 눈의 합은 5였다.그들은 또다시 합이 12였다.우리 쪽에서는 예유진이 먼저 주사위를 굴렸다.예유진은 시작부터 6을 굴렸고 석지훈의 운은 여전히 좋았다. 그 역시 6을 굴렸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둘의 주사위 눈의 합은 이미 12였으니 나는 아무렇게나 굴려도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신중하게 주사위를 던졌다. 그런데 또 1이 나왔다.나는
한민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름을 하나 말했다.하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예유진은 온몸이 굳었다.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눈치챈 원태웅은 분위기를 바꾸려고 말했다.“희연 씨랑 왕자현 씨한테도 빨리 물어봐. 재밌는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잖아.”나는 최희연에게 서둘러 물었다.“너 연애편지 써 본 적 있어?”최희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어, 써 봤어.”나는 놀라서 말했다.“내가 왜 몰라?”“어렸을 때 써 봤는데, 전해 주지는 못했어.”어렸을 때 일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내가 질문을 잘 못 하는 걸 보자 원태웅은 꽤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최희연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옆에서 계속 조용히 있던 왕자현에게 일부러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왕자현 씨, 마음속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왕자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또박또박 말했다.“당연하죠. 누구나 마음속에 좋아하는 사람은 다 있잖아요.”원태웅이 끼어들며 말했다.“그건 묻지 않아도 알잖아. 와이프가 여기 있는데 당연히 희연 씨를 좋아하겠지. 무슨 그런 질문을 해?”원태웅은 화가 났는지 팀을 다시 나누자고 했다. 그때 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들 재밌게 노네. 혹시 사람이 부족한가? 내가 끼어도 될까?”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당신이 어떻게 왔어요?”“석지훈이 초대했어. 다 같이 캠핑한다고 해서 심심해서 와 봤는데 내 전처도 있네.”진유겸은 다가와 최희연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최희연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지만 왕자현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그는 항상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나는 석지훈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진유겸은 석지훈이 부른 게 아니었다. 불청객이었다.주민솔이 집에 가서 말해버린 게 분명했다. 진유겸은 최희연이 여기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까는 왕자현이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주민솔은 왕자현이 있는 줄 몰랐으니까.원래 좀 괜찮았던 분위기
원태웅은 석지훈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바깥세상의 소문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특히 최희연과 진유겸의 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원태웅의 질문은 의도적으로 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나는 원태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원래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원태웅은 노는 것을 좋아했고 누구를 불쾌하게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석지훈에게도 짓궂게 굴었지만 사과는 빨리하는 편이었다.진유겸은 솔직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전처 때문에 왔지.”의도는 분명했지만 왕자현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는 최희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희연아, 안 추워? 오빠가 외투 가져다줄게.”왕자현이 스스로를 오빠라고 칭하는 것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나는 얼굴을 가리고 최희연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반대로 진유겸의 얼굴은 어두웠다.최희연은 고개를 젓다가 끄덕이며 말했다.“추워요.”왕자현은 최희연에게 외투를 가져다주기 위해 텐트로 갔다. 원태웅은 석지훈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진실게임을 택했고 석지훈은 여전히 벌칙 게임을 선택했다.석지훈은 절대 주도권을 남에게 넘기는 법이 없었다.원태웅은 마지못해 나에게 물었다.“너는 네 몸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뭐야?”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다.나는 웃으며 대답했다.“코요.”원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확실히 오똑하네.”나는 웃으며 말했다.“칭찬 고마워요.”이제 예유진과 석지훈만 남았다.석지훈은 벌칙 게임을 선택했고 아무도 그에게 너무 어려운 벌칙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를 향해 ‘사랑해.’라고 말하는 벌칙을 주었다.게임에 참여한 모두가 규칙을 잘 지켰다. 석지훈은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말했다.“내가 윤아를 좋아하는 건 다들 알잖아? 사랑해.”한민수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눈이 없어지겠어요!”그의 말에 나는 받아쳤다.“내 마음이죠.”질문이 끝나자마자 왕자현이 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지만 최희연은 망설였다. 그녀가 망설일수록 왕자현은 더 곤란해졌다. 모두가 최희연과 진유겸의 과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최희연이 자신의 입장을 밝힐 때였다.이 진실게임은 모두 벌칙 게임 같았다.산속의 달빛은 점점 더 밝아졌다. 최희연은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신중하게 말했다.“유겸 씨, 우리가 이혼할 때 앞으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더 이상 나의 작은 아버지가 될 수 없죠. 그리고 내가 당신을 작은아버지라고 부른 건 당신이 그 사람의 작은아버지였기 때문이에요.”최희연이 말하는 '그 사람'은 진서준이었다.그녀의 대답은 꽤 매정했다.진유겸과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 같았고 혹시 과거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진서준 때문이라는 의미였다.“예전에 날 사랑한다고 했었잖아.”진유겸은 왕자현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오늘의 진실게임과 벌칙 게임은 정말 곤란한 상황만 만들었다.최희연은 잠시 멍해지더니 말했다.“당신도 예전이라고 했잖아요.”이미 지나간 일을 왜 마음에 담아둔단 말인가?진유겸은 정말 마음이 아팠다. 이제 왕자현만 남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니면...”왕자현의 부드러운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고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말했다.“희연이를 안아주세요.”진유겸의 차가운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내 생각에 진유겸은 나를 때릴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때렸을 것이다.나는 바보처럼 웃으며 석지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오빠, 나 왠지 위험한 것 같아요.”“응, 다들 속셈이 있네.”모두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확실히 속셈이 있는 듯했다.왕자현은 진유겸이 보는 앞에서 최희연을 부드럽게 안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그러고는 이내 놓으며 말했다.“희연아, 긴장하지 마.”그의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진유겸 때문에 긴장하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포옹 때문에 긴장하지 말라는 뜻일까?전자라면 진유겸은 기뻐할 것이지만 후자라
짙은 어둠 속에서 최희연의 얼굴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때 왕자현이 불쑥 손을 뻗어 최희연의 손을 감싸 쥐더니 차가운 어조로 진유겸에게 물었다.“진실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내 와이프를 이렇게 곤란하게 하는 건 너무하네요! 진유겸 씨, 게임에도 선이 있는 법입니다.”제일 먼저 최희연을 감싼 건 왕자현이었다.진유겸은 비웃으며 말했다.“당신들이 먼저 시작한 거 아니었나? 어떻게?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그리고 난 당신한테 물어본 것도 아닌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진유겸의 말투는 정말 얼굴을 붉히려는 것 같았다.그는 최희연에게 날카롭게 물었다.“나를 사랑해?”최희연은 마스크를 코까지만 쓰고 있어서 위 얼굴이 보였는데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듯 주변 사람들은 모두 짐작하는 눈치였다. 나는 왕자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왕자현은 일어서서 최희연을 텐트로 데려가려 했지만 최희연은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천천히 한마디 내뱉었다.“사랑해요.”나는 왕자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차가웠지만 관용이, 분노했지만 알 수 없는 신뢰가 어려 있었다. 마치 곁에 있는 여자를 전적으로 믿는 듯한 표정이었다.진유겸의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어.”그는 최희연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마치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최희연은 천천히 말했다.“사랑하는 건 맞지만 잊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 잊을 수 없는 건 아니에요! 2년 전처럼... 내가 용기를 내서 서준을 포기하고 당신을 선택했던 것처럼요.”진유겸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말이야? 서준이가 없어서 나를 사랑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희연아, 아직도 날 몰라? 난 내가 원하는 건 반드시 가져야 해!”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유겸 씨, 이혼하던 날 당신은 정말 매정했어요. 그래도 난 당신을 놓아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날 분명히 말했는데 지금 이 집착은 대체 뭐예요?!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