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네 소원이라면.”그 한마디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그때 우리는 아직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고현성이 “세상을 떠난 지” 겨우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나는 아직 석지훈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나를 단순한 가족처럼 여겼다.하지만 나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몰래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버렸다.달빛이 쏟아지는 밤, 그의 눈빛은 유난히 차갑고 날카로웠다.마치 주변 공기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린 듯했다.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키스하고 싶어?”그리고 다시 물었다.“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나는 알고 있었다.그 순간, 우리 사이의 마지막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고 더 이상 나는 고현성을 사랑하는 연수아가 아니게 될 것이다.그 또한 나에게 단순히 둘째 오빠가 아니게 될 것이다.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걸 눈치챘는지 그는 조용히 내 뺨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수아야, 무슨 생각해?”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처음으로 오빠한테 키스했던 순간.”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응?”“에르크 별장에서.”그가 고쳐 말했다.“아니야.”“그럼요?”“강물이 처음이었지.”석지훈이 말하는 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때 그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고 우리는 얼음장 같은 강물 속에서 첫 키스를 했다. 하지만 의식이 흐릿해서인지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난 기억이 없어요.”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핑계네.”나는 뻔뻔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그는 다정하게 말했다.“하지만 수아야, 난 기억해.”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달콤해서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나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그렇게 주장하고 싶다면 좋아요. 대신 운성시로 돌아가면 나랑 세 가지를 같이
그는 결국 나와 약속했다.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 순간, 그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건넸다.“우리 사이에서 손에 꼽을 정도야.”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뭐가 손에 꼽을 정도예요?”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부끄러운 일.”하지만 나는 자궁암 수술을 받은 지 이제 겨우 석 달, 그동안은 절대 부부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그는 반드시 삼 개월을 참아야 했고 나 역시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갑자기 그가 유럽으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모르는 척하며 피곤한 듯 말했다.“나 자고 싶어요.”그는 조용히 나를 끌어안았고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가운데 나는 금방 잠들어 버렸다.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었다.자리에서 일어나자 석지훈은 방에 없었다. 나는 맨발로 계단을 내려와 그를 찾았고 1층 거실에서 윤 비서와 대화 중인 그를 발견했다.나를 보자 윤 비서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수아 씨.”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강 비서는요?”“아직 자고 있습니다.”나는 놀라서 물었다.“혹시 어제 술 마셨어요?”보통 출장 중에 내가 일부러 휴가를 주지 않는 이상 비서가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다.윤 비서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아닙니다. 어젯밤에 강 비서가 길을 보지 않고 걷다가 강에 빠졌거든요. 그러다 감기에 걸렸는지 병원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지금까지 푹 자고 있는 겁니다.”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괜찮아요?”“네, 다만 피곤해 보이긴 합니다. 그래서 대표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강 비서가 깨어나면 함께 운성시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가씨의 비서이니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요.”나는 아직까지 내 비서가 언제부터 석지훈의 비서와 이렇게 친해졌는지 모르겠다.마치 오랜 인연을 뒤늦게 만난 것처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부탁할게요. 전 괜찮아요. 그리고 강 비서한테 사흘 동안 휴가라고 전해 주세요.”
[희연아, 무슨 일이야?]그녀는 한참을 뜸 들이다가 답장을 보내왔다.[나... 혼인신고 했어.]혼인신고?무슨 혼인신고?설마 결혼했다고?나는 깜짝 놀라서 이내 메시지를 보냈다.[누구랑?][나랑 5년 동안 알고 지낸 남자.]나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왕자현?][응, 바로 조금 전에.]지금 국내는 아마 점심쯤이었다.최희연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혼했다고?그것도 진유겸보다 먼저 했다니.어쩌면 그에 대한 복수인가?나는 차마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랐다.아니, 솔직히 말하면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괜히 그녀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걱정되었다.나는 이 이야기를 회피하듯 답장을 보냈다.[내일 돌아가면 만나. 지훈 씨가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어. 우리 같이 보자.]하지만 최희연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그는 노트북을 덮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그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이제 운성시로 돌아가는 거예요?”“응. 근데 외투는 왜 안 입었어?”나는 입고 있는 체크무늬 원피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안 추워요.”국내는 점점 따뜻해지는 시기라 바람만 불지 않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가 운성시의 날씨를 너무 얕봤다.그곳은 비가 내렸고 그것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였다.비바람 속에서 온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지만 그는 아까 F국에서 내가 했던 말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그는 내일 연씨 가문의 별장에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안심이 되어 편히 잠들 수 있었다.하지만 그때, 내 핸드폰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현성이 보낸 메시지였다....아이스랜드.왕자현은 복도에 서서 아래에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혹여 그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운 듯 급히 말했다.“제가 약속드릴게요. 언젠가 자현 씨가 다른 여자를 원하시게 된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그의 권력을 이용해 복수하려고 했어도 그는 기꺼이 허락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진유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내기로 했다.그렇게 해야만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그때가 되면 그녀는 이미 유부녀일 테니까.더 이상 그에게 어떤 기대도 품지 않아 된다.여자는 한 번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남자보다 훨씬 더 단호해지는 법이다.“먼저 운성시로 돌아가세요. 내일 찾아갈게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나서려는 순간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았다.흰색 기모노를 입은 그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고귀했다. 마치 만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했다.더군다나 그의 얼굴은 조각상마냥 완벽했다.어쩌면 이 세상에서 드문 남자였다.하지만 그녀는...그랑 어울리지 않았다.차마 바라볼 수조차 없는 사람이었다.그녀의 마음속은 쓰라림과 열등감으로 가득 찬 채 비굴하게 그를 불렀다.“왕자...”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진짜 이름인가요?”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한참을 뜸 들이다가 말했다.“제 증조부는 일본인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문화를 무척 좋아했지만 사실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어요. 그래서 제 이름을 지을 때...”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녀에게 되물었다.“제가 굳이 이름을 속일 필요 있을까요?”“아... 왕자는 혼혈이셨군요.”최희연은 그가 어느 나라 국적인지 정확히 몰랐다.그는 두 손을 뒤로 한 채 차분하게 설명했다.“증조부는 일본인, 증조모는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중, 한 혼혈이에요. 저는 우리나라 혈통이 더 많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죠.”아, 그래서 기모노를 입고 있었구나.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그 순간,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희연 씨.”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석지훈은 이미 곁에 없었다. 혹시 또 예전처럼 나 모르게 떠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찾아 나섰다.하지만 서재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한 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보다.곧이어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이랑 민수는 지금 핀란드에 있어. 이번에 넌 운성시에 남아서 수아를 돌봐.”“알겠어, 나도 솔직히 해외 나가긴 싫었어.”원태웅의 목소리였다.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형, 수아가 아직도 형한테 화났어?”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지훈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격했다.“언제 적 얘기를 아직도 꺼내는 거야?”나는 처음으로 그가 이런 식으로 화내는 걸 보았다. 근데 편안한 분위기였다. 둘의 관계는 생각보다 가까운 것 같았다.원태웅은 눈치채고 잽싸게 분위기를 바꿨다.“아니, 그냥 걱정돼서 그러지. 그나저나 여자들은 말이야, 잘 달래주면 다 풀린다고 하더라고.”“...”문 앞에서 듣고 있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석지훈은 아무 대꾸 없이 그의 말을 무시했다.그런데도 그는 기어이 선을 넘으며 계속해서 떠들었다.“형, 꼭 고현성을 조심해야 해! 그 자식, 수아를 절대 포기 안 할 거야. 수아의 전남편이자 수아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야. 솔직히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 한구석이 약해질 수도 있잖아? 게다가 요즘 고현성이 겪은 일들이...”그가 말끝을 흐리는 바람에 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고현성이 요즘 무슨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거지?다만 그가 무슨 일을 겪든 이제는 나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석지훈은 짧게 대답했다.“수아는 스스로 판단할 거야.”원태웅은 피식 비웃음을 흘리더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태연한 척해 봐야 소용없어. 고현성이 다시 수아한테 다가오면 형 또 질투하면서 속으로 혼자 부글부글 끓을 거잖아? 물론 형은 절대 질투한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나는 석지훈에게 그저 조금 더 나를 아껴 달라고 조를 뿐, 원태웅처럼 그의 한계를 시험하며 장난을 치진 않았다.그는 그렇게 쉽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계속해서 건드리다간 언젠가 큰코다칠지도 모르는 일이다.나는 원태웅을 향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게 같아요?”원태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확실히 다르지. 형은 널 아끼니까 네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벌을 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가 말썽을 부리면 무조건 벌받는단 말이야. 민수랑 유진이 봤지? 지훈이 형은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야.”나는 그만 시선을 거두고 창문을 통해 비가 그친 뒤 맑아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걸 알면서도 계속 그러는 거예요? 셋째 오빠, 내가 한마디만 할게요. 강가를 자주 걷다 보면 언젠가 발이 젖기 마련이에요.”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형이랑 얼마나 오랜 친구라고, 절대 선 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나를 향해 말했다.“형, 원래 오늘 핀란드로 가기로 했잖아? 근데 내일로 미뤘더라. 보나 마나 하루 더 시간을 내서 너랑 함께 있으려고 그런 거지?”석지훈은 오늘 함께 연씨 가문 별장에서 식사하기로 약속했다.그는 분명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네, 오늘 집에 가서 애들 보려고요.”그는 갑자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수아야, 형한테 잘해. 형은 네가 소중히 여길 만한 사람이야.”그는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고 그 한마디는 이상하게 내 마음 한구석을 찜찜하게 했다.나는 곧장 서재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석지훈은 아직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바빠요?”그는 짧게 대답했다.“30초만.”나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그는 윤 비서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어떤 일이든 내일 핀란드에서 얘기해. 오늘은 절대 방해하지 마.]메일을 보낸 뒤 그는 노
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보고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조용히 고개를 돌려 설거지를 계속했다.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자 그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검은색 밀리터리 룩에 허리에는 같은 색상의 가죽 벨트까지.깜짝 놀란 나는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이건 뭐예요?”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좋아한다며.”“...”흘려보내듯 내뱉은 말에 그는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왔다.나는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며 살며시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그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안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조심해. 다치면 어쩌려고.”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오빠, 설마 기분 맞춰주려고 옷 갈아입은 거예요?”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한 말이었고 그 역시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하는 그였다.“응. 네가 기뻐했으면 해서.”참, 사람을 설레게 하는 말을 능숙하게도 한다.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의 얇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런데 그의 눈에 비친 웃음기가 너무 달콤해서 나도 모르게 한 번, 또 한 번 입을 맞췄다.“...”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내 모습에 그는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 쥐더니 거칠게 입술을 베어 물었다.살짝 얼얼한 감각에 나는 수줍게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더 이상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급히 몸을 돌려 정원으로 도망쳤다.정원에는 살구꽃이 여전히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복숭아꽃 봉오리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마 다음 달이면 만개할 것 같았다.그때가 되면 정원은 온갖 꽃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볼 수 없겠지...솔직히 말해 나는 그와 헤어지는 게 싫었다.우리의 만남과 이별이 이렇게 잦은 것도 싫었다.그러나 이게 우리의 현실이었고 그는 그가 지켜야 할 권력이 있었고 나 또한 내가 책임져야 할 연
아침 조조 영화관은 한산했다. 내가 요즘 제일 인기 있는 영화표를 끊고 돌아오니 석지훈은 팝콘 한 통과 미지근한 콜라 한 잔을 들고 서 있었다.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오빠는 안 마셔요?”“난 콜라 안 마셔.”그가 말했다.사실 석지훈은 굉장히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서 정크 푸드는 절대 먹지 않았다.나는 그가 군것질하는 모습은 물론 음료를 마시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기껏해야 차나 커피 정도? 나는 다른 걸 가리켰다.“저기 생수도 있어요.”석지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말했다.“들어가자.”그가 손에 들고 있던 팝콘을 건네주자 나는 받아 안았다. 그는 한 손에는 콜라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익숙하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우리가 전세 냈네요.”내가 석지훈에게 말했다.이 시간에 영화 보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긴 했다.시작하기 직전에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 그중 한 커플이 우리 앞자리에 앉았는데 어린 나이 탓인지 남자애가 여자친구에게 팝콘을 계속 먹여달라고 칭얼거렸고 목마르다고 콜라도 먹여달라고 했다.내가 계속 그 커플을 쳐다보자 석지훈이 고개를 돌려 나지막이 말했다.“영화 시작했어. 집중 좀 해.”나는 시선을 거두어 스크린을 향했지만 자꾸만 앞자리 커플에게로 눈길이 갔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갑자기 손에 있던 콜라를 석지훈에게 건넸다.남자는 빨대를 잠시 보더니 살짝 물고 한 모금 마셨다.그가 빨대에서 입을 떼자 나는 콜라를 도로 가져오며 물었다.“어때요? 신세계죠?”석지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안 마셔본 것처럼 말하네. 안 좋아한다고 해서 안 마셔봤다는 건 아니야.”“그럼 팝콘은 먹어봤어요?”내가 다시 물었다.“그건 안 먹어봤어.”나는 팝콘 몇 알을 그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석지훈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윤아야, 너 진짜 장난꾸러기야.”나는 웃으며 물었다.“맛있어요?”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어. 영화나 계속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