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나는 꿈을 꾸었다. 그곳은 연씨 가문 별장이었고 집에 부모님과 고현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23살 생일 파티를 어떻게 할까 상의하고 있었다.내가 소파 옆에 서 있는데 고현성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빨간색 좋아하니까 빨간 장미꽃을 세팅하는 건 어때요? 제가 피아노도 직접 연주할게요.”고현성의 표정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에게 비추면서 더욱 멋있어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미간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그를 뚫고 허공에 머물렀다. 당황한 내가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목놓아 울부짖던 그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병실에 누워있었고 낮에 입었던 밝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옆에는 싸늘한 표정의 고현성이 서 있었다.꿈속에서 다정했던 고현성을 봤던 탓인지 차가운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감았다.“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고현성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고승철이 갑자기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고현성을 째려보면서 화를 냈다.“방금 넘어져서 얼굴이 피범벅이 됐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병원에 와서 이런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수아야, 너 평소에 현성이를 너무 풀어줬어. 남편을 잘 단속했어야지.”‘남편이라... 방금 이혼하자고 했는데.’나는 고현성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아버지의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승철에게 말했다.“아버님, 우리 이혼했어요.”그 소리에 고현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고승철도 놀란 눈치였다. 다행히 내가 낮에 귀띔이라도 한 덕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낮에 그 얘기를 꺼내더니 벌써 이렇게 빨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빠른가요? 현성 씨는 3년 전에 이미 이혼하고 싶어 했어요. 지금까지 끌어도 아무도 득을 본 사람이 없고요. 아 참, 전 사업 머리가 없어서 선양 그룹이
운성시의 하늘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대지를 하얀색으로 뒤덮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에 금색 롱원피스를 입었고 밖에는 하얀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거기에 예쁜 실버 귀걸이를 매치했고 메이크업까지 한 채 길거리를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운성시는 아주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외톨이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방황하듯 사람들 사이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찬바람이 스치면서 눈꽃이 얼굴에 내려앉아도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평범하고 키도 평범한 한 사람을 따라갔다.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던 그때 나는 용기 내어 다가가 은행 카드를 건네면서 부탁했다.“내가 10억 원 줄 테니까 나랑 3개월만 연애할래요?”그는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나를 보았다.“미안해요. 난 여자 친구가 있어요.”혼자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용기 내서 다가간 것이었는데...“알겠어요. 괜찮아요.”나는 실망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또 다른 평범한 남자를 찾았다. 사실 나 정도 얼굴이라면 남자들이 거절할 리가 없었고 게다가 10억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그들은 되레 날 미친 사람 취급했다.“나랑 연애할래요?”“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가족한테 연락해 줄까요?”나는 멋쩍게 웃었다.“아닙니다. 다른 사람 찾아볼게요.”또 다른 사람을 잡고 물었다.“나랑 연애할래요?”“미안해요...”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제대로 된 연애가 하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느낌이 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행복이라는 게 대체 어떤 걸까?내가 해본 거라곤 임지혜를 미친 듯이 질투한 것뿐이었다.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나랑 연애할래요?”그런데 그때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진짜 언니였어요?”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고씨 가문 사람 고민영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고현성이 싸늘하게 서 있었다.나는 민망함이 극에 달했고 고민영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차 안에서 그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말 한마디가 없었다. 아마 아까 그를 거절한 이유를 눈치챈 것 같았다.석지훈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씻었고 그의 핸드폰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문자 한 통을 보게 되었다. 한민영이 보낸 것이었다.“지훈아, 난 감당할 수 있어.”무슨 뜻일까?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욕실에서 나오더니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수아야, 씻을래?”그의 말투는 화난 것 같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씻을게요.”“상처 조심하고.”“알겠어요. 지금 씻을게요.”나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 보니 그는 등받이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일부러 먼저 말을 걸었다.“내일 아이들 데리고 하루만 집에서 지내다가 모레 다시 별장으로 데려다주면 어때요?”그는 내 말을 받아주었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내일은 집에 있을 거예요?”그는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떼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내일은 동성시에 가야 해.”그는 늘 바빴다. 나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알겠어요.”그런데 석지훈이 갑자기 물었다.“저녁에 고현성이랑 무슨 얘기 했어?”나는 깜짝 놀랐다. 석지훈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한 적이라고 없었는데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걸까?나는 급히 설명했다.“별 얘기 안 했어요. 다은 씨에 대해 물어봤는데, 오빠가 마침 와서 그만뒀어요.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그는 내 직설적인 물음을 가볍게 무시했다.나는 장난스럽게 다시 물었다.“질투하는 거 맞죠?”이번엔 조용히 책을 내려놓더니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웠다.나는 뒤에서 그의 허리를 안고 얼굴을 그의 등판에 묻으며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전 오빠가 나 때문에 질투하는 게 좋아요. 미안해요. 그리고 석씨 별장에서 자고 싶지 않은 이유는... 현
석지훈과 함께 운성시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분명 자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던 탓에 석지훈을 데리고 곧바로 석씨 별장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이미 주무시고 계셨고 거실에는 보기 드문 사람이 있었다.바로 연시혁이었다.그리고 그의 품에는 송승아가 안겨 있었다.그녀는 계속해서 엄마를 찾고 있었다.나는 서둘러 다가가 몸을 낮춘 뒤 그녀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승아가 왜 여깄어? 아이를 너한테 넘긴 거야?”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아니, 날 용서하지 않았어. 내가 참지 못하고 내 핏줄이라며 화를 내자 승아를 내 앞에 두고 떠나버렸어. 지금 연락도 되지 않아.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일단 승아를 데리고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어.”송승아는 송이연이 목숨 걸고 낳은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아이를 연시혁에게 쉽게 넘길 리 없었다. 뭔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나는 내일 날이 밝으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었다.전에 병원에서 송승아랑 다섯, 여섯 달을 함께 지냈다 보니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나를 고모라고 부르며 품에 얌전히 안겨있었다.나는 그녀를 한참 동안 안고 있다가 석지훈의 품에 아이를 넘겼다. 내내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석지훈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팔을 들어 송승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러나 송승아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목을 감싸안더니 품에 안긴 채 까불었다. 다행히도 그는 송승아를 잘 다뤘다.나는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연시혁에게 물었다.“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야?”“상주시에 가서 찾아야지.”그는 송이연에게 모든 인내를 쏟아부었다. 그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왜냐하면 과거에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오혜원이 이식받은 신장...그녀가 잘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나는 석지훈의 품에서 송승아를 다시 데려와 연시혁에게 건넸다.그는 아이를 건네 안으며 말했다.“승아야
그가 말했다. “잘 지내. 내가 장사하라고 했는데 흥미가 없다더라. 심지어 그동안 고정재를 위해 배웠던 음악도 다 내려놨어.”“지금은 행복하겠죠.” 내가 말했다.그가 이어서 말했다. “응, 그럴 거야.”우리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마치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처럼.그때 멀리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나는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오빠.”석지훈은 흰 꽃이 가득 핀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두 손을 뒤로 한 채 깊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고 당당했다.“이리 와.”나는 고현성에게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잡아 들고는 서둘러 석지훈에게 달려가서는 그의 품에 안겼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똑바로 서.”석지훈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진지했다.진지하다 못해 고지식한 노인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나는 웃으며 자세를 바로잡고 물었다.“일 다 끝났어요?”“응, 너 데리러 왔어.”데리러 왔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나는 몰래 고현성이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인했더니 여전히 조금 전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표정은 쓸쓸했지만 덤덤해 보였다.그는 나에게 한 번도 집을 준 적이 없었다.오히려 많은 상처만 남겼다.그럼에도 나는 그가 행복하길 바란다.고현성, 네가 행복하고 평안하길 바랄게....고현성은 석지훈의 품에 안긴 연수아를 바라보며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녀는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그는 문득 3년간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어쩌면 이미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그녀가 그토록 강력한 권력을 쥐고도 한 번도 그를 거스르지 않았던 모습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연약함을 사랑했다.이혼 후 그녀가 보여준 단호함과 강인함조차도 그를 미치게 했다. 그는 그녀의 어떤 모습이든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항상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어쩌다 둘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고현성은 이
“유진의 처지는 민수랑 비슷해. 유진 어머니가 예씨 가문으로 재혼하면서 유진을 데려갔기 때문에 진정한 예씨 가문 사람은 아닌 셈이지. 그래서 어쩌면 유진은 민수보다 더 빨리 자신의 상황을 알아채고 예씨 가문에 남지 않았어. 그 뒤로 계속 지훈이 형을 따라다니며 일했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나처럼 둘째 형이라고 부르게 된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음번에 만나면 넷째 오빠라고 부르는 게 어때? 얼른 익숙해지도록 말이야.”원태웅은 또 뭔가 떠오른 듯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 사람 말이야, 참 안쓰러워.”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왜?”원태웅은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었기에 뭔가를 물어보면 나보다 더 신나서 대답하곤 했다. “유진은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를 사랑했어. 그 감정을 마음속에 오랫동안 묻어두다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지.”예유진은 석지훈의 사람으로 그의 권력 역시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런 사람이 원하는 여자를 얻지 못하다니, 나는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그 사람이 누구예요?”원태웅이 말했다.“걔 여동생, 예씨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정말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가 맞았다.최소한 예씨 가문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나는 원태웅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유진은 2년 전에 예씨 가문의 결정에 따라 문벌이 비슷한 집안의 아가씨랑 결혼했어. 그런데 결혼식 전날, 진정한 후계자가 사라진 거야.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씨 가문에서는 유진에게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았어. 모두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거든.”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였다.예씨 가문의 권력자가 예유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결혼 전날 사라진 걸 보면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나는 원태웅에게 물었다.“그분이 유진 씨를 좋아했어요?”원태웅은 대답했다.“좋아했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그녀는 조민수의 말에 당황해서 물었다.“민수 오빠,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고 계세요? 다른 사람 때문에 절...”조민수는 바로 그녀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말했다.“다른 사람? 수아는 내 동생이야.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동생이라고, 넌 그저 조씨 가문에 얹혀살며 기생하는 존재잖아.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조민수의 극도로 차가운 태도와 날 선 말에 그녀는 울면서 가버렸고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도 서서히 흩어졌다.조민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수아야, 미안해.”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난 그 여자가 언니를 괴롭히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야. 오빠, 앞으로는 절대 언니를 괴롭히지 못하게 지켜줘. 안 그러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조민수는 말하면서 석지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나는 서둘러 그를 소개했다.“둘째 오빠, 우리 엄마가 어릴 적 입양한 아들이에요. 그리고 오빠, 이분은... 내 약혼자이자 내 아이의 아빠야. 앞으론 네 매부지~”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조민수는 손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 지훈 씨.”석지훈은 평소 사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사람과 접촉하는 걸 꺼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존중하기 때문에 내 가족에게도 예의를 갖췄다. 그는 조민수의 손을 잡더니 뜻밖의 말을 뱉었다.“수아가 언제 민수 씨한테 저를 소개할지 궁금했는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이 몇 마디는 내 마음을 간지럽히며 설레게 했다.조민수는 웃으며 말했다.“이제 만났네요.”나는 이어 언니를 소개했다.“둘째 오빠, 이쪽은 우리 새언니예요.”석지훈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녕하세요.”...조민수 일행과 헤어진 후, 나는 일부러 연회장에서 한민수를 찾았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한성범이 연회에 참석했으니 한씨 가문의 서자로서 그 역시 이런 자리에서 더 열심히 얼굴을 비춰야 할 텐데 말이다.나는 궁금증을
사람이 있는 곳에는 늘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부유한 집안에 철없는 아가씨들이 넘쳐난다. 지금 김예진을 비꼬고 있는 눈앞에 예쁜 여성은 처음 보는 분이었지만 감히 내 언니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나는 차마 용납할 수 없어 곧바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어디서 굴러왔죠?”담현아가 얼마 전에 주민솔의 친구를 이 한마디로 받아친 적이 있었다.그 여자는 잠시 멍해지더니 물었다.“너 누구야?”김예진은 그녀와 말다툼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내가 이런 일로 화를 내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말했다.“민수 씨 어머니 쪽 사람이야. 다른 데로 가자. 신경 쓸 필요 없어.”오빠 어머니 쪽 사람이라니...만약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따지고 들면 분명 순간적으로는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녀가 집에 가서 고자질이라도 하면 피해를 보는 건 김예진이 될 것이다.나는 김예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와 함께 자리를 뜨려던 참에 그녀는 김예진을 밀치며 말했다.“지금 너랑 말하고 있잖아!”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오만하고 건방진 여자는 처음이었다. 예전에 임지혜조차도 감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지는 못했다.보아하니 김예진이 평소에도 이 여자에게 꽤나 괴롭힘을 당했던 것 같다.나는 즉시 김예진을 내 뒤로 끌어당기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사과해.”그녀는 멍해졌다.“넌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나는 그녀의 말을 단번에 잘라버렸다.“사과하라고.”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상관이 없었고 누구든지 석씨 가문을 넘볼 수는 없었다.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 내가 조씨 가문의 조민수 사촌 동생인 거 알아? 내가 김예진을 때렸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게다가 처음도 아닌데...”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이내 주변의 시선은 나에게 쏠렸다. 그녀는 뺨을 감싼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우리 고모가
김예진이 그의 아이를 몰래 지웠다니...그들의 결혼에서 과연 누가 잘못했고 누가 맞는지 나는 알 수 없었거니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다행히 그들이 있는 곳은 외진 곳이라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아까 대화를 듣지 못했다.조민수는 눈을 꼭 감았다가 깊은 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예진 씨, 나도 오랜 시간 참고 견뎌왔어요. 하지만 이젠 지쳤어요. 이젠 그만 놓아줄게요. 더 이상 절 미워하는 여자를 붙잡고 싶지 않아요.”김예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잘 있어요, 민수 씨.”알겠어요. 잘 있어요, 민수 씨그들은 그렇게 쉽게 헤어졌다.하지만 나는 석지훈과 절대 이렇게 쉽게 헤어질 수 없었다.왜냐하면 그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그때는 몰랐다. 때로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그 지경에 이르게 되면 무력감만 느낄 뿐이었다.사랑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았다.나는 구석에서 조민수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김예진을 찾으러 나섰다.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언니.”김예진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수아야.”“언니, 아까 오빠랑 했던 얘기 다 들었어요.”“미안해, 너까지 걱정하게 해서.” 김예진이 말했다.나는 망설이며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방금 전에 남현 씨 형을 만났어. 남현 씨랑 정말 닮았더라고. 그 순간 진짜 정신이 나가버렸어. 네 오빠가 날 부르는 것조차 듣지 못했지.”김예진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여 설명했다.“남현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난 그때 진심으로 남현 씨와 함께하고 싶었어. 근데 남현 씨가... 그리고 남현 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어. 아주 오랜 시간 외롭고 힘들었는데 그때 네 오빠가 곁에서 함께 있어 줬거든. 그래서 결국 민수 씨를 용서하기로 했어. 근데 나중에 알게 된 거야. 네 오빠랑 남현 씨의 죽음이...”
나는 한성범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에 똑같은 물음을 석지훈한테도 물어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성범이 그를 한씨 가문의 사위로 삼더라도 그가 나를 선택하고 한성범과 멀어지게 되면 어떨지 물었다.석지훈은 이렇게 대답했다.“괜찮아. 만약 정말로 날 멀리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난 애초에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나는 석지훈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와 헤어지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게다가 한성범 역시 그를 바꿀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명확했고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한번 해보시죠.”그는 여유로운 내 태도에 갑자기 나를 비꼬듯 말했다.“네가 그동안 해온 일을 들어보니 연씨 가문에서 석씨 가문로 옮겨갔지만 큰 성과는 없더군. 생각만큼 단호하지도 않고. 하지만 운이 좋았지. 연씨 가문이 무너지자 때마침 석씨 가문이 있었고 항상 지훈이가 뒤에서 너를 지켜줬어. 수아 씨, 만약 지훈이를 잃게 된다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석씨 가문조차 지켜낼 수 없을 거고 결국 석씨 가문까지 잃게 될 운명이야.”결국 나는 석씨 가문을 잃게 될 운명...나는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어르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죠.”한성범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는 차갑게 말했다.“석씨 가문의 일은 어르신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게다가 지훈 씨는 절대 한씨 가문의 사위가 되지 않을 겁니다. 어르신 손녀도 별로 대단한 건 없어요.”한민영은 교만하고 제멋대로였다.“적어도 우리 민영이는 이혼한 적이 없단다.”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나는 더 이상 말싸움 하고 싶지 않았다. 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나는 짜증이 솟구쳐서 방을 나갔다.밖으로 나가니 멀지 않은 곳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현성이 보였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우리 둘이
석지훈은 입꼬리를 휘어올 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르신은 온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비록 악의는 없었지만 나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한참 후, 어르신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쁜 아이로구나.”석지훈이 대답했다.“네, 정말 예쁘죠?”“지훈아, 언제 결혼할 생각이니?”그는 순순히 대답했다.“얼른 하려고요.”“그래, 가능한 빨리 준비해라.”어르신은 나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말투가 어쩐지 내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여자의 본능적인 직감 때문인지 나는 왠지 모르게 눈앞의 어르신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무리 석지훈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원태웅이 방을 찾아와 밖에 중요한 사람이 찾고 있다고 했고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방을 떠났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내게 당부했다.“여기서 기다려.”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석지훈은 원태웅을 따라 방을 나섰다. 나는 그들이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나는 알 수 없었고 방에는 나와 어르신만 남게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이 어찌나 불편하고 어색했는지 몰랐다.내가 어색해하는 걸 본 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내가 어렵느냐?”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닙니다, 어르신.”그러자 그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지훈이가 너를 아주 좋아하더구나.”나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나는 지훈이가 자신의 짝을 스스로 선택하는 걸 지지한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여자의 촉은 언제나 소름 돋게 맞았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지훈이는 정말 완벽한 사람이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남자를 찾기는 힘들 거야.그리고 내게는 손녀가 하나 있다. 비록 그 애가 지훈에게 미움을 받고 있더라도 말이다.그 아이는 내 손녀이자 한씨 가문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이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