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두 사람의 표정 차이가 워낙 커서 분간할 수 있었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고현성은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윤다은과 고정재는 강가를 따라 그의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윤다은은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었다.뭔가 겁먹고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이주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윤다은의 긴장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오빠, 미안해. 이제야 결혼한다는 얘기를 해서. 난 그저... 미안해... 많이 보고 싶었어.”고정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어떤 위로를 담고 있었다.“다은아,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었는데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 같아.”“오빠, 난 수십 년 동안 오빠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수아 언니를 놓치게 만들었어... 미안해. 내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알아. 사실 오래전부터 오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오빠, 난 이제 오빠를 놓았고 내 행복을 찾았어. 그러니 오빠도 날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그 말을 듣고 이주원은 마침내 윤다은이 마음속에 숨겨온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까?윤다은은 한 남자를 수십 년 동안 사랑했고 그를 따라 전 세계를 누볐다.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이주원은 그녀가 안쓰러웠다.“다은아, 네 행복을 빌어.”고정재는 손을 들어 윤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다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내가 성인이 된 후로 오빠는 더 이상 이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어. 내가 그동안 오빠에게 짐이 되고 불편하게 했지?”고정재는 그녀를 불렀다.“다은아.”“오빠...”“너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야.”윤다은은 고정재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연수아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었다.그렇다, 그는 그녀를 가족으로 여겼다.담현아는 고정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여자였다.“오빠, 지금까지 날 지켜줘서 고마워.”고정재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는 평생 너를 지켜줄 거야.”
담현아와 나는 호텔에서 근처 야시장까지 걸어갔고 배가 고파진 그녀는 꼬치구이를 먹자고 했다. 그녀가 이것저것 엄청 많이 시키는 걸 보자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둘이서 다 먹을 수 있겠어?”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희연 언니에게 전화해서 같이 먹자고 해요. 희연 언니는 술도 잘 마시니까 오늘 취할 때까지 마셔보자고요.”나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누군가는 술 한 잔에 취했던 것 같은데?”담현아는 투덜거렸다.“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웃음을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최희연에게 카톡을 보냈다. 곧 그녀의 답장이 왔다.[미안. 유겸 씨가 왔어.]나: ...진유겸은 꽤 집착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최희연이 금운에 오자마자 바로 따라온 걸 보면 말이다.문득 나도 석지훈이 보고 싶어 졌다.그는 떠난 지 한참이 되었고 그동안 나는 그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잘 자요.]하지만 그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오빠, 자요?]잠시 후, 그의 답장이 왔다.[어?]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그는 최소한의 안부 인사조차 없었다.나는 더 이상 그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담현아가 메뉴를 고르고 내 옆에 앉자 나는 그녀가 주문한 맥주를 보며 물었다.“취하지 마. 난 너 호텔까지 못 업고 가니까. 그럼 정재 씨를 불러야 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담현아는 겁도 없이 대답했다.“아저씨는 완전 신사예요.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진작 일어났겠죠! 그 사람은 보수적이라 그의 신혼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선을 넘지 않을걸요. 그런 사람한테 뭘 하기를 바라겠어요?”나는 숨은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얘기 같은데?”담현아는 나를 흘겨보았다.“내가 언제요?”나는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한 거잖아.”“수아 언니, 나이 들면 다 이렇게 생각이 구려지는 거예요?”나: “...”내가 늙었나?갑자기 좀 서운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고향에서 부랴부랴 달려오신 윤다은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수아야.”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아주머니.”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맙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윤다은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인터넷에서 화제였던 그 연수아 맞죠? 이혼한 사람이 어떻게 다은이의 들러리를 설 수 있죠?”맞다. 이혼한 내가 어떻게 들러리를 설 수 있겠는가?사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윤다은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지적하다니.윤다은의 결혼식이었기에 나는 그 사람과 논쟁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윤다은은 내가 억울한 거 같았는지 립스틱 내려놓고 정색하면서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한 건 맞지만, 지금은 미혼이에요. 왜 들러리를 설 수 없다는 거죠?”그 여자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불길해요.”하지만 윤다은은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길하다고 하면 길한 거예요.”“집안이 좋다고 우리 이씨 가문을 무시하지 마세요. 작은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그때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요!”알고 보니 그녀는 이주원 쪽 친척이었다.그녀가 방을 나가자 나는 윤다은을 달래며 말했다.“저 사람 말이 맞아. 나는 이혼했으니 네 들러리로는 적합하지 않아.”나는 혹시라도 이씨 가문 사람들이 윤다은을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윤다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나는 언니가 꼭 내 들러리를 서 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나: “...”점심때쯤 이주원이 신부를 데리러 왔다. 이주원의 들러리들은 모두 같은 과 의사들이나 오랜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주원에게 들러리 중 한 명을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이주원은 나와 최희연에게 이미 남
12월 금운의 날씨는 포근했고 부드러운 햇살이 쫙 쏟아져 짙은 색 군용 점퍼를 입은 남자에게 따스하게 내려앉았다.한 달 만에 만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그랬다. 그는 아름다웠다.최현욱, 아니지. 그의 이름은 최욱현이었다.최욱현은 사람을 홀릴만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선글라스를 손에 든 채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긴 부츠는 반짝반짝 빛났는데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요정 같았다.이씨 가문 친척들과 하객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고급 차 수십 대가 한꺼번에 있는 모습을 본 적도 거의 없었다. 모두 경악과 부러움에 휩싸였다.이주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신지?”최욱현은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다만 화려한 분홍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나는 그가 왜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최욱현은 우리 앞에 와서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신부 친구입니다. 원래 신부 데리러 오려고 했는데, 좀 늦어져서 아쉽네요. 이 고급 차 수십 대를 활용하지 못했으니 사과의 의미로 신부에게 선물할게요. 다은 씨, 어때요?”최욱현과 윤다은이 아는 사이라고?윤다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혹시 도와주러 온 건가?윤다은은 재치 있게 대답했다.“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차는 뭐 하러 줘요? 나도 살 수 있는데.”신부의 당당한 말에 이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최욱현은 웃으며 물었다.“다들 왜 입구에 서 계시는 거죠?”윤다은은 시무룩하게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했다고 내 들러리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그러자 최욱현은 나를 보며 물었다.“수아 씨는 어떻게 생각해?”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최욱현은 다시 이씨 가문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이씨 가문 사람들도 멍해졌다.“네?”최욱현은 허리에 손을 얹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비꼬는 척하며 말했다.
지금의 최욱현은 마치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 같았다.나는 다시 물었다.“금운에는 어떻게 온 거야?”“아까 말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그가 말했다.나는 차갑게 말했다.“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나는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잖아? 눈보라 속에서 너를 업고 몇 시간이나 걸었고.”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지훈 씨가 네가 꾸민 일이라고 했어.”“진실을 알고 있었네.”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는 친구 아니야. 얼른 가.”최욱현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흠칫 놀라 그의 손을 쳐냈다.“만지지 마.”“그냥 쓰다듬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그는 어린아이처럼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차마 미워할 수 없었다.석지훈이 그에게 백혈병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병으로 나와 너무나도 닮았다.우리 둘은 다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허락 없이 만지는 건 성추행이야.”내 말을 듣자 그는 순순히 말했다.“그럼 앞으로 허락을 받고 터치할게.”12월의 날씨에 들러리 드레스만 입고 있으니 너무 추웠다. 담현아가 패딩을 가져다주자 나는 패딩을 받아 들고 웃으며 말했다“나는 이따 핀란드에 갈 거야. 너는 정재 씨랑 같이 동성으로 돌아가.”그러자 담현아가 말했다.“나랑 그 사람은 사는 도시가 다르잖아요.”나는 작게 말했다.“어쩌면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도 있잖아.”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굳이 길을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담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 망설이다가 나에게 물었다.“언니, 아저씨에 대한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많이 망설여져요...”나는 차분히 물었다.“뭐가 망설여지는데?”내 옆에는 최욱현이 서 있었지만 담현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잖
최욱현이 F국을 언급하자 F국에 정착한 나의 친어머니 안혜인이 떠올랐다. 고귀한 공작부인 말이다.나는 패딩을 여미며 거절했다.“시간 없어.”최욱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가 너 보자고 하셔. 지금 F국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우리 엄마 알아?”최욱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내가 눈을 부릅뜨자 자기 머리 쓱 만지면서 말했다.“알지. 옛날부터 알았어. 너 지난번에 입은 드레스도 네 엄마가 보내준 거야.”“엄마가 그런 식으로 보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지난번 일 때문에 솔직히 너 못 믿겠어.”최욱현이 되물었다.“내가 네 엄마 아는 거 못 믿는 거야?”나는 아무 말 없이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갔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오며 설명했다.“진짜야. 나 네 엄마 알아. 우리 삼촌 와이프거든. 어릴 때 네 엄마랑 몇 년 같이 살았어. 비록 숙모지만 난 어머니라고 불렀지.”나는 걸음을 멈췄다. 최욱현도 예전에 자기 엄마가 도라지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도라지꽃을 좋아하셨는데.그렇지 않고서야 석 씨 저택 아래의 운산 기슭에 그렇게 많은 도라지꽃을 심어 놓았을 리가 없었다. 최욱현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내가 동요하는 것을 보고 그는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번호를 누르고 내게 건넸다.“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나: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최욱현은 대답 안 하고 씩 웃으면서 나를 봤다.나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유난히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나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구...”묻자마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최욱현이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수아야, 나 안혜인이야.”그녀는 감히 자신을 나의 엄마라고 칭하지 못했다.“네. 욱현 씨가 건 거예요.”나의 어조는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매우 차분했다.“수아야, 널 만나고 싶구나.”비록 그녀는 나를 버렸지만 나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최욱현은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현정우가 입고 있는 검은색 군복에도 관심을 보였다.“우리 옷이랑 다르네. 여기 허리띠가 있네.”나: “...”나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현정우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지만 현정우는 그를 무시했다.최욱현은 재미없다는 듯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대신 나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가주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무기력해? 아까 왜 그 이씨 가문 사람들을 그냥 뒀어?”나는 설명했다.“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 권세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다은이 시댁 될 사람들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정재 씨도 의사 선생님 체면을 생각해서 고급 차로 데려오지 않고 검소하게 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다 망쳐놨잖아!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과 의사 선생님 동료, 친구들이 다 다은이가 돈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앞으로 그녀를 귀찮게 할 일도 많아지겠지. 그 사람들 눈에 다은이는 졸부로 보일 거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돈은 다은이에게는 껌값일 테니 한 번 도와주고 두 번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뒷말이 나올게 뻔해.”최욱현은 내 옆에 앉아 말했다.“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네 말이 맞아.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신부를 찾을 거야. 신부는 시댁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니 분명 도와 줄것이고 그 사람들은 신부가 만만하니까 돈 뜯어낼 궁리만 하겠지.갈수록 더 심하게 말이야! 하지만 너는 한 사람을 간과했어. 바로 신랑이야. 신랑이 자기 쪽 사람들이 신부를 괴롭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까? 게다가 오늘 일을 크게 벌인 건 앞으로의 많은 문제를 예방하는 거야. 아무도 신부를 얕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부를 괴롭히지 않겠지.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의 동료 중에 신부를 괴롭혔던 사람도 있었어.”“나는 그런 일은 잘 몰라.”내가 말했다.나는 윤다은의 성격상 스스로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여러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나를 구해준 적도 있었으니까.“됐다, 그 얘긴 그만하자.”
석지훈의 어머니는 두 번이나 내가 그녀와 닮았다고 했다. 그녀의 전체 얼굴을 마주하자 나는 마치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몇십 년 후면 나도 그녀와 똑같아질 것이다.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고 최욱현은 눈치껏 자리를 뜨며 말했다.“어머니, 약속대로 수아를 데려왔습니다! 두 분 먼저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게요.”최욱현이 자리를 뜨자 내 곁에는 현정우 몇몇만 남았다. 그녀는 나에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이 사람들 일단 물리렴.”나는 현정우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나에게서 10미터 정도 떨어졌다.그들이 멀어지자 앞에 앉은 귀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너를 만나는구나.”‘그렇다면 나에게 신장을 기증했을 때도 나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내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나는 네가 보고 싶었고 내가 직접 키우고 싶었어. 하지만 네 아빠를 생각하면... 그는 나를 속이고 내 사랑을 짓밟았어. 난 그를 증오해. 그래서 네가 곁에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어. 미안하구나.”그녀는 내 아버지를 증오한다고 말할 때도, 나를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도 매우 차분했다. 아주 조금의 감정 동요도 없었다.나는 입을 열었다“괜찮아요.”“수아야, 너는 나를 만나도 차분하구나.”나는 커피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그 말을 듣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너는 나와 많이 닮았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말을 이었다.“욱현이에게 널 데려오라 한 건, 운성에 있는 내 재산과 F 국에 있는 것을 모두 너에게 주려고 그랬어.”나는 웃으며 물었다.“그렇게나 후하세요?”그녀는 말했다.“너는 내 유일한 딸이니까.”“욱현이도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던데요.”내가 갑자기 최욱현을 언급하자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욱현이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내가 키웠어. 날 어머니라 부르는 건 그냥 친근함의 표시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