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했다.“석지훈의 말이 석씨 가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석나은은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항상 온화하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노기를 띠며 말했다.“연수아 씨, 저는 당신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수아 씨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억지 부릴 거면 전 수아 씨랑 함께할 수 없어요.”석나은의 말은 참 웃겼는데 마치 그녀가 나에게 베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당당하게 말했다.“나는 석나은 씨처럼 이렇게 진부하지 않아요. 석지훈과 결혼하지 않을망정 다른 여자와 나누지 않을 거예요.”석나은은 눈을 감은 채 감정을 억제하다 한참 만에야 조용히 말했다.“잘 가요. 연수아 씨.”석나은은 나한테 화가 나서 도망갔다. 이 여자는 평소 고귀한 태도를 유지한 채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다가 나 같은 사람을 만나니 어쩔 수 없이 우아한 자태로 바람처럼 멋지게 떠났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깊은숨을 내쉬며 화를 내지 않으려고 자신을 설득했다. 회사로 가는 길에 나는 원태웅에게 문자를 보냈다.[석지훈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원태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장했다.[알아. 둘째 형이랑 상관없어. 다 석씨 가문에서 정해준 거니까 신경 쓰지 마.]원태웅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명색이 석지훈의 약혼녀인데 내 마음이 어찌 평온하기만 하겠는가!게다가 그는 며칠 동안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나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끄고 회사에 갔다. 회사에서 한참 동안 서류를 뒤적거렸지만 결국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마음속은 억울함으로 가득 찼지만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그에게 약혼녀가 있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고 지금은 주로 나에 대한 그의 무관심이 나를 무섭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했다.퇴근 무렵 집사가 쓴 글자를 비서에게 말하자 비서가 의아하게 물었다.“이 ‘소’자가 영진에 있는 소씨 집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이 마을에 소씨
나는 문득 집사님이 말씀하신 그 한 마디를 이해했다.“사실 어르신과 사모님은... 사실...”그 말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그는 우리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나는 눈앞에 있는 중년 남자가 연기처럼 사라질까봐 꼭 안고 잠시도 놓지 못했다.그때 뒤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나는 경악하며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엄마.”“가자, 먼저 들어가서 얘기해.”...거실은 깔끔했고 구석에는 옛날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매일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했다.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나는 담담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우리가 떠나서 미안해.”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왜 그랬어요?”그들은 왜 열네 살의 나를 버리고 사라진 건지 궁금했다.“나와 네 아빠는 비즈니스 업계의 그런 일에 질린 지 오래됐어. 게다가 누군가 우리에게 경고까지 했어... 수아야, 엄마가 미안해.”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꼬박 9년 동안 나를 피했다.도대체 누가 뒤에서 그들에게 경고했단 말인가?엄마가 나를 안고 울자 아버지가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아이를 봤으니 기뻐해야지.”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물었다.“누가 두 분을 협박했어요?”그때 연씨 가문의 누가 감히 협박했단 말인가.내 눈물이 멈추지 않자 어머니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수아야, 너는 다 컸으니 이런 일들을 더는 너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네가 여기 찾아왔으니 분명 무슨 소문을 들었을 거야!”나는 어머니의 부드러움이 참 좋았다. 그 부드러움으로 내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어 어머니를 꼭 껴안은 채 잠시도 놓지 않고 어릴 때처럼 그녀에게 매달렸다.“수아야, 너는 우리의 친딸이 아니야.”나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거짓말이죠?”나는 아버지가 거짓말했기를 바랐지만 집사가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부모님도 나를 속일 생각은 없는듯했다.아버지는
두려운 표정을 지은 아버지는 평온한 삶을 방해하기라도 한 듯 내가 그의 말을 소화하기도 전에 모질게 어머니의 품에서 나를 끌어냈다.나는 아버지에게 떠밀려 문밖으로 나왔지만 한사코 그의 팔을 붙잡고 떠나려 하지 않고머리를 흔들며 억울하게 애원했다.“아빠, 절 쫓아내지 말아요.”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나를 쫓아내려고 마음을 굳게 먹은 듯했다. 나는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빠, 정말 보고 싶어요. 쫓아내지 말고 여기에서 하룻밤만 묵게 해주면 안 돼요?”아버지는 나를 다시 밀치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나는 문 앞에, 아버지는 문 안에 서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가 애수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보고 싶었어. 나도 우리 예쁜 딸 수아가 보고 싶었어. 나는 지난 9년 동안 내 딸 보러 운성시에 수도 없이 가고 싶었어. 내 딸이 매일 잘 먹고 있는지, 밤에 잘 자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누구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닌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지 궁금했어... 나와 네 엄마는 밤낮으로 그리워했지만 네 소식이 조금도 들을 수 없었어. 네 일이 몇 번이나 실시간검색에 오르내려서야 우린 어른이 된 너를 알아봤어.”“아주 예쁜 소녀였지. 난 그 기사를 보며 네 엄마에게 말했어. ‘봐, 우리의 소중한 딸이야. 다 커서 시집간대!’”“하지만 딸이 시집간 그 사람은 내 딸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는지 또 이혼했어. 너의 이혼 소식을 듣고 엄마는 밤새 잠도 못 자고 한참이나 울었고, 나는 이혼도 괜찮다고, 앞으로 더 좋은 남자가 너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예뻐할 것이라고 위로했지.”내 눈은 눈물샘을 잠그지 못하는 듯 계속 눈물이 흘러나왔는데 슬픈 표정으로 한마디 한마디 뱉어내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가슴이 너무 아팠다. 누군가 심장을 도려내 빨간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이 말은 지혈의 효과가 있었다.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적셨다.“넌 나와 네 어머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우리도 너와 더 있고 싶지만 많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고 기다리라는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물었다.“뭘 기다리라는 거예요?”“네 휴대폰에 활력 징후 검사 프로그램이 설치돼 있는데 그쪽에 일이 생겼다고 떴어. 지금 상태는 어때?”석지훈은 나를 정말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덤덤하게 그에게 대답했다.“나는 괜찮아요.”몸의 고통이 사라진 듯했는데 폭우가 조금씩 새어 들어왔고 불빛을 빌려 보니 비서의 얼굴이 피투성이였다.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요?”비서는 고집스레 대답했다.“연 대표님, 전 괜찮아요.”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제가 운전을...”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강해온 씨, 천재지변은 모두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에요. 미래와 사고 중 어느 것이 먼저 도착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 자책할 것 없어요.”비서는 감격하며 말했다.“연 대표님, 괜찮을 거예요.”그럴 것이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하지만 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석지훈은 전화를 끊지 않았고 나도 끊지 않았지만 나는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우리는 커플인데 전혀 연인 같지 않았다.비가 전부 내 몸에 쏟아지자 비서는 간간이 나를 달랬다.“연 대표님, 인터넷에서 대표님이 나쁜 여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대표님의 과거를 모르고 대표님이 겪은 억울함을 몰라서 그래요. 다들 대표님의 열정과 사람 됨됨이를 몰라요.”“강해온 씨,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사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제가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너무 무서웠고 절망적이었어요. 사람들의 위로가 필요했지만 그때 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제 남편이었어요. 나는 특히 그 사람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없었죠... 그날 밤 나는 혼자 외롭게 별장에 누워있었고,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렸어요. 나는 내가 죽은 줄 알았고, 내 애절한 사
동성시의 비는 점점 더 크게 내리면서 창문을 전부 내 몸에 쏟아졌다. 나는 몸으로 휴대폰을 내리치는 비를 가리며 석지훈과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고 마음속의 억울함도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입가에서 맴돌던 말을 삼켜버리며 나는 힘들게 고개를 들어 강해온을 바라봤다. 온몸이 흠뻑 젖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차가운 빗물이 그의 얼굴의 핏자국을 씻어내렸다.심하게 다친 데다 큰비가 퍼붓고 있어 피가 흐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잠시 후에도 우리를 구하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아마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인지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강해온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강 비서, 나와 알고 지낸 지 9년이 되죠? 내가 연씨 가문을 접수해서부터 해온 씨는 줄곧 저의 곁에 있었고 많은 번거로운 일을 막아줬어요.”“대표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에요.”강해온의 목소리는 유난히 낮았다. 온몸이 마비된 나는 휴대폰을 꽉 잡고 석지훈과 말하고 싶었지만 냉담한 그의 성격을 떠올리며 주춤했다...결국 겁이 났던 나는 석지훈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자존심을 버리려는 생각을 접었다.나는 휴대폰을 끈 후 옆으로 내팽개쳤다. 그동안 강해온이 계속 말을 걸었지만 나는 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또 차에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있었는지 몰랐지만 나의 귓가에는 어렴풋이 누군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연수아 씨가 뒷좌석이 갇혔어요. 차 문을 떼야 하는데 아마 15분 정도 걸릴 거예요.”“활력 징후는 어때?”“연수아 씨 상황이 좋지 않아요.”남자는 냉담하게 지시했다.“차 문을 떼.”밖의 말소리가 멎자 빗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는 부모님이 있었고 오혜원도 있었으며 우리는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화면이 바뀌더니 또 섣달 그믐날로 돌아갔다. 당시 사람을 잘못 사랑한 것을 몰랐던 나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죽기를 기다렸다.화면이 또 바뀌어 나와 석지훈이 처음 만난 장면이 보였는데
석지훈이 물었다.“배고파?”오늘따라 그는 유난히 부드러웠는지라 나도 차분하게 말했다.“안 고파요.”그러자 그가 궁금한 듯 물었다.“왜 여기로 왔어?”그 말을 들은 나는 걱정스러웠다.“차가 뒤집힌 지점이 어디예요?”석지훈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여기서 멀지 않아.”“이곳은 동성시에서 얼마나 떨어졌어요?”석지훈은 입술을 질끈 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30km.”이곳이 동성시로부터 30km가 떨어져 있다면 영진까지는 100km가 넘을 것이다. 영진시와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다고 생각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나의 친부모님이...어젯밤 아빠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나는 내 친엄마가 왜 그들에게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친아빠가 뭔가 눈치챈 게 아닐까?이 생각이 들자 나의 마음은 더욱 의문스러워졌다.이런 의문들은 안개처럼 나를 휘감아 진실을 알고 싶어도 그저 빙산의 일각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일한 단서가 바로 어제 아빠가 나에게 준 쪽지였다.어젯밤에 내가 차 안에서 미리 이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에서 그 쪽지를 찾을 수 있었을까?게다가 폭우가 쏟아져서 글씨를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 석지훈은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주물러주며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윤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나는 심드렁해서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나의 냉담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말없이 일어나 방을 나갔다.방이 몇 평밖에 안 되지만 아주 깨끗했고 침대 시트도 새것이어서 냄새가 좋았다.수심에 잠긴 채로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고개를 돌리자 머리맡에 마침 휴대폰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침 화면에 문자가 있다는 알림이 떴다.그것도 고현성의 문자였다.[수아야, 보고 싶어.]시간을 보니 조금 전에 보낸 문자였는데 화면에는 그가 보낸 다른 문자도 있었다. 그는 내가 왜
“연수아 씨가 대표님에게 화냈어요?”밖에 빗소리가 요란했고 윤 비서의 말소리도 높지 않았지만 난 여전히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내가 화냈다고? 석지훈이 나를 냉담하게 대한 게 아니었어?’석지훈의 목소리는 낮았다.“아마 그런가 봐.”“대표님, 여자는 달래야 해요.”“말이 많네.”석지훈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며칠 동안 윤아와 여기에 머물 테니 넌 먼저 동성시로 돌아가 회사의 일을 처리해. 무슨 일이 있으면 원태웅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이 이곳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해.”나는 석지훈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으나 윤 비서는 알아듣고 공손하게 말했다.“네. 대표님.”윤 비서가 떠났고 밖에서는 빗소리가 멈추지 않았지만 석지훈은 더는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이불을 들춰보니 허벅지에 거즈가 둘려 있었고 가슴과 손바닥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몸에 난 상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석지훈이 방으로 들어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침대 발치에 놓았다.하얀 셔츠를 입은 석지훈이 다가와 손을 들어 나의 뺨을 만지며 물었다.“뭐 먹고 싶어?”낮은 목소리로 일부러 천천히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배 안 고파요.”기분 탓인지 나는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최근 많은 일이 발생해서인지 재수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그럼 죽이라도 끓여줄게.”말을 마친 석지훈은 내 방에서 나갔다.또 혼자 방에 남겨져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는데 전형적인 한옥이었고 나는 머지않은 다른 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한참 후 그는 죽 한 그릇을 들고 방에 들어왔는데 내가 고개를 쳐들고 빤히 보자 부드럽게 물었다.“설탕 넣어줄까?”평소에 거의 웃지 않던 석지훈이 씩 웃으니 나는 그에게 홀린 것 같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짠 게 좋아요.”석지훈은 돌아서서 다시 부엌에 갔다. 부엌에서부터 내가 있는 방까지 몇십 보 거리밖에 되지 않아 그는 곧 내 방으로 돌아왔다.그는 한없이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는데 그 뼛속에
나는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여자가 되고 싶었다.내가 말하지 않자 그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나를 아가라고 부르며 계속해서 말했다.“어젯밤에 널 걱정했어.”평온하고 강인했던 내 마음의 장벽은 그가 아가라고 부르자 무너져 내렸고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화난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화난 게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이 한심했을 뿐이에요.”욕심이 많은 내가 한심했다. 석지훈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었다.석지훈의 차가운 손바닥은 나의 얼굴을 어루만졌는데 이 동작에 나는 위로를 받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얇은 입술로 나의 이마에 입 맞추며 인내심 있게 타일렀다.“나와 말해봐.”“오빠, 사랑한다고 말해줘요.”나는 이 말을 하지 못할 줄 알았지만 결국 그의 앞에서 참지 못하고 해버렸다. 그도 내가 큰 결심을 하고 이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만약 그가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내가 이 일로 화를 낸 것을 알게 되자 석지훈은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한참 후에야 물었다.“아가야, 사랑이란 뭘까?”이 말은 왠지 익숙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그윽한 눈빛을 바라보며 갑자기 꿈에서 이 상황을 본 것 같았다.이것은 꿈이 아니라 오래전에 석지훈이 나한테 물었었다.방황스럽고 의혹투성이다.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설명했다.“난 사랑이 없는 환경에 처해 있어 네가 원하는 사랑이 뭔지 잘 몰라. 솔직히 말할게. 난 어릴 때 집을 떠난 후 줄곧 보육원에 있다가 2년도 안 되어 돌아왔어... 내가 석씨 가문을 물려받기 전까지 냉혹한 일들이 많았거든.”석지훈은 담담한 말투로 과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 후 머뭇거리다가 약속하듯 말했다.“난 사랑이 뭔지 모르다 보니 네가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몰라. 내 사랑을 원한다면 내가 할 수 있게 가르쳐줘. 내가 줄게.”내가 원한다면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게 배워달라고 했다. 이것은 석지훈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양보였다.나는 그때 이 말을 믿었다. 그러나 한참
담현아는 지난번 일 때문에 계속 앙금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주민솔이 경찰서에서 나왔다고 하니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녀는 나에게 카페에서 30분 동안 기다리라고 했다.30분은 금방 지나갔다.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담현아가 까만 머리를 땋은 채 캐리어를 끌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겨우 끝났어요!”나는 웃으며 물었다.“왜 이렇게 힘들어?”“일찍 들어오려고 며칠 밤샜어요. 일단 카페에서 좀 자고 있을게요. 이따가 7시에 깨워줘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2층에 방 있어.”고양이 카페 2층은 며칠 전 내가 임대해 놓은 것이었다.담현아는 짐을 1층에 두고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고 나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끌고 그녀를 따라 올라가 방에 짐을 놓아주었다.내려와 보니 예지한이 얼굴을 찌푸리며 나에게 물었다.“사장님 가게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자주 와요?”이상한 사람?어디가?그냥 다 그녀가 아는 사람일 뿐이지.나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며 말했다.“들켰네요!”그것도 내가 실수로 들키게 한 것이었다.이 말에 예지한은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내 정체를 알았어요?”“네. 방금.”내가 대답했다.“아, 여기 좀 더 있으려고 했는데.”예지한은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내가 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한 달 더 있을 거예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여기 떠나기 아쉬워요.”예지한은 여기서 2년을 살면서 모든 것에 정이 들었고 또 여기는 한가로워서 떠나기 아쉬울 만도 했다.하지만 한민수의 말이 맞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책임이 있었다. 예지한이 아직도 저렇게 놀 수 있는 건 할아버지가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었다.그리고 한민수, 예유진 그리고 진유겸, 심지어 나까지도 우리 모두는 자신이 가진 것을 굳건히 지켜야 했다.예지한도 마찬가지였다.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예 씨 가문이 있었다.예지한은 좀 시무룩해 하면서 다시 일하러 갔다. 나는 카운터를 보고
어젯밤 길바닥에서 자고 두 시간이나 걸었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내가 막 나가려는데 원태웅의 문자가 왔다. [형이 방금 운성에 도착했어. 이틀 정도 여기에 머물 거야.]그는 바쁜 남자였다.항상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기에 이틀이나 머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석지훈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니 항상 만남은 짧고 헤어짐은 길었다. 며칠 함께 있으면 또 헤어져야 했고 헤어지면 한두 달, 길면 반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나는 운성으로 돌아온 후 진유겸의 결혼식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나는 그가 왜 결혼식을 연기했는지 잘 몰랐지만 최희연이 국내에 없으니 그녀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운성에 도착한 후, 나는 고양이 카페에 가서 최희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나도 방금 알았어. 원래 일찍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미룰 수밖에 없네! 수아야, 나 방금 수술을 마쳤고 얼굴의 흉터가 아직 회복 중이라 아이스랜드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할 것 같아. 하나한테서 이미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가 시간이 된다면 카페를 좀 돌봐줘!]나는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후 다시 물었다.[흉터는 어때?]최희연이 답장했다.[아직 회복 중이지만 왕자현 씨가 흉터가 남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어. 나는 그를 믿어. 다 나으면 귀국할게!][그래. 그때의 너는 분명 아름다울 거야.]최희연은 바로 답장하지 않고 30분 뒤, 갑자기 슬픈 어조로 말했다.[왕자현 씨가 내가 그림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싶어 해. 그는 그 분야에 조예가 깊거든. 근데 내 손목이... 수아야, 나는 붓을 잡을 수는 있는데 손이 떨려서 도저히 붓을 댈 수가 없어!]최희연은 그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정성을 쏟았다. 그 노력으로 힘들게 성과를 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주민솔 그 여자는 정말 죽어 마땅했다.며칠 전에 진유겸은 그녀를 경찰서에서 꺼내주었다.나는 최희연에게 조심스럽게
석지훈은 내가 생떼를 부린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 섰고 그는 내가 따라오지 않자 몸을 돌려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아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생떼 부리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석지훈: “...”이번에 석지훈은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그는 별장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돌려 별장 밖으로 나가 길가에서 도라지꽃 몇 송이를 꺾었다.나는 꽃을 옆에 두고 길가에 옆으로 누워 눈을 떴다. 늘씬한 몸매, 아름다운 드레스, 그리고 꽃 한 송이. 2층에서 보면 아름다운 그림 같을 것이다.내 행동은 아주 이상했다.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지금 술에 취한 상태였다. 비록 대부분은 연기였지만 술에 취한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석지훈은 분명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여기 누워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석지훈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참을성이 있었다. 나는 그가 2층 방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도 몸을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나는 별장 입구에 밤새도록 누워 있었고 그러다가 먼저 잠들어 버렸다. 깨어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술에 취한 척할 수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서 의식이 흐릿했다고 해도 하룻밤이 지나면 알코올은 이미 다 날아가 버렸을 테니 말이다.나는 재채기를 하고 일어났다. 원래는 함승윤에게 전화해서 나를 데리러 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때야 내 가방이 석지훈의 차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초인종을 눌렀다.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내가 거의 포기하려고 할 때 정장 차림의 석지훈이 나왔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런 석지훈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리움이 더 컸다.예전처럼 차갑
이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설명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형, 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 형의 석씨 가문을 빼앗은 여자야! 방금 보니까 술에 취했더라고. 곁에 비서도 없이 말이야. 전에 날 도와준 적이 있는데 차마 그녀를 혼자 둘 수 있어야지. 그래서 집에 데려다주려고.”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지?”원태웅: “...”석지훈이 지시했다.“이 여자를 네 차에 태워.”“형, 내 차 고장 났어. 우리 두 사람 좀 집까지 데려다줘! 얘는 술 취하면 얌전해. 절대 방해 안 할게.”석지훈: “...”석지훈은 결국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원태웅은 전화를 받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야 했다. 정말 일이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석지훈의 운전기사가 그를 길가에 내려주자 차에는 나와 석지훈 두 사람만 남았다.나는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신사답게 나를 밀어내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팔을 껴안고 웅얼거리며 말했다.“정우 씨.”“허, 정우까지 네 손에 넘어간 거야.”남자가 갑자기 뜬금없이 말하자 나는 당황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 운전기사가 물었다.“아가씨, 어디 사세요?”나는 계속 당황한 척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무관심하고 간결하게 말했다.“주소.”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무슨 주소요?”그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네 집 주소.”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정말 오랫동안, 거의 돌처럼 굳어 버릴 때까지 생각하다가 석지훈의 품에 쓰러졌다.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동성으로 돌아가.”2년 전 석지훈은 동성에 살았었다.동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보니 창밖에는 온통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다. 여기는 석 씨 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석지훈은 몰래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나는 깨어난 후 계속 멍하니 차 안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행히 술에 취해서 그런지 그는 나를 심하게
예지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한민수는 화가 나서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러자 예지한은 한민수가 두려운 듯 서둘러 앞치마를 벗고 그를 쫓아 나갔다.나가기 전에 나에게 카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카페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지만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문득 현정우가 생각났다.그의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나는 일어나 카운터에 앉았다. 아직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런 옷을 입고 여기에 앉아 있으니 너무 어색했다.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따뜻한 물을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앉아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어떻게 하면 석지훈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을까?석지훈은 보수적이고 깔끔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남자였다. 예전의 그는 높은 곳에 있었고 주변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다가온 이유는 내가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동생처럼 여기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말했었다.그러나 지금의 석지훈은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첫 키스가 남아 있고 자신이 숫총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키스하고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그에게 키스하면 다른 여자들은 끼어들 틈이 없을 테니까.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한단 말인가.나는 예전에 몇 번 술에 취했거나 정신 잃었을 때 그의 입술을 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술을 많이 마실 수도 없고 최음제를 먹을 수도 없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나는 원태웅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는 내 생각을 듣고 매우 찬성하며 말했다.[가능해. 네가 술에 취하면 돼. 내가 지금 바로 너를 데리러 가서 그에게 데려다줄게!]나는 답장을 보냈다.[나는 술을 많이 못 마셔요!]원태웅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가 진짜로 취하래!]나는 순간 원태웅의 뜻을 이해했다. 예지한이 돌아오자 나는 서둘러 나갔다. 차에 타자
그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했는데도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내 남자의 초라한 모습을 왜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가?나는 한민수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쪽에는 지훈 씨에게 어떻게 설명했어요?”한민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솔직하게 말했죠.”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솔직하게 말했다는 거죠?”“부상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기억이 좀 뒤죽박죽 해졌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설명했죠. 그는 석씨 가문의 진짜 후계자가 아니고 오히려 당신이 적통이며 지금의 그는 석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없다고요. 그런데 지훈이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리고 바로 의사에게 언제쯤 완전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지 묻던데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나는 그에게 되물었다.“지훈 씨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요?”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다만 석지훈 본인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까 의아하게 물었을 것이다. 너도 알고 태웅이도 알고 유진이도 아는데 왜 자기만 모르는지. 아마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그는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지훈의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요. 그러니 꼬시려면 서둘러야 할 거예요. 한성범은 당신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는 며칠 후면 지훈이를 핀란드로 불러들일 거예요.”석지훈은 항상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한성범은 그를 구해 줬으니 만약 한성범이 핀란드로 부른다면 그는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나는 정말 서둘러야 했다.그리고 한성범도 경계해야 했다.나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말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한민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어떻게 할 건데요?”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한성범은 지금 어디 있어요?”이 말에 한민수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