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내 손바닥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이번에는 나는 곧 ‘진’을 알아볼 수 있었다.영진.“나보고 영진으로 가라고요?”나이든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에 또 글씨를 썼고, 나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서야 ‘소’라는 글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나는 이 ‘소'자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집사에게 물었지만 그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상실감을 안고 병원을 떠났는데 병원 입구에 서서 밖의 음침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그렇게 넋을 잃고 있을 무렵 온화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방해했다.“연수아 씨, 안녕하세요. 저는 석나은이라고 해요.”목소리를 들은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는 어느새 치마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은 온화하고 얌전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전형적인 대갓집 아가씨였다.그녀는 바로 비 오는 그날 밤, 석지훈이 나를 데리고 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 길에서 만난 여자로, 손목에는 여전히 청록색 옥 팔찌를 차고 유난히 우아하고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그녀의 성이 석씨니 틀림없이 석씨 집안 사람이 일 것이고 아마 석지훈의 누나나 여동생일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여기서 만나다니 참 우연이네요.”“그래요, 우연이네요. 며칠 전 석지훈이 집에 돌아왔을 때 연수아 씨도 따라올 줄 알았는데 혼자더군요.”며칠 전에 석지훈이 나에게 물은 적은 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석씨 가문에 가지 않기로 했다.그때 나는 기분은 매우 나빴을 때라 아무렇게나 둘러댔었다.“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예요.”눈앞의 석나은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네, 연수아 씨는 편한 사람이니 앞으로 우리가 자매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아직은 신원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나은 씨는 석지훈의 여동생인가요? 아니면 누나세요?”나의 질문을 들은 석나은은 난감한 기색을 짓더니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조
그녀가 말했다.“석지훈의 말이 석씨 가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석나은은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항상 온화하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노기를 띠며 말했다.“연수아 씨, 저는 당신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수아 씨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억지 부릴 거면 전 수아 씨랑 함께할 수 없어요.”석나은의 말은 참 웃겼는데 마치 그녀가 나에게 베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당당하게 말했다.“나는 석나은 씨처럼 이렇게 진부하지 않아요. 석지훈과 결혼하지 않을망정 다른 여자와 나누지 않을 거예요.”석나은은 눈을 감은 채 감정을 억제하다 한참 만에야 조용히 말했다.“잘 가요. 연수아 씨.”석나은은 나한테 화가 나서 도망갔다. 이 여자는 평소 고귀한 태도를 유지한 채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다가 나 같은 사람을 만나니 어쩔 수 없이 우아한 자태로 바람처럼 멋지게 떠났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깊은숨을 내쉬며 화를 내지 않으려고 자신을 설득했다. 회사로 가는 길에 나는 원태웅에게 문자를 보냈다.[석지훈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원태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장했다.[알아. 둘째 형이랑 상관없어. 다 석씨 가문에서 정해준 거니까 신경 쓰지 마.]원태웅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명색이 석지훈의 약혼녀인데 내 마음이 어찌 평온하기만 하겠는가!게다가 그는 며칠 동안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나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끄고 회사에 갔다. 회사에서 한참 동안 서류를 뒤적거렸지만 결국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마음속은 억울함으로 가득 찼지만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그에게 약혼녀가 있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고 지금은 주로 나에 대한 그의 무관심이 나를 무섭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했다.퇴근 무렵 집사가 쓴 글자를 비서에게 말하자 비서가 의아하게 물었다.“이 ‘소’자가 영진에 있는 소씨 집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이 마을에 소씨
나는 문득 집사님이 말씀하신 그 한 마디를 이해했다.“사실 어르신과 사모님은... 사실...”그 말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그는 우리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나는 눈앞에 있는 중년 남자가 연기처럼 사라질까봐 꼭 안고 잠시도 놓지 못했다.그때 뒤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나는 경악하며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엄마.”“가자, 먼저 들어가서 얘기해.”...거실은 깔끔했고 구석에는 옛날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매일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했다.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나는 담담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우리가 떠나서 미안해.”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왜 그랬어요?”그들은 왜 열네 살의 나를 버리고 사라진 건지 궁금했다.“나와 네 아빠는 비즈니스 업계의 그런 일에 질린 지 오래됐어. 게다가 누군가 우리에게 경고까지 했어... 수아야, 엄마가 미안해.”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꼬박 9년 동안 나를 피했다.도대체 누가 뒤에서 그들에게 경고했단 말인가?엄마가 나를 안고 울자 아버지가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아이를 봤으니 기뻐해야지.”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물었다.“누가 두 분을 협박했어요?”그때 연씨 가문의 누가 감히 협박했단 말인가.내 눈물이 멈추지 않자 어머니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수아야, 너는 다 컸으니 이런 일들을 더는 너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네가 여기 찾아왔으니 분명 무슨 소문을 들었을 거야!”나는 어머니의 부드러움이 참 좋았다. 그 부드러움으로 내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어 어머니를 꼭 껴안은 채 잠시도 놓지 않고 어릴 때처럼 그녀에게 매달렸다.“수아야, 너는 우리의 친딸이 아니야.”나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거짓말이죠?”나는 아버지가 거짓말했기를 바랐지만 집사가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부모님도 나를 속일 생각은 없는듯했다.아버지는
두려운 표정을 지은 아버지는 평온한 삶을 방해하기라도 한 듯 내가 그의 말을 소화하기도 전에 모질게 어머니의 품에서 나를 끌어냈다.나는 아버지에게 떠밀려 문밖으로 나왔지만 한사코 그의 팔을 붙잡고 떠나려 하지 않고머리를 흔들며 억울하게 애원했다.“아빠, 절 쫓아내지 말아요.”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나를 쫓아내려고 마음을 굳게 먹은 듯했다. 나는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빠, 정말 보고 싶어요. 쫓아내지 말고 여기에서 하룻밤만 묵게 해주면 안 돼요?”아버지는 나를 다시 밀치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나는 문 앞에, 아버지는 문 안에 서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가 애수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보고 싶었어. 나도 우리 예쁜 딸 수아가 보고 싶었어. 나는 지난 9년 동안 내 딸 보러 운성시에 수도 없이 가고 싶었어. 내 딸이 매일 잘 먹고 있는지, 밤에 잘 자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누구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닌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지 궁금했어... 나와 네 엄마는 밤낮으로 그리워했지만 네 소식이 조금도 들을 수 없었어. 네 일이 몇 번이나 실시간검색에 오르내려서야 우린 어른이 된 너를 알아봤어.”“아주 예쁜 소녀였지. 난 그 기사를 보며 네 엄마에게 말했어. ‘봐, 우리의 소중한 딸이야. 다 커서 시집간대!’”“하지만 딸이 시집간 그 사람은 내 딸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는지 또 이혼했어. 너의 이혼 소식을 듣고 엄마는 밤새 잠도 못 자고 한참이나 울었고, 나는 이혼도 괜찮다고, 앞으로 더 좋은 남자가 너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예뻐할 것이라고 위로했지.”내 눈은 눈물샘을 잠그지 못하는 듯 계속 눈물이 흘러나왔는데 슬픈 표정으로 한마디 한마디 뱉어내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가슴이 너무 아팠다. 누군가 심장을 도려내 빨간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이 말은 지혈의 효과가 있었다.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적셨다.“넌 나와 네 어머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우리도 너와 더 있고 싶지만 많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고 기다리라는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물었다.“뭘 기다리라는 거예요?”“네 휴대폰에 활력 징후 검사 프로그램이 설치돼 있는데 그쪽에 일이 생겼다고 떴어. 지금 상태는 어때?”석지훈은 나를 정말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덤덤하게 그에게 대답했다.“나는 괜찮아요.”몸의 고통이 사라진 듯했는데 폭우가 조금씩 새어 들어왔고 불빛을 빌려 보니 비서의 얼굴이 피투성이였다.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요?”비서는 고집스레 대답했다.“연 대표님, 전 괜찮아요.”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제가 운전을...”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강해온 씨, 천재지변은 모두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에요. 미래와 사고 중 어느 것이 먼저 도착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 자책할 것 없어요.”비서는 감격하며 말했다.“연 대표님, 괜찮을 거예요.”그럴 것이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하지만 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석지훈은 전화를 끊지 않았고 나도 끊지 않았지만 나는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우리는 커플인데 전혀 연인 같지 않았다.비가 전부 내 몸에 쏟아지자 비서는 간간이 나를 달랬다.“연 대표님, 인터넷에서 대표님이 나쁜 여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대표님의 과거를 모르고 대표님이 겪은 억울함을 몰라서 그래요. 다들 대표님의 열정과 사람 됨됨이를 몰라요.”“강해온 씨,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사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제가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너무 무서웠고 절망적이었어요. 사람들의 위로가 필요했지만 그때 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제 남편이었어요. 나는 특히 그 사람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없었죠... 그날 밤 나는 혼자 외롭게 별장에 누워있었고,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렸어요. 나는 내가 죽은 줄 알았고, 내 애절한 사
동성시의 비는 점점 더 크게 내리면서 창문을 전부 내 몸에 쏟아졌다. 나는 몸으로 휴대폰을 내리치는 비를 가리며 석지훈과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고 마음속의 억울함도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입가에서 맴돌던 말을 삼켜버리며 나는 힘들게 고개를 들어 강해온을 바라봤다. 온몸이 흠뻑 젖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차가운 빗물이 그의 얼굴의 핏자국을 씻어내렸다.심하게 다친 데다 큰비가 퍼붓고 있어 피가 흐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잠시 후에도 우리를 구하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아마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인지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강해온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강 비서, 나와 알고 지낸 지 9년이 되죠? 내가 연씨 가문을 접수해서부터 해온 씨는 줄곧 저의 곁에 있었고 많은 번거로운 일을 막아줬어요.”“대표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에요.”강해온의 목소리는 유난히 낮았다. 온몸이 마비된 나는 휴대폰을 꽉 잡고 석지훈과 말하고 싶었지만 냉담한 그의 성격을 떠올리며 주춤했다...결국 겁이 났던 나는 석지훈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자존심을 버리려는 생각을 접었다.나는 휴대폰을 끈 후 옆으로 내팽개쳤다. 그동안 강해온이 계속 말을 걸었지만 나는 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또 차에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있었는지 몰랐지만 나의 귓가에는 어렴풋이 누군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연수아 씨가 뒷좌석이 갇혔어요. 차 문을 떼야 하는데 아마 15분 정도 걸릴 거예요.”“활력 징후는 어때?”“연수아 씨 상황이 좋지 않아요.”남자는 냉담하게 지시했다.“차 문을 떼.”밖의 말소리가 멎자 빗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는 부모님이 있었고 오혜원도 있었으며 우리는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화면이 바뀌더니 또 섣달 그믐날로 돌아갔다. 당시 사람을 잘못 사랑한 것을 몰랐던 나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죽기를 기다렸다.화면이 또 바뀌어 나와 석지훈이 처음 만난 장면이 보였는데
석지훈이 물었다.“배고파?”오늘따라 그는 유난히 부드러웠는지라 나도 차분하게 말했다.“안 고파요.”그러자 그가 궁금한 듯 물었다.“왜 여기로 왔어?”그 말을 들은 나는 걱정스러웠다.“차가 뒤집힌 지점이 어디예요?”석지훈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여기서 멀지 않아.”“이곳은 동성시에서 얼마나 떨어졌어요?”석지훈은 입술을 질끈 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30km.”이곳이 동성시로부터 30km가 떨어져 있다면 영진까지는 100km가 넘을 것이다. 영진시와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다고 생각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나의 친부모님이...어젯밤 아빠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나는 내 친엄마가 왜 그들에게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친아빠가 뭔가 눈치챈 게 아닐까?이 생각이 들자 나의 마음은 더욱 의문스러워졌다.이런 의문들은 안개처럼 나를 휘감아 진실을 알고 싶어도 그저 빙산의 일각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일한 단서가 바로 어제 아빠가 나에게 준 쪽지였다.어젯밤에 내가 차 안에서 미리 이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에서 그 쪽지를 찾을 수 있었을까?게다가 폭우가 쏟아져서 글씨를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 석지훈은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주물러주며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윤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나는 심드렁해서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나의 냉담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말없이 일어나 방을 나갔다.방이 몇 평밖에 안 되지만 아주 깨끗했고 침대 시트도 새것이어서 냄새가 좋았다.수심에 잠긴 채로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고개를 돌리자 머리맡에 마침 휴대폰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침 화면에 문자가 있다는 알림이 떴다.그것도 고현성의 문자였다.[수아야, 보고 싶어.]시간을 보니 조금 전에 보낸 문자였는데 화면에는 그가 보낸 다른 문자도 있었다. 그는 내가 왜
“연수아 씨가 대표님에게 화냈어요?”밖에 빗소리가 요란했고 윤 비서의 말소리도 높지 않았지만 난 여전히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내가 화냈다고? 석지훈이 나를 냉담하게 대한 게 아니었어?’석지훈의 목소리는 낮았다.“아마 그런가 봐.”“대표님, 여자는 달래야 해요.”“말이 많네.”석지훈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며칠 동안 윤아와 여기에 머물 테니 넌 먼저 동성시로 돌아가 회사의 일을 처리해. 무슨 일이 있으면 원태웅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이 이곳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해.”나는 석지훈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으나 윤 비서는 알아듣고 공손하게 말했다.“네. 대표님.”윤 비서가 떠났고 밖에서는 빗소리가 멈추지 않았지만 석지훈은 더는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이불을 들춰보니 허벅지에 거즈가 둘려 있었고 가슴과 손바닥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몸에 난 상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석지훈이 방으로 들어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침대 발치에 놓았다.하얀 셔츠를 입은 석지훈이 다가와 손을 들어 나의 뺨을 만지며 물었다.“뭐 먹고 싶어?”낮은 목소리로 일부러 천천히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배 안 고파요.”기분 탓인지 나는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최근 많은 일이 발생해서인지 재수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그럼 죽이라도 끓여줄게.”말을 마친 석지훈은 내 방에서 나갔다.또 혼자 방에 남겨져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는데 전형적인 한옥이었고 나는 머지않은 다른 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한참 후 그는 죽 한 그릇을 들고 방에 들어왔는데 내가 고개를 쳐들고 빤히 보자 부드럽게 물었다.“설탕 넣어줄까?”평소에 거의 웃지 않던 석지훈이 씩 웃으니 나는 그에게 홀린 것 같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짠 게 좋아요.”석지훈은 돌아서서 다시 부엌에 갔다. 부엌에서부터 내가 있는 방까지 몇십 보 거리밖에 되지 않아 그는 곧 내 방으로 돌아왔다.그는 한없이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는데 그 뼛속에
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아직 졸려?”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장례를 치르는 건가요?”“그래,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나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석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러 나섰다. 관을 덮는 순간, 석지훈의 눈가가 계속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장례는 아침 9시에 끝났다. 우리는 석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동성시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아랫배는 계속 아팠고 목에서는 쇳맛이 점점 짙어졌다.우리는 오후 한두 시쯤 아파트에 도착했다. 석지훈은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 곧장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그가 잠든 틈을 타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도착한 곳은 석씨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온 것을 알고 급히 달려와 나를 친절히 안내하며 검사를 도왔다. 그러나 CT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 암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나는 충격을 받은 채 물었다.“암이 완치됐다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재발할 수 있죠?”“가주님, 조금 전에 이전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전에 앓으셨던 자궁암이 말기였습니다. 말기라는 건... 완치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현재 의료 기술로는 재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넉 달 전 난산을 겪으셨잖아요. 비록 치료가 제때 이루어졌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상태는 재발 초기 징후가 보이고 있으니 항암제를 다시 복용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재발 초기 징후라니... 언제든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나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는데 이번에도 과연 또 기회가 있을까?죽음이 이번에도 나를 비켜가 줄까?나는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항암제 효과는 얼마나 있나요?”“가주님께서 이전에 드셨던 항암제는 석씨 집안에서 만든 약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치료 효과가 뛰어나 병세를
석지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내가 질문을 던지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깊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누가 뭐라고 했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물어보고 싶어서요.”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석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넌 거짓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고 눈빛이 흔들려서 날 똑바로 보지 못해. 윤아야, 어떤 소문을 들었든 한 가지만 믿어. 난 어떤 이유로도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네 손을 놓지 않을 거고.”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지만 고집스럽게 물었다.“그럼 오빠가 나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예요?”이전 같았더라면 석지훈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 혼자 속앓이하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겠지만 석지훈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명확히 물어보고 싶어졌다.석지훈은 내가 진지하게 답을 원한다는 걸 알고 한참 생각한 뒤 차분히 대답했다.“전에 네 이름은 들어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네 얼굴도 몰랐어. 너한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였고 네가 연씨 집안의 대표이자 고현성의 전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어. 사실 네 신분을 더 일찍 알 수 있었지만 난 네 신분조사에 관심이 없었거든. 네가 연윤아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었어. 진실이든 거짓이든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석지훈이 우리가 민박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을 때 나는 믿었다.그가 뭐라 하든 난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게다가 그 시기 석지훈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내가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가 그때 내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우리의 만남엔 어떤 불순한 의도도, 다른 요인도 없었다.그가 내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둔 건 단지 내가 ‘연윤아’였기 때문이지 모두가 오해하는 그 ‘신장’ 때문이 아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오빠는 왜 그때 내가 접근하도록 둔 거예요?”왜 내 오빠가 되어
공식 자리에서 나는 석수아로만 불릴 수 있다.석씨 성은 내가 석씨 집안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석지훈의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말이 끝나자 한 중년 여성이 나섰다. 그녀는 뚱뚱한 청년의 팔을 붙잡아 끌어내며 담담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아이가 철없이 행동해 사모님을 언짢게 했네요.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그녀가 바로 석지훈이 석지윤일 것이다.정당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석씨 집안의 방계 식구들은 적지 않았다.석지윤은 청년이 석지훈을 모욕하도록 내버려두다가 석지훈이 나를 언급하자 그제야 가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모욕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석지훈이 했던 ‘없앨 수도 있다’는 말은 석씨 집안의 방계들이 있는 곳에서 가주의 위엄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리고 이 뚱뚱한 청년은 본보기가 될 만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그에게 문제였던 건 단 하나, 자신의 입을 조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호랑이가 개에게 무시당한다 해도 여전히 호랑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청년과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석씨 집안은 예로부터 규율과 존비귀천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상과 벌도 분명해야 하고요. 댁의 자제가 규율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이 석씨 집안이 직접 가르쳐야겠습니다.”몇 달 전 함승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석씨 집안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부서가 있는데 처벌이 워낙 혹독해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석지윤은 내가 말한 ‘석씨 집안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가주님, 제 아이를 용서해 주십시오.”나는 비웃으며 답했다.“잘못을 저질렀으니 집안의 규율대로 가르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잠시 멈춘 뒤 나는 말했다.“단, 당신의 아이가 석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 달라지죠.”정당에 모인 방계 식구들의 안색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때 지훈이는 날 친어머니라고 믿었기에 나를 많이 그리워했어. 하지만 나는... 나는 지훈이한테 늘 차갑게 대했지. 생일날에만 잠깐씩 만났고. 지훈이가 네 곁에 나타난 이유는 네 몸속의 신장이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널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여자를 멀리하던 남자가 유독 너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쏟겠니?”‘석지훈이 나를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니!’나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석지훈이 정말 널 사랑한다고 믿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넌 지훈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석지훈은 예전에 사랑을 모른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어떤 건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정작 그의 행동은 내가 느끼기에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지훈이는 석씨 집안에서 자란 아이야. 고독 속에서 자라 강인하고 잔인하고 냉혹해. 그런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니?”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으로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남자들은 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 그런데 만약 지훈이가 너와 함께 있는 이유가 단지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라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녀가 이번에는 더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수아야, 지훈이의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니? 그 아인 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며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함승윤이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가주님, 그분이 뭐라고 하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답했다.“아니에요.”함승윤과 함께 정당으로 향하자 석지훈이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