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비밀인데?”오혜원의 비밀은 늘 뭔가 불안했다.나는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선물이라면 좋은 일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가느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네 마음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줄 수 있을 뿐이야. 네 몸속에 있는 신장은 사실 다른 사람 거야. 그리고 내 신장은... 미성년자라 적출해도 쓸 수 없었어.”나는 충격에 휩싸여 물었다.“다른 사람이면... 누구 말이야?”오혜원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았고 아무리 물어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여전히 연 씨 가문이 그녀에게 빚을 진 것은 맞지만 내 몸속의 신장이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죄책감이 많이 줄어들었다.오혜원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내 신장은 너희 연 씨 가문에 줬어. 다만 너희 가문에서 쓸 수 없었던 거지. 그러니까 여전히 너희 잘못이야.”한숨을 쉬며 그녀가 말했다.“처음 운성에 돌아왔을 때는 널 원망하고 싶지 않았고 네 마음에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너희 연 씨 가문이 예전에 나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참을 수가 없었어... 내가 나타나서 너희에게 상처를 준 건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나는 멍한 상태로 병원을 나섰다. 입구에서 나는 강해온에게 전화해 그 당시 신장 제공자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그는 공손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 그리고 진서준의 사망 사건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진씨 가문 회장님이 직접 손을 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나는 충격을 받았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데!“이유가 뭔지 알아요?”“아직 자세한 정황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최희연 씨께서 이미 진실을 알고 계시는데 그분이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네요.”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말했다.“이따가 내가 연락해볼게요.”병원을 나서는데 강해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대표님, 유 회장님이 계속 만나자고 하는데 아직 답변을 못 드렸습니다.”“내일 만나자고...”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들은 고현성을 데려갔다. 뒤이어 도착한 유서정도 함께였지만, 나만은 제외되었다. 고 회장님은 내가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간청해도 그는 나를 거절했다. 나는 희망 가득한 눈으로 고정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을 거야.” 나는 그의 소매를 붙잡고 간절히 부탁했다.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꼬마 아가씨, 우리 아버지께도 사정이 있으셔.” 고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나와 멍하니 서 있는 임지혜만 남았다. 나는 미친 듯이 쫓아갔지만 비행기는 이미 이륙한 뒤였다. 나는 그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고 운성에 있는 것조차 두려웠다. 끝없는 불안감에 나는 차를 몰아 동성으로 향했다. 동성에 도착하자마자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꼬마 아가씨,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너무 슬퍼하지 마.” 나는 그를 막으며 말했다. “말하지 마세요...” “현성이가...” 나는 소리쳤다. “제발 말하지 말아 주세요!” “꼬마 아가씨, 모레가 현성이 장례식이야.”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찼다. 믿기지 않았다. “그럴 리 없어요. 현성 씨는 오늘 낮에도 저에게 용서해 달라고 했어요.” 고정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꼬마 아가씨...” 나는 그의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쓰라렸다. 고통이 가득 찬 상태로 차에서 내려 길가에서 구토를 시작했다. 토하고 또 토하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문득 내가 죽었을 때 고현성의 심정이 어땠을지 깨달았다. 그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너무나 슬퍼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끝내 믿을 수 없었다. 눈물이 계속 흘렀고 나는 눈물이 다 말라붙을 때까지 울었다. 잠시 후,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차를 몰아 석씨 집안으로 갔다.
나는 끝없는 슬픔에 빠져 있었고, 석지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나에게 고현성을 잊을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잊고 싶지 않아요.” 나는 고현성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게 준 것이 행복이든 고통이든,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의 일부였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꽃밭에 엎드린 채 흐느꼈고, 석지훈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내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놀랍게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윤아야, 잠시 눈을 붙여.” 그날 밤, 나는 울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오늘이 몇 날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몸은 무기력하게 무너질 것 같았다.나는 옆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고현성의 교통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사흘이 지나 있었다. 그 사흘 동안 나는 침대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고정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대신 윤다은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받자, 그녀는 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새언니...” 나는 눈가가 붉게 물들며 물었다. “다은 씨, 현성 씨는 어디 있어?” 마음 깊은 곳에서조차 나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새언니, 이틀 전에 오빠 장례를 치렀어요.”‘장례를... 치렀다고?’고현성은 정말로 내 세상에서 떠나버린 것이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마음속 깊은 슬픔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침대 곁에 놓인 피 묻은 옷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전날 입었던 옷으로, 온통 고현성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 옷을 끌어안으며 울었다.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통곡하며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 옷을 꼭 껴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넓은 저택은 텅 비어 있었고, 석지훈은 여기에
그는 검은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묘비 아래 잠든 남자와 똑같은 외모를 가진 그가, 지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가 고현성이기를. 그가 다시 살아 돌아왔기를. 하지만 나는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정재라는 것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가 나를 부드럽게 불렀다. “꼬마 아가씨.”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난 이제 원망할 사람조차 없어졌어요.” 물론, 사랑할 사람도 없어졌다. 고정재가 말했다. “현성이가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어.” 나는 숨을 억누르며 물었다. “생전에 깨어난 적이 있었나요?” 고정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성이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어.” 잠시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하지만 나는 느꼈다. 이생에서 다시는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고정재는 비 사이로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 아가씨, 내일 나는 운성을 떠나 F국으로 갈 거야.” 고현성이 떠남으로써, 우리 셋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결국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도 나에게 용감히 다가올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단순히 세속적인 문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이미 변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 사이에 늘 존재했던 고현성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며 이별을 고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다은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정이란 건 억지로 되는 게 아니지.” 고정재는 그렇게 떠났다. 끝도 없는 빗속에서 이제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나는 축축이 젖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이 도시가 지겨워졌다. 아니, 조금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잠시
임지혜는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녀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고, 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나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현성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망가뜨리겠다’ 라는 말을 남긴 뒤,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하며 말했다. “현성 씨가 왜 당신 대신 이런 고통을 받아야 했던 건데?” 이 질문은 나 또한 고민했던 적이 있다. 나는 얼굴에 떨어지는 빗물을 닦아내며 산 위쪽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마음이 있었다면, 단 한 조각이라도 있었다면 현성 씨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임지혜는 너무도 이기적이고, 너무도 악랄하며, 너무도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순간 모든 것이 지치게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임지혜를 바라보다가, 옆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를 향해 말했다. “이따가 직접 경찰서로 데려가요. 그리고 서준 씨를 치었던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서 변호사를 통해 형량을 높이도록 해요.” 비서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나는 깊은 피로감을 느끼며 그를 불렀다. “강 비서.” “네, 대표님.” 여름의 비는 전혀 차갑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은 이미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듯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연씨 집안이 운성시에서 뿌리내린 지 얼마나 됐죠?” 비서는 익숙한 듯 대답했다. “대표님의 조부께서 1953년에 사업을 시작하셨고, 1973년에 정식으로 운성에서 시 그룹을 설립하셨습니다. 올해로 연씨 집안은 4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 비서, 본사를 동성으로 옮겨요.” 그는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둘 다 수년간의 노력과 수많은 자원을 쌓아온 도시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배려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수아 씨, 나 이제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저 지금 동성에 있어요. 와서 저 좀 만나줄래요?”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꽤 낡고 허름한 오래된 주택가였다. 문 앞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쉬고 노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창백한 얼굴의 송이연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약간 불룩한 그녀의 배도. 내 시선을 따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는 지켰어요. 하지만 너무 약해요.” 그녀 뱃속의 아이는 결국 지켜냈다. 나는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지킬 수 있다니 다행이에요.” 그녀는 연시혁과 결혼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아이를 지키기로 했다. 송이연이 연시혁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그녀는 참 단순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여자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소파에 앉았다. 어색한 마음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물었다. “왜 동성시에 있는 거예요?” “시혁 씨가 S시에 날 찾아왔어요. 머리가 복잡해서 그냥 동성으로 와버렸죠. 원래 새 아파트 단지에 살려고 했는데, 오래된 주택가의 분위기가 좋아서 여기로 정했어요. 여긴 대부분 노인들이 살고 있어서 매일 그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더라고요.” 송이연은 외로워서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나는 그녀가 전화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통화할 때, 더는 못 견디겠다고 했잖아요...” 그 말을 꺼내자 송이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제 몸이 더는 아이를 품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제 아이가 7개월이 넘었는데, 지금 아이를 없애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어떻게든 이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싶어요.” 7개월이 넘었는데 아이를 품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거라
송이연의 상황은 나와는 달랐다. 나는 완전히 생육 능력을 잃은 반면, 그녀는 신장 이식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몸이 약해진 것뿐이었다. 비록 그녀가 이 아이를 포기하더라도, 앞으로 다시 임신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목숨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수아 씨, 우리 부모님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분들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졸업하자마자 편지 한 장 남기고 둘이서 세계 여행을 떠나버리셨죠.”“그 덕에 저는 어쩔 수 없이 CEO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순식간에 막강한 권력과 모두가 부러워하는 스펙을 가지게 되었어요.”“제 인생은 너무나 순탄했죠. 그리고 저는 너무 착하고 온순했어요. 그런데 시혁 씨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송이연은 내 손을 놓고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저한테 가르쳐준 것은 뼈아픈 고통, 이루지 못할 갈망, 그리고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감정이었어요.”“함께한 시간 동안 저는 늘 그 사람의 안전을 걱정했고,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어요.”“항상 사고를 치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누구와도 싸움을 벌였거든요. 너무나 유치하고 충동적었어요. 제 주변의 엘리트 남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죠.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송이연은 깊이 빠져버렸고 그로 인해 이렇게까지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 물잔을 쥐었다. 송이연은 창밖의 지저귀는 참새 몇 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 눈에 시혁 씨는 아무런 빛도 없는 남자일지 몰라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저한테 정말 잘해줬어요. 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죠.”“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모습이 너무나 기뻤어요.” 그녀는 눈을 감고 슬픔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왜 이러는지 물어봤죠? 그 이유를 말해줄게요. 내가 이 아이를 지키려는 이유
뒤를 돌아보니 술에 약간 취한 듯한 반경우가 보였다.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반년 넘게 못 봤잖아. 너 더 예뻐졌다! 근데 말이야, 네가 가업을 동성시로 옮긴 지도 벌써 넉 달 가까이 됐는데, 어떻게 나한테는 한 번도 연락을 안 하냐. 날 친구로 생각하기는 하는 거냐?” 나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누가 너한테 연락하고 싶겠어.” “쳇, 내가 너한테 관심이나 있을 줄 알아?” 반경우는 넥타이를 풀고 내 옆에 앉아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 물었다. “요즘 어때? 언제쯤 다시 힘낼 거야?” 그가 말하는 건 고현성과 관련된 일이었다.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잖아.” “알았어, 신경 안 쓸게.” 반경우는 내 팔을 끌어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자, 내 친구들 좀 만나보자.” 반경우는 나를 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의 친구들이 그가 여자 하나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머, 반경우, 화장실 갔다 오더니 여자를 데려왔네? 뭐야, 둘이 잤어?” 그 말에 내 얼굴이 굳어지자, 반경우는 ‘닥쳐!’라며 웃으며 둘러댔다. “농담하지 마. 내 동생이야.” “네 동생?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어? SNS에서 몇 번 화제 됐던 그 여자잖아. 뭐더라... 큰 집안 대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반경우는 웃으며 말했다. “너 술 마셨냐? 이렇게 유명한 사람도 몰라? 연수아야, 연씨 그룹의 대표!” 그 친구는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연 대표님 사업하는 거 강단 있다고 칭찬하시더라. 거의 사람들 만나지도 않고 단호한 스타일이라던데. 근데 반경우, 정말 대단하네! 우리 연씨 그룹 대표를 네 사람처럼 말하네!” 나는 강단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연씨 집안의 일에 자주 관여하지 않았고 거절할 수 없는 자리일 때만 나설 뿐이었다. 반경우는 나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그
이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설명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형, 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 형의 석씨 가문을 빼앗은 여자야! 방금 보니까 술에 취했더라고. 곁에 비서도 없이 말이야. 전에 날 도와준 적이 있는데 차마 그녀를 혼자 둘 수 있어야지. 그래서 집에 데려다주려고.”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지?”원태웅: “...”석지훈이 지시했다.“이 여자를 네 차에 태워.”“형, 내 차 고장 났어. 우리 두 사람 좀 집까지 데려다줘! 얘는 술 취하면 얌전해. 절대 방해 안 할게.”석지훈: “...”석지훈은 결국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원태웅은 전화를 받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야 했다. 정말 일이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석지훈의 운전기사가 그를 길가에 내려주자 차에는 나와 석지훈 두 사람만 남았다.나는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신사답게 나를 밀어내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팔을 껴안고 웅얼거리며 말했다.“정우 씨.”“허, 정우까지 네 손에 넘어간 거야.”남자가 갑자기 뜬금없이 말하자 나는 당황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 운전기사가 물었다.“아가씨, 어디 사세요?”나는 계속 당황한 척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무관심하고 간결하게 말했다.“주소.”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무슨 주소요?”그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네 집 주소.”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정말 오랫동안, 거의 돌처럼 굳어 버릴 때까지 생각하다가 석지훈의 품에 쓰러졌다.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동성으로 돌아가.”2년 전 석지훈은 동성에 살았었다.동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보니 창밖에는 온통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다. 여기는 석 씨 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석지훈은 몰래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나는 깨어난 후 계속 멍하니 차 안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행히 술에 취해서 그런지 그는 나를 심하게
예지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한민수는 화가 나서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러자 예지한은 한민수가 두려운 듯 서둘러 앞치마를 벗고 그를 쫓아 나갔다.나가기 전에 나에게 카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카페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지만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문득 현정우가 생각났다.그의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나는 일어나 카운터에 앉았다. 아직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런 옷을 입고 여기에 앉아 있으니 너무 어색했다.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따뜻한 물을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앉아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어떻게 하면 석지훈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을까?석지훈은 보수적이고 깔끔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남자였다. 예전의 그는 높은 곳에 있었고 주변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다가온 이유는 내가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동생처럼 여기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말했었다.그러나 지금의 석지훈은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첫 키스가 남아 있고 자신이 숫총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키스하고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그에게 키스하면 다른 여자들은 끼어들 틈이 없을 테니까.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한단 말인가.나는 예전에 몇 번 술에 취했거나 정신 잃었을 때 그의 입술을 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술을 많이 마실 수도 없고 최음제를 먹을 수도 없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나는 원태웅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는 내 생각을 듣고 매우 찬성하며 말했다.[가능해. 네가 술에 취하면 돼. 내가 지금 바로 너를 데리러 가서 그에게 데려다줄게!]나는 답장을 보냈다.[나는 술을 많이 못 마셔요!]원태웅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가 진짜로 취하래!]나는 순간 원태웅의 뜻을 이해했다. 예지한이 돌아오자 나는 서둘러 나갔다. 차에 타자
그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했는데도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내 남자의 초라한 모습을 왜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가?나는 한민수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쪽에는 지훈 씨에게 어떻게 설명했어요?”한민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솔직하게 말했죠.”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솔직하게 말했다는 거죠?”“부상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기억이 좀 뒤죽박죽 해졌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설명했죠. 그는 석씨 가문의 진짜 후계자가 아니고 오히려 당신이 적통이며 지금의 그는 석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없다고요. 그런데 지훈이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리고 바로 의사에게 언제쯤 완전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지 묻던데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나는 그에게 되물었다.“지훈 씨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요?”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다만 석지훈 본인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까 의아하게 물었을 것이다. 너도 알고 태웅이도 알고 유진이도 아는데 왜 자기만 모르는지. 아마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그는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지훈의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요. 그러니 꼬시려면 서둘러야 할 거예요. 한성범은 당신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는 며칠 후면 지훈이를 핀란드로 불러들일 거예요.”석지훈은 항상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한성범은 그를 구해 줬으니 만약 한성범이 핀란드로 부른다면 그는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나는 정말 서둘러야 했다.그리고 한성범도 경계해야 했다.나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말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한민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어떻게 할 건데요?”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한성범은 지금 어디 있어요?”이 말에 한민수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