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연을 만났을 때 그녀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아래층에서 임지혜를 만난 일을 이야기해주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나도 요즘 병원에서 자주 봐.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의사를 붙잡고 뭔가 자꾸 요구하는데, 정말 정신 나간 것 같더라고.”정신병?!설마 고현성에게 차이고 나서 미쳐버린 건 아니겠지?나는 호기심에 물었다.“병원에서 소란 피우기도 해?”“그건 아닌데, 입으로‘혜원이는 날 속일 리 없어’ 이런 말을 계속 중얼거리더라고.”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혜원이?”임지혜가 어떻게 혜원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어. 나도 누군지 모르겠어.”최희연은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그 여자 진짜 꼴 보기 싫어. 예전에도 짜증 났는데, 저렇게 미쳐 날뛰는 꼴을 보니 또 불쌍하기도 해! 그런데 저 여자가 예전에 차로 서준을 쳤던 거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도 싹 사라져.”최희연도 나처럼 지금의 임지혜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역시 우리는 너무 마음이 약한 것 같다.나는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그 여자 얘긴 그만하고, 너 퇴원은 언제 해?”“곧 할 거야. 유겸 씨가 데리러 온대.”진유겸 얘기가 나오자 최희연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병원에 보러 왔었어?”내가 물었다.“어. 내가 누군지도 알더라.”최희연은 약간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사실 난 서준과의 관계를 숨기려고 했거든. 그런데 어제 그 사람이 병문안을 왔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나와 서준의 관계를 얘기하더라.”나는 호기심에 물었다.“그가 뭐라고 했는데?”“나는 서준의 작은아버지야. 너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넌 서준의 생전 유일한 여인이니 우리 반쪽은 같은 식구라고 봐야지. 앞으로 너의 남은 여생, 내가 책임질게.”최희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게 그 사람이 한 말이야. 난 거부할 틈도 없었어.”진유겸이 그녀의 여생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했다니, 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물었다.“뭘 그렇게 거부하고 싶었던 거야?”혹시 그에게
나는 고현성이 이 말을 누구에게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누구에게 말했든지 간에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은 분명했다.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쩔 줄 몰랐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 그와의 거리가 갑자기 너무 멀어져 버린 것 같았고 최근 며칠 간의 모든 기쁨과 행복이 거짓말 같았다.“너 언제 돌아와?”나는 고현성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을 느꼈다. 전화 너머에 있는 여자가 그에게 특별히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나는 슬픔과 억울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나에게 진심을 다하지 않았고 그와 다시 시작하기로 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왜 그와 다시 시작한 거지?“그래. 며칠 후에 데리러 갈게.”고현성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회사로 돌아왔다.사무실에 앉아있으니 머리가 멍해지고 마치 세상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강해온이 돌아왔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괜찮아요.”많은 일을 겪으며 나는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익혔다.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은 너무나 선명했다.“대표님, 죄송해요.”강해온은 사과했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이유를 말해보세요.”그가 공금을 횡령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내가 지나치게 차분한 것을 보고 강해온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 돈은 스위스로 보내졌어요.”“그걸로 뭘 했나요?”“저도 잘 모릅니다. 사실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저는 줄곧 모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 일은 7년 전, 심 비서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시킨 일로 그때 그는 이건 대표님 부모님의 뜻이라고 하셨죠.”심 비서는 아빠의 비서였다.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나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매년 이렇게 큰 금액이 스위스로 흘러갔는데 왜 나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의심도 안
내가 그를 못 믿는다고 생각하다니?!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당신 입으로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는데 대체 뭘 믿으라는 거예요? 그럼 말해 봐요. 당신은 그 여자랑 약속대로 결혼할 거예요?”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끝까지 묻지 않았다. 나름의 자존심이 있었고 그와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난 그녀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나도 내 사정이 있어.”‘겨우 사정이 있다는 말 한마디로 대충 넘기려고 하다니! 고현성, 너도 참 대단해!’“그래요, 좋게 헤어져요.”나는 손을 뻗어 그를 밀치려 했지만, 그는 내 두 손을 잡고 나를 그의 품에 안은 채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날 믿어. 나는 널 배신하지 않아!”너무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제길!”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고현성을 봐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에게 발길을 날렸다.그는 급히 나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여전히 침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순간 후회했지만, 그 후회는 그가 나에게 준 배신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현성 씨,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응.”그의 목구멍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그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그 여자가 운성에 온다면 결혼할 거야.”고현성은 단호하고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냉소하며 말했다.“그럼 이제 우리는 끝이에요. 앞으로... 진정한 행복을 찾기 바래요.”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수아야.”아직도 뻔뻔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내 자존심과 오기가 나를 다잡았다. 오히려 나는 너그럽게 축복까지 해줘야 했다.나는 분노해서도 안 되고 기죽어서도 안 되었다.설령 진다고 해도, 당당하게 져야 했다.나는 차에 올라 출발했다. 백미러를 통해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 시간에 고정재가 전화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을줄은...그는 내가 고현성과 싸운 걸 알고 있었던 걸까?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고정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두 사람 일을 현성이가 다은에게 말했고 다은이가 또 나한테 얘기해 줬어...”내가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정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지막이 물었다.“지금 울고 있는 거야?”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일어나 차가 멈춰진 곳으로 갔다. 원래는 연 씨 별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곳에는 고현성과 함께했던 이틀간의 추억이 가득했다.내 마음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이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여전히 고정재였다.내가 가장 힘들 때, 심지어 전화를 끊었는데도 그는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따스한 위로와 곁을 지켜줄 누군가였다.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와 엮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를 마치 스페어처럼 대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게다가 윤다은도 있지 않은가...우리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나는 고정재의 전화를 받지 않고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내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깊은 한숨과 함께 몸이 너무 괴로웠다. 항암제를 꺼내 먹고 나니 한참 후에야 몸의 불편함이 조금 가라앉았다.나는 눈을 감고 모든 생각을 비웠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창 밖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눈을 떠보니, 운성에 오랜만에 해가 떴다.차창을 내린 나는 길 건너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그는 고현성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제 나는 그들을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고정재에게서는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편안한 분위기가 풍겼다.고정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그리고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나는 차 안에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배 안 고파?”나는
“정재 씨,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요?”나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고현성 얘기는 꺼내지 않고 다른 질문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고정재도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그는 항상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세계 여행도 하고, 유력 인사들도 만났어.”이것이 고정재가 내게 준 답변이었다.나는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나는 그의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뭐 먹고 싶어요? 내가 살게요.”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고정재는 나를 근처 죽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내게 따뜻한 죽을 주문해 주었다. 죽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에게 물었다.“어머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제 아버님께서 금운으로 가시던데.”고정재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표정했다.“어. 어젯밤에 수술하셨는데, 경과를 봐야 하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그럼 정재 씨는 왜 금운으로 안 갔어요?”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고정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아빠와는 어릴 때부터 거의 만나지 못해서 정이 없어. 이번에 금운에 가지 않은 것도 엄마가 곤란해질까 봐 그랬어.”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어머님이 왜 곤란해하세요? 아버님이랑 같이 있으면 싸우기라도 하세요?”고정재는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내가 싸울 사람으로 보여?”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빠는 날 싫어해서 항상 흠을 잡으셔. 아마 우린 천성적으로 안 맞는 사이인가 보지.”고승철은 아들의 흠을 잡을 만큼 유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내 생각이 진실이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사실 고정재는 어젯밤 이미 금운에 돌아갔고 어머니의 수술 병실 앞을 지켰다. 그러다 새벽에 윤다은의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우린 둘 다 말주변이 없었다. 다행히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말 없이 밥만 먹었다.고정재는 몇 술 뜨더니 숟가락을 내려놨다.내가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건 네가 슬퍼하는 모습이야.이것은 고정재가 내게 건넨 가장 애틋하고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때 고정재가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든 현성은 너에게 상처 주기를 가장 원치 않는 사람일 거야. 혹시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사정이라...고현성 역시 자신에게 사정이 있다고 말했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운성에 오면 결혼할 거라고 했다.그러니 그에게 사정이 있든 없든 아무 의미 없었다.내가 고개를 젓자 고정재가 말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억지로 말하게 하고 싶진 않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말했다.“하지만 난 네 곁에 있고 싶어.”그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미안해요,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나는 서둘러 죽집을 나와 차를 찾아 몰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강해온에게 새로운 아파트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연 씨 별장에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회사에 돌아왔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정재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던 것이다.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내가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그와 함께할 수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고현성과 고정재 사이에서 나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배신당했다고 그에게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이건 고정재에게 너무 불공평한 일이었고 내 감정에도 솔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나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넋이 나간 듯 시간을 보냈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이대로라면 조만간 병이 날 것 같았다.그래서 당분간 운성을 떠나 있기로 결정했다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강해온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새로 구입한 롤스로이스를 운전하고 동성시로 향했다.하지만 동성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입구에서 가벼운 접촉 사고가 발생했다. 일반 승용차 한 대가 내 차를 추돌한
창가로 가서 밖을 보니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여기로 가려고요?”그는 말이 없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얼굴에 흉터가 보기 흉하네.”나: “...”나는 동성에 온 뒤 화장을 지웠기에 매끈한 얼굴에 드러난 흉터는 당연히 보기 흉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것도 방금 내가 살려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싫은 소리를 듣게 되다니, 참으로 의외였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지켰다.그가 갑자기 물었다.“이름이 뭐야?”그의 목소리는 낮고 매우 거칠었다.그와 친분이 없으니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묻기에 답하지 않을 수도 없어 거짓으로 답했다.“연윤아요.”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창밖의 강은 고요했지만, 그가 여기서 나가려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바로 이때 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창가에 서 있던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한테 경고했다.“나랑 같이 안 나가면 고문당할 거야.”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누구한테요?”그는 차갑게 말했다.“날 죽이려는 자한테.”“지금 문 두드리는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는 자들이라는 거예요?”“그래. 그들은 내가 여기 있는 거 알아.”그를 찾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나는 거절했다.“난 안 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문이 열리고 맨 앞에 선 자가 이유도 묻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나는 당황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으니까.창가의 남자는 바로 나를 끌어당겨 창밖으로 뛰어내렸지만 뛰어내리는 순간 내 어깨는 칼에 베였다.나는 신음을 뱉었고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차가운 강물 속으로 빠졌다.숨을 쉴 틈도 없이 물을 몇 모금 마셨고 고개를 내밀려 했지만, 누군가의 손바닥에 눌렸다.숨 막혀서 죽을 것 같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고현성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몸에 힘을 빼고 가라앉도록 내버려 두
“나는 동성에 볼일이 있어. 나중에 연락할게.”나는 반경우의 만남을 거절했다.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지난번에 내가 널 불편하게 했나?”나는 고개를 숙이고 부정했다.“아니.”“난 너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없어. 오해하지 마”반경우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자 나는 그의 직설적인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내 소중한 친구잖아. 우리 사이의 선은 분명히 있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진짜 내가 오바한 건가?!“나 그렇게 잘난 사람 아니야.”내가 대답했다.“어.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그래. 알았어.”반경우의 통화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문 앞에는 끈질기게 들러붙는 사람이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나는 다가가서 물었다.“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지 알았어?”나는 반경우의 전 여자친구가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사람을 둘이나 데려왔다. 딱 봐도 내가 열세에 처한 걸 보자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내가 어떻게 알았을까?”나는 어이가 없었다.“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나와 반경우의 전 여자친구는 털끝만큼도 상관없는데 왜 날 오해하는 것인지 진짜 알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그녀와 반경우는 이미 헤어진 사이이니 설령 내가 그와 뭐가 있다고 해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그녀는 막무가내로 말했다.“동성에서 꺼져.”그 말을 듣고 나는 비꼬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어디 있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 진짜 왕이라도 되는 줄 알아? 다른 사람의 의사는 전혀 상관 않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반경우의 전 여자친구는 더 이상 나와 말할 의향이 없었던지, 미간을 찡그리며 명령을 내렸다.“저년의 휴대폰과 주민증을 빼앗아.”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자 위협적으로 말했다.“가져가. 아무것도 없으면 경우를 찾아가면 되지. 너도 그걸 원하지는...”그녀는 내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