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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1화

Author: 십일
아니나 다를까.

앞장선 경찰은 재석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이 두 사람을 먼저 데려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두 사람의 소변 검사까지 해보는 게 좋을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희도 다 압니다.”

서씨 형제는 안색이 돌변했고, 그제야 큰일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찰차는 급하게 떠났다.

현빈은 은근히 비웃었다.

“경찰들이 이렇게 빨리 출동하는 거 처음인데.”

재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지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제야 알아차렸다.

‘교수님도 도움 청하시느라 지각하셨구나.’

현빈은 조폭을, 재석은 경찰을 불렀다.

‘이렇게 되면, 서씨 형제들도 더 이상 방법이 없겠지.’

...

저녁 무렵, 진일네는 마치 설을 보내는 것처럼 떠들썩했다.

남봉수는 오후부터 바삐 돌아치기 시작했다. 닭과 오리를 잡고, 물고기를 손질했다.

집안의 모든 재료를 전부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둔 술까지 열었다.

이것은 원래 이현이 결혼할 때 꺼내 마시려고 했던 술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서서 남봉수를 말렸지만, 그는 전혀 듣지 않았다.

오후부터 주방에 들어갔고, 해가 저물어갈 때에야 주방에서 나와 웃으며 사람들을 불렀다.

“다들 와서 앉게, 음식 다 됐거든!”

사람들은 식탁 앞에 앉았다.

설을 쇨 때에야 쓸 수 있는 큰 식탁에는, 생선이며 고기들이 가득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보지 못한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

민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는 이미 주방에서 전해오는 향기를 맡았는데, 그 맵고 향기로운 냄새가 줄곧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남봉수가 말했다.

“현지의 특색 요리를 좀 만들었어. 고추를 많이 넣지 않았으니 그렇게 맵지 않을 거야. 너희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역시 민지였다.

“맛있어요! 정말 너무 맛있어요!”

민지는 음식이 아주 매울 줄 알았다.

전에 매운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남봉수가 만든 음식은 입에 들어가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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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2화

    재석도 흠칫 놀란 듯 했다.눈빛이 교착된 사이, 정은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 미소에 당황한 재석은 시선을 떼지 못했고, 원래 평온하던 마음조차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에헴!” 현빈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했다.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정신을 차리더니 시선을 돌렸다.‘흥! 나 몰래 시선을 교환하다니.’민지는 걱정돼서 현빈에게 물었다.“심 대표님, 왜 그러세요?”서준은 미처 민지를 막지 못했다. 식탁 아래서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좀 매워서.”“네? 이게 매워요? 난 왜 하나도 안 매운 거 같죠? 그럼 빨리 물 좀 마셔요.”“음.”‘정말 다정한 아이군!’민지가 물었다. “쮼, 너 방금 왜 내 옷을 잡은 거야? 무슨 일 있어?”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아니야. 그럴 리가.”‘네 마음대로 해라.’...다 먹고 남봉수는 치우고 설거지하며 주방 청소하느라 바빴다.민지는 거실 의자에 앉았는데, 발 옆에 숯을 담은 대야 두 개가 있었다.그녀가 춥다는 것을 알고 이현이 특별히 민지를 위해 불을 지핀 다음 가져왔다.“민지 언니, 이거 먼저 써요, 이따가 제가 다시 숯 좀 넣을게요.”“응, 고마워 이현아, 너 너무 착하다!”이현은 부끄러워하며 침실로 달려갔다.민지는 따뜻한 숯탄 덕분에 더 이상 춥지 않았다.주방 벽에는 남봉수의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피곤하지도 않은 듯 이리저리 왔다갔다했고, 민지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좀 멍해졌다.‘남자들도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일 수 있구나, 처음 봐. 남자들이 주방에 들어서면 안 된다는 것도 다 뻥이었어.’더욱 놀라운 것은 진영매와 진일 남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마치 이미 이런 장면에 습관된 것 같았다.서준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민지는 턱을 짚었다.“나도 앞으로 밥 잘 하는 남편 찾을 거야! 그럼 난 손을 쓸 필요도 없고, 바깥에 나갈 필요도 없이 매일 맛있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3화

    현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아들을 해결한 이상, 이제 그 아버지를 해결해야 했다.그리고 두 사람의 아버지는 서지강 서지준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현빈은 진일에게 일찍 계획을 세우라고 일깨워주고 있었다.“현재 서씨 집안에게 있어,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바로 서지강과 서지준을 감옥에서 건져내는 거야.”“그래서 당분간 복수를 할 수 없을 거고. 그러나 서달우가 모든 방법을 다 써도 자신의 아들들을 구할 수 없다면, 너희 집안을 이용해 분풀이를 할지도 몰라.”진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지강과 서지준이 이미 끌려간 이상, 서씨 집안도 뿌리째 뽑히지 않을까요?”재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사실대로 말했다.“그건 힘들 거야. 현재 우리가 경찰에게 넘겨준 증거로 볼 때, 서씨 형제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충분하지만, 서달우를 넘어뜨릴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몰라.”만약 서씨 집안 사람들이 신중하고, 부자간의 일을 아주 분명하게 처리했다면?만약 서달우가 이 날을 위해 진작부터 준비를 했었다면?만약...아무튼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재석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원래 오늘 이기면 이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다시 원래대로 조용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현실은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현빈이 말했다.“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서씨 집안이 아무리 대단해도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서달우의 복수를 피하려면, 어려운 편도 아니야.”진일은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죠?”“이사를 가는 거야.”서씨 집안이 마을에서 날뛰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또한 그것뿐이었다.진일네 가족이 시내로 이사가면, 서달우은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반대로 계속 마을에서 지내면, 서달우는 진일을 상대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사람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상습적인 괴롭힘과 욕설도 시간이 길어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4화

    그러나 진일은 서씨 집안이 언제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할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위험에 빠지는 걸 볼 수 없었다.진일은 고민에 빠졌다.현빈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모든 사람에게는 다 자신의 운명이 있었다. 그는 지금 진일의 결정을 존중하면 됐고, 너무 많은 간섭을 할 필요가 없었다.이날 밤, 진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정은, 서준과 민지 세 사람은 재석, 현빈과 함께 마을의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조건은 아주 보통이지만, 그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행 모두 마음속으로 진일이 어떻게 선택할지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아직 안 자고 뭐해?” 정은은 홀에 앉아 창밖의 어두운 밤을 보았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 남자의 목소리에 생각이 끊겨 문득 정신을 차렸다.“선배.”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다음, 정은은 웃으며 인사했다.“선배님도 안 잤잖아요?”“잠이 안 와서.”“진일 선배 때문에요?”“너도?”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정은에게 물었다.“너 방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정은은 순간 침묵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정은은 묵묵히 입을 열었다.“나는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남자는 멍해졌다. “뭐가?”“우리가 진일 선배를 위해 해결책을 생각할 때, 모두 서씨 집안의 복수를 어떻게 피할지에 고려했잖아요.”“그런데 그걸 왜 피해야 하는 거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진일 선배인가요? 서씨 집안이 과수원을 빼앗으려고 폭행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피해자가 피해야 하다니. 이건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서씨 집안이지, 남씨 집안이 아니었다, 그럼 왜 그들이 도망가야 하는 것일까?정은은 현빈의 생각이 틀렸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재 서씨 집안의 복수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하지만 이 결정은 아무리 봐도 답답했다.‘너무 억울하잖아!’재석이 대답했다.“적당히 피하는 건 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5화

    “선배.”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어 진일의 말을 끊었다.정은을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진일도 정은을 바라보았다.“결정하기 전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좋아.” 진일이 정색했다.“무한 실험실에 들어온 이상, 매달 월급을 받을 거예요. 직함 등급에 따라 부동한 월급을 받을 거고요.”“연구원, 보조 연구원, 일반 연구원, 시니어 연구원으로 나뉘죠. 물론 직함은 한 편,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성과를 제출해야 해요. 이 점을 잘 알고 있겠죠?”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고 있어.”그러나 그는 정은이 왜 이때 이 일을 언급하는지 몰랐다.“실험실은 선배에게 향후 10년의 월급을 미리 지불할 수 있어요. 초보적인 계산에 따르면 8억 원 정도 될 거예요. 물론 이것은 단지 예측일 뿐이에요.”“실제 수입은 틀림없이 차이가 있을 것이고,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실험실에서 선불할 수 있는 액수가 바로 8억 원이에요.”진일은 충격을 받았다.“정, 정은아...”남봉수도 눈을 부릅뜨며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아니, 공부를 하고, 실험을 하면 이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니...’결국 전에 진일은 송지혜의 밑에서 일을 하면서, 여태껏 월급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니.정은은 계속해서 말했다.“이 돈으로 잠시 급한 불을 끌 수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월급을 선불하는 이상, 앞으로 10년 동안 선배는 무한 실험실에 있어야 하고, 이직할 수도 없어야. 그리고 매년 일정한 성과와 그에 상응하는 직함 등급을 받아야 해요.”그래서 이것은 베푸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기껏해야 정은의 투자와 인재를 남기는 수단이었다.좋은 연구원은 얻기 무척 어려웠다. 진일처럼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특별히 노력하는 연구원은 더욱 희한한 존재였다.그의 실력에 정은은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진일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6화

    계약서를 다 보고 난 진일은 정중하게 사인했다.그리고 두 손으로 정은에게 건네준 다음 맹세했다.“절대로 실험실 손해 보지 않게 할 거야.”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나도 나 자신의 안목을 믿어요.”정은이 진일을 도운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진일은 감격에 할 말이 많았지만,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평생 이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남봉수와 진영매는 이런 전기를 맞이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정은이 고마운 동시에, 아들에 대해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우리가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진일은 더 멀리 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아버지, 어머니, 우리에게 돈이 생겼어요.”진일은 웃으며 부모님을 쳐다보았다.그 순간, 그는 마침내 자신이 헛되게 공부하지 않았으며, 지식 덕분에 언젠가는 부자가 될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남봉수도 엄청 기뻐했다.도시로 이사하면 진영매는 최고의 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고, 게다가 재석이 소개한 그 전문가 덕에 건강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이현도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그 자신으로 말하자면, 도시에 가면 당연히 마을에 있을 때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었다. 남봉수는 비록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아직 멀쩡했고, 간식도 좀 만들 줄 알았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꼭 돈을 벌 수 있을 거야!’그들은 바로 희망이 생겼다.이제 유일하게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뒷산의 앵두나무들은 어떡하지?”재석이 입을 열었다.“이건 간단해요. 시중에 농산물 도급회사가 있거든요. 재배지는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요. 대부분 토지를 도급하여 과일과 채소를 재배한 후, 원산지에서 직접 마트나 시장에 보내는 거죠.”“제가 조사해 보았는데, Y시에 마침 이런 회사가 하나 있어요. 규모도 꽤 크고요.”“이 작은 과수원을 보고 실망하진 않을까?”외지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남봉수도 이런 도급 회사에 대해 들은 적이 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7화

    “정말 잘 됐네요!” 진일은 기뻐서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알았어요, 아저씨. 이틀 후에 저도 부모님과 같이 시내에 갈 거예요. 그때 가서 재운이 보러 갈게요...”“네, 안심하세요. 다 해결됐어요...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서씨 형제는 어제 이미 경찰에 잡혀갔어요... 네, 만나서 다시 얘기해요.”민지는 진일이 전화를 끊은 순간 바로 물었다.“재운이에 관한 소식인가요?”진일은 즉시 재석을 보더니 눈시울을 붉혔다.“조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꼭 면전에서 고마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감사합니다!”민지는 눈을 깜박였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방금 전화하신 분은 재운이 아버지인데, 재운이가 이미 깨어났다고 말씀하셨어.”“정말요? 잘됐네요!” 민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교수님한테 고마운 거죠?”“조 교수님이 재운이를 시내의 병원으로 옮기셨다는 거야. 또 전문가를 청해 수술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운이를 치료하셨고.”정은은 놀란 눈빛으로 재석을 바라보았다.“언제 안배한 거예요?”“어제.”“왜 이런 얘기하는 거 못 들었죠?”“오는 길에 시내 병원에 연락했거든.“그래도 교수님밖에 없네요.”현빈도 의혹을 느꼈다. ‘언제 연락한 거지? 어제 우리 두 사람은 줄곧 함께 있지 않았어? 아, 내가 구정배 찾아갔을 때 빼고... 이런! 이 기회를 잡았다니!’...몇 사람은 또 마을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고, 이튿날 J시로 출발했다.진일은 함께 가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을 챙겨야 했고, 그 후에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그 사이, 서씨 집안이 또 다른 수작을 부릴까 봐 현빈은 특별히 두 경호원을 찾아와 진일네 집 앞을 지키게 했다.그들은 현빈의 경호원이었고, 구정배의 사람이 아니었다.민지는 매우 궁금해했다.“심 대표님, 그렇게 하신 이유가 뭐예요?”현빈은 기분이 좋아서 민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나와 그 사람은 별다른 친분이 없거든. 친구에게 부탁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8화

    정은은 그 돈을 받았다.“그러나 선배는 받지 않을 거예요.”“그냥 내가 줬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돼. 어른이 준 용돈이라 생각하면 알아서 받을 거야.”“네.”모든 일을 해결한 다음, 정은은 또다시 실험실, 학교, 집을 드나드는 생활을 반복하기 시작했다.일단 그 안에 몸을 던지면,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민지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정은 언니는 정말 날 재촉할 수 있는 존재 같아.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만 하면, 힘들어 죽더라도 억지로 따라고 싶단 말이야.”서준은 듣자마자 웃었다.민지는 눈살을 찌푸렸다.“왜 웃어? 넌 아니야?”“난 자제력이 있거든.”“아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난 뭐 자제력이 없는 줄 알아?”진일 쪽도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다.정은 일행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진일은 부모님을 모시고 마을에서 이사를 갔다.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 앵두나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을 가졌다.눈독을 들이는 사람은 어찌 서씨 형제뿐이겠는가?다만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할 뿐이었다.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줄곧 탐내고 있었다.그것은 돈을 벌 수 있는 과수원이었다.이번에 진일네가 이사 간다는 말을 듣고, 또 서씨 형제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하나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매일 진일네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 남봉수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려 했다.진일의 말을 빌리자면, 설에도 그의 집은 이렇게 떠들썩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직접 남봉수에게 말했다. “어차피 너희들도 이사를 가야 하니까, 그 과수원은 그냥 나에게 줄 수 없어?”남봉수는 모두 화가 나서 웃었다.이웃 마을에서 친척이나 전에 친분이 좀 있던 사촌들조차도 모두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남봉수가 말했다.“모두들 온 이상, 나도 한마디 좀 할게. 그 과수원을 양도할 생각은 없어. 물론 공짜로 남에게 주지도 않을 거야.”“그럼, 너희들 모두 이사를 가면 누가 그 앵두나무를 키우겠어? 이렇게 내버려둘 순 없잖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89화

    봉수진이 물었다. “정은이 요즘 왜 그렇게 바쁜 거죠? 집에 와서 밥 먹으라고 몇 번 불렀는데 줄곧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한 달 넘게 못 봤는데...”이춘재는 신문을 내려놓고 봉수진을 바라보았다.“당신도 참,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손녀에게 같이 있어달라고 떼를 쓰는 거야? 정은이가 뭐 때문에 바쁘겠어? 실험을 하거나 논문을 쓰고 있겠지. 그래서 올 시간이 없는 거야.”“알아요...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 꽤 보고 싶단 말이에요...”이춘재는 멈칫했다.그렇게, 그도 정은이 보고 싶었다.설이 끝나자마자 두 노인은 L시의 같은 주택단지에 별장을 샀고, 계약을 체결한 후 재빨리 이사했다.이미숙은 돌아올 때, 부모님과 이웃이 된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래도 무척 반가웠다.이춘재와 봉수진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매일 딸과 사위를 만날 수 있었지만 같은 집에 살지 않아 서로에게 공간을 남겨주었다.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얼마 전에 이춘재는 이사회를 주재해야 했기에 J시로 돌아가야 했다.돌아온 후, 두 사람은 좀처럼 쉬지 않았다.이춘재는 일 때문에 바빴고, 봉수진은 화초를 가꾸며 채소를 심느라 바빴다. 게다가 시간을 내어 정은에게 전화를 하며 집에 와서 밥을 먹게 했다....어느덧 또 토요일이 찾아왔다.정은은 어젯밤 실험을 하느라 밤을 새웠기에, 아예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실험실에 침대, 이불, 세면용품과 갈아입을 옷이 다 있었다.아침 8시까지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다시 실험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마침 8시 30분이었는데, 두 번째 데이터도 다 나왔다.어젯밤 못 다한 실험을 계속 할 수 있었다.“언니, 굿모닝.”9시, 민지와 서준이 도착했다.“응.” 정은은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서준은 단번에 문제를 발견했다.“누나, 어제 밤을 지새웠어요?”“뭐라고요?!”민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3시에 잤어.”‘이게 밤새는 거랑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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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8화

    웨이터에게 물어본 후에야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그러나 다가오자마자 송정후가 쫓아오더니, 더러운 손으로 정은을 잡으려 하는 것을 볼 줄이야. 재석은 다급해지는 바람에 바로 입을 뗐다.송정후는 몸이 굳어졌다.정은은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재석을 향해 걸어갔다.“교수님.”재석은 정은이 다치지 않았단 것을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왜 나왔어? 밖은 춥지도 않니?”지금 재석의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방금 송정후를 호통친 모습과 그야말로 극과극이었다.“안이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미친 개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걸 그랬어요.”정은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그녀는 송정후의 코를 가리키며 ‘네가 바로 그 개’라고 말할 뻔했다.송정후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이때 갑자기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또 누구의 학생이 이렇게 날뛰는지 했는데, 알고 보니 조 교수의 학생이었구나? 어쩐지.”“한동안 못 봤는데, 조 교수는 언제 이렇게 예쁜 여학생을 제자로 삼은 거지? 가르칠 때 몸이, 아니지, 마음이 엄청 편하겠지? 말하자면, 네 곁에는 항상 예쁜 여자가 많았지. 정말 부럽네 부러워.”송정후는 갑자기 비아냥거리더니 재석을 모함했다.올해 초, 두 사람은 같은 국가급 프로젝트를 경쟁했는데, 송정후는 재석에게 졌기에 두 사람 사이가 이미 틀어졌다.그후 또 ‘가장 뛰어난 청년 연구원’ 선정에서 재석과 다투었는데, 송정후는 재차 실패를 거두었다.두 사람은 지금 라이벌과 다름이 없었다.송정후는 H시에 있고, 재석은 J시에 있는데, 두 사람은 일년 내내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송정후가 수를 써서 체면을 되찾으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지금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당연히 잘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송정후는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나는 또 조 교수가 정말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저 눈이 좀 높았던 것뿐이었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만 손을 대다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7화

    “얘기 좀 해도 되지?”정은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되지만, 전 교수님과 같은 분야를 전공하지 않아서요.”“어제 포럼에서 발언할 때, 과학 연구의 매력의 절반은 교차 학문 연구 간의 협력에서 온다고 했잖아? 내가 잘못 기억한 건 아니겠지?”“네.”“하하...”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말 잘하네, 그래서 인상이 정말 깊었어.”정은은 남자의 일부러 웃는 소리에 좀 불편했다.‘선배님이 이런 웃음을 지을 때는 그렇게 듣기 좋았는데...’“에헴! 죄송하지만, 송 교수님. 전 잠깐 나온 것일 뿐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찾으실 거예요.”말을 마치자마자 정은은 떠날 준비를 했다.그러나 송정후는 그녀를 불렀다.“정은아.” 그리고 다시 물었다.“네 교수님은 누구시지? 고경학? 유개훈? 아니면... 조재석?”송정후가 언급한 ‘고경학’과 ‘유개훈’은 모두 오미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정은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송정후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나 다 봤어. 어젯밤 그 섬에서 아주 재밌게 잘 놀던데?”그의 말투는 일부러 무언가를 암시한 것 같았고, 징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아주 재밌게 잘 놀았다’는 말에 고의로 힘을 주었기에, 아무리 봐도 정은은 불쾌함을 느꼈다.정은은 냉정하게 말했다.“송 교수님, 말씀 조심하세요.”송정후는 웃음을 멈추더니 비아냥거리는 듯 말을 이었다.“하하, 시치미를 떼는군. 오늘 여기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들 덕분이잖아?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분들이 널 공유할 줄은.”송정후는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래, 넌 젊고 예뻐서, 학계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라 할 수 있지. 독차지할 수 없는 이상, 차라리 대범하게 나서는 게 좋지 않겠어? 너한테도 이득일 텐데.”송정후의 비웃음이 짙어졌다.“그래, 이 방법이 얼마나 좋아!”정은은 송정후의 웃음을 다시 듣고서야 그 소리가 왜 불편했는지를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6화

    이 어르신들은 재석이라는 이 인기 있는 인물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척에게 소개하고 싶었고, 또 어떤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인연을 맺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며, 수많은 시도 속에서 재석의 답변은 언제나 그 한마디뿐이었다.“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원래 임 교수도 이번에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고, 어차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오혜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국제 물리 교류회가 벌써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혜정은 여전히 재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모든 교수들에게 각자의 ‘정은’이 있었다. 임 교수도 자기 학생들을 위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거절하면 거절했지 뭐, 허허. 거절 안 당한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잖아?"임 교수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들을 준비를 했지만, 뜻밖에도...“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너무 놀란 임 교수는 재석이 떠났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누구를 좋아하는 거지?’...한편, 정은은 오미선을 따라 몇몇 교수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서 있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지루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고프지? 가서 뭐 좀 먹어.”“네.”교수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전공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야기하다가 결국 화제는 집안 이야기로 흘러갔다.‘역시, 노부인들이 모이면 이런 얘기는 피할 수 없지.’정은은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이런 얘기는 내가 듣기엔 좀 너무 과하잖아.’술장과 디저트 코너를 한 바퀴 돌면서, 정은은 따뜻한 음료를 한 잔 마시며 과자도 몇 개 먹었다.‘음, 이제야 배부르네.’오미선이 옛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은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회장 뒷문으로 향했다.밖에는 작은 화원이 있었는데, 밤바람이 서서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5화

    밤은 깊어졌고,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만찬은 호텔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리며, 참석자들은 잠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올 수 있게 했다. 레드카펫도, 꽃도, 고급 차도 없고, 열어놓은 술장과 음식 코너만으로 만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진다. 대부분 남성들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간단한 셔츠를 입고 이번 만찬에 참석했다. 상대적으로,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은 좀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머리는 깨끗이 감은 데다가 옷차림도 단정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한복을 입은 사람도 있으며, 일부 교수들은 새로운 한복을 곁들은 패션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 교수는 여자 교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따르는 교수나 연구원을 따라 참석한 이들로, 이번 만찬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히고 싶어했다. 정은은 초대장을 들고 재석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미선은 먼저 도착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재석은 여전히 양복을 입었고, 너무 격식을 차린 느낌보다는 약간 캐주얼한 디자인이 가미되어 있어 좀 더 자유롭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정은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을 위해 립스틱을 발랐고, 카멜색 외투에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단순했지만, 엄청나게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오히려 돋보였다. 너무 젊어서 이런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믿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정은이 학문과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재석은 살짝 기침을 하며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정은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오미선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긴장돼?” “조금이요.” “걱정 마, 이따가 내가 사람 소개해줄게.” “좋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4화

    “이건 뭐죠?”정은은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스태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정은 씨, 오늘 저녁 학술 만찬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뛰어난 연구자시네요.”그 말을 끝으로 스태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정은은 손에 든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더니, 놀람과 당황이 스치고 지나간 끝에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매년 열리는 정상희의가 끝나면 ‘학술 만찬’가 열리는데, 포럼 기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인 연구자들이 초청된다.그 만찬의 입장권이 바로 이 붉은 초대장이었다.오미선과 재석처럼 뛰어난 학자들은 포럼 첫날에 이미 초대장을 받았다.예년처럼 초대장 한 장으로 본인 외의 다른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오미선은 정은과 미리 약속해두었다.“포럼 마지막 날 밤, 너 나랑 같이 가자.”정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그런데 다음 날, 재석이 또 찾아와 물었다.“나랑 같이 갈래?”‘앗!’정은은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그렇겠지.”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오 교수님이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널 안 데려가실 리 없지.”사실 정은도 의아했다.애초에 재석은 수지를 데리고 포럼에 참석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함께 만찬에 갈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물어보다니.‘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이수지 선배는...’‘어휴, 생각만 해도 괜히 민망해지네.’그런데 이번엔 정은이 자신의 성과로 초대장을 받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들뜨지 않을 수도 없었다.비록 초대장은 별거 아니지만, 정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이건 ‘소정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고, 단순히 ‘오미선의 제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은 게 아니란 것이다....하지만 수지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포럼 내내 존재감 없이 지냈으니 당연히 단독 초대장을 받을 리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재석이 초대장을 가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3화

    정은은 정말 조개를 주웠다.무슨 조개인지 모르지만, 보랏빛에 주황색이 섞여 있어서 정말 예뻤다.그녀는 기뻐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리 와서 봐요!”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재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정은의 곁으로 다가갔다.정은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개 하나가 드러났다.“예쁘죠?”재석은 정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그럼... 신발 벗고 같이 놀아볼래요?”남자는 순간 놀란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음에.”정은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봐, 정은이도 다음에 나와 같이 바다에 올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이 때때로 정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재석은 해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선배님, 계속 걸어가면... 끝은 어디일까요?”정은은 뒤로 걸으며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여유롭고 편안한 자세였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변의 끝은 모래사장이고, 모래사장의 끝은 바다겠지.”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난 또 선배님이 정색하면서, ‘해안선은 해양과 육지의 경계선이고, 대조평균고조면을 기준으로 정의돼. 조석이나 풍랑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되지 않은 선이 아니라, 띠처럼 형성되는 공간적 개념이지.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그녀는 재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진짜 베테랑 학자처럼 그럴듯한 모습을 보였다.재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미 답을 다 생각해놓고, 나한테 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다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어.”정은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몇 가닥이 뺨을 스쳤다.“아니에요. 난 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2화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는 오미선의 대표적인 인맥 기반이었다.누구나 정은이라는 젊은 후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 같은 전공에서 이어져온 인연 덕분이었다.우수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비록 정은이 직속 제자는 아니더라도, 생명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유망주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그다음은 물리학 분야였다.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재석의 신뢰와 명성만으로도 정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 친구는 소정은이라고,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예요...”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했다.말하는 도중, 자연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난 재석이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 처음 보네. 오늘 제대로 구경을 좀 하는구나, 하하하!”재석은 차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전에 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거든요. 정은이랑은 사실 선후배 사이고요. 그게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아니! 전혀. 네가 좋다면야 뭐든 좋은 거지.”재석은 어이가 없었다.수지는 기회를 엿보며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재석의 소개도, 옹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롱거리 같았다.국제 영화제에 자비로 입장해 레드카펫에 슬쩍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플래시가 아무리 번쩍여도, 그것은 수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오전의 네트워킹 세션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다.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버스를 타고 한 어촌 마을로 이동했다.이곳은 M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어촌’으로 불린다.10여 년간의 보호 및 개발 정책을 통해 전통 어업 기반에서 관광 및 체험형 마을로 점진적인 전환에 성공했지만, 가능한 한 어촌 고유의 생활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이처럼 수준 높은 포럼이 열릴 때면, 지역 지자체에서는 인문학적 탐방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곤 한다.일종의 힐링이자, 참가자들에게 새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1화

    복도에서, 오미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재석은 팔에 걸쳐 있던 정은의 숄을 건네주며 말했다.“괜찮아?”정은은 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숄을 받으며 웃었다.“걱정 마요. 나 안 취했어요.”“그럼 다행이네.”“선배님, 오늘 오전에 고마웠어요.”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고맙다고? 내가 너에게 질문을 부탁한 거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지.”“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날 불러줘서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예요.”“내가 기회를 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너야. 그러니까 나보다 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지.”정은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나 자신에게요?”“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 돼. 정은아,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네, 맞아요.”“이제 들어가. 오늘 일찍 쉬고, 내일 하루 더 남았으니까.”“네.”재석은 정은이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그녀가 문을 꼭 닫은 걸 확인하고서야 룸카드를 꺼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수지는 문구멍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재석이 정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가 겹쳐지자, 수지는 입술을 거의 깨물 뻔할 정도로 질투를 느꼈다.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수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잽싸게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손태민’이었다.그녀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침대에 내던졌다.“왜 또 쟤야? 정말 짜증나 죽겠네!”“하루 종일 연락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나 봐!”수지는 차갑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진동음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화면은 꺼졌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는 눈을 감았다.그 전에,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래, 이제 실컷 울려봐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0화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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