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은 손을 흔들었다.“괜찮아.”외투 한 벌일 뿐, 그의 옷장에는 옷이 많았다.“돌아와서 갈아입을 옷 몇 벌 좀 챙기려고. 또 실험실에 돌아가야 하거든.”그는 콧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고, 얼굴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기에, 딱 봐도 보통 감기가 아니었다.“잠깐만요.”정은은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가, 보온병을 들고 나왔다.“이건 내가 어제 끓인 생강차예요. 뜨거울 때 마셔요.”재석은 생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정은은 이를 보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안에 감기약도 있어요. 다 평소에 먹을 수 있는 건데, 케이스에 복용 방식이 적혀 있어요.”재석은 줄곧 건강해서 거의 감기에 걸린 적이 없었다. 정은의 말을 듣고, 그는 멈칫하더니 보온병을 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러나 곧이어 정은이 이렇게 말했다.“결국 선배님도 나 때문에 감기에 걸렸잖아요.”그래서 재석은 거절하려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보니, 지각하기 직전이었다.“고마워. 생강차와 감기약, 꼭 챙겨 먹을게.”재석이 성큼성큼 떠나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은은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논문에 아직 보충해야 할 부분이 있었기에, 그녀는 요 며칠 줄곧 각 사이트에서 자료를 찾아보았다.그리고 오미선이 준 책과 논문은 모두 독일어 원판이라, 정은의 독일어는 일상적인 교류만 가능했기에, 전문 어휘를 만나면 시간을 들여 찾아봐야 했다.논문에 빠진 정은은 사고를 하며 손으로 끊임없이 기록을 했다. 바로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생각이 끊기자, 그녀는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펜을 내려놓고 전화를 연결했다.“네.”[어제 일은 정말 미안해. 지금 할 말이 좀 있는데,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될까?]심현빈이었다.정은은 침묵을 지켰다. 마침 그녀도 말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시간과 장소를 정한 다음, 정은은 통화를 끊었다.이때, 도겸의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은은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고, 계속 논문에
현빈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정은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정은 누나?!”전선우는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 이곳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뜻밖에도 현빈과 정은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카페는 커플들이 데이트할 때 자주 가는 곳이지.’서우는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정말 그 두 사람이었다!사실 현빈이 친구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단 것을 안 이후, 선우는 비록 의외라 생각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전에 현빈 형은 이것보다 더 심한 일도 했으니까.’그러나 정은이 현빈을 받아들이다니, 선우는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다.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자,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정은은 계속 이야기하려는 마음을 거두었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선우와 인사를 한 다음, 그녀는 먼저 떠났다.정은이 떠나자, 선우는 그녀의 자리에 앉아서 맞은편의 현빈을 바라보았다.“형, 지금 진심이에요?”“뭐가?” 현빈은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정은 누나는 형을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아.”현빈은 멈칫하더니 커피를 내려놓았다.“이유가 뭐지?”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자, 선우는 약간 위축되었다.“그냥... 첫째, 형은 정은 누나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잖아요. 둘째, 도겸 형과 절친이었으니 두 사람은 절대로 불가능해요.”‘현빈 형은 바람둥이일 뿐. 정은 누나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참.” 선우는 눈알을 굴리더니, 갑자기 현빈에게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었다.“이제 솔직하게 말해봐요. 언제부터 정은 누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거예요?”현빈은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며, 담담하게 커피를 홀짝였다.“아주 오래전부터. 아마도 도겸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야! 형 짐승이네요!” 선우는 이를 악물며, 현빈이 정말 뻔뻔스럽다고 느꼈다.“형 지금 친구의 여자를 넘보고 있는 거잖아요!”현빈은 차갑게
그러나 선우는 여전히 마음속으로 현빈을 원망했다. ‘친구인 두 사람이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것도 모자라, 현빈 형이 먼저 속마음을 폭로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현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날 설득할 필요 없어. 그래도 시도를 해봐야 결과를 알지 않겠어?”...정은은 커피숍에서 나온 뒤, 백화점에 가서 새 목도리와 캐시미어 코트를 샀다. 그리고 또 마트에 가서 장을 봤는데, 밖으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겨울이라 날은 일찍 어두워졌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갔다.아파트에 도착할 때,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어두운 골목에서 뛰쳐나왔다.정은은 근처에서 떠돌아다니는 노숙자인 줄 알고, 등골이 오싹해지더니 소름이 쫙 돋았다.그러나 그 사람이 도겸인 것을 보자, 정은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도겸이 몸에 술 냄새가 나는 채로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도겸은 이미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 추워서 코까지 빨개졌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정은의 손을 잡았다.“정은아...”“이거 놔.” 정은은 불편해서 바로 발버둥 쳤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이 남자와의 스킨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놓지 않을 거야! 제발 내 곁으로 돌아와, 응?”정은은 도겸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정말 몰랐다.“당신 취했어.”“정은아, 난 진심이야...”그는 오늘 두 번째로 그녀에게 ‘진심’을 언급한 남자였다.“전에 네가 물어봤었잖아, 돌아오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나 지금 이미 서연희와 헤어지자고 했어. 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너와 심현빈 사이의 일은 없었던 걸로 할게.”“어제 내가 너무 말을 심하게 했어. 이렇게 사과할게. 날 때리든 욕하든 상관없어...”밤이 점점 깊어지자, 행인들도 많이 적어졌다. 일기예보는 오늘이 온도가 가장 낮은 날이며, 보온조치를 잘 취하라고 했다.정은은 방금 전까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이때 등골이 시렸고,
그날 밤, 정은은 불편하다는 핑계로 혼자 객실에서 잤다. 그녀는 이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날까 봐 두려웠다.그날 밤은 정말 어둡고 추웠으며 정은은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이튿날, 정은은 개인 병원에 가서 전면적인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그 후로 그녀는 도겸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지만, 그는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하긴, 밖에서 배불리 먹었으니, 또 어떻게 집안의 주방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난 당신이 정말 더럽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에게서 좀 떨어져.”도겸은 숨이 막히더니, 마치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졸은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심지어 정은의 눈조차 마주하지 못했다.‘다 알고 있었구나...’하늘에서 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찬바람은 거세게 몰아치며, 살을 에는 듯이 차가웠다.도겸은 빗속에 서 있으며, 몸이 비에 젖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마치 망부석처럼, 정은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서연희는 빗속으로 뛰어나왔다. 도겸의 하얘진 입술과 온도가 없는 차가운 몸을 보며,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도겸 오빠, 이제 그만 돌아가요. 왜 자신의 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거죠? 이러다 정말 쓰러질지도 몰라요!”그녀는 그의 곁에 서서, 마찬가지로 비를 맞고 있었다. 잠시 후, 연희는 추워서 벌벌 떨며 말했다.“오빠는 여기에 서 있는데, 소정은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그 여자는 오빠를 전혀 신경 쓰지 않잖아요! 오직 저만이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전 오빠와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제가 오빠의 곁에 남아있게 해주세요, 네?”도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눈시울을 붉히며 연희를 밀어냈다.“저리 가!”“그래요, 오빠가 남으시려는 이상, 저도 오빠와 함께 비를 맞을게요!” 연희는 모질게 마음을 먹으며, 더 이상 도겸을 설득하지 않았다.도겸은 자신의 상상에 빠져, 연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또 무
‘정은이 마침내 돌아왔어!’‘내가 가장 좋아하는 섹시한 잠옷을 입고, 날 유혹하고 있다고! 이번에 난 절대로 손을 놓지 않을 거야!’도겸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정은’을 자신의 몸 아래에 눌렀다. 그리고 다급하게 키스를 하며, 잠긴 목소리로 계속 외쳤다.“정은아... 정은아, 이제 드디어 날 용서한 거야?”...뜨겁고 격렬한 운동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났고, 도겸은 만족을 하며 바로 곯아떨어졌다.이튿날 아침, 도겸은 깨어나자마자 아픈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마치 바늘이 쿡쿡 찌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팔꿈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와 닿더니, 그는 흠칫 놀랐다.고개를 돌리자, 연희가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로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여자의 목에는 붉은 키스 자국이 남아 있었고, 새빨간 두 볼은 무척 요염했는데, 짜릿한 밤을 보낸 게 분명했다.도겸이 머리를 흔들자, 어젯밤의 격렬하고 짜릿한 화면들이 조금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괴로워하며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어떻게 서연희와 잘 수가 있지?’연희는 진작에 깨어났는데, 도겸이 깨어난 후에야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이어 볼에 홍조가 나타났다.그녀는 수줍게 입술을 깨문 뒤, 뒤에서 도겸을 껴안았다.“오빠, 어젯밤에 저를 너무 아프게 하셨단 말이에요. 저는 줄곧 싫다고 말했는데, 오빠는 제 말을 듣지 않...”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겸은 눈살을 찌푸렸다.“어젯밤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그 야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는 정은의 집 아래에서,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것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 집에 돌아왔는지, 또 어떻게 연희와 침대에 누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연희는 도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찔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어제 오빠는 비를 맞고 쓰러지셨어요. 저는 택시를 잡아서 오빠를 집에 데려다 드렸고요. 그리고 한
깊은 밤, 도겸이 그동안 쌓인 업무를 다 처리하자마자, 전선우의 전화가 걸려왔다.[도겸 형, 오랜만에 나와서 한잔할래요?]“좋아.”도겸은 서재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연희가 현관에 서서 신발을 갈아신은 것을 보았다.눈을 마주치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네가 여긴 왜 왔어?”“도겸 오빠, 나가시려고요?”“응.”그녀는 난처함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그, 그럼 제가 괜히 방해가 된 거네요?”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수, 수업 끝나서 온 거지, 수업을 빼먹은 게 아니에요... 어젯밤에 오빠가 저를 너무 거칠게 대하셔서, 아래에 염증이 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몸이 불편했거든요...”“그런데 혼자 약국에 가서 약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아서요. 사람들이 저를 비웃을까 봐 두렵거든요. 마침 별장의 약 상자에 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연고가 있는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연희는 행여나 도겸이 귀찮아 할까 봐 더듬더듬 설명했다.“지, 지금 바로 학교로 돌아갈게요!”도겸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자, 연희는 이를 악물며 별장을 떠나려 했다.겨우 몇 걸음 걷자, 뒤에서 도겸의 목소리가 울렸다.“이리 와.”그녀는 웃음을 지었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다시 억울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오빠...”도겸은 약 상자를 꺼내서 연약 몇 개를 찾았다. 설명서를 본 후,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이 약들 모두 그곳에 바를 수가 없어...”연희는 울먹였다.“그럼 어떡하죠? 약국에 가서 살까요? 그런데 제,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그녀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도겸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가자, 같이 병원에 가줄게.”“아니에요... 저는 괜히 오빠의 계획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도겸은 차 열쇠를 챙겼다.“별일 아니야. 선우가 술 마시자고 불렀을 뿐이니까. 좀 늦게 가도 괜찮아.”“그럼... 이따가 병원에서 나오면, 오빠랑 같이 가도 될까요?”“그래.”...병원
인기척을 듣고, 선우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가 도겸을 맞이했다.그러나 도겸이 연희의 손을 잡고 들어올 줄이야!‘이게 뭐야!’선우는 숨을 들이마셨다.도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선우야.”“도, 도겸 형 왔네요. 빨리 앉아요...”선우는 얼른 인사하면서, 술을 따르며 또 과일을 건네주었다.후에 연희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선우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형,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 사람과 헤어졌잖아요? 그런데 왜 이곳에 데려온 거예요?”술 두 잔을 마시자, 도겸은 눈빛이 좀 흔들리기 시작했다.“연희는 아직 어리니까, 나도 너무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 아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선우는 닭살이 돋았다.‘아 뭐야, 대학생인데 뭐가 어리다는 거지? 도겸 형 정말 멍청이구나!’“그럼, 정은 누나는요? 이제 화해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정말 그렇게 되면 현빈은 아마 미친 듯이 기뻐할 것이다.정은을 언급하자, 도겸은 가슴이 아팠다.“누가 그래?”“그럼 지금...”선우는 연희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양다리를 걸치려고요?”“뭐가 그리 급해. 연희를 잘 처리하면, 난 최선을 다해서라도 정은에게 잘해줄 거야.”선우는 입술을 움직였다.‘시간은 형을 기다리지 않을 텐데. 그 여자의 일을 다 처리하면, 정은 누나는 아마 다른 사람의 여자친구로 될지도 모르잖아.’그러나 도겸이 자신감 넘치는 것을 보고, 선우는 입을 다물고 그의 미움을 사지 않기로 했다.거의 새벽이 되어서야 파티가 끝났다.선우는 이미 반쯤 취했지만, 억지로 일어나서 계산을 한 뒤, 클럽 직원의 부축을 받고 차에 올랐다.대리운전은 이미 안에 있었고, 선우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동건은 얼마 마시지 않아서 상태가 나름 괜찮았다. 다만 담배를 좀 많이 피웠기에, 냄새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근처의 5성급 호텔에서 스위트룸을 하나 예약했는데, 지금 바로 가면 된다.단둘이 남은 도겸과 연희는 길가에 서서 대리운전을 기다렸다.연희는 남
“지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좀 열어줘, 우리 얘기 좀 하자.”“소정은! 내 말 못 들었어?”...“그래, 소정은, 너 정말 잘 났구나! 문 안 열어준다 이거지? 안 열면 내가 못 들어갈 것 같아?”처음에 얌전하게 말하다가, 지금은 화가 치밀어 오른 도겸은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나고 있었다.그가 마침내 포기하고 떠나려 할 때, 갑자기 차가운 두 눈을 마주쳤다.도겸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좁은 복도 안은 불빛이 어두컴컴했다. 지금 조재석은 계단에 서 있는데, 금방 올라온 것 같았다.이 시간, 여기에 나타나다니.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재석이 뭘 하러 왔는지 알 수 있었다.‘심현빈이 소란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지금 또 조재석이란 사람이 나타나다니.’ 도겸은 화가 난 동시에 마침내 정은의 곁에 있는 남자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진정을 되찾은 후, 그는 가장 먼저 사람 시켜 재석을 조사하라고 했다.‘소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었군. 어쩐지 심현빈까지 가만히 있더라니.’“정은이 찾으러 온 거야?”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지?”“나와 정은이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그래서?”도겸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만약 눈치가 있다면, 정은과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미안, 난 눈치가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라서.”“소정은은 내 여자야! 지금은 단지 화가 나서 그런 것일 뿐, 앞으로도 줄곧 내 여자라고.”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정은 씨는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그런데 누구의 여자라니, 그건 말이 안 되지. 정은 씨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어.”도겸은 냉소를 지었다.“조 교수님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군. 그 말이 뭐였더라? 뜻깊은 사랑을 했기에 그 사람을 더 미워하는 거라고. 정은이 나와 이렇게 심하게 다툰 것도, 다 날 너무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거든.”“믿지 못하겠으면 가서 문 두드려
남자는 이 상황을 보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동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민아, 이분은...?”분명히 수민이 직접 소개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동건도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궁금했다.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이미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눈빛 속에 심지어 작은 기대가 어렴풋이 비쳤다.“아, 이분은 고씨 가문의 큰아들, 고동건이야.” 수민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대답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두 남자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그런데, 이분은 수민과 무슨 사이지?” 남자가 다시 물었다.이번에 동건은 수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말했다. “남자친구예요.”말을 마치며 동건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난 수민의 남자친구라고요.”동료는 수민을 바라보며, 그녀가 고개를 젓길 바라는 눈길을 보냈다.이에 동건은 화가 나더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고, 수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강한 소유욕을 과시했다.수민도 뭐라 하지 않았고, 부드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남자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수민은 즉시 똑바로 서더니, 자신의 어깨에 놓은 동건의 손을 털어냈다. “이제 됐어. 그 사람 이미 떠났잖아.”동건은 손을 호호 불며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야! 좀 살살 해!”수민은 대꾸했다. “싫어.”“너 정말... 전화해도 안 내려오고, 전화도 안 받고. 대단하네.”“누가 그렇게 전화를 했는지 궁금했는데, 너였구나. 배불리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야?”동건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제시간에 내려왔으면 내가 전화를 그렇게 했겠어?”“제시간? 내가 너랑 약속했던가?” 수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동건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네가 오늘 야근 안 한다고 했잖아!”“그렇게 말했지만, 데리러 오라고 한 적은 없어.”수민은 야근을 하지 않아도,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있었고, 동건이 데리러 올 필요
그리고 도겸은, 상대방의 이런 모습을 보며 현빈이 묵인했다고 느꼈다.화가 난 그는 핸들을 내리치더니 고요한 밤에 갑자기 경적 소리가 울렸다.위층에서 직접 욕을 하기 시작했다.“한밤중에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말을 마치자 물 한 대야가 쏟아졌다.마침 도겸의 차 꼭대기에 뿌렸다.현빈은 이미 쿨하게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났다.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모든 것, 앞서 현빈이 정은을 위층으로 데려다 준 장면까지, 베란다에 서 있던 재석은 똑똑히 보았다.찬바람이 쌩쌩 불며 눈까지 그의 얼굴에 떨어졌지만, 재석은 마치 추위를 모르는 듯 30분 넘게 이렇게 서 있었다.그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는데, 그저 가슴이 심하게 답답하고 숨조차 잘 쉬지 못했다.머릿속은 많은 생각을 했지만 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지난번 정은을 떠보며, 그녀가 연애 대신 학업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대답을 받은 재석은 자신이 마음속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다시 친구로 되어 이렇게 정은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성장을 목격하는 것도 좋았다.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재석은 자신의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그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정은의 곁에 남자라곤 오직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고.그녀의 눈빛은 영원히 자신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다고.정은의 미소도, 그녀의 기쁨도 오직 자신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만약 가능하다면, 재석은 심지어 자신이 정은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이런 미친 생각들은 정은이 현빈의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이 나란히 올라오는 것을 보았을 때 들끓기 시작했다.재석은 쓴웃음을 지었고, 자신도 이렇게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다.더 슬픈 것은 감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하나뿐이라는 것이다....같은 밤,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 동건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수민의 전화를
눈에 거슬리는 동시에 도겸은 두 눈이 붉어졌고, 현빈의 뒷모습을 보며, 펑하고 핸들을 내리쳤다.도겸은 내려가서 현빈의 멱살을 잡고 그를 호되게 한 대 때리고 싶었다.하지만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손을 대는 것일까?단념하지 않는 전 남자친구? 아니면, 예전의 절친?그는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결국 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물건을 올려준 뒤, 현빈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은 거실에서 물을 따르며 건네주었다.“고마워요, 오빠, 물 좀 마시고 가요.”현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더니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정은은 물건을 간단히 정리하고 내일 다시 차츰차츰 치우려 했다.바로 이때,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은은 낮에 베란다 문을 닫지 않았는데, 이때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화분이 아직 베란다에 있었기에, 만약 바람에 날려 가서 사람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큰일이었다.그래서 정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화분을 실내로 옮겼다.그중 하나가 비교적 무거워서 그녀는 몇 번 시도했지만 조금도 들지 못했다.이때 두 손이 나타나더니, 화분을 받으며 듬직하게 들어올렸다.현빈이 말했다.“내가 할게.”정은은 한숨을 돌렸다.“고마워요, 오빠.”손을 거둬들일 때, 부주의로 현빈의 손을 부딪혔지만, 정은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남자의 눈빛은 조여졌고, 그다지 많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현빈이 그 잘 자란 코코넛을 쉽게 실내로 옮기는 것을 보고, 정은은 또 손을 들어 다른 몇 개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말했다.“이거, 그리고 이거도 다 옮겨야 하는데...”현빈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내가 짐꾼처럼 보여?”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하지만 내 오빠잖아요. 전에 어려움이 있으면 오빠를 찾으라고 했고요.”이번에 현빈이 말문이 막혔다.‘오빠, 오빠, 그놈의 오빠!’그는 자신이 정말 정신이 나갔다고 느꼈다. 어떤 호칭이든 정은의 입에서 나오면 이유 없
“도겸이는 자기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알아! 싸다 싸! 그러게 누가 그때 저런 말을 하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도겸이 형이 언제 단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은 누나는 이미 그 과거에서 벗어났는데.”“흥.” 동건은 냉소를 지었다.“도겸이가 단념을 한다고? 두고 봐. 정은 씨가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저 자식 평생 이러고 있을 거야.”“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그 가사가 뭐였더라? ‘얻을 수 없다면 영원히 소란을 피울 거야.’ 남자는 말이야, 정말 천박한 존재지. 됐어, 너희들 천천히 놀아, 나도 갈게.”“아니... 이제 막 왔는데 왜 가는 거예요?”동건은 헤헤 웃었다.“수민이가 갑자기 야근을 안 해도 된다고 했거든. 수민이 데리러 갈 거야.”선우의 눈빛은 더욱 이상해졌다.“그런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동건은 변명했다.“네가 뭘 알아? 나는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남자친구가 퇴근한 여자친구를 데리러 가는 것은 정상 아니야? 이것도 할 수 없다면, 양가 부모님들은 또 어떻게 우리 둘이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어?”“아, 늦었으니 먼저 갈에! 안녕!” 말하면서 동건은 성큼성큼 떠났다.선우의 잘생긴 얼굴에는 엄청난 의혹이 나타났다.‘왜 다들 요즘 귀신에 홀린 것 같지... 이상해! 너무 이상해!’...겨울의 비는 마치 바늘을 숨긴 듯 했고, 쌀쌀한 바람은 뼈를 에는 듯 했다.8시도 안 되었지만,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도겸은 클럽을 떠난 후, 차를 몰고 정은의 거처로 곧장 달려갔다.도중에 그는 질투와 불쾌감을 느끼며 심지어 정은에게 어떻게 따져야 할지를 생각했다.‘심현빈이랑 안 친하다며?’‘둘이 불가능하다며?’‘그런데 왜 그 자식과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난 거야?’‘두 사람 언제 사귄 거냐고?’‘심현빈이 대체 뭐가 좋은 거야?!’‘대체 왜?!’그러나 막상 도착하자, 도겸은 위층으로 올라갈 용기조차 없었다.그저 차 안에 멍하니 앉아서 비가 유리창에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았고, 지구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전하고 있는데!’선우는 또 다른 한쪽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도겸은 한 잔 한 잔 이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고 공도 치지 않았으며 여자가 다가오면 더욱 멀리 피했다.다른 사람들은 혀를 찼다.“우리 도겸이 형 지금 정말 침울해진 것 같아.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프네!”“꺼져, 오글거려 죽겠네! 말 좀 똑바로 할 수 없어? 우리 도겸이는 사랑을 위해 이렇게 된 것이니, 이건 일편단심이라고!”“그래도 여자는 다 똑같지 않아? 돈만 있으면 어떤 여자를 살 수 없겠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선우는 그들이 갈수록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을 듣고 즉시 호통을 쳤다.“이제 그만 좀 해. 그딴 말 좀 적게 하고. 너희들은 뭐 이런 상황이 없을 줄 알아!”그들 중에는 심지어 ‘소정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선우는 가슴이 떨렸다.그것은 절대로 도겸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는 이름이었고, 도겸은 듣자마자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 가서 소란을 피우면 정말 수습하기 어려웠다.동건은 연속 몇 판 지자, 카드를 던졌다.“재미없네. 너 무슨 속임수 썼지? 어떻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거야?”“형은 운이 나쁜 데다가 머리도 좋지 않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야! 전선우, 너 많이 컸다?”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칭찬으로 들을게요.”동건은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 놀아.”그가 가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사람들도 자연히 흩어졌다.선우는 카드놀이를 놀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자 술을 마실 흥미도 없었다. 무대 아래는 분위기가 막 뜨거워졌기에, 춤을 춰도 재미가 없어 아예 소파 구석에 틀어박혀 핸드폰을 보았다.그렇게 선우는 현빈이 올린 사진을 보았다.“모임? 누구랑 가족 모임에 참가한 거야?” 선우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는 사진을 클릭하며 맛있는 것이 참 많다고 감탄하려 하다가, 갑자기 사
현빈은 미소가 굳어졌다.계속 사진을 뒤지니, 다음 사진이 바로 그가 방금 찍은 음식 사진이었다.그는 마음이 움직여 SNS를 클릭해 이 사진을 올렸다.[가족 모임.]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고, 일부 사람들은 댓글을 달며 소란을 피웠다.[집잔치야?][현빈이 형 또 새 애인 생겼어!][모처럼 SNS에 사진을 올렸는데, 드디어 금융 뉴스가 아니네.][우리 형님 몰래 큰일을 해냈네요][이야, 전에 같이 솔로로 지내기로 했는데, 어떻게 여자 친구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간 거야?][쯧쯧,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이제 결혼하려는 거야?]현빈은 사진을 클릭하며 쳐다보다가 갑자기 멈칫했다.그는 저도 모르게 사진을 확대한 뒤,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서 정은의 반쪽 얼굴을 발견했다.비록 턱과 입술밖에 안 보이지만, 현빈의 친구들은 저마다 홈즈로 변신하여 이 실마리를 발견했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하려 했고, 생각하다 또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아무튼 모두들 농담이었으니, 만약 특별히 해석한다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았다.이때, 현빈은 갑자기 문자 한 통을 받았다.대학 동창인데 지난번에 그 샤브샤브 가게 사장님이었다.[축하한다, 친구야.][다음에 샤브샤브 먹으러 오면 무료야!]‘됐어, 답장하기 귀찮아.’...밤의 장막이 내리자, 등불이 켜졌다.전선우는 모이자며 동건과 도겸을 불렀다.동건은 처음에 퇴근한 수민을 데리러 가야 한다며 거절했다.그러나 5분 후에 동건은 다시 전화를 했다.[지금 시간 생겼어. 곧 도착할 거야.]선우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아, 수민이가 임시로 야근을 해야 한다고 했거든.]그리고 잠시 후 다시 덧붙였다.[오늘 밤을 새워야 한데.]선우는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수민, 수민, 그놈의 수민...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은? 진짜 여친도 아닌데.’“형 진짜 조수민에게 반한 거 아니지?”맞은편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곧 버럭 했다.[꺼져! 내가 그
현빈이 말했다.“이렇게 푸짐한 밥상에, 정은이는 또 이원이 처음이니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요?”이 제안에 두 노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아직 손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이춘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확실히 기념할 만한 일이지.”“현빈아, 너 좀 잘 찍어. 나중에 프린트해서 앨범에 넣을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저 말고 이모님에게 찍어달라고 해야죠.”“허허, 나 좀 봐, 너도 들어와야 한단 걸 깜빡했네...”현빈은 가정부를 불었다.정은은 얌전하게 봉수진의 곁에 서서 웃으며 그녀의 팔을 껴안았고, 옆에는 현빈이 서 있었으며, 가장 왼쪽에는 이춘재였다.“준비되셨나요?” 가정부가 물었다.봉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찰칵.셔터를 누르면서 이 순간이 고정되었다.두 노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정은은 방긋 웃고 있었으며, 현빈도 담담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가정부는 잘 못 찍었을까 봐 몇 장 더 찍었다.두 노인은 사진을 보고 나서 아주 만족스러웠다.가정부는 핸드폰을 현빈한테 돌려줬다.봉수진은 사진을 꼭 프린트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안심하세요. 저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봉수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현빈은 사진을 보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모님의 월급을 좀 올려도 될 것 같은데.’그리고 핸드폰으로 탁자 위의 음식을 몇 장 찍어서야 앉아서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후, 정은은 봉수진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다.이춘재는 수십 년 된 이웃과 산책을 하러 나갔다.멀리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래, 찾았어! L시에서, 이미 결혼을 했더군...”“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아, 소설을 쓰는 작가야. 미스터리 소설... 참, 꼭 을 읽어봐. 내 딸이 쓴 거야... 들어봤다고? 그럼 잘 됐네! 꼭 봐야 돼!”“오늘 온 그 아이는 내 손녀인데 서비대학교의 대학원생이야. 학술 때문에 바빠서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았어...”“하하... 그래, 하늘이
현빈은 정은에게 문을 열라고 표시했다.정은은 손을 들어 손잡이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그는 줄곧 현빈의 품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은 여전히 정은의 상상을 초월했다.청아한 디퓨저 냄새가 전해져 왔는데, 정은이 좋아하는 박하향으로 신선하고 쾌적했다.방 배치는 전체적으로 연한 색깔이었다.벽은 베이지색이었고, 나무로 된 바닥에는 부드러운 긴 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밟으면 편하고 가뿐했다.아마도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벽쪽에 특별히 책장을 몇 개 더 추가했다. 책장 앞의 창문 옆에 의자 하나까지 있었다.부드러운 햇빛이 큰 창문을 비추며 책장에 떨어졌고, 생각만 해도 편안했다.뿐만 아니라 방에는 작은 탁자, 정교하고 나른한 작은 소파, 심지어 작은 다탁까지 있었다.커튼을 열면 바깥은 독립된 베란다였다. 멀리 바라보면 하늘, 산, 숲, 풀밭이 있어 마음이 탁 트이고 기분이 상쾌했다.“마음에 들어?”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엄청 마음에 들어요.”말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지금의 모든 것이 너무 환상적이네요.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처럼, 신데렐라는 공주가 되어 그녀만의 성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정은은 말투가 가벼웠고, 표정이 평온했다.그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지만, 결코 빠져들지 않았다.현빈은 고개를 돌려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신데렐라가 아니야.”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가 계속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신데렐라는 영원히 연약하잖아. 왕자가 자신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고. 넌 아니야. 넌 자신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고, 주동적으로 어려움을 파헤치며 자신을 구할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너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겨울 왕국의 여왕 엘사야. 용감하고 지혜롭지.”정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오빠가 날 이렇게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는데요? 눈에 콩깍지라도 씐 거예요?”남자는 웃음을
“좋아요. 방금 들어왔을 때 힐끗 보았을 뿐, 아직 자세히 보지 못했거든요.”봉수진은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불편했기에, 정은은 원래 그녀를 모시고 정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잘됐다 생각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하늘은 흐렸고, 햇빛은 구름 뒤에 숨어 있다가 가끔 가느다란 빛을 비추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겨울의 J시에서 푸른 식물을 보기 어렵고, 대개 앙상한 가지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원의 화원은 예외였다.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만발했고, 겨울에 가장 선명한 색채를 이루고 있었다. 봉수진은 특별한 취미가 없어 그저 꽃과 식물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원래 이런 일에도 흥미가 없었지만, 이춘재가 봉수진이 점차 침울해진 모습을 보고는 주의를 좀 돌리라고 권한 것이었다. 처음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봉수진은 장갑을 끼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작은 화원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정은도 꽃가지를 다듬고 새 흙으로 덮어주는 것을 도왔다. 봉수진은 힐끗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에 감탄했다. 식물의 습성을 잘 알고 있어, 어떤 식물은 물을 많이 주고, 어떤 식물은 적게 주어야 하는지, 어떤 식물은 아예 물을 주면 안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딱 봐도 평소에 화초를 다듬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우리 정은이는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화초 가꾸는 솜씨도 대단하구나.” 봉수진은 웃으며 말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화초를 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할머니께서 너무 잘 가꾸셔서 저는 그저 거들었을 뿐이에요.”정은은 발밑에 자란 말리꽃을 바라보았다. 작은 떨기로 자라난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더 무성하게 자랄 것이었다.봉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듣기 좋은 말로 나를 달래는구나.”“아니에요, 진짜예요. 이 장미도 정말 예쁘잖아요. 그런데 모양이 조금 이상한데, 마치 배추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