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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0화

Author: 십일
“이번 대회를 말하자면, 요즘 학생들이 예전과 달라진 건지, 아니면 전체적인 교육 환경이 변해버린 건지 모르겠어.”

“제출된 과제 중 50%는 허황된 내용이고, 나머지 40%는 앞뒤가 안 맞아 말도 안 되더군. 겨우 10%도 안 되는 과제만이 그나마 볼 만했지.”

장학경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씁쓸하게 말했다.

“정말 세대가 갈수록 퇴보하는 걸까? 전의 세 번의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은 하나같이 Science나 네이처 잡지에 논문을 발표한 유력한 인재들이었는데, 지금은... 하아.”

더 이상의 말은 없었고, 그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올해는 그래도 뜻밖에 괜찮은 과제가 하나 있긴 했어. 바로 너희 학교의 학생들이 낸 과제였는데, 제목이... <유전자 검사와 생물학>, 조장 이름은 아마도... 서지예라고 한 것 같은데?”

“그 과제는 최우수상을 받았지. 연구 주제 선정부터 실험 방식, 그리고 최종 완성도까지 기대 이상이었어. 심사위원들도 만장일치로 학술지 Science에 투고해도 무난히 통과할 수준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으니까!”

“심사 끝난 후, 몇몇 교수님들이 서지예 학생에 대해 알아보더군. 들리는 말로는 대학원 입학하자마자 이미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고 하던데, 너희 생명과학대학에서도 꽤 유명한 천재 소녀라더라. 저 나이에 대단하긴 하지...”

정은은 장학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지예와 <유전자 검사와 생물학>이라는 것을 언급한 순간부터, 정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왜냐하면 그 과제는 분명 그들 팀의 연구 과제였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지예의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일까?

머릿속은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지만, 짧은 충격이 지나가자마자, 정은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

진일은 금방 밖에서 돌아왔다. 피곤에 찌든 허리와 어깨는 뻐근했고, 이마 한가운데엔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과로와 지나친 집중으로 인한 피로감이었다.

올해 겨울방학, 송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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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운은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사실 그는 자신이 지예 그들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다.그들도 재운을 배척하는 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티를 냈다.재운은 어설프게나마 그들과 어울리려 애를 썼고, 결국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이런 환경에서 뭉칠 수 있다면, 혼자 남는 일은 없었다.이익을 쫓고 손해를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재운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재운은 곧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볼 뿐,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호의를 베푼 적이 없다는 것을.그제야 재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세상에는 아무리 애써도 호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결코 녹아들 수 없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그래서 그는 더는 애쓰지 않기로 했다.그냥 혼자 유유히 지내기로.경진대회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누구의 팀에 끼는 것보다, 자신이 어떤 과제를 할지, 누구와 함께할지 먼저 고민했다.어차피 지예가 자신을 초대할 리 없으니, 재운은 처음부터 단념하고 있었다.기대하지 않으면, 배척도 고립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런데 뜻밖이었다.지예가 먼저 찾아와 손을 내밀 줄이야.재운은 당황해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보고, 지예는 그가 얼떨결에 기뻐하는 줄 착각하더니,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재운은 이틀을 고민했다.결국 용기를 내어 거절하기로 했다.하지만 거절하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이 이미 팀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뭐야, 그 표정은? 널 받아준 건 네 능력을 인정해서야. 싫다고 거절하지 마.”진호도 거들었다.“그러니까! 원래 넌 안 끼워주려고 했는데, 같은 반이라고 봐줘서 넣어준 거야. 감사히 생각하라고!”거절할 기회조차 없이, 재운은 지예의 팀원이 되어버렸다.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어차피 이렇게 된 일이라면, 제대로 하는 게 맞다고. 그래서 재운은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논문 자료를 모아 오라는 말에 이틀 밤을 꼬박 새웠고, 간신히 자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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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운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아니요... 못 받았어요...”진일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당황하지 말고 기숙사에서 기다려. 내가 직접 확인하고 올게.”말을 마치고는 곧장 기숙사를 나와 송지혜의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일은 멈칫했다.송지혜가 말했다.“이번에 꽤 잘했어. 첫 도전인데도 최우수상을 받아왔잖아.”이 성과는 학과에 명예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긍지를 안겨주었다.몇 달간 쌓였던 울분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송지혜는 만족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지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사실, 이 모든 게 다 소정은 덕분이에요. 이모, 그 애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Science나 네이처 학술지 같은 곳에 논문을 쉽게 낼 수 있고, 이런 대학생 경진대회에서도 이렇게 완성도 높은 연구 과제를 내놓다니...”그녀의 말투에는 질투가 묻어 있었다.지예는 비록 정은의 연구 결과를 가로채긴 했지만, 상대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송지혜는 차를 홀짝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그 정도가 대단한 거야? 흥, 소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도 할 수 있어. 그 애는 운이 좋아서 앞서 나간 것뿐이야. 언젠가 너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지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소정은을 따라잡는다고? 허,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한때 ‘천재 소녀'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살았던 지예는 자신이 정말 천재라고 착각했었다.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았다.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고, 자신은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었다.예전의 거만함과 자만은 결국 우물 속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어리석음에 불과했다.소정은은 정말 강했고, 지예는 한없이 부족했다.하지만 어쨌든 이번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어떤 방법을 썼든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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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은 무려 10페이지에 달했고,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고발자는 다름 아닌 송지혜의 제자인 진일이었다. 그는 송지혜가 논문을 조작하고, 사적으로 대학원생을 선발하며, 뇌물을 받고 외부 기업과 결탁한 것은 물론, 조카인 지예를 위해 대필 논문까지 작성하게 했다고 폭로했다.게시글 말미에는 PDF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를 열어보면 총 30여 페이지가 넘는 송지혜의 비리와 부정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증거 자료까지 포함된 이 문서는 단순한 의혹을 넘어선 확실한 폭로였다.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학생들을 착취하고 각종 선물을 요구한 정황.][제자들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며 강압적으로 일을 시킨 사례.]가장 충격적인 것은, 송지혜가 진일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고, 이를 지예의 성과로 둔갑시킨 것이었다.이 모든 내용은 명확한 증거와 함께 공개되었고, 서비대학교의 사이트는 순식간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세상에, 30 페이지가 넘다니. 정말 충격이야.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데?][요약해 줄 사람 없나? 너무 길어서 다 읽긴 힘든데.][이건 명백한 교수님의 권력 남용이애. 제자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걸 보면, 얼마나 참다가 폭로한 것이겠어.][헉, 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짓을 해왔다고? 그럼 특혜며 대학원 진학까지 다 부정입학 아니야?][천재 소녀? 웃기지 마. 부정행위로 쌓아 올린 가짜 성공이겠지!][그런데 교수님의 제자가 직접 폭로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보통은 익명으로라도 조심스럽게 올리는데, 실명으로 터뜨린 걸 보면 진짜 궁지까지 몰렸던 모양이야.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면, 이 학생도 정말 악인이 다름없어!][읽다가 소름 돋았어. 매일같이 교수한테 갈굼당하는 나로선 너무 공감돼서 눈물 날 지경이야... 난 이런 용기가 없지만, 그래도 남진일을 응원하겠어!][와, 진일 선배 정말 너무 비참한대?][진짜 최악이다. 연구 성과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조카 대신 논문을 써주게 했다고? 이 정도면 범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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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난한 선택이요?”민지는 이해하지 못했다.“고발은 어렵지 않을 텐데. 증거만 충분하면 여론을 이용해 직접 송지혜 교수님을 무너뜨릴 수 있잖아요. 이게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는 것보다 훨씬 빠를 텐데.”여론이 커지면 학교도 모른 척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효율만 따지면 고발이 가장 빠른 방법이지. 하지만 그 게시물을 다시 한번 자세히 봐봐.”“봤어. 몇 번이나 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진일 선배는 실명으로 고발했어.”“그래서?”민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서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민지는 지금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학생이 교수님을 고발하면 두 가지 결과뿐이야. 첫째, 성공해서 교수님이 처벌을 받는다. 둘째, 실패해서 교수님은 여전히 멀쩡하다. 하지만 어떤 결과든 학생의 입장에 있어 이후의 상황은 지옥과 다름없어.”민지는 눈살을 찡그리며 물었다.“실패하면 교수님한테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해. 그런데 왜 성공해도 마찬가지란 거야?”서준은 조용히 되물었다.“그런 성공했다고 치자. 그다음은?”“당연히 그 교수님이 해임되거나, 감옥에 가겠지!”“맞아. 그럼 교수님이 해임되면, 그 학생은?”서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특히 진일 선배처럼 마지막 1년을 앞둔 사람이라면? 곧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지도교수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민지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했다.교수가 해임되면 진일은 제때 졸업할 수 없게 된다.설령 학교 측에서 지도교수를 바꿀 기회를 준다고 해도, 몇 년 동안 연구한 분야가 바뀌면 주제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그렇게 되면 지난 3년 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졸업을 하지 못 한 대학원생이 학부생과 뭐가 다를까?아니, 어쩌면 학부생보다도 더 못할 수도 있었다.동기들 중 학부생들은 나이도 더 어리고, 앞으로 기회도 많았다.한참 동안 침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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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0화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9화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8화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7화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6화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5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4화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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