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켁...” 정은은 놀라서 기침을 했다.밥을 잘 먹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다니? 정은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우린 사귀는 사이가 아니지만, 심 대표님에게 있어 이번 식사는 확실히 공짜와 다름없죠. 왜냐하면...”정은은 웃으며 사장을 바라보았다.“제가 사는 거니까요.”사장은 멍하니 있다가 이어서 의미심장하게 현빈을 바라보았다.‘이 녀석도 당하는 날이 있군! 잘됐어!’다 먹고 정은은 주동적으로 계산하러 갔다.사장은 현빈을 잡아당겨 목소리를 낮추었다.“야, 너도 열심히 노력 좀 해. 얼른 그 친구의 마음을 얻어야지. 다음에 올 때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 정말 널 비웃을 거야!”현빈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그러고 싶지.” “이야, 이 세상에 드디어 너를 혼내 줄 여자가 나타났구나, 희한하다.”“야...”“그래! 이 친구가 도와줄게.”정은은 이미 계산대에 가서 결제를 하려 했다.결제한 후, 그녀는 뒤에 있는 현빈을 바라보았다.“갈까요?”“에이, 잠시만요!” 사장이 먼저 입을 열더니 웃으며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직원에게 물건을 건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네?” 직원은 어리둥절해졌다.“티켓.”“아!”사장은 받아서 현빈에게 주었다.“자, 내 여동생이 피아노 연주회 티켓 두 장을 구했는데, 음치인 내가 또 어떻게 그걸 들으러 가겠어? 자리에 앉으면 정말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거잖아! 하하... 오늘 마침 만났으니 너한테 줄게!”현빈은 참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 건데, 정말 나한테 줄 거야?”“그럼, 가져가!”“그래, 그럼 나도 고맙게 받을게.”두 사람은 사장의 배웅을 받고 샤브샤브 가게를 떠났다.현빈은 손에 든 티켓을 흔들며 정은에게 물었다.“맥심 피아노 연주회, 가고 싶어?”“맥심이요? 진짜예요?” 정은은 의아함을 참지 못했다.“연주회 티켓은 정말 구하기 어려운데.”“자, 직접 확인해 봐...”정은이 머리를 숙였는데 정말 맥심의 연주회였다.“내 친구가 호의로 우
어떤 곡인지, 어떻게 변주를 했는지 현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현장의 어두운 조명은 가장 좋은 은폐가 되어, 현빈이 거리낌 없이 부드러움과 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다.그의 시선은 통제되지 않고 정은의 하얀 손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그 손을 꽉 쥐고 영원히 놓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잠시 후, 현빈은 스스로를 억제하며 이성을 되찾았다.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이 밤만 지나면... 더 이상 급해할 필요 없어, 정은이를 놀라게 해선 안 돼...’두 시간, 어떤 사람에게는 괴로움과 시련이겠지만, 정은에게는 엄청난 시청각 향연이었다.그렇기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정은은 입맛을 다셨다.“방금 그 ‘크로아티아 랩소디’ 들었어요? 록 요소를 추가한 거 있죠! 예상치 못한 낭만과 생동감이 넘쳤고, 특히 중간의 변주는 더욱 놀라웠어요! 심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해요?”현빈은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응? 그래, 듣기에는 확실히 괜찮았지.”정은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남자의 이상한 반응을 놓쳤다.홀을 나서자, 가로등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땅에 비추는 빛과 그림자가 쏟아져 내리며, 그때서야 정은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깨달았다.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이다.정은은 논문을 아직 끝내지 못했고, 내일 실험실에 가져갈 점심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먼저 가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빈이 갑자기 말했다.“나랑 어디 좀 가줄래?”“네?”“안 돼?” 남자의 검은 눈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이며 놀라울 정도로 밝았다.정은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승낙했다.하지만...“9시 전에 집에 가야 돼요.”“좋아.” 현빈은 그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정은은 자신의 차에 올라 현빈의 차를 따라 근교로 향했다.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두 사람은 산 꼭대기에 도달했다.“정은아, 봐봐...”두 사람은 바람을 맞으며 차를 멈추자, 정은은 고개를 숙이고 패딩으로 자신을 꼭 싸맸다. 이때 현빈이 갑자기 입을 열
“맞아, 자연계에는 천연의 푸른 장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실현할 수 없는 희망이나 완성할 수 없는 소원을 의미하지.”현빈은 정은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손에 있는 이 꽃다발을 더 자세히 봐봐...”“...어? 천연이네요?! 염료로 물들인 게 아니에요?!” 정은은 놀라서 고개를 들어 현빈의 표정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남자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피어오르자, 정은은 자신이 알아맞혔다는 것을 알았다.정은은 충격을 받았다.“어떻게 이럴 수가?!”“에서 최근 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제1저자는 T대 의약대학 국제박사 안카나할리 남가바야.”“먼저 이중표현 입자를 구축한 다음, 이 입자는 파란색 합성에 참여하는 두 개의 세균 유전자를 포함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입자는 농균으로 전환되고, 그 다음에...”여기까지 말하자 현빈은 잠시 멈추더니 마치 무언가에 걸린 것 같았다.필사적으로 회상해도 소용없었다.“풉...” 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논문을 외우고 있는 거예요?”현빈은 보기 드물게 어색해졌다.“에헴! 미안, 이건 내 전공이 아니어서, 억지로 외워도 기억할 수가 없네...”정은은 그를 대신해 남은 부분을 보충했다.“그리고 농균이 흰 장미의 꽃잎에 주사되는 거 맞죠? 이변이 없는 한, 농균은 식물 호르몬인 아세틸라일락톤의 유도로 장미꽃잎 세포 게놈에 유전자를 전이 시켜 장미 세포가 짙은 남색의 효소를 합성하게 되는 거죠.”“맞아, 맞아! 바로 이 효소를 합성하는 거야! 너도 이 논문을 본 적이 있니?”“아니요. 심 대표님이 말한 것을 들은 뒤, 이 결론을 충분히 유도할 수 있죠.”“대단해.”현빈은 혀를 내둘렀다.“이 꽃은... 엄청 비싸겠죠?”“너한테 주는 거야, 아무리 비싸도 너보다 중요하지 않으니까.”“고마워요.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요.”“정은아.” 현빈은 갑자기 정색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남자의 애틋한 두 눈을 마주하자, 정은은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니 바로 도망가고 싶었다.정은이 사고난 그날 저녁, 그녀를 집에 바래다준 다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재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현빈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는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정은을 위해 현빈은 6년을 기다렸고, 그녀가 도겸과 헤어지고 또 1년이 걸려서야 두 사람은 평범한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영원히 친구일 수는 없어.’그날 밤, 현빈은 문득 계속 기다리면 전철을 밟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게 더 나았다.현빈은 오늘 고백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그는 더 이상 묵묵히 기다리고 조용히 뒤에서 정은을 지키고 싶지 않았다. 현빈은 명분을 가지고 정은의 곁에 서서 당당하게 그녀를 품에 안고 제멋대로 키스하고 싶었다.현빈은 정은을 원했다.이 점은 더없이 명확했다.불꽃놀이가 다 타버리자, 모든 것이 고요해졌고, 공기 중에는 현란하게 막을 내린 후에 남은 화약 냄새가 있었다.현빈은 정은을 보며 눈빛은 그윽했다.“정은아, 나 너...”갑작스러운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면서 극도로 애틋한 분위기는 이렇게 끊어졌다.공기가 순식간에 응결되었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화면에 ‘할머니'라는 세 글자가 번쩍이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봉수진은 정말 중요한 일이 없으면 먼저 그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지난번에 이렇게 늦게 현빈에게 전화를 한 이유도 자신의 호흡이 원활하지 않아 이미 땅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때 봉수진은 언제든지 기절할 수 있었다.현빈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미안. 전화 좀 받을게.”정은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극도의 긴장이 갑자기 풀렸다.“네, 중요한 일 같은데, 얼른 전화 받아요.”‘전화를 좀 오래 받았으면 좋겠어... 방금 자신이 하지 못한 말과 하지 못한
‘L시?’현빈은 멈칫했지만, 별다른 생각하지는 않았다.그는 정은을 바라보며 서둘러 말했다. “할아버지, 지금 저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요. 이 일 마치고 바로 전화드릴게요. 할머니와 함께 좀 진정하세요. 의사가 말했잖아요, 너무 흥분해선 안 된다고요.”[그래, 너도 얼른 일봐, 서두르지 말고. 어차피 사람은 이미 찾았으니까. 말하자면 너도 아는 사람이야.]“제가 아는 분이라고요?”[그래, 네 이모의 이름이 이미숙이잖아. 바로 그 『7일담』의 작가라고! 지난번에 서점에 있을 때, 우리 미숙이가 바로 위층에서 사인회를 열었어. 우리는 아래층에 있었고. 다 내 탓이야. 네 할머니가 올라가 보고 싶어 했는데, 내가 말렸지. 그렇게 놓쳤다니...][그리고 정은이도 말이야. 어쩐지 그 아이를 보자마자 친근감을 느꼈더라니, 알고 보니 우리의 손녀였어... 이것도 다 운명이었던 거야. 우리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사람을 드디어 만나게 했어...][현빈아? 현빈아? 아직 듣고 있니?]이춘재는 계속 말을 했지만, 현빈은 그저 윙윙거리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머릿속도 이미 새하예졌다.이춘재가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오직 ‘네 이모가 바로 『7일담』의 작가’라는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정은이의 어머니가 내 실종된 지 오래된 이모라고?’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순식간에 멍해졌다.이때, 정은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 전화는 이미 끊겼지만, 현빈은 굳은 채로 전화를 받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표정은 망연자실했고, 마치 길을 잃은 아이 같았다.“심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정은은 현빈이 무슨 전화를 받았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남자의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졌다.현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황스러움, 의혹, 씁쓸함... 여러 감정이 그의 눈빛에 뒤섞여 있었다.정은은 이런 현빈을 본 적이 없었다.“무슨 일이에요?” 정은은 다시 물으며 걱정에 잠긴 눈빛으로 현빈을
한 입 깨물고 무심코 고개를 들자, 정은은 아파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재석은 줄곧 밤에 달리기를 꾸준히 해왔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자주 그가 운동하러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하지만 오늘은... 운동복을 입지 않았다니?외투를 단정하게 입고, 표정도 약간 진지해 보였다. 마치 여기서 정은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선배님.” 정은은 웃으며 다가갔다.재석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품에 안긴 푸른 장미를 보자 순간 멈칫했다.“놀러 나갔어?”“놀러 간 건 아니에요. 먼저 수리한 차를 찾았고, 또 피아노 연주회를 들으러 갔어요.”“이 꽃... 꽤 특별하네.”정은은 눈빛이 반짝였다. “선배님, 이것 좀 봐요. 뭔가 특별하지 않아요?”말하면서 정은은 꽃을 건네더니 재석이 자세히 볼 수 있게 했다.재석은 고개를 숙여 잠시 꽃을 살펴보더니, 손으로 만져보며 말했다. “천연 재배된 건가?”생물학계의 거물답게, 한마디로 핵심을 짚어냈다. “네!”“어디서 났어?”재석이 물었다.정은은 멈칫하더니 사실대로 말했다.“심 대표님이 준 거예요.”재석은 눈빛이 무거워졌다.“왜 갑자기 꽃을 준 거지?”“오늘이 내 양력 생일이니까요...”“그래서 생일을 같이 보낸 거야?” 재석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계속해서 물었다.“같이 피아노 연주회까지 들으러 갔어?”“네.”남자는 얇은 입술을 오므렸고, 몸 옆에 늘어뜨린 두 손은 서서히 주먹을 쥐며 조여들었다.정은은 까놓은 고구마를 건네주었다. 부드러운 속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배님, 먹을래요?”“응, 고마워.” 재석은 고구마를 받아들였다.“꽃은 내가 들게요. 들기 불편할 텐데...” 말하는 사이에 정은은 고구마를 다 먹어치웠고, 꽃을 받아 재석이 고구마를 먹게 했다.“괜찮아, 내가 들게. 고구마 껍질은 네가 다 까줬으니까.”말을 마치고, 재석은 한 손에 꽃을, 다른 한 손에는 고구마를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위층으
재석은 원래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오히려 잠시 자신의 마음을 숨긴 후, 그는 현실을 직면하기로 결심했다.마음속의 목소리가 그에게 말했다.‘넌 정은이를 좋아해.'‘넌 이미 정은이에게 빠졌어!'처음은 절제했지만 후에 직시하기로 마음먹었고, 지금은 철저히 당당해졌다. 재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감정은 결코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억누르려 했던 욕망과 망상은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자라날 뿐이었다.한 번 또 한 번의 꿈은 마치 한 대 또 한 대의 따귀처럼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부끄러웠지만 동시에 그토록 아름다웠다.꿈속의 정은은 선녀 같기도, 요정 같기도 했다. 너무나 쉽게 재석의 마음을 빼앗아 갔으니까.그리고 재석은 저항할 힘조차 없었고, 빠져드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재석은 평소에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정은에게 마음을 고백할지 말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망설였다.정은은 지금 실패한 연애에서 겨우 벗어났고, 모든 주의력을 학문 연구에 쏟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연애를 하고 싶은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만약 정은이 원하지 않는다면...’그리고 만약 재석이 입을 열었다면,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겠는가?전혀 없었던 일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럼 유일한 결과는 바로 만나면 어색해져 점차 멀어지는 것이었다.이것도 재석이 질질 끌면서 그 한걸음조차 내디디지 못한 이유였다.그러나 그날 밤 말을 하다가 이웃 아주머니에게 방해를 받은 후, 재석은 갑자기 자신이 좀 더 용기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정은이가 원한다면? 만약 정은이도 나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그래서 재석은 오늘 밤 일찍 실험실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래층에서 정은을 기다렸다.그러나 정은뿐만 아니라, 현빈이 선물한 푸른 장미까지 볼 줄이야.정은은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두 사람이 7층까지 올라가 각자의 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뭐가 달라지겠는가?감정은 장난이 아니었고 게임도 아니었으니, 그것을 선택하면 전심전력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했다.그러나 정은은 아직 완성해야 할 과제가 그렇게 많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끝내지 못했다.학문의 드넓은 바다와 높은 정상, 그녀는 이제 막 그 깊은 세계로 첫발을 내디디며, 과학 연구의 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그렇게 많은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 사랑에 빠질 여유가 어딨겠는가?재석은 정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하지만 이것은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만약 쉽게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정은이 아니었을 것이다.“알았어.” 재석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는 점점 눈가로 번져갔다.정은도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군고구마 달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아.”“그럼 다음에 또 사줄게요.”“그래.”두 사람은 집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정은은 가장 먼저 그 푸른 장미의 포장을 뜯은 뒤, 두 개의 꽃병에 나누어 꽂았다.푸른 장미는 집에 있던 흰색 안개꽃과 함께 집안을 눈부시게 만들었다.그녀는 꽃병 하나를 거실 탁자 위에 놓았다.그리고 다른 꽃병을 들고 재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선배님, 이거 받아요. 거실 탁자 위에 놓으면 예쁠 거예요.”재석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답게 핀 푸른 장미와 깨끗한 안개꽃은 마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처럼 순수하고 눈부셨다.한순간,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정은이 장미를 반으로 나누어 자신에게 준 것에 놀랐고, 현빈의 치밀한 계획이 그녀에게는 평범한 일로 여겨졌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선배님, 왜 불을 안 켠 거예요? 집이 너무 어둡잖아요.” 정은의 재석의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실 전체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커튼도 빈틈없이 쳐져 있었다.재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침실로 들어갔거든. 그래서 거실의 불을 켜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