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뭐가 달라지겠는가?감정은 장난이 아니었고 게임도 아니었으니, 그것을 선택하면 전심전력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했다.그러나 정은은 아직 완성해야 할 과제가 그렇게 많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끝내지 못했다.학문의 드넓은 바다와 높은 정상, 그녀는 이제 막 그 깊은 세계로 첫발을 내디디며, 과학 연구의 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그렇게 많은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 사랑에 빠질 여유가 어딨겠는가?재석은 정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하지만 이것은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만약 쉽게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정은이 아니었을 것이다.“알았어.” 재석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는 점점 눈가로 번져갔다.정은도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군고구마 달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아.”“그럼 다음에 또 사줄게요.”“그래.”두 사람은 집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정은은 가장 먼저 그 푸른 장미의 포장을 뜯은 뒤, 두 개의 꽃병에 나누어 꽂았다.푸른 장미는 집에 있던 흰색 안개꽃과 함께 집안을 눈부시게 만들었다.그녀는 꽃병 하나를 거실 탁자 위에 놓았다.그리고 다른 꽃병을 들고 재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선배님, 이거 받아요. 거실 탁자 위에 놓으면 예쁠 거예요.”재석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답게 핀 푸른 장미와 깨끗한 안개꽃은 마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처럼 순수하고 눈부셨다.한순간,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정은이 장미를 반으로 나누어 자신에게 준 것에 놀랐고, 현빈의 치밀한 계획이 그녀에게는 평범한 일로 여겨졌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선배님, 왜 불을 안 켠 거예요? 집이 너무 어둡잖아요.” 정은의 재석의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실 전체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커튼도 빈틈없이 쳐져 있었다.재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침실로 들어갔거든. 그래서 거실의 불을 켜지
이튿날 아침, 정은은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자, 그녀는 눈을 비볐는데, 겨우 7시도 안 된 것을 발견했다. 정은은 하품을 하며 눈을 떴지만 머리는 여전히 멍했다.그녀는 핸드폰을 받았고, 목소리는 금방 깨어나서 약간 잠겼다.“아빠, 왜 이렇게 일찍 전화하신 거예요?”소진헌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소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정은아,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오셨어.]정은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요? 그게 누구신데요?”[네 엄마 친부모님. 네 진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오셨어.]정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지금 표 끊어서 돌아갈게.”오후 12시, 비행기가 착륙했다.정은은 공항을 나와 얼른 택시를 잡았다.집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은은 별장 밖에 차 두 대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한 대는 벤틀리, 다른 한 대는 특수 제작한 롤스로이스였고, 번호판도 고급스러운 번호였다. 둘 다 일반인이 쉽게 탈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이웃들이 지나가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고급차는 흔하지만, 벤틀리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었다.하지만 그 롤스로이스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차였다.특히 특수 번호판까지 달린 차라면, 재벌 가문이거나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일 것이다.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원에서 땅을 파고 있는 소진헌이 보였다.그는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삽을 들고 진흙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고, 발 옆에는 빈 화분이 몇 개 놓여 있었다.화초를 가꾸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냥 손에 무언가를 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정은은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서 말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아마도 그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일 것이다.정은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진헌 앞으로 걸어가
정은은 서둘러 소진헌을 달랬다. “엄마가 친부모님을 찾은 건 좋은 일이에요.”이미숙은 과거가 없는 사람이었다.예전에는 뿌리를 찾으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희망을 접었다.때로는 자신을 소설 속 인물에 대입하기도 했다. 비참한 어린 시절, 부모님이 원수에게 암살당한 이야기들...그러나 후에 이미숙은 더 이상 이런 일로 고민하지 않았고,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은은 어머니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소진헌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왔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이미숙을 위한 기쁨.하지만 소진헌은 당장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엄마가 어떤 분인지, 두 분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하셨으면서도 모르시겠어요? 겉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속은 매우 단호하신 분이잖아요.”“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실 거예요. 아빠, 그동안 함께한 정을 생각해 보세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으세요? 엄마가 저와 아빠를 버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떠나실 것 같아요?”소진헌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그래. 우리 사이의 감정이 어떻게 쉽게 사라질 수 있겠어? 게다가 우리에게 정은이라는 딸까지 있잖아!’이렇게 생각하자, 소진헌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일리가 있네. 나도 잠시 생각이 꼬였어...”정은이 말했다. “가요, 우리 같이 들어가요.”“그래.”그렇게 부녀는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소파에 앉아 있는 현빈을 보자, 정은은 완전히 멍해졌다.남자는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평소의 느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눈빛은 진지했고, 표정 역시 엄숙했다.그와 함께 앉아 있는 두 노인을 보자, 정은은 다시 한번 놀랐다.현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였다.예전에 J시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매우 친절한 두 사람이었다.그때 그녀는 자유분방한 현빈이 이렇게 자상한 어르신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이렇게 다
봉수진은 지금 현빈의 조언을 듣고 눈 치료와 몸조리를 꾸준히 해온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그녀의 시력은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그래서 봉수진은 외손녀의 얼굴이 딸과 얼마나 닮았는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이미숙은 정은과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이란 사실에 놀랐다.그래서 정은은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이춘재는 감개무량했다. “네 엄마와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널 찾아다녔어. 국내외를 다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두 번이나 놓쳤다니... 다행히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어.”여기까지 말하자, 봉수진은 정은과 현빈이 더 일찍 만났단 걸 떠올렸다. 이것은 정말 하늘이 정한 인연이었다.“정은은, 말하자면 현빈은 네 사촌 오빠야.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현빈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표정도 어두웠다.정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반응하며 웃으며 말했다. “오빠.”현빈은 주먹을 꽉 쥐었고,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봉수진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현빈이 조금만 더 눈치가 빠르고 신경을 썼더라면, 우리는 더 일찍 만났을 텐데.”이춘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현빈과 정은이가 이런 인연을 맺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돼.”“그래요. 이걸로 충분하죠... 정말.”살아생전에 이미숙을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다행이었으니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했다.정은은 컵을 들고 미소를 지었고, 현빈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소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그의 침묵은 이상할 정도로 깊었다.이미숙은 두 아이의 관계에 대해 놀랐지만, 그보다는 지난 몇 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궁금했다.그녀는 이미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거의 다 떠올렸다.지난번 유보영과의 다툼으로 이마를 다친 이후, 기억들이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을 직접 만나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이미숙의 기억은 마치 퍼즐이 완성된 듯 채워졌
“심 대표님!” 정은은 현빈의 말을 끊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똑똑히 생각하고 나서 다시 말해요.”“너도 알잖아?” 남자는 정은을 자신의 품에 가두며 양손으로 벽을 짚었다.“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뭐가 달라지는데요? 지금 우리는 그런 관계로 발전할 수가 없어요...”“무슨 관계?”현빈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말해봐, 무슨 관계냐고?”“우린 사촌 오빠와 사촌 동생 사이잖아요.”“너 아직 모르지?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친딸이 아니셔. 즉, 우리는 혈연관계가 없단 말이야!”정은은 잠시 멍해졌다. “혈연이 있든 없든,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요.”“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또 이 말이네! 항상 그 말밖에 없어!’현빈은 정은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왜 나를 좋아하면 안 돼? 넌 강도겸과 같은 쓰레기까지 사랑했었잖아.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정은은...”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 제발.”냉정함, 이성, 현빈은 그런 것들 다 필요 없었다.그는 어젯밤 다 하지 못한 말을 마저 하며, 정은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그러나...“그만해요.” 정은은 고개를 돌렸고, 눈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현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잠시 후,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더 듣지 않는 거야? 왜... 나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려 하지 않는 거냐고? 너도 두려운 거지? 우리 사이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봐.”“아니요.” 정은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냉정했다.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왜냐하면 지금부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는 남매일 뿐이고, 남매로만 지낼 거예요.”말을 마치고, 정은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현빈은 그대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한참 지나서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 남매?”
현빈은 술집을 찾아갔고, 앉자마자 독한 술 몇 병을 따서 한 잔 한 잔 마셨다.그 사이 어떤 여자가 와서 말을 걸었지만 예외 없이 모두 그에게 쫓겨났다.현빈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술을 마시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야 호텔로 돌아왔다.도중에 현빈은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눈을 감으면 정은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는 자신이 왜 항상 한 걸음 늦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전에 현빈은 도겸에게 졌고, 이제 또 이 빌어먹을 사촌 오빠라는 신분 때문에 졌다.‘하나님은 여태껏 날 돌본 적이 없어!’택시에서 내린 현빈은 비틀거리며 호텔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를 탈 때, 향기로운 냄새가 콧구멍으로 파고들었고, 이어서 부드러운 몸이 달라붙었다. 여인은 일부러 가슴으로 현빈의 팔을 문지르며 대담하게 집적거렸다.그리고 목소리는 더욱 달콤하고 애교가 넘쳤다.“오빠, 왜 혼자서 술을 마신 거예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가 같이 방으로 들어가줄게요...”현빈은 알코올 때문에 평소보다 반응이 좀 느렸지만, 결국 손을 들어 여자를 뿌리쳤다. “꺼져! 날 건드리지 마!”현빈의 혐오스러운 반응은 마치 무슨 몸에 더러운 거라도 묻은 것 같았다.여자는 화가 나서 입을 삐죽거리며 퉤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감히 날 밀어내는 거야?! 술주정뱅이가 누구한테 차였는지, 감히 날 뿌리쳐?!”그녀의 말 한마디가 마침 현빈의 정곡을 찔렀다.현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턱을 살짝 들었는데, 눈빛의 한기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여자는 움츠러들었다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현빈은 눈을 드리우며 갑자기 정은에 전화를 걸고 싶었다.그러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그는 머뭇거리며 끝내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마침 이때 두 호텔 직원이 지나가다가 현빈이 정말 심하게 취한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와서 물었다.현빈은 룸 카드를 꺼내 자신을 방으로 돌려보내라고 분부했다.한 직원이 그를 부축했고, 다른 한 사람은 룸 카드를 들고 방문을 열
이미윤은 자료에 있는 주소를 따라 이미숙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그녀는 철제 대문 밖에 서서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별장을 살펴보았다.동네 밖에서 보기엔 그저 그런 것 같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괜찮았다.이미숙이 이런 작은 동네에 와서도 별장에 살고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하...’이미윤은 차갑게 웃었다.‘이미숙은 어릴 때부터 운이 좋았지.’심지어 절에 가면 스님이 두 손을 모아 이미숙은 부귀영화를 누릴 운명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그런데 이미윤은 늘 옆에 있어도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이미숙이 있는 곳이라면 이미윤은 무시당했다.정원 너머로 이미윤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문을 연 사람은 소진헌이었다.그는 어르신들의 입맛을 알아보았고,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은 후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반죽을 하던 중,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자 화려한 옷차림에 오만한 표정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누굴 찾으세요?”이미숙은 소진헌을 훑어보았다.키도 크고, 생김새도 괜찮지만 스타일이 너무 촌스러워 그저 평범한 중년 남자 같았다.품위가 없고, 매력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소진헌 씨?” 이미윤이 물었다.“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이미윤은 은근히 놀랐다.‘이미숙이 이런 남자와 결혼했다니.’소진헌은 예의상으로 대답했을 뿐, 이미윤이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그리고 침묵을 지킬 때, 뒤에서 이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거실에서, 이미윤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이미숙은 뜨거운 물 한 잔을 건넸고, 웃으면서 말했다.“커피랑 차 싫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입맛 여전히 그대로겠지?”오기 전에 이미윤은 이미숙이 어떻게 변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수십 년의 떠돌이 생활로, 아마 이미숙은 삶에 지쳐 예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혼자 고독하게 지내거나, 평범한 사람과 결혼해 뚱뚱하고 못생기게 됐을지도. 돈이 없으면 원래 아름답던 얼굴도
”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좋은 일이야.”이춘재가 감찬했다.소진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이미숙은 그제야 이미윤에게 소진헌을 소개한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이 사람은 내 남편이야.”“안녕하세요.” 이미윤은 살짝 웃었다. “제부는 정말 잘생기셨고, 재능이 넘쳐나는 것 같네요.”지금 이미윤은 더 이상 까다로운 눈빛으로 그를 보지 않았다.소진헌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예의를 차렸지만, 은근히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숙은 그동안 소진헌과 오랫동안 함께 했기에, 이 말을 듣자마자 이상함을 감지했다.그녀는 소진헌을 바라보았다.소진헌은 오히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이미숙애개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고 표시했다.‘왠지 모르겠지만, 처형이 좀 이상한데... 그리고 불편해’.그래서 소진헌과 너무 다정하게 굴지 않았다.“아빠, 만두를 빚으실 거예요 말 거예요? 어?”정은은 주방에서 나오자 거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그리고 눈빛은 이미윤에게 떨어졌다.이미숙은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은아, 이리 와.”정은은 고분고분 걸어갔다.“언니, 내 딸 정은이야. 정은아, 이분은 네 이모야, 얼른 인사해.”눈이 마주치자, 정은은 이미윤을 잠시 훑어보더니 영리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모.”이미윤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이미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일었다.‘그날 벤츠 매장에서 재석과 함께 있었던 그 여자아이가 아니야?’이미윤은 당시 사진을 찍어 강서원에게 보내기도 했다.강서원에게 재석이 연애를 했냐고 물었지만, 강서원은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얼버무렸다.‘지금 그 태도를 생각해보면, 아들의 여자친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정은을 바라보는 이미윤의 눈빛은 갑자기 의미심장해졌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애정이 넘쳐나는 말투로 말했다.“미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