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07화

Author: 십일
뚱보도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도 이미 참을 만큼 참았어! 너처럼 말을 듣지 않는 여자는 아주 죽도록 얻어맞아야 돼. 순순히 1억만 내놓으면 우리도 바로 떠날게!”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리는 척을 했다.

“아이고, 왜 사서 고생을 하려는 거야? 진작에 내 충고를 들었다면, 내 아들도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텐데! 그까짓 돈 때문에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단지 돈을 원할 뿐이야. 넌 이미 벤츠를 샀으니, 1억은 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겠지? 안심해, 우리도 말한 대로 할 거야. 네가 돈을 주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널 보내줄 거야!”

정은은 상대방이 이렇게 날뛸 줄 몰랐다.

이젠 연기조차 하지 않다니. 이건 강도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비록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정은도 목숨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만 원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저한테 500만 원밖에 없어요.”

“500만 원?! 우리가 거지냐?! 너 이 차의 전조등만 해도 500만 원이 넘을 텐데, 여기서 발뺌을 할 거야?!”

“이 여자는 도통 말을 듣지 않네, 그냥 확 때리자!”

말라깽이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정은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그를 막았고, 다음 순간, 말라깽이는 걷어차여 멀리 날아갔다.

현빈은 발을 거두며 비참하게 쓰러진 남자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네가 감히 이 여자를 건드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다친 데 없어?”

정은은 남자가 손을 들 때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엄습하지 않았고, 갑자기 현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익숙한 두 눈과 마주쳤다. 지금 현빈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당, 당신이 여긴 어떻게?!”

정은은 바로 입을 뗐다.

현빈은 그녀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서 되려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 사람들에게 돈 뜯기는 거 지켜보라고?”

“그게 아니라...”

정은은 어색
Locked Chapter
Continue Reading on GoodNovel
Scan code to download App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8화

    정은은 고개를 돌렸다.현빈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영문을 몰랐다.“심 대표님, 내가 또 신세를 진 것 같네요.”현빈은 멍하니 있다가 이어서 미소를 지었다. “난 네가 날 귀찮게 하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정은은 눈을 드리웠다.“그런데 나도 고맙다는 말 외에 심 대표님의 마음을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가치가 있을까요?”정은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현빈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라, 멈칫하더니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그동안 네 태도는 아주 명확했고, 내 태도도 역시 그랬어. 거절하는 건 네 권리겠지만, 계속 널 좋아하는 것도 나의 선택이야. 난 믿어.”정은은 고개를 들었다.현빈은 그녀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필 거라고. 아직 열리지 않은 이유는 시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야.”“만약 시기가 계속 안 찾아오면요?”“그럼 계속 기다려야지.”“실망할 거예요.”정은이 말했다.“난 가진 게 많아서 이 정도는 두렵지도 않아.”현빈은 이렇게 대답했다.정은은 몸을 굽혀 조수석에 앉은 다음,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위의 주름을 다린 다음 현빈에게 돌려주었다.현빈은 뒷좌석에 놓으면 된다고 했고, 시동을 걸어 이곳을 떠났다.도중에 이번 일의 경과를 말할 때, 정은은 저도 모르게 재석을 언급했다.“다행히 선배님이 상향 전조등에 비추어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이런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 줬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난 가장 먼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텐데...”오른쪽은 가드레일이었다. 가드레일 밖에 그 부자 세 사람이 숨었으니, 아무나 튀어나와 그녀의 차 앞에 쓰러진다면 그것은 아주 큰 골칫거리였다.“조 교수가?” 현빈은 단번에 중점을 잡았다.“그 사람이 널 가르쳤어? 어떻게?”정은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요즘 선배님이 코치로 되어줬어요.”현빈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핸들을 꽉 잡더니 무심코 말을 받았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9화

    추운 섣달, 낡은 주택 단지는 저녁 9시가 넘으면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근처의 가로등은 또 켜졌다 꺼졌다 했으니, 재석은 정은이 걱정되어 틈만 나면 시간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가 기다렸다.비록 정은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고정되지 않았지만, 겨우 20분에서 30분 정도 차이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옹근 두 시간이나 늦었다.그리고 현빈의 차에서 내렸다.재석은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밤바람이 불자, 이따금 한기를 안겨왔고, 재석은 정은의 코가 얼어서 빨개진 것을 보았다.“가자, 밖은 너무 추우니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고, 고개를 돌려 현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가로등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고, 걸음걸이까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복도의 음향 제어등은 층층이 켜져 있는데, 은은한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정은이 재석을 언급할 때 엄청 기뻐해하며 그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보고, 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때는 나와 강도겸이 절친이었기에 정은을 놓쳤는데, 지금은 또 정은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을 지켜볼 거야?’일이 자연스럽게 성사되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이 순간, 현빈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이러다가 무슨 이변이 생길지도 몰라.’그는 전에 망설였기에 6년이란 기다림을 바쳤고, 정은도 이제 겨우 도겸과 헤어졌다.‘같은 잘못은 절대로 다시 범하면 안 돼. 그건 바보와 다름없으니까.’몸을 돌리는 순간, 남자의 눈빛은 마치 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확고해졌다....이 날은 소한이었다.사람들은 소한과 대한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섣달 그믐날 전의 마지막 두 번째 절기이기도 했다.그러나 정은에게 있어, 이것은 또 다른 특수한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생일이었다.이른 아침, 가장 먼저 축복을 보낸 사람은 정은의 아버지 소진헌이었다.정은이 아직 자고 있을 때, 그의 영상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0화

    이미숙은 계속 말했다.[정은아, 생일 축하해. 원래 나와 네 아빠는 며칠 전에 J시에 가서 너와 같이 생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임시로 『7일담』 재판을 하기로 한 거야. 심지어 속표지 세 상자나 부쳤고. 정말 떠날 수가 없어서 네 아빠와 상의 끝에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널 보러 가기로 했어.]이미숙도 어쩔 수 없었다.새 책이 대박 나서, 이미 세 번째로 재판되었고, 지금 서재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속표지가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때로는 책이 너무 잘 팔리는 것도 고민이었다.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다정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얼마나 인기 많으신데, 좀 바쁘신 것도 다 정상이잖아요.”자랑스러운 정은의 말투에 이미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참, 넌 몰라, 네 엄마 지금 인기가 정말 장난도 아니야! 얼마 전에 한 독자가 어디에서 네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얻었는지, 전화하면서 자신에게 따로 사인을 해달라고 한 거 있지? 심지어 돈 2천만 원을 주겠다잖아.]이미숙이 전화를 받을 때, 소진헌은 마침 옆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독자의 요구대로 축복의 말을 써주기만 하면 2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니?소진헌은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어?” 정은조차도 좀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그때 네 엄마는 멍해서 반응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네 엄마가 가격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직접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어. 쯧쯧...]지금 생각해도 소진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럼 엄마는 허락하셨어요?”[사인해 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받지 않았어. 그 사람도 J시 사람인 것 같아!]전화를 끊자, 정은은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그녀는 어렵게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커튼을 열었다.어젯밤에 또 눈이 내렸기에 창밖은 온통 새하얬다.이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정은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펑!리본이며 반짝이는 종이가 정은의 머리와 몸에 떨어졌다.정은은 멍해졌다.수민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 앞에 붉은색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화

    알만한 사람들은 소정은이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자신의 생활도, 공간도 없이, 하루 24시간 강도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매번 이별 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재회를 청했다. 누구나 이별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은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도겸이 새로운 연인을 안고 들어올 때, 방안은 오묘한 정적이 5초간 흘렀다. 그러자 정은은 귤을 까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왜 다들 말이 없어? 나를 왜 봐?”“정은아.”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노골적이고도 태연했다.“생일 축하해, 선우야.”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인 선우를 생각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다녀올게.”문을 닫을 때, 정은은 안에서 이미 대화가 시작된 것을 들었다.“형, 정은이 여기 있잖아요. 미리 얘기했는데 왜 여자를 데려왔어요?”“맞아! 도겸아, 이번에는 너무했어.”“신경 쓰지 마.” 도겸은 여자의 허리를 매만지며 담배를 피웠다. 흰 연기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이 마치 세상을 게임처럼 여기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남은 대화는 문이 닫혀서 정은은 듣지 못했다. 정은은 침착하게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을 고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정말 비참하군.”비참한 삶. 정은은 깊이 심호흡하며 결심했지만,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정은은 참을 수 없이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겸은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타액이 두 사람 사이에서 티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소란을 피웠다.“역시 도겸이네! 제대로 놀 줄 알아!”“분위기 끝내주네, 한 번 더!”정은의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이 사람이 자신이 6년간 사랑한 남자라니. 지금, 이 순간 그저 헛웃음만이 났다.“야, 그만해.” 누군가가 작게 경고하며 문 쪽을 가리키자,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정은, 돌아왔네? 이거 다 장난이야, 신경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화

    식탁 쪽.“왜 죽이 없죠?”“보양식 죽 말이죠?”“보양식 죽?”“네, 정은 아가씨가 자주 끓여준, 찹쌀과 표고버섯, 황태, 대추를 함께 끓인 그 죽 말씀하시는 거죠?”“아이고, 그거 준비하려면 표고버섯, 황태랑 대추만이라 해도 전날에 준비를 해놔야 해요.”“그리고 불 조절이 특히 중요해요. 저는 정은 아가씨처럼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불을 볼 수 없어요. 제대로 끓여내지 못해요.”“그럼 고기 소스 좀 가져다줘요.”“그래요. 도련님.”“맛이 이상한데요?” 도겸은 병을 훑어보았다. “포장도 다르네요.”“도련님이 자주 먹던 그건 이미 다 먹어서 이제는 이거밖에 없어요.”“나중에 마트 가서 두 병 사다 놔요.”“못 구해요.”왕순자는 약간 난처하게 웃었다. “그것도 정은 아가씨가 직접 만든 거라서, 저는 못 해요.”쿵! 도겸은 깜짝 놀랐다.“음? 도련님, 식사 안 하세요?”“네.”왕순자는 도겸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지?’...“게으름뱅이! 일어나!”정은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시끄러워, 조금만 더 잘래.”조수민은 화장을 마치고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 “곧 8시야, 너 강도겸한테 아침 안 해줘도 돼?”예전에도 정은은 가끔 외박하곤 했지만, 새벽에는 돌아갔다. 도겸의 속을 위해 보양식 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수민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겸이 다친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배달을 시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정말 사람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습관이었다.수민이 계속해서 부르자 정은은 잠결에 손을 흔들었다. “안 해줘도 돼, 헤어졌어.”“오, 이번에는 며칠 동안 헤어지려고?”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그래, 그럼 더 자. 아침 식사는 탁자 위에 있어. 나는 일하러 간다. 그리고 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준비하지 마.”“됐다. 너 어차피 다시 돌아갈 거지? 그럼 나갈 때 베란다 창문 좀 닫아줘.”정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화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뭔데?”“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4화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속 쓰려! 소정은!”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약상자가 어디에 있죠?”[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좋아, 좋네, 좋아...”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화

    “형, 무슨 일이에요?”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진실 게임 할래요?”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강 대표님.”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회사로 가죠.”“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0화

    이미숙은 계속 말했다.[정은아, 생일 축하해. 원래 나와 네 아빠는 며칠 전에 J시에 가서 너와 같이 생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임시로 『7일담』 재판을 하기로 한 거야. 심지어 속표지 세 상자나 부쳤고. 정말 떠날 수가 없어서 네 아빠와 상의 끝에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널 보러 가기로 했어.]이미숙도 어쩔 수 없었다.새 책이 대박 나서, 이미 세 번째로 재판되었고, 지금 서재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속표지가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때로는 책이 너무 잘 팔리는 것도 고민이었다.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다정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얼마나 인기 많으신데, 좀 바쁘신 것도 다 정상이잖아요.”자랑스러운 정은의 말투에 이미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참, 넌 몰라, 네 엄마 지금 인기가 정말 장난도 아니야! 얼마 전에 한 독자가 어디에서 네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얻었는지, 전화하면서 자신에게 따로 사인을 해달라고 한 거 있지? 심지어 돈 2천만 원을 주겠다잖아.]이미숙이 전화를 받을 때, 소진헌은 마침 옆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독자의 요구대로 축복의 말을 써주기만 하면 2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니?소진헌은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어?” 정은조차도 좀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그때 네 엄마는 멍해서 반응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네 엄마가 가격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직접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어. 쯧쯧...]지금 생각해도 소진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럼 엄마는 허락하셨어요?”[사인해 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받지 않았어. 그 사람도 J시 사람인 것 같아!]전화를 끊자, 정은은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그녀는 어렵게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커튼을 열었다.어젯밤에 또 눈이 내렸기에 창밖은 온통 새하얬다.이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정은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펑!리본이며 반짝이는 종이가 정은의 머리와 몸에 떨어졌다.정은은 멍해졌다.수민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 앞에 붉은색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9화

    추운 섣달, 낡은 주택 단지는 저녁 9시가 넘으면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근처의 가로등은 또 켜졌다 꺼졌다 했으니, 재석은 정은이 걱정되어 틈만 나면 시간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가 기다렸다.비록 정은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고정되지 않았지만, 겨우 20분에서 30분 정도 차이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옹근 두 시간이나 늦었다.그리고 현빈의 차에서 내렸다.재석은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밤바람이 불자, 이따금 한기를 안겨왔고, 재석은 정은의 코가 얼어서 빨개진 것을 보았다.“가자, 밖은 너무 추우니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고, 고개를 돌려 현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가로등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고, 걸음걸이까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복도의 음향 제어등은 층층이 켜져 있는데, 은은한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정은이 재석을 언급할 때 엄청 기뻐해하며 그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보고, 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때는 나와 강도겸이 절친이었기에 정은을 놓쳤는데, 지금은 또 정은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을 지켜볼 거야?’일이 자연스럽게 성사되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이 순간, 현빈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이러다가 무슨 이변이 생길지도 몰라.’그는 전에 망설였기에 6년이란 기다림을 바쳤고, 정은도 이제 겨우 도겸과 헤어졌다.‘같은 잘못은 절대로 다시 범하면 안 돼. 그건 바보와 다름없으니까.’몸을 돌리는 순간, 남자의 눈빛은 마치 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확고해졌다....이 날은 소한이었다.사람들은 소한과 대한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섣달 그믐날 전의 마지막 두 번째 절기이기도 했다.그러나 정은에게 있어, 이것은 또 다른 특수한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생일이었다.이른 아침, 가장 먼저 축복을 보낸 사람은 정은의 아버지 소진헌이었다.정은이 아직 자고 있을 때, 그의 영상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8화

    정은은 고개를 돌렸다.현빈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영문을 몰랐다.“심 대표님, 내가 또 신세를 진 것 같네요.”현빈은 멍하니 있다가 이어서 미소를 지었다. “난 네가 날 귀찮게 하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정은은 눈을 드리웠다.“그런데 나도 고맙다는 말 외에 심 대표님의 마음을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가치가 있을까요?”정은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현빈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라, 멈칫하더니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그동안 네 태도는 아주 명확했고, 내 태도도 역시 그랬어. 거절하는 건 네 권리겠지만, 계속 널 좋아하는 것도 나의 선택이야. 난 믿어.”정은은 고개를 들었다.현빈은 그녀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필 거라고. 아직 열리지 않은 이유는 시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야.”“만약 시기가 계속 안 찾아오면요?”“그럼 계속 기다려야지.”“실망할 거예요.”정은이 말했다.“난 가진 게 많아서 이 정도는 두렵지도 않아.”현빈은 이렇게 대답했다.정은은 몸을 굽혀 조수석에 앉은 다음,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위의 주름을 다린 다음 현빈에게 돌려주었다.현빈은 뒷좌석에 놓으면 된다고 했고, 시동을 걸어 이곳을 떠났다.도중에 이번 일의 경과를 말할 때, 정은은 저도 모르게 재석을 언급했다.“다행히 선배님이 상향 전조등에 비추어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이런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 줬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난 가장 먼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텐데...”오른쪽은 가드레일이었다. 가드레일 밖에 그 부자 세 사람이 숨었으니, 아무나 튀어나와 그녀의 차 앞에 쓰러진다면 그것은 아주 큰 골칫거리였다.“조 교수가?” 현빈은 단번에 중점을 잡았다.“그 사람이 널 가르쳤어? 어떻게?”정은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요즘 선배님이 코치로 되어줬어요.”현빈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핸들을 꽉 잡더니 무심코 말을 받았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7화

    뚱보도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았다.“우리도 이미 참을 만큼 참았어! 너처럼 말을 듣지 않는 여자는 아주 죽도록 얻어맞아야 돼. 순순히 1억만 내놓으면 우리도 바로 떠날게!”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리는 척을 했다.“아이고, 왜 사서 고생을 하려는 거야? 진작에 내 충고를 들었다면, 내 아들도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텐데! 그까짓 돈 때문에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우리는 단지 돈을 원할 뿐이야. 넌 이미 벤츠를 샀으니, 1억은 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겠지? 안심해, 우리도 말한 대로 할 거야. 네가 돈을 주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널 보내줄 거야!”정은은 상대방이 이렇게 날뛸 줄 몰랐다.이젠 연기조차 하지 않다니. 이건 강도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비록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정은도 목숨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천만 원은 불가능했다.그녀는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저한테 500만 원밖에 없어요.”“500만 원?! 우리가 거지냐?! 너 이 차의 전조등만 해도 500만 원이 넘을 텐데, 여기서 발뺌을 할 거야?!”“이 여자는 도통 말을 듣지 않네, 그냥 확 때리자!”말라깽이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정은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그를 막았고, 다음 순간, 말라깽이는 걷어차여 멀리 날아갔다.현빈은 발을 거두며 비참하게 쓰러진 남자를 차갑게 쳐다보았다.“네가 감히 이 여자를 건드려?!”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더니 다급하게 물었다.“다친 데 없어?”정은은 남자가 손을 들 때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엄습하지 않았고, 갑자기 현빈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익숙한 두 눈과 마주쳤다. 지금 현빈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했다.“당, 당신이 여긴 어떻게?!”정은은 바로 입을 뗐다.현빈은 그녀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서 되려 웃었다.“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 사람들에게 돈 뜯기는 거 지켜보라고?”“그게 아니라...” 정은은 어색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6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정은은 바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그들은 사기꾼이었다.말라깽이가 말했다.“들었어, 젊은 아가씨? 너 오늘 큰 사고를 쳤어. 배상하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고.”정은은 미소를 지었다.“그 철상자가 보물이라고요? 내가 바보 같아요?”“허.” 말라깽이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이 철상자는 당연히 보물이 아니지. 안에 든 물건이 바로 우리 가문의 보물이라고. 형, 이 여자가 말을 안 들으니 한번 보여줘.”뚱보는 그 철상자를 열었고, 안에는 조각들이 쌓여 있었다.“봤어? 이 도자기는 우리 류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진 건데, 고려부터 지금까지 이미 십여 대 전해졌어!”“이건 왕실에 있던 도자기야! 역사를 좀 배웠을 거 아니야? 이 도자기가 얼마나 드문지 알아? 지금 아주 경매에 내놓을 수 있는 진품이라고!”노인은 이미 아들의 부축을 받고 담뱃불을 붙이더니 뻑뻑 피우고 있었다.“아가씨, 너도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는 거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 도자기도 확실히 우리 가문의 보물이란 말이야. 온 가족이 그것을 정성껏 보살피고 있는데, 평소에는 더욱 만지지도 못하고 있어.”정은은 냉정하게 되물었다.“그런 소중한 보물인 이상, 왜 한밤중에 도로 한가운데 나타났을까요? 그것도 철상자 안에 있다니?”“오늘 우리가 이사를 했거든. 그래서 집에 있는 물건을 다 옮겼어. 도자기는 깨지기 쉬우니, 부딪힐까 봐 임시로 철상자에 넣은 거고.”“방금 우리가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철상자는 바로 옆에 있었어. 네 차가 갑자기 방향을 꺾는 바람에 이 상자를 길 가운데로 친 거야.”“다행히 우리는 반응이 빨라서 가드레일 밖으로 숨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늘 도자기가 아니라 세 사람을 죽인 살인범으로 됐을 거야!”“제가 친 거라고요? 잘못 본 거 아니에요?” 정은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네 차는 시종 직진을 유지하면서 방향을 틀지 않았는데, 어떻게 도로변의 물건에 부딪힐 수 있겠어요? 이 철상자가 누군가에 의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5화

    이성을 되찾자, 정은은 빠르게 사고하기 시작했다.‘상향 전조등은 갑자기 켜졌고, 그 바람에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았어.’당황한 가운데 정은은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그러다 덜커덩 소리가 날 줄이야.그러나 정은은 자기가 부딪힌 게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고 확신했다.‘그런데 여기에 왜 물건이 있을까?’상향 전조등이 비춘 순간, 정은의 시야는 이미 먼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당시 길 중간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고 확신했다.‘직진을 한 이상, 무언가에 부딪혔을 리가 없는데. 설마... 그 물건이 갑자기 나타난 건가!’다른 가능성을 제쳐 두면, 오직 이 결론밖에 없었다.그러나 정은은 차에 앉아 무려 3분을 기다렸고, 사람이나 차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잘못 생각했나?’2분을 더 기다렸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정은은 차에서 내려와 확인하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차에서 내리기 전에 정은은 핸드폰을 챙겼고, 생각하다가 다시 안에서 접이식 칼을 꺼냈다.아주 작아서 마침 손바닥에 쥘 수 있었다.차에서 내린 후, 정은은 가장 먼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머리 위의 두 가로등이 이미 파손된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빛이 다른 구간보다 이렇게 많이 어둡더라니.’그리고 그제야 몸을 숙여 차 앞을 살펴보았다. 위에 주먹만한 긁힌 자국이 있었다.정은이 부딪힌 물건은 바로 네모난 철상자였다.상자는 녹이 슬어 얼룩덜룩했고, 위에는 용접의 흔적까지 있었는데, 몇 군데의 충돌로 인한 흔적을 은은하게 볼 수 있지만 아마도 처리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오목한 곳은 고친 적이 있어 뚜렷해 보이지 않았다.정은은 영문을 몰랐다.‘한밤중에 길 중간에 철상자가 나타났다고? 마치... 일부러 거기에 놓여 있어 내가 부딪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이 일은 너무나도 심상치 않아 정은은 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그리고 후속 편리하게 보험 수속을 밟으려고 신속하게 핸드폰으로 사고 현장 사진을 찍은 다음 차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이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4화

    서준은 요즘 집에 일이 있어서 실험실에 오지 않았다.5시가 막 지나자, 민지는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정은 언니, 나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그래.” 정은이 고개를 돌리자, 민지가 과자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칼로리가 별로 없었기에 아마도 식욕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조심히 가.”정은은 당부한 다음 다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실험 데이터를 검사했다.민지가 떠난 후, 실험실은 철저히 조용해졌고, 정은은 시간의 흐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다.기기를 끄고 쓰레기를 치운 다음, 정은은 나가는 김에 쓰레기를 버렸다.그리고 차에 올라 능숙하게 시동을 걸며 액셀을 밟았다.차는 여유롭게 도로에 올랐다.중간에 갈림길을 지나자, 정은은 네비게이션을 보더니 오른쪽으로 돌았다.길 옆의 가로수는 이미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았는데, 누르스름한 가로등 아래에서 소리 없이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었다.정은은 천천히 인디케이터를 켜고 가장 오른쪽 차선으로 옮겼고, 안정된 후에야 음악을 켰다.경쾌한 음악소리는 마치 시냇물처럼 가볍게 흐르며 긴장을 풀어주었다.이때 갑자기 현빈의 전화가 걸려왔다.[바빠?]남자의 목소리는 낮았고 은근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다정한 말투에 일상적인 화제를 나누는 듯한 친근함은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혔다.“방금 실험실에서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현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날씨가 좋지 않아서 밤이 되면 눈 내릴 수 있어. 가는 길에 안전에 주의해.]“네.” 정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현빈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네가 주문한 몇 대의 기기가 이미 도착했어. 내일 실험실에 사람 있어? 내가 사람 시켜 보낼게.]현빈이 장악하고 있는 천양 테크놀러지는 많은 실험기구의 구매경로를 틀어쥐고 있는데, 이는 대리와 비슷했다. 실험실에 필요한 수입 기구가 있을 때, 정은은 현빈을 찾아 주문했다.현빈은 심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3화

    침묵하며 집에 돌아온 재석은 정은을 문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방금 그 이상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그래도 입을 열어 설명했다.“아주머니도 나쁜 분이 아니셔. 그냥 수다 떨기를 좋아하셔서 그래.”‘차라리 설명하지 않는 게 더 낫겠네.’정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날 저녁, 정은은 노동일이 말한대로 연고를 붙이며 발에 물을 조금도 묻히지 않았다. 잠자기 전에 또 노동일이 가르친 대로 허벅지의 관건적인 혈자리를 누르며 안마했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연고를 뜯은 후, 정은은 발목을 몇 번 눌렀는데, 뜻밖에도 통증이 정말 사라졌다.그녀는 즉시 뛰쳐나가 옆집 문을 두드렸고, 재석이 나온 순간, 정은은 흥분해하며 말했다.“어르신의 연고가 너무 대단한데요!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부기가 사라졌고, 깡충깡충 뛰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말하면서 재석이 믿지 못할까 봐 정은은 정말 깡충깡충 뛰려고 했다.재석은 한숨을 쉬며 정은의 어깨를 잡았다.“응, 난 믿으니까 증명할 필요 없어. 어르신이 말씀하셨잖아, 한동안 오래 서 있을 수 없다고. 발목에 너무 힘 주지 마.”정은은 응답한 다음, 남자의 웃음을 머금은 눈빛을 마주했다. 방금 유치한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정은은 갑자기 쑥스러워하더니 코끝을 만졌다.재석은 그녀의 유치한 동작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1월 중순,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맞이했다.전교학생들은 7일 동안 시험을 봐야 했는데, 정은과 같은 경우, 매일 시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시험이 없을 때 그녀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드디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됐다.그러나 휴가는 정은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왔기 때문이다.가장 큰 차이점은 방학한 후에 다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은의 일상은 집과 실험실만 드나드는 것으로 바뀌었다.“정은 언니, 기말고사가 끝나면 이틀 정도 쉬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02화

    정은은 멍해졌다.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심지어 거절할 겨를이 없었고, 남자는 이미 신발을 벗겨줬다.그 다음은 양말...정은은 눈을 드리우며 재석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치 중요한 실험을 완성하고 있는 듯 표정이 진지했다.이 순간, 정은은 호흡이 멎더니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녀는 왜 재석이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재석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잘 대해주는 것일까?그러나 지금, 정은은 재석이 자신을 대할 때 확실히 남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재석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성실해도, 낯선 사람에게 이 지경까지 할 수는 없다.신발과 양말을 벗자, 재석은 노동일의 요구에 따라 조심스럽게 정은의 발목을 잡았다.남자의 손바닥은 약간 차가웠기에, 손끝이 정은의 발등에 닿았을 때 피부가 닿는 곳에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가슴이 두근거렸다.정은의 피부는 섬세하고 매끄러워, 재석은 침을 삼키더니 들끓는 감정을 극력 억제했다.정은은 이게 어떤 느낌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간지럽고 뜨거워서, 마치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지나치게 뜨거운 온도가 도대체 재석의 온도인지, 아니면 자신의 온도인지 몰랐다.그녀는 발을 움츠리고 싶었지만, 노동일의 말에 또 억지로 참았다.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 이상해서 한쪽에서 약재를 체크하던 아주머니조차도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오늘은 정말 희한하네. 재석이가 주사를 무서워하지 않다니?”전에 재석이 강서원을 데리고 왔을 때, 침을 보기만 하면 멀리 떨어져 나갔다.보면 볼수록 괴로워, 심지어 쓰러질 수도 있었다.‘그런데 오늘은...’“역시! 여자친구랑 같이 오니 다르긴 다르구나! 하하...”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웃었다.정은은 움직일 수도, 입을 열 수도 없어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어색하게 기침을 하며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노동일은 눈치를 살피다가 두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