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지 적은지는 정은도 몰랐다.재석이 답장을 씹었기 때문이다.만두를 전부 다 찐 후, 정은은 10개를 골라 비닐봉지에 넣은 다음, 재석에게 가져다주려고 했다.그런데 문을 한참이나 두드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정은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선배님, 지금 집에 있어요?]이번에 재석은 아주 빨리 답장을 했다.[실험실에 왔어.][내가 만두를 좀 쪘는데, 선배님에게 10개 줄게요. 저녁에 돌아올 때 가져 갈래요?]재석은 원래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직접 만든 음식을 특별히 자신에게 보내주려고 하는데, 이렇게 차갑게 거절하는 건 좀 그랬다.‘그건 예의가 아니지. 그리고... 내가 찔린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그래.]정은은 핸드폰을 거두며 집으로 돌아갔다.주방을 정리하고 앉자마자, 물을 마시기도 전에 수민의 전화가 걸려왔다.[정은아! 내 만두는, 다 됐어?!]“응, 다 됐어. 오늘 수십 개 만들었으니 네가 먹기엔 충분하다고. 이 게걸스러운 계집애야!”수민은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당장이라도 정은의 집으로 날아가고 싶었다.일주일동안 꼬박 밤을 새면서 오늘 드디어 일을 끝냈던 것이다.그녀는 1초도 회사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네가 더 게걸스럽겠지! 딱 기다려, 곧 도착할 거야.] 수민은 일부러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고,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통화를 마치고 수민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고동건?”남자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표정은 무척 어두워서 마치 누가 빚이라도 진 것 같았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 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동건의 앞으로 걸어갔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짧아지면서, 수민은 동건의 안색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두운 것을 발견했다.“왜? 내가 여기에 나타나서 널 방해라도 한 거야?” 동건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딱 기다려!”수민은 어이가 없었다.“너 뭐 잘못 먹었니?”“내가 뭘 먹어.
동건은 바로 입을 열었다.“내가 밥 사줄게!”“필요 없어. 오늘 나 약속 있으니까 다음에 네가 사.”말을 마치자, 수민은 자리를 떠나려 했다.동건은 얼른 쫓아갔다.“그럼 데려다 줄까?”수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진심이야?”“응!”“그래, 그럼 빨리 운전해.”출퇴근길에 눈을 잠깐 붙이기 위해 수민은 이번 주에 운전을 하지 않았다.동건은 기분이 좋아서 얼른 조수석의 문을 열었는데, 아쉽게도 수민은 그를 무시하며 뒤로 걸어갔다.“난 뒤에 앉을래, 눕고 싶어.”“그래.”차에서, 동건은 운전을 하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이 세상에 나보다 더 좋은 남자친구가 또 있을까? 한 시간 넘게 회사 아래에서 퇴근한 여자친구 기다리지, 또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러 데려다 주지. 하지만 만약 내가 데려다주지 않는다면 수민은 벌써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을 거야.’물론 동건도 무척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이길래 수민이 야근을 끝내자마자 바로 만나러 달려가는 건데!’수민은 뒷좌석에 누웠다.“왜 갑자기 한숨을 쉬는 거야?”“내가 언제?”“방금.”“일주일 동안 야근했다고?”“어.” 수민은 옆에 있던 쿠션에 기댔다.‘야, 훨씬 편해졌네.’“이렇게 바쁜 사람이 테니스를 칠 시간은 있고?” 동건은 또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전선우가 말한 거야?”“흥!”“너도 정말 웃기네. 너희들 말이야, 정말 어디 좀 이상한 거 아니니? 전선우, 강도겸 그리고 너!”“뭐??”“내가 코치 하나 청해서 서브 동작을 배우고 있는데, 전선우는 갑자기 달려와서 코치에게 주먹을 날린 거야. 내 코치는 하마터면 코가 꺾어질 뻔했다고. 그것 때문에 내가 400만 원이나 배상했단 말이야. 그 자식도 너처럼 정신이 나간 거지?”“코치?”수민이 되물었다. “그렇지 않으면?”“헤헤...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수민은 영문을 몰랐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숨을 쉬다가 왜 또 바보같이 웃기 시작한 거야? 역시, 머리가
알만한 사람들은 소정은이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자신의 생활도, 공간도 없이, 하루 24시간 강도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매번 이별 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재회를 청했다. 누구나 이별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은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도겸이 새로운 연인을 안고 들어올 때, 방안은 오묘한 정적이 5초간 흘렀다. 그러자 정은은 귤을 까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왜 다들 말이 없어? 나를 왜 봐?”“정은아.”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노골적이고도 태연했다.“생일 축하해, 선우야.”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인 선우를 생각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다녀올게.”문을 닫을 때, 정은은 안에서 이미 대화가 시작된 것을 들었다.“형, 정은이 여기 있잖아요. 미리 얘기했는데 왜 여자를 데려왔어요?”“맞아! 도겸아, 이번에는 너무했어.”“신경 쓰지 마.” 도겸은 여자의 허리를 매만지며 담배를 피웠다. 흰 연기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이 마치 세상을 게임처럼 여기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남은 대화는 문이 닫혀서 정은은 듣지 못했다. 정은은 침착하게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을 고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정말 비참하군.”비참한 삶. 정은은 깊이 심호흡하며 결심했지만,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정은은 참을 수 없이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겸은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타액이 두 사람 사이에서 티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소란을 피웠다.“역시 도겸이네! 제대로 놀 줄 알아!”“분위기 끝내주네, 한 번 더!”정은의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이 사람이 자신이 6년간 사랑한 남자라니. 지금, 이 순간 그저 헛웃음만이 났다.“야, 그만해.” 누군가가 작게 경고하며 문 쪽을 가리키자,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정은, 돌아왔네? 이거 다 장난이야, 신경
식탁 쪽.“왜 죽이 없죠?”“보양식 죽 말이죠?”“보양식 죽?”“네, 정은 아가씨가 자주 끓여준, 찹쌀과 표고버섯, 황태, 대추를 함께 끓인 그 죽 말씀하시는 거죠?”“아이고, 그거 준비하려면 표고버섯, 황태랑 대추만이라 해도 전날에 준비를 해놔야 해요.”“그리고 불 조절이 특히 중요해요. 저는 정은 아가씨처럼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불을 볼 수 없어요. 제대로 끓여내지 못해요.”“그럼 고기 소스 좀 가져다줘요.”“그래요. 도련님.”“맛이 이상한데요?” 도겸은 병을 훑어보았다. “포장도 다르네요.”“도련님이 자주 먹던 그건 이미 다 먹어서 이제는 이거밖에 없어요.”“나중에 마트 가서 두 병 사다 놔요.”“못 구해요.”왕순자는 약간 난처하게 웃었다. “그것도 정은 아가씨가 직접 만든 거라서, 저는 못 해요.”쿵! 도겸은 깜짝 놀랐다.“음? 도련님, 식사 안 하세요?”“네.”왕순자는 도겸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지?’...“게으름뱅이! 일어나!”정은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시끄러워, 조금만 더 잘래.”조수민은 화장을 마치고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 “곧 8시야, 너 강도겸한테 아침 안 해줘도 돼?”예전에도 정은은 가끔 외박하곤 했지만, 새벽에는 돌아갔다. 도겸의 속을 위해 보양식 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수민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겸이 다친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배달을 시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정말 사람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습관이었다.수민이 계속해서 부르자 정은은 잠결에 손을 흔들었다. “안 해줘도 돼, 헤어졌어.”“오, 이번에는 며칠 동안 헤어지려고?”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그래, 그럼 더 자. 아침 식사는 탁자 위에 있어. 나는 일하러 간다. 그리고 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준비하지 마.”“됐다. 너 어차피 다시 돌아갈 거지? 그럼 나갈 때 베란다 창문 좀 닫아줘.”정은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뭔데?”“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속 쓰려! 소정은!”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약상자가 어디에 있죠?”[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좋아, 좋네, 좋아...”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형, 무슨 일이에요?”선우는 술을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겸을 보곤 슬그머니 동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도겸의 어두운 얼굴에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원래 활기찼던 이곳의 공기도 잠잠해졌다.“누구한테 차단당해서 그런 거겠지.”동건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던졌다. 도겸의 얼굴은 그 말에 더욱 어두워졌다.쾅! 도겸은 술잔을 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눈에 폭력적인 기운이 어른거렸다.“다시는 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어?”동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노래하던 사람도 입을 다물었고, 주변 사람들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선우는 목구멍에 걸린 술을 삼키며, 정은 누나가 정말로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빈은 술에 약간 취해 정신을 차리며 선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은이 돌아왔어?”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모르겠어요.”현빈은 선우의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짐작했다.바텐더가 다섯 병의 술을 가져오자, 누군가가 용감하게 제안했다.“진실 게임 할래요?”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좋아, 나 그거 제일 좋아해.”이때 한 여자가 막 들어왔다. “안나 이쪽으로 와, 마침 형 옆에 자리가 비었어.”안나는 자연스럽게 도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이 클럽의 에이스였고, 도겸과도 익숙한 사이였다.“강 대표님.”도겸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너희끼리 놀아, 난 먼저 간다.”남겨진 사람들은 당황했고, 오늘 밤의 분위기를 깨뜨린 듯한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술집을 나온 도겸에게 운전기사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도겸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텅 빈 집을 떠올렸다.“회사로 가죠.”“강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
“당시의 충동적이고 불합리했던 행동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해야 해. 그건 내가 교수님에게 빚진 거야.”수민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정은의 말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듯 두 번이나 기침을 했다. 도망치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제발 나 좀 살려줘, 정은아.”정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너도 알잖아. 나 대학 때 유일하게 재수강한 과목이 오미선 교수님의 수업이었어. 교수님 앞에서는 난 늘 작아지기만 했고, 그분이 무서워서 도망치고만 싶었어.”수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게다가, 나는 교수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어. 교수님은 나를 기억도 못 하실 거야. 미안하지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정은은 수민의 마음을 이해한 듯,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수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 있어.”정은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응? 누구?”“너 내 사촌 오빠인 조재석, 기억나지?”정은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론 기억하지. 국내 최연소 물리학과 교수, 그리고 ‘네이쳐’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과학자 10인 중 1위였잖아. 오미선 교수님 밑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하며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생물학계에서 천재로 주목받았던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전과해 물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큰 화제였고. 결국,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법이야.”현재 재석은 국제 물리학계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정은은 재석과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다른 시기에 입학한 후배였다. 입학하자마자 재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 수민을 통해 재석이 수민의 사촌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석은 몇 년 동안 해외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귀국했다.수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동건은 바로 입을 열었다.“내가 밥 사줄게!”“필요 없어. 오늘 나 약속 있으니까 다음에 네가 사.”말을 마치자, 수민은 자리를 떠나려 했다.동건은 얼른 쫓아갔다.“그럼 데려다 줄까?”수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진심이야?”“응!”“그래, 그럼 빨리 운전해.”출퇴근길에 눈을 잠깐 붙이기 위해 수민은 이번 주에 운전을 하지 않았다.동건은 기분이 좋아서 얼른 조수석의 문을 열었는데, 아쉽게도 수민은 그를 무시하며 뒤로 걸어갔다.“난 뒤에 앉을래, 눕고 싶어.”“그래.”차에서, 동건은 운전을 하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이 세상에 나보다 더 좋은 남자친구가 또 있을까? 한 시간 넘게 회사 아래에서 퇴근한 여자친구 기다리지, 또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러 데려다 주지. 하지만 만약 내가 데려다주지 않는다면 수민은 벌써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을 거야.’물론 동건도 무척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이길래 수민이 야근을 끝내자마자 바로 만나러 달려가는 건데!’수민은 뒷좌석에 누웠다.“왜 갑자기 한숨을 쉬는 거야?”“내가 언제?”“방금.”“일주일 동안 야근했다고?”“어.” 수민은 옆에 있던 쿠션에 기댔다.‘야, 훨씬 편해졌네.’“이렇게 바쁜 사람이 테니스를 칠 시간은 있고?” 동건은 또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전선우가 말한 거야?”“흥!”“너도 정말 웃기네. 너희들 말이야, 정말 어디 좀 이상한 거 아니니? 전선우, 강도겸 그리고 너!”“뭐??”“내가 코치 하나 청해서 서브 동작을 배우고 있는데, 전선우는 갑자기 달려와서 코치에게 주먹을 날린 거야. 내 코치는 하마터면 코가 꺾어질 뻔했다고. 그것 때문에 내가 400만 원이나 배상했단 말이야. 그 자식도 너처럼 정신이 나간 거지?”“코치?”수민이 되물었다. “그렇지 않으면?”“헤헤...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수민은 영문을 몰랐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숨을 쉬다가 왜 또 바보같이 웃기 시작한 거야? 역시, 머리가
많은지 적은지는 정은도 몰랐다.재석이 답장을 씹었기 때문이다.만두를 전부 다 찐 후, 정은은 10개를 골라 비닐봉지에 넣은 다음, 재석에게 가져다주려고 했다.그런데 문을 한참이나 두드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정은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선배님, 지금 집에 있어요?]이번에 재석은 아주 빨리 답장을 했다.[실험실에 왔어.][내가 만두를 좀 쪘는데, 선배님에게 10개 줄게요. 저녁에 돌아올 때 가져 갈래요?]재석은 원래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직접 만든 음식을 특별히 자신에게 보내주려고 하는데, 이렇게 차갑게 거절하는 건 좀 그랬다.‘그건 예의가 아니지. 그리고... 내가 찔린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그래.]정은은 핸드폰을 거두며 집으로 돌아갔다.주방을 정리하고 앉자마자, 물을 마시기도 전에 수민의 전화가 걸려왔다.[정은아! 내 만두는, 다 됐어?!]“응, 다 됐어. 오늘 수십 개 만들었으니 네가 먹기엔 충분하다고. 이 게걸스러운 계집애야!”수민은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당장이라도 정은의 집으로 날아가고 싶었다.일주일동안 꼬박 밤을 새면서 오늘 드디어 일을 끝냈던 것이다.그녀는 1초도 회사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네가 더 게걸스럽겠지! 딱 기다려, 곧 도착할 거야.] 수민은 일부러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고,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통화를 마치고 수민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고동건?”남자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표정은 무척 어두워서 마치 누가 빚이라도 진 것 같았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 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동건의 앞으로 걸어갔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짧아지면서, 수민은 동건의 안색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두운 것을 발견했다.“왜? 내가 여기에 나타나서 널 방해라도 한 거야?” 동건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딱 기다려!”수민은 어이가 없었다.“너 뭐 잘못 먹었니?”“내가 뭘 먹어.
생활품 코너를 지나자, 재석은 바로 멈추었다.“뭐 살 것 있어?”정은은 집에 있는 바디워시와 세제가 다 떨어진 것을 생각했다.“네.”그녀가 바디워시를 고를 때, 재석도 카트에 뭔가를 넣었다.정은이 힐끗 훑어보았다. 수건, 슬리퍼, 갈고리.꽤 많았기에 카트도 곧 꽉 찼다.계산할 때, 재석은 자신이 하겠다고 말했고, 정은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영수증을 잘 남겨둬서 이따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은에게 카운트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좋아요.” 정은은 밖으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도 계산을 마치고 큰 봉지 3개를 들고 나왔다.정은은 받아서 그와 좀 분담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뒤로 피했다.“아니야, 내가 하면 돼.”“그런데 너무 많잖아요...”한 봉지에 고기와 채소가 있었고, 다른 두 봉지는 각각 그들이 구입한 생활용품이 있었다.아주 분명하고 엄밀하게 나뉘었다.“정말 내가 들 필요가 없는 거예요?”정은이 다시 물었다.“응.”남자의 체력은 확실히 여자보다 훨씬 좋았다. 재석은 봉지를 들고 단숨에 7층을 올라갔는데, 숨조차 헐떡이지 않았다.정은은 자신의 봉지 두 개를 받은 다음 문 옆에 놓고는 재석에게 영수증을 달라고 했다.“에헴...” 남자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 “얼마 안 들었으니까 줄 필요 없어.”“그건 아니죠? 영수증은 봉지에 있는 거예요? 나한텐 없는 것 같은데, 선배님 봉지 좀 볼게요...”재석은 마치 감전된 것처럼 재빨리 뒤로 피하더니 정은이 자신의 봉지를 보지 못하게 했다.정은은 영문을 몰랐다.“안에 없어. 이, 이따가 계산하면 얼마 들었는지 톡으로 보낼 테니까, 그때 주면 돼.”“그래도 돼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재석은 방금 왜 피한 것일까?‘내가 자신의 봉지를 보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이야? 그 안에 나에게 보여줄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건가?’의혹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은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고, 봉지를 들고 방에 들어
정원을 둘러보고 또 빈대떡을 먹었으니, 이미숙은 매우 만족했다.다음 날, 부부는 L시에 돌아갔다.정은은 그들을 역으로 데려다 주었다.나석천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작가님, 이것은 출판사에 보낸 팬들이 편지입니다. 팬들이 작가님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요.”이미숙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팬레터를 받았던 것이다.그것도 적지 않았는데, 가방이 꽉 찼다....집에 돌아온 정은은 햇빛이 좋은 것 같아 두 방의 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를 빨았다.10월 말, 한여름의 무더위가 점차 가시면서, 가을 기운이 서늘함을 안고 조용히 다가왔다.그녀는 또 옷장을 한 번 정리했다. 입지 않는 옷과 치마는 자주 쓰지 않는 옷장에 넣었고, 또 가을에 입을 옷을 편리하고 꺼내기 쉬운 곳으로 옮겼다.바쁘게 돌아친 후, 시간은 이미 오후 2시가 되었는데, 정은은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냉장고에는 토마토 두 개만 남았다.정은은 한숨을 쉬며 신발을 갈아신고 외출을 했다. ‘결국 마트에 가야 하다니.’“지금 나가려고?” 1층에서 내리자마자 정은은 위로 올라가고 있는 재석을 마주쳤다.“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채소가 없어서, 마트에 가서 좀 사려고요.”“그럼 잘됐네, 같이 가자.”재석은 즉시 방향을 바꾸어 그녀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선배님은 뭘 사려고요?”재석은 이 문제에 대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어느 마트에 가려는 거야?”이 근처에 세 마트가 있었는데, 모두 그리 멀지 않았다.정은은 한 마트 이름을 말한 다음 그에게 물었다.“괜찮죠?”방금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다.“난 오케이.”몇 분 후, 두 사람은 마트에 들어섰다.이것이 바로 도심에서 지내는 좋은 점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매우 편리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부대시설도 잘 갖추어졌다.단지 동네 환경이 좀 좋지 않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 외에 정말 나무랄 데가 없었다.정은은 앞에서 걸었고, 재석은 쇼핑 카트를 밀고
정은은 또 물었다.“먼저 빈대떡 좀 드실래요? 제가 한 조각 드릴까요?”봉수진이 말을 하려고 할 때, 현빈의 핸드폰이 울렸다.맞은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그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알았어, 일단 사람부터 붙잡아. 난 가능한 한 빨리 달려갈 테니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그는 미안해하며 정은을 바라보았다.“미안.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야 할 것 같아.”말이 끝나자 현빈은 또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먼저 두 분을 집에 데려다 드릴게요. 다음에 시간이 나면 다시 구경하러 나오시는 건 어때요?”“그래. 하지만 정은이 부모님을 보지 못했구나...” 정은은 즉시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급한 일이 있으신 이상, 먼저 가세요. 앞으로 또 볼 기회가 있을 거예요.”“그래.”이미숙과 소진헌이 다가올 때, 현빈은 이미 두 노인을 데리고 찻집을 나와 차를 몰고 떠났다.이미숙은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그 두 노인은 누구야?”“심 대표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예요. 사인회 그날 마침 만났는데, 오늘 또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요.”이미숙은 의심을 하지 않았다.“정말 인연이군. 구경하느라 지쳤지? 집에 가지 않을래?”“조금만 더 놀아요. 이 거리를 다 구경하지 못했잖아요.” 정은은 이미숙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이미숙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계속 구경하자.”...차 안에서.현빈은 핸들을 잡으면서 비서와 통화를 했다.“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사람을 붙잡고 있어.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이춘재가 물었다.“많이 급한 거야? 만약 시간이 없다면 우리를 내려놓아도 되는데. 나와 네 할머니는 택시를 타고 돌아가면 되니까.”“아니에요, 내 부하들이 이미 처리하고 있어요.”“그럼 됐어.”현빈은 재삼 고민하다가 물었다.“할아버지, 이번에 귀국하시면서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얼마나 머물 예정이시죠? 저도 괜찮은 의사들을 좀 알고 있어서 할머
이 가게를 지나갈 때, 이미숙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빈대떡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정은은 좌우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것은 아주 낡은 가게였고, 장식도 옛날식이었는데, 주위에는 아무런 포스터도 붙이지 않았다. 가장 안쪽에 가야 팻말에 열거된 떡이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런데 정말 빈대떡이 있을 줄이야.‘그럼 엄마는 어떻게 지나가다가 이 가게에 빈대떡이 있다는 걸 아셨을까? 게다가 빈대떡은 이 가게의 간판 메뉴이기도 했다.’이미숙이 말했다.“나도 모르겠어. 아무튼 안에 빈대떡 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주 맛있을 것 같았어.”소진헌이 말을 이어받았다.“네 엄마는 코가 엄청 예민한 거 몰라? 맛있는지 안 맛있는지 냄새만 맡으면 바로 알 수 있다니깐.”“그렇군요...”정은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코야.’현빈이 말했다.“이런 인연이, 나도 빈대떡 사러 왔는데.”“혼자 먹으려고요?”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우리 할머니께 사 드리려고.”“할머니도 오셨어요?” 정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왜 안 보이는 거죠?”“구경하다가 지치셨는데, 옆의 찻집에서 쉬고 계셔. 이따가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소개해드려야지. 지난번에 서점에 있을 때, 할머니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보려고 하셨지만,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거든.”“좋아요.” 정은도 웃으며 말했다.모두 빈대떡을 사는 이상, 앞에 있던 정은은 아예 2인분을 달라고 했고, 현빈에게 나눠주었다.“얼마야? 돈 줄게.”“아니에요, 이건 내가 할머니께 사 드리는 거예요. 게다가 비싼 것도 아니에요. 지난번에 당신도 물을 사줬는데, 나도 돈을 주겠다고 말한 적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현빈은 웃음을 터뜨렸다.“가요.” 정은은 고개를 돌려 현빈을 바라보았다.‘이 사람은 왜 갑자기 바보같이 웃는 거지?’찻집에 들어서자, 정은은 바로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두 노인을 보았다.정은은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봉수진은 여기서 정은을 만날 줄은
“허, 알아요, 당신들 모두 날 원망하고 있잖아요. 우리 부모님, 그리고 당신! 당신들 모두 그때 나와 이미숙이 같이 나갔는데, 이미숙은 납치되어서 돌아오지 못하고, 혼자 돌아온 내가 원망스러운 거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들은 나도 이미숙과 함께 죽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잖아요!”“그 입 닥쳐!” 심정훈은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눈빛도 갑자기 매서워졌다.“누가 죽었단 거야?!”“하하... 28년이 넘었는데, 설마 아직도 이미숙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두 분은 당연히 포기하려 하지 않겠죠. 이미숙은 바로 두 분의 보배였으니까.”“나이도 드신 이상, 희망을 품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시겠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 심정훈, 당신조차 이미숙을 잊지 못했다니!”“우리가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우리의 아들도 가정을 이룰 나이가 다 됐는데, 당신은 아직도 이미숙을 그리워하고 있다니? 하하하, 웃기지도 않나 봐요?! 당신은 그런 자신이 징그럽지도 않냐고요?!”찰싹!심정훈은 손을 들어 따귀를 날렸다.동작이 너무 빨라서 이미윤에게 피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남자는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았고, 온몸에 찬 기운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미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무정했다.“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말을 할 줄 모르면 그냥 입 다물어.”말이 끝나자 심정훈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성큼성큼 떠났다.이미윤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심정훈, 당신은 양심도 없는 거예요?”“왜? 왜 아직도 실종된 지 20여 년이나 넘은 이미숙을 그리워하는 거냐고요? 부모님도 그렇고, 심정훈 당신도 그렇고. 설마 이미숙은 두 분의 친자식이고, 난 그냥 입양된 자식이라서?!”...다른 한편, 현빈은 두 노인을 따라 정원을 지나 작은 문으로 나갔다.그런데 놀랍게도 거리로 나왔다.현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전에 여러 번 왔는데, 여기에 문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이춘재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네 작은 이모는 여기서 몰래 빠져나가는 것
이미윤은 끊긴 전화를 보며 화가 나서 앞의 쟁반을 엎어버렸다.쟁반 위에 갓 만든 보양식도 따라서 땅에 떨어지더니 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사모님...” 가정부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꺼져! 모두 꺼지라고.”이미윤은 문을 가리켰고, 관리를 잘 받은 얼굴은 보기 드물게 험상궂은 기색을 드러냈다.가정부들은 줄지어 나갔다.이미윤은 뒤로 물러서서 소파에 주저앉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동안 그녀는 줄곧 두 노인과의 관계를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이춘재는 나름대로 괜찮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에는 냉담하게 원망을 했지만, 지금은 평온하게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더 이상 예전처럼 이미윤을 아끼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다.그러나 봉수진은 달랐다.말로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줄곧 이미윤을 탓하며 여태껏 그녀를 용서한 적이 없었다.“회장님, 돌아오셨습니까...”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심정훈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엉망진창이 된 거실을 보았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소파에서 노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미윤을 담담하게 훑어보았다.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이미윤은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며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궁금하지도 않는 거예요?”심정훈은 몸을 돌려 소매 단추를 풀면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당신이 원한대로 해.”어차피 보신탕을 엎어버려도 새로 만들 수 있었고, 땅이 더러워져도 깨끗이 닦을 수 있었다.‘또 이런 말을 하는군! 어쩜 이렇게 매정한 거야!’“심정훈, 난 당신의 아내라고요! 나에게 신경 좀 써주면 안 돼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당신 오늘 뭐 잘못 먹었어?”이미윤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동안 줄곧 이렇게 지내왔는데, 왜 갑자기 이런 정신 나간 말을 하는 거야? 참, 나 오늘 저녁에 일이 있으니 돌아오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치고 심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가
더군다나 이미숙이 실종되었을 때, 이미 스물두 살이었다. 당시 어려서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하더라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 만약 정말 살아있다면 무슨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자신의 부모님에게 연락할 것이다.그런데 전화 한 통도, 문자 한 통도 없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남은 인생을 편하게 향수해야 나이에 두 사람은 이국 타향에서 분주히 뛰어다녔다.현빈은 마음이 약해졌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정원에 한 번 가보세요.”“그래! 미숙이는 정원에 있는 그네랑 자등나무를 제일 좋아했지...”현빈이 봉수진을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갈 때,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발신 번호를 확인한 후, 내색하지 않고 봉수진이 보지 못하게 손바닥으로 번호를 가렸다.“할머니, 저 전화 좀 받으러 나갈게요.”“그래.”본관을 나서자, 현빈은 그제야 수신 버튼을 눌렀다.“어머니, 무슨 일이시죠?”[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맞은편의 이미윤은 기분이 좀 좋지 않았는데, 기다리다 짜증이 났던 것이다.[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현빈은 그녀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일 때문에 좀 바빴어요. 지금 밖에 있고요.”[뭐가 바쁜데? 너 지금 누구랑 같이 있어?]현빈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머니, 전 범인이 아니니까 저를 그렇게 심문하실 필요 없어요.”[범인?! 허--]이미윤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지금 누굴 말하는 거야? 범인은 나 아니니? 그래서 너희들 다 날 속이고 있는 거잖아? 지금 날 뭘로 보고?!]“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그럼 넌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귀국하셨는데, 왜 나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니?]현빈은 말문이 막혔다.[그럴 줄 알았어!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어머니...” 현빈은 씁쓸하게 웃었다.[너 지금 네 외할아버지 그들과 함께 있는 거지? 맞지? 나 방금 이미 본가에 갔었는데, 집사가 그러더라, 네가 두 분을 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