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야! 너무 쪽팔려!’결국 재석은 정은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뚫으며 밖으로 비집고 나갔다.이번에는 아무도 정은을 밀지 않았다.“휴...”정은은 한숨을 푹 쉬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고개를 들자 뜻밖에도 남자의 웃음을 머금은 눈과 마주쳤다.“미안해요, 선배. 나도...”재석은 그녀의 볼을 가리켰다.“머리카락이 붙었어.”“네?”정은은 손을 들었지만 그 머리카락이 어딨는지 몰랐다.재석은 그녀를 도와 떼어냈다. 비록 충분히 조심스러웠지만, 손끝은 여전히 여자의 매끄럽고 따뜻한 피부에 닿았다.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다 됐어.”정은은 어색하게 그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현장이 너무 붐벼서 머리카락이 다 엉망됐잖아. 게다가 땀까지 흘렸으니 볼에 붙은 거야. 너무 쪽팔려.’방금 재석의 품에 안긴 장면을 떠올리면 정은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호흡이 가빠졌다.‘이곳에 못 있겠어...’“선배님! 목 안 말라요?! 나, 나 물 좀 사러 내려갈게요!”말을 마친 후 얼른 줄행랑을 쳤다.재석은 입을 벌렸다. 그는 목마르지 않다고, 만약 그녀가 마시고 싶다면, 자신이 가서 살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정은은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현빈과 마주칠 줄이야.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곁에 두 노인이 있었다.할아버지는 백발에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있어 무척 엄숙하고 까다로운 느낌을 주었다.그의 옆에 있는 할머니는 많이 부드러워 보였지만,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찼고,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정은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노부인은 고개를 돌렸지만, 망연히 다시 시선을 옮겼다.현빈은 여기서 정은을 만날 줄 몰랐다.그는 오늘 특별히 일정을 취소한 다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놀러 나왔다.두 노인은 일주일 전에 귀국했는데, 현빈은 미리 사람 시켜 본가를 치우라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하지만 막내딸이 실종된 이후로 이씨 가문은 모든 것이 변했다.이것도 바로 이춘재 부부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아직도 행방이 묘연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모를 떠올리니, 현빈은 저도 모르게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만약 계속 찾을 수 없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아쉬움을 메우지 못할 것이다.“현빈아, 목이 좀 마르구나.” 노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래요. 그럼 저 물 사러 갈게요...” 현빈은 정은을 바라보았다.“많이 바빠?”“괜찮아요.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죠?”“난 물 좀 사러 갈 테니까, 나 대신 두 분 좀 챙겨줘.”“내가 사러 갈까?” 어차피 정은도 내려와서 물을 사려 했다.현빈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평소에 고정된 브랜드의 물만 마시거든. 이 근처에는 없고, 맞은편 거리에 있는 수입 마트에 가서 사야 해.”“그래요? 그럼 얼른 가서 사요. 난 여기서 두 분과 함께 얘기 나누고 있을 테니 안심해요.”“고마워.”현빈은 몸을 돌려 떠났다.할머니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곁에 앉혔다.“아가씨, 우리 현빈이와 친구라고? 너희들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아...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도겸이 바로 그 ‘친구'였다.“그렇구나. 현빈이는 여성 친구가 거의 없는데, 네가 처음은 것 같구나!” 봉수진은 웃음을 지었다.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와, 심 대표는 정말 물 마시듯 여자친구를 바꾸었지.’“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곳은 너무 많이 변했어.”이춘재는 갑자기 감탄하기 시작했다.정은은 그의 말투에 묻은 그리움을 알아차리며, 최근 몇 년 J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춘재는 정은이 J시에 대해 술술 말하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물었다.“넌 이곳의 사람인가?”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L시의 사람이에요. L시 아시죠? 남방의 구릉지대인데,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물도 있고...”정은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정은은 약간 뻘쭘해졌다. 속마음이 간파당했지만 그렇게 난처한 편은 아니었다.처음 만난 사이이니, 경계를 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었다.‘두 분은 겪으신 일이 나보다 훨씬 많으니 내 마음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거야.’아니나 다를까,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두드렸다.“아가씨, 특히 너처럼 예쁜 아가씨는 언제나 경계심을 가져야 해. 미리 위험을 방지해야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어.”“네.”“제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L시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J시에 왔어요. 그러니 두 분은 아마 저를 보신 적이 없을 거예요.”“하긴.” 봉수진은 웃었다.그러나 왠지 모르게 정은은 봉수진의 미소에서 낙담과 실망을 느낄 수 있었다.이춘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라 할 수 있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물을 사러 간 현빈이 돌아왔고, 두 노인에게 한 병씩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은 물을 담은 봉지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몇 병 더 샀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드려. 오늘 아주머니 사인회이니 아저씨도 같이 오셨겠지?”“네, 맞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받아.” 현빈은 봉지를 직접 그녀의 손에 넣었다.“고마워요.”“방금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기분이 꽤 좋으신 것 같은데?”들어오기 전에 현빈은 멀리서 이춘재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았고, 평소에 가장 까다로운 할머니조차도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이 장면을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멍해졌다.‘두 분께서 이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작년에 외국에 두 노인을 방문할 때, 봉수진은 마침 입원을 했다. 이춘재는 매일 탄식하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현빈은 이주 정도 머물렀고, 이춘재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아예 없었다.이씨 가문의 산업이 모두 국내에 있었기에, 현빈도 두 노인에게 돌아오라고 권유했다.
딩-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은이 안에서 나왔다.“선배님.”“어디 갔었어?”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정은의 말투는 홀가분했고, 재석은 약간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심지어 걱정이 묻어났다.“방금 아래층에서 심 대표님을 만났거든요. 자, 선배님, 물 좀 마셔요.”정은은 봉지에서 물 한 병을 꺼내 재석에게 건네주었다.재석은 봉지 위의 로고를 힐끗 바라보았다. 맞은편 거리의 수입 마트였다. ‘정은이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면...’“심 대표가 산 거야?”“네. 심 대표님 대신 어르신 좀 챙겨드렸거든요. 그 사람은 건너편 마트에 가서 물을 샀고요. 두 어르신은 이 브랜드의 물만 마셔서요.”재석은 손을 내밀어 물을 받았다.정은은 사인회장을 들여다보았다.“어때요? 이미 끝났어요?”재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줄을 선 사람이 많아서 아마도 조금 더 걸릴 거야.”방금 전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했기에, 정은은 다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정은은 재석이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선배님, 들어가서 사인 받을 거예요?”“난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그래요!” 정은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선배님, 왜 웃어요?”“에헴!” 재석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정색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뭐지, 선배님은 지금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니!’사인회는 원래 오후 4시에 끝날 예정이었지만 결국 5시가 되어서야 끝났다.맨 뒤에서 줄을 선 재석과 정은은 책을 펼쳐 이미숙 앞에 놓았다.“사랑하는 엄마, 저에게 사인 좀 해주세요.”“감사합니다, 아주머니.”이미숙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예쁜 딸이 앞에 서 있었고, 옆에는 재석이 있었다.두 사람 모두 웃으며 눈빛에 기대를 드러냈다.그 순간, 이미숙은 마음이 황홀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서 있으니 정말.
식당에 도착하자, 종업원은 네 사람을 데리고 직접 룸으로 향했다.그리고 음식을 주문한 다음 음식이 올라오길 기다렸다.민지가 강력히 추천한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맛은 정말 좋았고, 재료도 정말 싱싱했지만 정말 매웠다.중간에 정은은 화장실에 다녀왔다.돌아올 때 팥빙수 하나가 올라왔다.재석이 설명했다. “이걸로 좀 풀어.”정은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선배님은 정말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인 것 같아.’다 먹고 재석은 계산하러 갔다.샤브샤브 식당 옆에는 번화가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했다.이미숙이 가고 싶어 하자 소진헌은 웃으며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재석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정은은 그들 일가족이 다 떠나는 것은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이 나왔는데, 손에 종이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방금 네가 그 팥빙수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나 더 포장해달라고 했어. 돌아가서 얼른 먹어. 남기면 직접 버리고. 내일 먹으면 배탈이 나기 쉬워.”“좋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분은?”그녀는 번화가를 가리켰다.“놀러 가셨어요.”“그럼 우리도 구경하러 할까?”“그래요!” 정은도 당연히 가고 싶었다.만약 재석을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에 이미숙, 소진헌과 함께 갔을 것이다.두 사람은 나란히 거리를 걸었고, 양쪽 길가에는 노점이 빽빽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파는 물건도 각양각색이었다.먹을 것과 입을 것과 그리고 노는 것까지 가득했다.액세서리 노점을 지나자, 정은은 멈추더니 한 회색 집게핀을 가리키며 물었다.“이거 얼마예요?”“그건 2,000원이에요.”“이건 어떻게 집어야 머리카락을 꽉 고정시킬 수 있는 거죠?”정은은 인터넷에서 산 집게핀을 써본 적이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이 많고 굵어서인지, 걷어 올려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없었다.정은은 방금 이 집게핀이 전에 인터넷에서 산 것보다 더 크고 재질도 더 견고한 것을 보고 가격
“자.”정은은 목을 움직이더니 또 고개를 저었다. ‘어, 정말 안 떨어지네. 꽤 단단하게 묶었나 봐.’“어머!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빨리 배웠네요. 나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아요!” 사장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재석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설명하려 했다.“제 남자친구 아닌...”그러나 사장님은 그녀에게 말을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예전에는 시집간 여자들이 머리를 걷어올렸어요. 시집간 후, 금슬이 좋다면 남편이 직접 부인을 위해 머리를 묶어주었고요. 이게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빗겨주며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한마음을 맺는다는 뜻이 있어요.”“안타깝게도 지금 이 남자들은 머리를 묶어주긴커녕 빗으로 간단하게 빗겨주는 것도 귀찮다고 하니 정말 게으름뱅이와 다름이 없다니깐요. 하지만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대단해요.”사장님은 재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배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이 있어서 직접 아가씨를 위해 머리를 말아올렸잖아요.”“이 사람은 제 남자...”“아가씨, 이 총각 꼭 소중히 여겨야 돼요. 요즘은 좋은 남자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정은은 속이 답답해졌다.‘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순 없는 거야?’두 사람은 노점을 떠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제 할 줄 아는 거야?”“뭘요?”“머리카락을 걷어올리는 거.”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난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배우라는 거야?!’재석이 말했다.“내가 다시 한번 가르쳐줄까?”“아니요!” 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굳이 안 걷어올려도 되니까 그냥 마음대로 묶으면 되지.’“날 못 믿겠어?”정은은 쓴웃음을 지었다.“나 자신을 믿지 않아서 그래요.”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어차피 봐도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나았다.두 사람은 걷다가 멈추었고, 거리를 나갈 때에야 이미숙, 소진헌과 합류했다.“엄마...”“어? 이 집게핀은...”이미숙은 바로 정은의 걷어올린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재석은 잠시 멈칫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뭐?!” 소진헌은 갑자기 흥분해졌다.“정말이야? 고백은 했어? 왜 아직도 사귀지 않은 거야?”잇단 질문에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이럴 줄 알았으면 대답하지 말걸 그랬어.’네 사람은 집 앞에서 헤어졌다.재석은 왼쪽으로 향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고, 정은네 일가족은 명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이미숙은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오늘 덕분에 잘 먹었어.”“에이,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오늘 아주머니의 사인을 받았잖아요.”이 말 한마디에 이미숙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정은은 샤워하러 갔다.평소처럼 머리를 묶고 머리가 젖지 않도록 샤워모자를 썼다.그러나 손을 뒤로 뻗은 순간, 딱딱한 집게핀을 만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이미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정은은 고개를 힘껏 흔들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음, 정말 대단한 수법이야. 그런데 왜 나만 못하는 거지? 말도 안돼,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짜증나!’이미숙과 소진헌은 씻은 다음 이미 방으로 돌아가 누워있었다. 부부는 불을 켜고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나석천이 이때 문자를 보내왔다.[이 작가님, 축하드립니다!][『7일담』은 오늘 판매량이 또 최고치를 기록했고, 이미 몇 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이 책의 영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받고 싶다고 했어요.][30분 전에 출판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첫 번째로 인쇄한 책은 이미 품절되었고, 공장은 밤새 인쇄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작가님의 다른 배당금도 이미 도착했고요. 잠시 후에 계좌로 넣어드릴게요.][원래 전화로 말하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이미 주무셨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내일 전화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정말 너무 흥분해서요.]이미숙은 문자를 보고 나서 자신의 남편을 꽉 껴안았다.소진헌은 갑작스런 포옹에 흠칫 놀랐다.
이미숙은 이렇게 말했다.“뭘 먹을지 모르겠으면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정해. 가격은 모든 것을 대표할 순 없지만 적어도 성의를 표시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동건은 레스토랑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또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이미숙은 감사 인사를 해야 했으니 틀림없이 식사 자리를 비싼 곳으로 정할 것이다.금요일, 저녁.동건은 10분 앞당겨 도착했는데, 정은네 일가는 그보다 더 일찍 도착할 줄이야. 그들은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원래 정은은 수민까지 불렀지만, 그녀는 너무 바빠서 이미 연속 이틀동안 야근을 했기에 정말 시간이 없었다.“정말 안 올 거야? 고동건 씨도 있는데.”수민은 눈을 부라리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그 남자가 있으면 내가 가야 하는 건가?]“두 사람 지금 사귀고 있잖아. 다 먹으면 동건 씨는 또 네 기사가 되어 널 집에 데려다줄 수 있고.”[쳇, 누가 데려다 달라고 했어? 나한테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는 가짜 커플이잖아. 넌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지금 자꾸 비아냥거릴 거야...]룸 안에서.동건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두 분도 참, 저도 간단하게 도와드렸을 뿐인데, 이렇게 특별히 밥을 사주시다니!”“당연히 그래야지.”소진헌은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네가 나석천 편집장님을 정은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지금의 『7일담』이 있게 된 거야.”이미숙도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동건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었다.소진헌은 훤칠하지만 우아한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다. 옷이든 하는 말이든 모두 지식인만이 가지고 있는 기질을 내뿜었다.이미숙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파란 원피스에 긴 머리를 걷어올린 채로 소진헌의 곁에 서 있으니 침착하면서도 도도했다.그녀가 서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곧 음식이 올라왔다.소진헌은 좋은 술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가득 따른 후, 그는 먼저 마시며 동건을 바라보았다.“작은 은
이때 정은은 다른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에 매료되어, 두 남자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재석은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정은이 한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5층으로 된 케이크에 한층마다 정교한 피규어를 놓았다.“예뻐?”“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었어요.”그리고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선배님, 이 안경 쓰고 눈살을 찌푸리는 피규어 말이에요, 선배님과 닮지 않았나요?”재석은 한동안 자세히 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언제 자주 눈살을 찌푸렸지?”“눈살을 찌푸렸지만, 선배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지금이요.”재석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장난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궁핍하고 마음이 찔렸다.“하하...”정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선배님 정말 귀엽네요.”세 사람이 케이크 가게를 막 나서자, 재석의 핸드폰이 울렸다.“네, 어머니.”[재석아, 집에 한번 돌아와.]강서원의 목소리는 심각하고 엄숙했다.“무슨 일이세요?”[돌아와서 얘기하자.]“네.”통화를 마치자, 재석은 집에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했다.“미안,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고, 마침 현빈도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 현빈은 재석을 바라보았다.“공교롭게도 저희 집에도 일이 좀 생겼네요. 하지만 그전에 전 먼저 정은을 집에 데려다줄 테니, 교수님은 얼른 일 보러 가세요.”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두 분 다 얼른 가서 일 봐요!”재석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정은은 재빨리 말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텐데, 아무도 데려다줄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현빈을 보았다.“심 대표님도 빨리 가요. 중요한 일 그르치면 안 되잖아요.”현빈과 재석은 눈을 마주치며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다.결국 정은의 재촉으로
다 먹은 뒤, 이미윤은 계산하러 갔다.두 사람 모두 얼마 먹지 않아서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았다.이쪽의 두 어머니는 수심이 가득했지만, 그쪽의 현빈과 재석은 각기 수확을 얻었다.하나는 양복을, 하나는 구두를 샀기에 모두 기분이 좋았다.현빈이 말했다.“앞에 밀크티 가게 있는데, 뭐 마실래?”재석도 같은 시간에 입을 열었다.“그 케이크 가게가 엄청 유명한데...”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고, 서로를 힐끗 보더니 적의를 드러냈다.“정은아, 우리 같이 밀크티 사러 갈래?”“들어가서 한번 볼래?”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뭐야, 왜 또 이래!’“그냥 각자 사러 가세요. 난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물었다.“교수님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지 않으시겠죠?”“만약 심 대표님이 사는 거라면 한 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그래요.”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이를 갈고 있었다.“그리고 보답으로 내가 심 대표님에게 케이크를 사줄게요.”이 말을 듣자, 현빈은 더욱 화가 났다.두 사람은 각자 줄을 섰다.정은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현빈은 양손에 밀크티 한 잔씩 들고 있었고, 탁자 위에 한 잔 남아 혼자 들 수 없었다.그는 종업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들게요.”두 사람은 말하면서 케이크 가게로 갔다.“서원아? 서원아?!”“응? 뭐라고?”“뭘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거야?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다니.” 이미윤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는데 케이크 가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강서원은 손을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그 여자아이, 뜻밖에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니. 심지어 웃고 떠들며 함께 밀크티까지 마시면서 쇼핑을 하고 있어! 그건 커플끼리 하는 일 아니야?!’비록 그 남자의 뒷모습만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옷차림과 기질만 보아도 조건이 나쁘지 않다
고개를 들어 정은을 본 순간,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에 순식간에 웃음기가 감돌았다.어르신에게 신발을 사야 하니 디자인만 보아서는 안 되며 편안함도 고려해야 한다.그렇다고 편안함만 따지고 디자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정은은 서점에서 이춘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양복 조끼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마치 신사와 같은 기질을 내비쳤다.옷차림에도 신경을 많이 썼으니 신발도 잘 골라야 했기에 시간이 좀 더 걸렸다.흔한 구두 재질은 그 몇 가지밖에 없었기에 정은은 가장 편한 두 가지 재질을 선택했고, 이어서 점원에게 이 두 가지 재질로 만든 신발을 모두 골라내라고 했다.그사이 재석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곧 정은은 두 켤레를 골랐다.“이 두 켤레가 다 괜찮은 것 같아요. 심 대표님이 하나 골라요.”현빈은 직접 카드를 꺼냈다.“뭘 골라? 두 켤레 다 포장하면 되지. 네가 골랐으니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엄청 좋아하실 거야.”정은은 믿지 않았다.“에이, 설마요.”“나중에 시간 나면 우리 할아버지 뵈러 가지 않을래? 그럼 두 분이 널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알 수 있을 거야.”“나도 그러고 싶어요. 두 분 다 아주 친절해 보이시거든요...”현빈의 눈빛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점원이 포장할 때, 현빈은 정은에게 차 한잔 따라줬다. 물이 좀 식은 것을 발견하고 또 다른 점원에게 물을 끓이라고 했다.그리고 나서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차 좀 마셔, 따끈따끈해.”“고마워요.” 정은은 잔을 받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진열대에 떨어졌다.그녀는 소진헌에게 한 켤레 골라주고 싶었다.현빈은 정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더 마실래?”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고마워요.”그는 일어나더니 정은의 손에 있는 빈 잔을 가져왔다.그리고 이 장면은 마침 안으로 들어온 이미윤에게 발각되었다.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그리 놀라지 않았다.이미윤은 현빈이 바람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수가 있어, 여자를 갖고
재석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회색이 괜찮은 것 같아.”정은은 눈에서 빛이 났다.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아!’재석은 점원에게 말했다.“그럼 이걸로 할게요. 카드로 계산해줘요.”재석은 다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 정은은 그의 옷깃을 가리켰다.“여기 접혔어요.”그는 정리를 했지만 옷깃은 여전히 접혔다.그래서 정은은 직접 재석을 도와주었다.남자는 키가 커서 정은은 까치발을 해야 했고, 두 사람은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여자아이에게서 나는 독특한 향기를 맡자, 재석은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는 정은의 가녀린 손가락이 옷깃을 가볍게 뒤집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손끝이 무심하게 목을 스치자, 마치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으며 짜릿한 느낌은 온몸에 퍼졌다....강서원은 오늘 다른 귀부인과 식사 약속이 있었다. 시간이 아직 일러서 먼저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다.자신의 물건을 사고 기사에게 차에 실으라고 한 다음, 또 빈손으로 5층에 올라가서 소기봉과 세 아들에게 사주려고 했다.‘어쩔 수 없지 뭐, 하나는 내 남편이고, 세 아들은 또 모두 솔로잖아.’여러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것을 보지 못하자, 강서원은 서서히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심심하게 안에서 걷고 있었다.이때, 강서원은 쇼윈도에 있는 양복에 시선을 빼앗겼다.멈춰 서서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쇼윈도 유리를 통해 가게 안의 1남 1녀를 보았다.‘어머, 저 사람 우리 재석이 아니야?! 그것도 한 여자와 같이 있다니!’강서원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이 정도면 충분히 큰 서프라이즈인 줄 알았는데, 뒤에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그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손도 남자의 옷깃에서 거두어들였다. 그렇게 예쁘고 익숙한 얼굴이 예고도 없이 강서원의 눈에 들어왔다.‘그 여자아이잖아! 동서와 사이가 아주 가까운 그 다례사!’강서원은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콧대가
항이는 신이 났다.그는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비싼 쇼핑백에 담아서 건네줬다.“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항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히죽히죽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서서 까불었다.“이거 좀 봐, 내가 인형을 잘 빚을 수 있다니깐. 그 손님 엄청 좋아하잖아!”[에헴! 정신 차려! 그 오빠가 좋아하는 건 그 예쁜 언니지, 네가 빚은 인형이 아니라고!][그래서, 그 오빠 혼자 몰래 달려와서 인형을 사간 거야?][아직 고백을 하지 못한 것 같은데.][어머, 형사님이세요? 눈치도 참 빠르시네요!]...정은은 물을 사고 돌아온 재석이 손에 쇼핑백 하나 들고 있는 것을 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건 뭐예요?”“그냥 뭐 좀 샀어.”그래서 그녀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 길을 건너 보행로를 따라 앞으로 가면 도심이었다.정은은 손목 시계를 보았는데, 이미 오후 4시였다.‘이제 돌아가야 하나?’그런 생각을 하기도 무섭게 재석이 입을 열었다.“며칠 후에 난 세미나를 참가하러 K시에 가야 돼. 그곳의 날씨가 많이 따뜻해서 겨울의 양복을 입을 수 없거든. 마침 요앞이 백화점이니 날 도와 옷 한 벌 골라 주면 안 될까?”“좋아요.”지나친 요구가 아니었기에 정은은 동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남성복은 5층에 있었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했다.한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정은은 소리를 내어 불렀다.“심 대표님?”현빈이 고개를 돌렸다.정은을 본 순간, 현빈은 놀라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한쪽에 있는 재석을 발견하자, 그의 눈빛은 어두워졌다.“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정은아.” 말하면서 현빈은 웃으며 재석을 바라보았다.“또 만났네요, 조 교수님. 여긴 어쩐 일이죠?”정은이 대답했다.“선배님을 위해 얇은 양복 한 벌 골라주려고요. 대표님도 쇼핑하러 왔어요?”“응. 우리 할아버지에게 구두 사드리려고...”이때 현빈은 자연스럽게 난처함을 드러냈다.“하지만 어떤 걸
“미안해요!”“미안.”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며 뒤로 물러났다.눈을 마주치자, 어색함 외에 이상한 감정이 돋아나고 있었다.“선배...”“난...”“아니면 선배님부터 말할래요?”재석은 눈을 반쯤 드리웠는데, 마치 사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고개를 드는 순간, 마치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았다.“정은아, 사실 나...”“봐요, 다 빚었잖아요?” 항이의 건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은은 뻘쭘해서 귀와 얼굴이 빨개졌다. 이 말을 듣고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얼른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벌써요?”“그래요, 난 원래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였어요.”말하면서 손에 든 인형을 정은의 앞으로 내밀었다.정은은 힐끗 보더니 입가를 실룩거렸다.역시 조금의 기대도 가져서는 안 됐다.전에 본 그 몇 개의 인형은 비록 이목구비가 모호했지만 적어도 이목구비가 있었다.하지만 눈앞의 이 인형은 이목구비가 없었고, 그저 두 머리를 맞댄 것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잠깐!’정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건...’“이, 이게 저희라고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잖아요...”“그럴 리가요? 이게 딱 보이잖아요! 내가 두 사람이 뽀뽀하는 그 장면을 보고 그대로 빚은 건데! 이건 머리, 이건 목, 이건 서로 닿은 두 입술...”“앗!”정은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고, 재석은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보며 전술적으로 가볍게 기침을 했다.“아직도 못 알아보겠어요? 그럼 내가 다시 알려줄게요. 이건 머리...”“아니요!”“네?”정은은 정중하게 말했다.“이제 알겠어요.”“진짜요? 거짓말 아니죠?”“네.”“와! 나한테 인형을 만드는 재능이 있을 줄 알았어. 그동안 아무도 날 믿지 않았지!”이때, 라이브의 시청자들은 열띤 토론을 벌렸다.[저 아가씨 엄청 어색해하던데.][항이 씨, 제발 그 아가씨 내버려둬요. 곧 울 것 같은데.][나도, 정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그 분 아마도 항이가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고
재석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인형이라고 하지만 사실 윤곽밖에 닮지 않았고, 심지어 그 윤곽도 좀 이상했다.이목구비, 표정, 동작과 같은 디테일도 없었다.재석은 사실대로 말했다.“너무 대충 만든 것 같아서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어.”다시 주위를 바라보니, 노점의 다른 진흙 인형도 모두 이런 스타일이었다. 아무튼 너무 못생겼다.이 노점도 정말 이상했는데, 주인이 없고 삼각대 하나밖에 없었다. 위에는 핸드폰 한 대가 놓여 있었고, 카메라로 두 사람을 찍고 있었다.정은은 잠시 침묵했다.“그렇긴 해요. 하지만 이 각도에서 보면... 사랑의 신 큐피드와 닮은 것 같은데요?”말이 끝나자마자 노점 뒤에서 갑자기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정말 말 그대로 튀어나왔는데, 마치 스프링을 장착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했다.“아가씨, 내가 만든 인형을 알아보았다니?!” 젊은 남자는 두 눈에서 빛이 났다.‘하늘이시어, 드디어 내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군.’정은은 의아해했다.“정말 큐피드였어요?”“맞아요!”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내 작품을 알아본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에요. 엉엉... 정말 감동이네요!”‘이건 좀...’정은이 말했다.“비록 빚은 인형들의 모양과 이목구비는 형편없지만, 그래도 윤곽을 통해 나름 알아볼 수 있어요. 혹시 피카소가 롤모델인가요?”감격에 겨웠던 남자는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날 비웃은 건가요?”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고 재석이 입을 열었다.“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이 인형들은 확실히 특이하게 생겼는데.”‘아니, 어떻게 내 앞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가 있지? 그래도 난 2백만 팔로워를 가진 진흙 조각 블로거인데. 동물이나 다른 물건은 참 생동하게 잘 빚었지만, 사람만 빚으면 실패했지.’정은은 남자를 응원했다.“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이때, 라이브의 시청자들은 이미 배를 끌어안고 웃기 시작했다.[정말 예쁘게 생기셨는데? 너무 일리가 있는 말
재석이 물었다.“점심 먹었어?”“아직이요. 선배님은요?”“잘됐네, 나도 안 먹었는데.”눈을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호흡이나 맞춘 듯 미소를 지었다.20분 후, 재석과 정은은 한 고깃집에 들어갔다.기름이 지글지글거리는 고급 삼겹살, 남자는 삼겹살 표면이 약간 탈 때까지 뒤집다가 신선한 상추에 싸서 여자 앞에 건넸다.정은은 고개를 숙인 채 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재석을 보며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선배님, 나 혼자 할게요...”그러나 재석은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정은에게 입을 벌리라고 했다.정은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남자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답장하고 있잖아? 정말 손으로 받을 거야?”정은은 즉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답장 다 했으니까 나 혼자 먹을게요.”재석은 쌈을 접시에 담았다.“먼저 손부터 닦아.”정은은 방금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앗, 깜박했어.’후에 정은은 열심히 먹기 시작했고, 재석은 고기 굽는 것을 책임졌다. 고기를 다 구운 후에 직접 그녀의 접시에 놓았다.“선배님, 나한테 주지만 말고 선배님도 얼른 먹어요!”“좋아.”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은의 접시는 줄곧 고기로 가득 찼다.소고기를 입에 넣자, 즙이 절로 나올 정도로 부드러웠다. 정은은 데여서 숨을 들이마셨는데, 혀끝이 따갑고 아팠다.재석은 아이스 코코넛 우유 한 병을 건네주었다.“천천히 마셔.”얼른 두 모금 마시자, 정은은 그제야 좀 나아졌다.재석은 모처럼 덤벙대는 그녀의 모습을 봐서 속으로 기분이 엄청 좋았다.“어때, 좀 괜찮아졌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하지만 혀가 아직도 좀 얼얼하네요.”“입 벌려, 내가 한번 볼게.”남자의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 정은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십여 초가 지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룸의 온도가 너무 높았는지, 아니면 불판이 너무 뜨거웠는지 볼에 홍조가 나타났다.정은은 얼른 똑바로 앉았다.재석은 시선을 거두었
정은은 농담으로 말했다.“오빠, 고작 2천만 원으로 우리 실험실의 모든 프로젝트에 투자하려고? 에이, 그럼 너무 적은데.”인훈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겠어? 하나만 투자할게!”말을 이렇게까지 한 이상, 정은도 그저 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인훈은 자신이 아무 핑계나 대고 준 2천만 원이 앞으로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을 안겨다 줄지 전혀 몰랐다....새 실험실로 이사했으니 이제 이웃대학의 임시 실험실에 갈 필요도 없었다.당초에 마정일은 호의로 실험실을 그들에게 빌려주었는데, 비록 재석의 체면을 봐주기 위해서였지만 정은은 여전히 감격했다.토요일에 그녀는 꽃과 과일을 사서 마정일을 찾아갔는데, 실험실 열쇠를 돌려주는 김에 감사한 마음을 전달했다.마정일의 사무실은 행정동 3층에 있었고, 정은은 몇 번 가본 적이 있어 이미 길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마 교수님, 계세요?”안에서 곧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와.”정은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마정일의 사무실은 그란 사람처럼 간단하고 넓으며 질서정연했다.책상과 탁자 하나 외에 소파와 책꽂이었다.나무 다탁 위에는 다기 한 세트가 놓여 있었는데, 금방 끓여내서 방 안에 차 향기가 넘쳤다.뜻밖에도 안에 재석이 있었다.‘선배님을 위해 끓인 것 같군.’“정은이구나.”“조 교수님, 마 교수님, 안녕하세요! 두 분 점심 드셨어요?” 정은은 꽃을 잘 놓은 다음 과일을 옆의 탁자에 놓았다.“당연히 먹었지. 너도 참, 뭘 또 이렇게 사서 오는 거야?”“꽃과 과일일 뿐, 귀중한 물건이 아니에요. 실험실을 저희에게 공짜로 빌려주셨으니 저도 당연히 뭘 좀 사드려야 하지 않겠어요?”“하하...” 마정일은 크게 웃었다.“넌 말재간도 참 좋구나. 무슨 말을 해도 다 일리가 있어. 나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그럼 그냥 받으세요.” 정은은 그럴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아, 이 아이 좀 봐. 자신감이 넘쳐서 조금도 겸손하지 않잖아!”재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