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가 말했다.“그럼 저는 뭐 하면 되는데요?”“넌 돈을 관리하면 돼.”이날 정은과 서준은 각각 1억을 민지에게 입금했다.‘아, 돈 받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네!’민지는 과자를 먹으면서 은행의 문자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집엔 돈이 많았지만, 민지는 여전히 돈을 사랑했다.‘영원히 돈의 매력에서 헤어져 나올 수 없다니깐. 이 점은 우리 아빠랑 똑같아, 헤헤!’...정은은 CPRT의 국내 딜러가 ‘천양 테크놀로지'라는 스타트업이라는 것을 알아냈다.이 회사를 따라 그녀는 또 대주주가 류문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류문일의 이름으로 된 기업을 다시 검색해 보니, 복잡다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은은 익숙한 이름 하나를 찾아볼 수 있었다.[전선우.][여보세요, 정은 누나, 잘 지내고 있었어요?]“그럭저럭. 넌?”[에이, 말도 마세요. 얼마 전에 넘어져서 종아리가 부러졌는데, 지금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나 됐어요.]“그렇게 심각한 거야?” 정은은 깜짝 놀랐다.[사실 심각한 편은 아니에요. 그냥 오래 휴양을 해야 하거든요. 정은 누나도 제 성격 잘 알잖아요. 저는 움직이기 좋아해서 매일 가만히 누워 있질 못해요.]‘뭐야!’“뼈를 다치면 푹 쉬어야 해. 그래도 의사 말 듣고 편하게 쉬어.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말이야.”[네. 알았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한테 전화를 하신 거죠?]정은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CPRT가 뭐예요? 저는 CPR밖에 몰라요.]정은은 인내심을 가지며 설명했다.“일종의 동적 측정기인데, 일반적으로 생물연구에 쓰여.”[누나가 말한 그 회사는...]“천양 테크놀로지.”[맞아요. 저도 테크 기업, 특히 스타트업에 투자한 적이 있긴 해요. 하지만 솔직히 이 분야는 제가 전문적으로 잘 아는 영역이 아니라서, 대부분 남들이 투자하는 걸 따라갔고, 오래 투자한 적도 없어요. 천양 테크놀로지도 아마 동건 형을 따라 투자했던 걸 거예요. 저는 단순히 돈만 투자했을 뿐, 회사의 결정이나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네?”동건이 말했다.[현빈이가 그 회사 사장이란 말이야.]빙빙 돌다가 그 사람이 자신의 지인이라니.통화를 마치고 정은은 한숨을 쉬며 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그날 현빈과 적게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여우는 너무 교활해서 자칫하면 그의 함정에 빠질 수 있었다.그래서 정은이 생각해낸 가장 좋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현빈을 멀리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주동적으로 찾아갔다니.‘이건 너무 뻘쭘한데...’...동건은 핸드폰을 내려놓은 다음, 아직도 침대에 누워 쿨쿨 자고 있는 수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누가 나더러 제시간에 오라고 했는데? 1분도 늦으면 안 된다며?! 그런데 내가 도착했지만 아직 이렇게 자고 있다니! 나 여기서 널 꼬박 40분이나 기다렸어. 조수민, 넌 양심도 없니?!”침대 위의 여자는 몸을 뒤척이더니 계속 잤다.동건은 씩씩거리며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어젯밤에 또 남자 만나러 간 거야?”질문하는 동시에 그는 레이더처럼 방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다행히 남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이때, 동건의 눈빛은 침대 머리맡의 서랍에 떨어졌다.‘물컵이 왜 두 개지?!’동건은 알 수도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소리를 질렀다.“조, 수, 민!”펑.베개 하나가 날아와 동건의 머리를 찧었다.수민은 몸을 돌려 앉았는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넌 끝도 없니? 왜 계속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야?! 기다릴 거면,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꺼져!”‘누구도 내 수면을 방해할 수 없다고!’동건은 어이가 없었다.‘어,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나한테 화를 낼 수가 있지?!’“야...”“꺼져!”동건은 하마터면 화가 나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그래! 꺼지라면 꺼져야지! 내가 널 무서워할 것 같아?!’멋지게 몸을 돌려 수민에게 도도한 뒷모습을 보여주려고 할 때, 동건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더니 발걸음을
“그래! 넌 성질도 더럽고 기억력도 나쁘네. 대체 어떻게 된 거야?”수민은 동건을 향해 베개를 던졌다.“입 닥쳐!”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여유롭게 피했는데, 이미 이런 공격에 익숙해진 것이었다.수민은 또 다른 베개를 들려고 했지만 동건은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뭘 찾는 거야? 그 베개 나한테 있어.” 수민은 어안이 벙벙했다.“그게 어떻게 거기에 있는 거지?”‘기억력도 너무 안 좋네.’“아가씨, 넌 이미 날 한 번 때렸고, 이번이 두 번째야.”“아.”‘꽤 어색하군.’수민이 물었다.“지금 몇 시야?”“10시 30분.” 그녀는 동건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뭐야, 시간이 아직 이르잖아. 미래의 시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 정성껏 꾸미느라 시간이 좀 오래 걸린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물 좀...”동건은 얼른 말을 이어받았다.“물을 마시고 싶은 거지?”말이 끝나자, 그는 화장대에서 컵 하나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이미 물이 담겨 있었다.“빨리 마셔. 그리고 얼른 일어나서 화장한 다음 나가자고!”수민은 물을 받았는데, 손이 닿자마자 바로 이상함을 알아차렸다.“따뜻한 물이야?”“응!”‘수민이는 여자니까 따뜻한 물을 마셔야겠지?’“얼음물로 바꿔줘.”“아니, 아침부터 차가운 물을 마시겠다고?” 동건도 아침에 일어나서 얼음물을 마셨지만, 수민은 여자였다.“뭐?” 수민은 눈을 부라렸다.“누가 나 따뜻한 물 마신다고 했어? 정신 나간 거야 뭐야!”“아니, 내가 아는 여자...” “아, 네 전 여자친구들?” 수민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이 바보야!”“아니, 넌 왜 자꾸 욕을 하는 거야?”“네 전 여자친구들은 밀크티 마셔? 일식 먹어? 시원한 칵테일 좋아해?”“그런 게 왜 궁금한데?”“이거 다 차가운 음식이잖아. 게다가 생것도 있네. 그럼 여자들은 아예 손도 안 대는 거야?”‘엥!’동건은 말문이 막혔다.수민은 편안하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
“야, 왜 멍을 때리고 있는 거야? 물 줘.”모든 아름다운 장면은 여자가 입을 여는 순간에 툭 하고 깨졌다.동건은 어이가 없었다.“내 요구 하나 들어주면 안 돼?”“말해봐.”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니 수민은 기분이 상쾌해졌다.“나랑 얘기할 때 말투가 좀 부드러웠으면 좋겠어. 우리는 커플이지 원수가 아니잖아. 이러면 우리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뭘 걱정해?”“자신의 아들이 너한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하시겠지!”수민은 말을 하지 않았다.“자기야, 이렇게 말하라는 거야? 이 치마 어때? 어머님께서 좋아하실까? 나 엄청 오랫동안 골랐단 말이야...”동건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그 뭐지. 그냥 예전처럼 말해, 그래, 사나운 네가 더 보기 좋아.”‘사나운 수민이가 정상이지.’방금 그녀가 애교를 부릴 때, 동건은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다시 한번 말해 봐? 누가 사납다는 거야?”“넌 조금도 사납지 않아.”“너 계속 이 단어를 쓰고 있잖아?!”수민은 가장 빠른 속도로 옅은 화장을 했다.“자, 이제 갑시다.”동건은 어안이 벙벙했다.“화장을 한 거야?”“어때? 아주 자연스럽지? 이건 일부러 민낯처럼 화장을 하는 기술인데, 얼핏 보면 마치 화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거야. 너 같은 남자를 속이기에 딱이라고. 괜찮지?”이미 여러 번 속은 동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왜 자꾸 날 욕하는 느낌이 들지?’두 사람이 동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다 되어 갔다.송보미는 문앞에 서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마침내 동건의 차를 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달려가서 웃으며 맞이했다.수민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송보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수민이 왔어? 얼른 들어와. 햇볕 너무 많이 쬐면 안 좋아.”말하면서 수민을 끌고 안으로 데려갔다.‘엄마 아들인 난 어떡하라고?’“어머님, 죄송해요. 어젯밤에 야근을 해서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거든요. 또 옷을 고르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어요. 정말 죄송해요.”동건은 집에 들어서자
“엄청 오래 기다릴 줄 알았는데, 동건이 그 녀석이 이렇게 빨리 여자친구를 찾을 줄은 정말 몰랐어. 이제 드디어 내 며느리에게 줄 수 있다니.”‘역시, 경매장에서 찍으신 거구나. 적어도 몇 억, 심지어 수십 억이 들지도 몰라.’“안 돼요, 어머님, 저는 이 팔찌를 가질 수 없어요.” 수민은 즉시 거절했다.만약 그녀가 동건의 진짜 여자친구라면, 아무리 비싼 팔찌라도 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수민이 가짜 여자친구였던 것이다.‘가짜인 내가 수십억짜리 팔찌를 받다니, 쯧쯧... 그건 너무하지.’“팔찌 하나일 뿐,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안심해, 이건 너희들에게 압박을 주는 것도, 결혼하라고 재촉을 하는 것도 아니야. 난 단지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이야.”송보미는 팔찌를 상자에서 꺼내 직접 수민에게 끼워 주었다.“크기가 딱 맞네. 어머, 네 피부톤과 너무 잘 어울린다.”“최고급 비취 팔찌이니 당연히 잘 어울리겠지!’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동건은 소파에 앉아 히죽거리며 물었다.“무슨 얘기를 방에 가서 한 거야? 그것도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하다니...”“됐어, 내가 네 여자친구를 빼앗아갔다고 질투하는 거지? 지금 돌려줄게.”송보미는 웃으며 수민을 밀었다.“엄마, 저한테 그런 누명 씌우지 마세요. 전 그런 뜻이 없었단 말이에요...”동건은 턱을 들더니 은근히 부인했다.오후에 수민은 편안하게 마사지를 받았는데, 바깥의 미용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그녀는 물을 마시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는데, 수민은 물컵을 들고 거실 창문 앞으로 가서 받았다.“여보세요?”[날 기억하시나요? 진성후예요.]수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날 밤 호텔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당연하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그날 이후로 나한테 연락도 안 했으니까요. 난 누나가 날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남자가 억울해하며 말하자, 수민은 마음이 약해졌다.“너도 전화번호를 안 남겼잖아?”[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수민과 동건을 주시하고 있었다.송보미가 입을 열었다.“어머, 두 사람 얼마나 달콤한지 좀 봐요!”“저는 도련님께서 이렇게 주동적으로 한 여자에게 다가간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수미가 일반 여자아이겠어요? 출신이든 교양이든 모두 훌륭하단 말이에요. 이 녀석도 마침내 제대로 된 신붓감을 찾았네요.”“도련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으셨죠.”“이대로 수민이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난 자다가도 행복해서 일어날지도 몰라요.”“어? 그런데 도련님의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시죠?”“그래요?” 송보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았다.“정말이네요... 수민이의 몸이 좀 뻣뻣해 보이지 않아요?”‘두 사람 분명히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는데, 이상하다...’아래층에서 동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움직이지 마, 우리 엄마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하셨어.”“언제부터 그곳에 서 계셨죠?”“네가 전화를 받을 때부터.”‘망했네.’송보미가 말했다.“왜 껴안기만 하고 진도를 안 나가는 거죠?”수민은 이 말을 똑똑히 들었다.그녀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았다.수민은 동건을 바라보며 말했다.“키스해줘.”“뭐?”“왜 멍을 때리고 그래? 빨리!”동건은 침을 삼키더니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맹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다음 순간, 동건은 여자의 가녀린 허리를 포악하게 감싸더니 강렬하고 거친 키스를 했다.축축하고 건조하며 입술과 혀가 얽히고설켰다.“어머! 키스하고 있는 것 좀 봐요. 이모님, 우리 얼른 피해야겠죠? 아이들이 난처함을 느낄지도 몰라요.”“그러니까요.”송보미가 떠났다.찰싹!깔끔한 소리가 울려퍼졌다.동건은 영문을 몰랐다.“아니... 왜 내 얼굴을 때리는 거야?”수민은 다리가 나른해졌다.“너 왜 진짜로 키스하는 건데?”게다가 수민은 동건의 얼굴을 때린 게 아니라 그저 가볍게 밀어냈을 뿐이었다.따귀와는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정은은 그제야 한동안 재석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외출하는 시간이 많이 비슷해서 전에 자주 마주쳤지만, 최근에 정은은 재석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너무 바빠서 그동안 실험실에서 지냈겠지.’정은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저녁에 그녀는 도서관에서 잠시 책을 보다가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8시였다.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뒤에 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재석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정은은 재빨리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선배님.”그러나 남자는 못 들은 것처럼 곧장 지나갔다.‘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거나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그런가?’정은은 집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나가서 몇 바퀴 뛸 작정이었다.마침 재석에게 CPRT의 구매 경로를 물어볼 수도 있었다.사실 기계를 사겠다고 할 때, 정은은 가장 먼저 재석과 오미선을 떠올렸다.오미선은 최근에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늘 병원에 찾아갔다. 그래서 정은은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자신의 돈으로 기계를 산 일이 터진다면, 송지혜가 악의적으로 실험실을 강점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이다.‘아마도 병원에서 직접 뛰쳐나와 송지혜 교수님과 학교를 찾아가서 따지시겠지.’그러나 현재 학교는 분명히 송지혜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오미선이 찾아가도 아무런 좋은 점을 얻지 못할 것이다.‘괜히 화를 내시면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그냥 말을 하지 말자.’그래서 재석을 찾는 게 최상책이었다.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정은이 문자를 보내고 또 전화를 걸어도 재석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너무 바빠서 핸드폰을 볼 시간이 없는 거겠지.’그러나 재석을 찾으려 했지만, 오늘에야 결코 만났던 것이다.원래 정은은 이미 현빈에게 연락했는데,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재석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그녀도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분석해 본
진욱이 물었다.“너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무슨 일 있었어?”재석이 대답했다.“그건 네 착각이야.”말을 마치고 휴식실로 걸어갔다.그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는데, 서랍에 넣으려 했다.서랍은 안쪽에 있었고, 문을 열자, 정은이 전에 쓰던 접이식침대가 원래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그때 자신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왔을 때, 마침 낮잠을 자고 있던 정은과 부딪친 것을 생각하면, 재석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숨이 거칠어졌다. ‘마치 꿈속에서처럼...’재석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 순간, 괴로움과 부끄러움이 일제히 밀려왔다.이런 자신 때문에 재석은 창피함을 느꼈다.“조 교수, 내가 야식 좀 시켰는데. 같이 먹을래?” 진욱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아니야, 너 혼자 먹어.”“치킨과 족발이야, 정말 안 먹을 거야?”“응.”“이 치킨은 말이지, 그래도 정은이가 한 게 가장 맛있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정은이 이미 개학한 거 아니야? 왜 줄곧 실험실에 놀러 오지 않았지? 다음에 정은이 만나면 자주 오라고 전해줘. 우리 모두 정은이가 엄청 보고 싶단 말이야.”휴식실에서 나온 재석은 이미 진정을 되찾았다.“그럼 네가 직접 가서 말하든가.”정은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있었다.진욱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아니, 두 사람 이웃이니 매일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냥 우리의 그리움을 전해줄 수 있잖아?”“응, 안 돼.”한참 후, 진욱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조 교수, 너 최근에 정말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 같아.”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 있으면서 들은 체 만 체했다.진욱은 계속 중얼거렸다.“설마 실연당한 건 아니겠지? 매일 엄숙한 표정으로 실험실에 나오다니. 정말 무서워 죽겠네.”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실험에 전념했다. 그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이것 봐, 또 이러네...”진욱은 혀를 찼다....다음 날 저녁, 하늘에는 붉은 구름이 떠돌았고, 푸른 하늘도 금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