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눈을 뜬 아이는 아직도 누워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엄마는 왜 아직도 자는 거예요? 놀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나를 몇 번 흔들어보던 아이는 금세 포기하고 티비를 틀어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죽은 지 삼 일째 되는 날이라 내 몸에서는 이때부터 썩은 내가 약간씩 나기 시작했다.점심에 집으로 돌아온 조승연은 티비 앞에 있는 아들을 보더니 화를 내며 전원을 뽑아버렸다.“조세훈, 너 어릴 때부터 계속 티비 보면 나중에 눈멀어.”“엄마는 왜 너랑 안 놀아주는 거야? 날씨도 좋은데 같이 나가서 좀 돌아다니지.”그때 이상한 냄새를 맡아낸 조승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한청아 진짜 너무하네. 애도 안 보고 집 정리도 안 하고... 결혼을 해봤자 어차피 다 내가 하고 있잖아!”욕설을 퍼부으며 안방 문을 열던 조승연은 안에서 나는 악취에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아 한청아 진짜! 안방은 왜 또 이렇게 악취가 진동을 하는 거야!”나는 그의 목에 손을 올린 채 손부채질을 하며 바로 문을 닫아버린 조승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저 자세로 누워만 있었는데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상황인지 들어가 보는 게 정상 아닌가?“내가 미쳤지, 너 같은 거랑 결혼을 다 하고.”내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승연은 문에다 대고 욕을 하고 있었다.“나랑 살기 싫으면 이딴 식으로 시위하지 말고 그냥 이혼해! 애는 나랑 유라가 같이 키울 거니까 걱정 말고.”“아직 젊으니까 이혼하고 너도 새로운 사람 찾아봐.”“아무튼 애는 못 줘.”그의 말을 들으며 웃던 나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이혼? 사람도 다 죽은 마당에 무슨 이혼이야!”“조승연, 내가 아무리 귀신이 됐어도 절대 너 잘사는 꼴은 못 봐.”방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조승연은 거실로 가 세훈이를 보며 말했다.“세훈아, 아빠랑 아줌마랑 같이 살자. 네 방에 미니카도 잔뜩 넣어줄게.”“싫어요, 나는 엄마랑 살 거예요!”조승연은 새집에
제 볼을 감싸 쥐고 있던 아이는 내 손을 자신의 볼 위로 올렸다.“엄마, 나 아파요. 빨리 호 해줘요.”세훈이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한편 새집으로 돌아간 조승연은 진유라한테 세훈이가 자신과 함께 살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러자 진유라가 조승연의 손을 자신의 배에 올리며 말했다.“동생이 생기면 우리 세훈이도 말 잘 듣겠죠.”“승연 씨, 나 당신 아이 가졌어요.”진유라가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조승연도 그녀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추더니 신나서 물었다.“병원은 가봤어? 남자야 여자야?”“한 달밖에 안돼서 그건 아직 몰라요.”“그래그래.”진유라가 고개를 젓든 말든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흥분한 조승연은 집안을 돌아다니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리고 진유라와 함께 있어 주기 위해 곧바로 일도 비서에게 다 떠넘겨 버렸다.한편 여전히 배고파서 힘들어하고 있던 세훈이는 며칠 동안 내가 한 자세로만 누워있는 걸 보고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채 물어왔다.“엄마, 아빠도 나 버리고 나갔는데 설마 엄마도 나 버릴 건 아니죠?”“나 말 잘 듣고 투정도 안 부릴 테니까 나 안 버리면 안 돼요?”며칠 동안 물을 못 마친 아이의 목소리는 진작에 갈라져 있었고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심했는지 눈도 잔뜩 충혈돼있었다.“엄마가 왜 널 버리겠어, 아가. 너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목놓아 외치며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그렇게라도 세훈이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가만히 아이를 지켜보았다.
이틀이 지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조승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파진 아이는 주방으로 들어가 다 타버린 계란을 가져오더니 그걸 그대로 집어삼켰다.“엄마, 이거 너무 써요.”계란을 먹으며 나를 보던 아이는 내가 아무 말도 못 한다는 걸 안 건지 스스로 제 볼을 매만지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세훈아, 이러다가는 너까지 죽겠어. 경찰 아저씨라도 찾아가 얼른.”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더욱더 초조하게 집을 돌아다니며 세훈이를 살릴 방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계란을 다 먹은 세훈이는 이미 다 울어버려서 눈물샘이 말라버린 건지 울지도 않고 내 옆에 가만히 누워있었다.“엄마는 왜 내 말에 대답을 안 해요? 몰래 티비도 안 볼 건데 대답 좀 해주면 안 돼요? 나 너무 힘들어요...”잠에 빠져들듯 눈을 천천히 감던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아이가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게 내 눈에 보였다.“엄마! 한참 찾았잖아요!”나를 본 아이가 품을 향해 달려오자 나는 한달음에 아들을 안아주었다.세훈이는 그동안 많이 서러웠는지 작은 솜 주먹으로 나를 콩콩 때리며 울어 젖혔다.“미안해 아가, 다 엄마 탓이야. 내가 널 잘 지켰어야 했는데... 그만 울자, 엄마 이제 아무 데도 안 가.”나는 무게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한참이나 울고 난 아이는 갑자기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기 자신을 보며 의아한 듯 물어왔다.“세훈아, 우린 이미 죽었어. 그러니까 이제 가야 해.”나는 세훈이의 손을 잡고 여기를 벗어나려 했지만 주위의 벽들이 우리를 막고 있는 게 느껴졌다.마치 절대로 이 집을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강한 힘이 우리를 막아서자 나는 다시 의아해졌다.나는 마음의 짐을 다 덜어냈는데 왜 아직도 못 가는 거지? 설마 세훈이한테 남은 한이라도 있는 건가?한동안 조용하던 세훈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공중에 떠 있는 나를 번갈아 보더니 방방 뛰며 말했다.“와, 나 이제 엄마가 둘이나 있어요!”나는 아직 죽음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아이를
“한청아가 죽었다고요? 말도 안 돼요, 며칠 전에 집에 갔을 때만 해도 자고 있었는데.”“그리고 우리 세훈이는 내가 호텔로 데려가서 밥도 먹었었는데 죽었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조승연은 미친 사람처럼 경찰에게 달려들며 하얀 천을 덮는 것을 막았다.“엄마, 우린 여기 있는데 아빠는 왜 우리를 못 봐요?”내 손을 꼭 잡은 세훈이는 아빠가 왜 저렇게 슬퍼하는지를 알지 못했다.“아가, 우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아빠가 우릴 못 보는 거야.”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설명하고 있을 때 경찰은 조승연을 사무실로 데려가 사건에 대해 물었고 때마침 부검의가 우리들의 사인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왔다.침묵을 유지한 채 우리의 외관을 단정히 해주던 경찰은 아까부터 울면서 밖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또 자신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냐고 하소연하고 있는 조승연을 보며 말했다.“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 하세요. 아내분은 6월 22일에 돌아가셨는데 6월 23일에 집에 돌아가신 분이 그걸 몰랐어요?”“그리고 당신 아들은 굶어 죽었어요. 이 시국에 아사가 어떤 의민지 알기나 해요?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조승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부검보고서에 적힌 글들을 훑어봤다.[한청아, 여, 31세, 사인 심장마비.][조세훈, 남, 3세, 사인 아사.]“세 살밖에 안되는 애가 집에서 굶어 죽을 동안 당신은 뭐 했어요?”조사를 통해 조승연이 비서와 밖에서 오랫동안 동거했다는 걸 알아낸 경찰은 조승연을 아니꼽게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저... 저는...”경찰의 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조승연은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사무실에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그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울다 지친 조승연은 시신 확인서에 사인을 하고 내일의 화장을 기다렸다.나와 세훈이는 그런 그를 따라 그의 새집으로 향했다.“왜 그래요? 설마 청아 씨가 또 당신 주의 끌겠다고 아이를 학대한 거예요?”진유라는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며
이튿날, 나와 세훈이의 장례식이 열리자 지인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장례식장을 찾아와 나와 세훈이가 함께 누워있는 관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엄마, 사람들 엄청 많이 왔어요. 그런데 왜 다 나를 모른 척 하는 거예요?”세훈이는 다른 사람들의 몸을 관통하는 게 마냥 재밌는지 웃으며 뛰어다녔다.나는 그런 아이의 옆에서 조용히 검은 정장을 입고 가슴에 하얀 꽃을 매단 조승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어떡하니 승연아.”“그래도 너라도 잘 버텨야지.”조문 온 사람들마다 그에게로 다가가 한마디씩 위로를 건넸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나의 흑백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미워서 그런 거야?”“네가 좀만 더 살갑게 굴었으면 나도 널 모른 척하지는 않았을 거야.”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눈을 감으면 왈칵 쏟아질 듯이 가득.“지금 내 탓하는 거야?”“내가 너더러 진유라랑 만나라고 했니?”“내가 애 보지 말라고 부추겼니?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뺨을 갈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세훈이는 살 수 있었는데 아이는 오로지 그의 무책임 때문에 죽어 나간 것이다.아이의 아빠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책임감 없이 아이를 나한테 맡겨놓고 다른 여자랑 놀러 다니는지.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화나는 건 지인들한테는 출장 때문에 집에 와보지 못해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거라고 둘러댄 그의 행동이었다.다들 그의 말을 믿었기에 그를 다독이며 잘 견뎌내라고 위안을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그리고 내 부모님마저 먼 길 달려오셔서 그를 위로해주고 있었다.못 본 사이에 흰머리가 더 생긴 것 같은 아버지는 자신보다 우리 사진 앞을 소나무처럼 가만히 서서 지키며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조승연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조 서방, 이러다가는 자네까지 쓰러져. 좀 앉아서 쉬어.”
“괜찮아요 장인어른,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목이 멘 채로 말을 이어가며 제 뺨을 때리는 조승연에 아버지가 그를 말리려고 일어섰는데 그 순간 장례식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조승연, 너 진짜 대단하다. 내 애는 죽어도 신경 안 쓰더니 네 와이프랑 자식 장례식은 치러주는 거야?”진유라는 자신도 아이를 잃어서 슬픈데 아내 장례식장만 지키고 있는 조승연이 못마땅해 내 사진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당황한 조승연은 빠르게 진유라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아내랑 아이를 동시에 잃진 않았을 거야, 다 네 탓이라고!”말을 하면서 손에 힘을 준 조승연 때문에 진유라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그때 둘의 대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버지가 조승연을 보며 물었다.“이게 무슨 말인가?”“할아버지, 조승연은 1년 전부터 나랑 만나왔어요. 이 사람은 진작에 당신 딸이랑 이혼하고 싶어 했다고요!”진유라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조승연을 바라봤다.“그러고 보니 한청아가 죽던 날도 당신은 나랑 자느라 아들 전화를 못 받았지?”“하하하...”진유라는 뭐가 웃긴지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다.그에 조문 온 사람들도 모두 그가 여자랑 뒹구느라 아내와 자식이 죽어가게 방치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특히 세 살 난 아이는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온전히 조승연 때문에 죽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까지 다 들통나버린 것이다.“아빠 너무 무서워요... 아빠는 왜 아줌마 목을 조르는 거예요?”“괜찮아 아가, 이런 건 보지 마.”나는 내 손을 잡아 오는 아이를 보며 말해주었다.그런데 내 목소리가 아까보다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여보니 내 발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아마도 곧 이승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그때 진유라의 말을 들은 아버지가 조승연의 뺨을 때리더니 그를 장례식장 밖으로 내쫓았다.“장인어른,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청아랑 세훈이 보내주는 것까지만이라도 허락해주세요...”장례식장 밖에서 애처롭게 문
나와 세훈이의 죽음은 당지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것 때문에 조승연의 회사 주식은 날로 떨어지더니 그는 결국 파산을 선포하게 되었다.하지만 조승연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내 아버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고 매일같이 아버지의 집 앞으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물었다.그에 참다못한 아버지가 빗자루를 휘두르며 그를 쫓아내니 조승연은 또다시 찾아갈 엄두를 못 내고 우리가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집안에는 아직도 악취가 자욱했지만 조승연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뒤적여 예전의 추억들을 찾아보며 중얼거렸다.“청아야, 내가 미안해. 내가 널 구하지 못했던 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나만 남겨두고 가버리면 어떡해...”계속 눈물을 흘려 대는 조승연 때문에 베개 시트도 점점 젖어 들어갔다.나는 이렇게 처절하게 우는 그를 보니 조금은 통쾌해지는 것 같았다.“바람피운 것도 너고 이 집과 나랑 세훈이를 먼저 버린 것도 너야.”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나는 세훈이의 손을 잡고 조승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아이가 죽은 게 가슴 아프긴 하지만 세훈이가 진유라와 조승연을 따라갔었더라면 학대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어쩌면 나랑 같이 있는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엄마, 아빠 너무 슬프게 우는데요? 우리가 떠나는 게 싫은가 봐요.”그런데 조승연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달려갔던 세훈이가 무슨 일인지 빠르게 손을 떼어내며 놀라고 있었다.“세훈아, 우리 세훈이야?”그런데 이때 조승연이 무슨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내 품으로 달려오는 세훈이를 보게 된 그는 소리 내 웃다가 또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청아야, 세훈아... 너희 다시 돌아온 거야?”정확히 나를 바라보는 조승연의 시선을 느낀 나는 마침내 그가 우리를 볼 수 있다는 걸 확신하고서는 눈을 번뜩이며 세훈이를 잡아당겼다.“그래, 네가 어떻게 죽었나 보러 왔어.”“우리가 죽은 건 다 너 때문이야.”나는 그간의 서러움을 담아 온몸으로 한기를
심장에서 전해지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나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엄마, 왜 그래요?”하지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걱정스레 묻는 아들의 모습에 나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나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려 했지만 몸이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고 뻗었던 손은 아들에게 닿지도 못한 채 아래로 떨구어졌다.그런 나를 본 아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엄마, 왜 그러는 거예요... 나 두고 가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엄마...”아이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머리가 울려왔고 심장이 점점 옥죄어드는 것 같아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아가... 얼른 아빠한테 전화해.”아직 세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는 내 상태가 어떤 건지도 정확히 몰랐기에 나는 그를 통해 남편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띄엄띄엄 말하는 내 말을 용케 알아들은 세훈이는 눈물을 닦으며 거실로 나가더니 내 핸드폰을 들고 들어왔다.그리고는 그걸 내 얼굴에 들이밀며 잠금을 해제했다.의식이 점점 흐려져 가고 있던 나의 몸은 빈껍데기 안에 갇혀버린 것처럼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여기서 내가 믿을 거라고는 아들밖에 없었지만 아직 어린아이가 119에 신고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나는 그저 그가 아빠에게만 연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조승연의 번호를 긴급연락처로 설정해둔 덕분에 세훈이는 화면에 있는 바로 가기 버튼을 눌러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통했지만 받는 이가 없어 한동안 수신음만 들리다가 결국 여자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뭔지도 몰랐던 세훈이는 반복해서 아빠를 찾아댔고 희망이 사라진 나의 눈앞도 서서히 어두워졌다.할아버지도 집안의 유전병인 심장병으로 돌아가셔서 어릴 때부터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심장을 유독 더 살피며 신경을 써왔건만 나는 결국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나와 세훈이의 죽음은 당지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것 때문에 조승연의 회사 주식은 날로 떨어지더니 그는 결국 파산을 선포하게 되었다.하지만 조승연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내 아버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고 매일같이 아버지의 집 앞으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물었다.그에 참다못한 아버지가 빗자루를 휘두르며 그를 쫓아내니 조승연은 또다시 찾아갈 엄두를 못 내고 우리가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집안에는 아직도 악취가 자욱했지만 조승연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뒤적여 예전의 추억들을 찾아보며 중얼거렸다.“청아야, 내가 미안해. 내가 널 구하지 못했던 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나만 남겨두고 가버리면 어떡해...”계속 눈물을 흘려 대는 조승연 때문에 베개 시트도 점점 젖어 들어갔다.나는 이렇게 처절하게 우는 그를 보니 조금은 통쾌해지는 것 같았다.“바람피운 것도 너고 이 집과 나랑 세훈이를 먼저 버린 것도 너야.”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나는 세훈이의 손을 잡고 조승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아이가 죽은 게 가슴 아프긴 하지만 세훈이가 진유라와 조승연을 따라갔었더라면 학대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어쩌면 나랑 같이 있는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엄마, 아빠 너무 슬프게 우는데요? 우리가 떠나는 게 싫은가 봐요.”그런데 조승연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달려갔던 세훈이가 무슨 일인지 빠르게 손을 떼어내며 놀라고 있었다.“세훈아, 우리 세훈이야?”그런데 이때 조승연이 무슨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내 품으로 달려오는 세훈이를 보게 된 그는 소리 내 웃다가 또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청아야, 세훈아... 너희 다시 돌아온 거야?”정확히 나를 바라보는 조승연의 시선을 느낀 나는 마침내 그가 우리를 볼 수 있다는 걸 확신하고서는 눈을 번뜩이며 세훈이를 잡아당겼다.“그래, 네가 어떻게 죽었나 보러 왔어.”“우리가 죽은 건 다 너 때문이야.”나는 그간의 서러움을 담아 온몸으로 한기를
“괜찮아요 장인어른,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목이 멘 채로 말을 이어가며 제 뺨을 때리는 조승연에 아버지가 그를 말리려고 일어섰는데 그 순간 장례식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조승연, 너 진짜 대단하다. 내 애는 죽어도 신경 안 쓰더니 네 와이프랑 자식 장례식은 치러주는 거야?”진유라는 자신도 아이를 잃어서 슬픈데 아내 장례식장만 지키고 있는 조승연이 못마땅해 내 사진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당황한 조승연은 빠르게 진유라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아내랑 아이를 동시에 잃진 않았을 거야, 다 네 탓이라고!”말을 하면서 손에 힘을 준 조승연 때문에 진유라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그때 둘의 대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버지가 조승연을 보며 물었다.“이게 무슨 말인가?”“할아버지, 조승연은 1년 전부터 나랑 만나왔어요. 이 사람은 진작에 당신 딸이랑 이혼하고 싶어 했다고요!”진유라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조승연을 바라봤다.“그러고 보니 한청아가 죽던 날도 당신은 나랑 자느라 아들 전화를 못 받았지?”“하하하...”진유라는 뭐가 웃긴지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다.그에 조문 온 사람들도 모두 그가 여자랑 뒹구느라 아내와 자식이 죽어가게 방치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특히 세 살 난 아이는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온전히 조승연 때문에 죽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까지 다 들통나버린 것이다.“아빠 너무 무서워요... 아빠는 왜 아줌마 목을 조르는 거예요?”“괜찮아 아가, 이런 건 보지 마.”나는 내 손을 잡아 오는 아이를 보며 말해주었다.그런데 내 목소리가 아까보다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여보니 내 발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아마도 곧 이승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그때 진유라의 말을 들은 아버지가 조승연의 뺨을 때리더니 그를 장례식장 밖으로 내쫓았다.“장인어른,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청아랑 세훈이 보내주는 것까지만이라도 허락해주세요...”장례식장 밖에서 애처롭게 문
이튿날, 나와 세훈이의 장례식이 열리자 지인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장례식장을 찾아와 나와 세훈이가 함께 누워있는 관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엄마, 사람들 엄청 많이 왔어요. 그런데 왜 다 나를 모른 척 하는 거예요?”세훈이는 다른 사람들의 몸을 관통하는 게 마냥 재밌는지 웃으며 뛰어다녔다.나는 그런 아이의 옆에서 조용히 검은 정장을 입고 가슴에 하얀 꽃을 매단 조승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어떡하니 승연아.”“그래도 너라도 잘 버텨야지.”조문 온 사람들마다 그에게로 다가가 한마디씩 위로를 건넸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나의 흑백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미워서 그런 거야?”“네가 좀만 더 살갑게 굴었으면 나도 널 모른 척하지는 않았을 거야.”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눈을 감으면 왈칵 쏟아질 듯이 가득.“지금 내 탓하는 거야?”“내가 너더러 진유라랑 만나라고 했니?”“내가 애 보지 말라고 부추겼니?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뺨을 갈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세훈이는 살 수 있었는데 아이는 오로지 그의 무책임 때문에 죽어 나간 것이다.아이의 아빠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책임감 없이 아이를 나한테 맡겨놓고 다른 여자랑 놀러 다니는지.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화나는 건 지인들한테는 출장 때문에 집에 와보지 못해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거라고 둘러댄 그의 행동이었다.다들 그의 말을 믿었기에 그를 다독이며 잘 견뎌내라고 위안을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그리고 내 부모님마저 먼 길 달려오셔서 그를 위로해주고 있었다.못 본 사이에 흰머리가 더 생긴 것 같은 아버지는 자신보다 우리 사진 앞을 소나무처럼 가만히 서서 지키며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조승연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조 서방, 이러다가는 자네까지 쓰러져. 좀 앉아서 쉬어.”
“한청아가 죽었다고요? 말도 안 돼요, 며칠 전에 집에 갔을 때만 해도 자고 있었는데.”“그리고 우리 세훈이는 내가 호텔로 데려가서 밥도 먹었었는데 죽었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조승연은 미친 사람처럼 경찰에게 달려들며 하얀 천을 덮는 것을 막았다.“엄마, 우린 여기 있는데 아빠는 왜 우리를 못 봐요?”내 손을 꼭 잡은 세훈이는 아빠가 왜 저렇게 슬퍼하는지를 알지 못했다.“아가, 우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아빠가 우릴 못 보는 거야.”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설명하고 있을 때 경찰은 조승연을 사무실로 데려가 사건에 대해 물었고 때마침 부검의가 우리들의 사인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왔다.침묵을 유지한 채 우리의 외관을 단정히 해주던 경찰은 아까부터 울면서 밖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또 자신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냐고 하소연하고 있는 조승연을 보며 말했다.“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 하세요. 아내분은 6월 22일에 돌아가셨는데 6월 23일에 집에 돌아가신 분이 그걸 몰랐어요?”“그리고 당신 아들은 굶어 죽었어요. 이 시국에 아사가 어떤 의민지 알기나 해요?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조승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부검보고서에 적힌 글들을 훑어봤다.[한청아, 여, 31세, 사인 심장마비.][조세훈, 남, 3세, 사인 아사.]“세 살밖에 안되는 애가 집에서 굶어 죽을 동안 당신은 뭐 했어요?”조사를 통해 조승연이 비서와 밖에서 오랫동안 동거했다는 걸 알아낸 경찰은 조승연을 아니꼽게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저... 저는...”경찰의 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조승연은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사무실에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그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울다 지친 조승연은 시신 확인서에 사인을 하고 내일의 화장을 기다렸다.나와 세훈이는 그런 그를 따라 그의 새집으로 향했다.“왜 그래요? 설마 청아 씨가 또 당신 주의 끌겠다고 아이를 학대한 거예요?”진유라는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며
이틀이 지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조승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파진 아이는 주방으로 들어가 다 타버린 계란을 가져오더니 그걸 그대로 집어삼켰다.“엄마, 이거 너무 써요.”계란을 먹으며 나를 보던 아이는 내가 아무 말도 못 한다는 걸 안 건지 스스로 제 볼을 매만지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세훈아, 이러다가는 너까지 죽겠어. 경찰 아저씨라도 찾아가 얼른.”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더욱더 초조하게 집을 돌아다니며 세훈이를 살릴 방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계란을 다 먹은 세훈이는 이미 다 울어버려서 눈물샘이 말라버린 건지 울지도 않고 내 옆에 가만히 누워있었다.“엄마는 왜 내 말에 대답을 안 해요? 몰래 티비도 안 볼 건데 대답 좀 해주면 안 돼요? 나 너무 힘들어요...”잠에 빠져들듯 눈을 천천히 감던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아이가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게 내 눈에 보였다.“엄마! 한참 찾았잖아요!”나를 본 아이가 품을 향해 달려오자 나는 한달음에 아들을 안아주었다.세훈이는 그동안 많이 서러웠는지 작은 솜 주먹으로 나를 콩콩 때리며 울어 젖혔다.“미안해 아가, 다 엄마 탓이야. 내가 널 잘 지켰어야 했는데... 그만 울자, 엄마 이제 아무 데도 안 가.”나는 무게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한참이나 울고 난 아이는 갑자기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기 자신을 보며 의아한 듯 물어왔다.“세훈아, 우린 이미 죽었어. 그러니까 이제 가야 해.”나는 세훈이의 손을 잡고 여기를 벗어나려 했지만 주위의 벽들이 우리를 막고 있는 게 느껴졌다.마치 절대로 이 집을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강한 힘이 우리를 막아서자 나는 다시 의아해졌다.나는 마음의 짐을 다 덜어냈는데 왜 아직도 못 가는 거지? 설마 세훈이한테 남은 한이라도 있는 건가?한동안 조용하던 세훈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공중에 떠 있는 나를 번갈아 보더니 방방 뛰며 말했다.“와, 나 이제 엄마가 둘이나 있어요!”나는 아직 죽음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아이를
제 볼을 감싸 쥐고 있던 아이는 내 손을 자신의 볼 위로 올렸다.“엄마, 나 아파요. 빨리 호 해줘요.”세훈이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한편 새집으로 돌아간 조승연은 진유라한테 세훈이가 자신과 함께 살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러자 진유라가 조승연의 손을 자신의 배에 올리며 말했다.“동생이 생기면 우리 세훈이도 말 잘 듣겠죠.”“승연 씨, 나 당신 아이 가졌어요.”진유라가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조승연도 그녀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추더니 신나서 물었다.“병원은 가봤어? 남자야 여자야?”“한 달밖에 안돼서 그건 아직 몰라요.”“그래그래.”진유라가 고개를 젓든 말든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흥분한 조승연은 집안을 돌아다니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리고 진유라와 함께 있어 주기 위해 곧바로 일도 비서에게 다 떠넘겨 버렸다.한편 여전히 배고파서 힘들어하고 있던 세훈이는 며칠 동안 내가 한 자세로만 누워있는 걸 보고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채 물어왔다.“엄마, 아빠도 나 버리고 나갔는데 설마 엄마도 나 버릴 건 아니죠?”“나 말 잘 듣고 투정도 안 부릴 테니까 나 안 버리면 안 돼요?”며칠 동안 물을 못 마친 아이의 목소리는 진작에 갈라져 있었고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심했는지 눈도 잔뜩 충혈돼있었다.“엄마가 왜 널 버리겠어, 아가. 너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목놓아 외치며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그렇게라도 세훈이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가만히 아이를 지켜보았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뜬 아이는 아직도 누워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엄마는 왜 아직도 자는 거예요? 놀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나를 몇 번 흔들어보던 아이는 금세 포기하고 티비를 틀어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죽은 지 삼 일째 되는 날이라 내 몸에서는 이때부터 썩은 내가 약간씩 나기 시작했다.점심에 집으로 돌아온 조승연은 티비 앞에 있는 아들을 보더니 화를 내며 전원을 뽑아버렸다.“조세훈, 너 어릴 때부터 계속 티비 보면 나중에 눈멀어.”“엄마는 왜 너랑 안 놀아주는 거야? 날씨도 좋은데 같이 나가서 좀 돌아다니지.”그때 이상한 냄새를 맡아낸 조승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한청아 진짜 너무하네. 애도 안 보고 집 정리도 안 하고... 결혼을 해봤자 어차피 다 내가 하고 있잖아!”욕설을 퍼부으며 안방 문을 열던 조승연은 안에서 나는 악취에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아 한청아 진짜! 안방은 왜 또 이렇게 악취가 진동을 하는 거야!”나는 그의 목에 손을 올린 채 손부채질을 하며 바로 문을 닫아버린 조승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저 자세로 누워만 있었는데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상황인지 들어가 보는 게 정상 아닌가?“내가 미쳤지, 너 같은 거랑 결혼을 다 하고.”내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승연은 문에다 대고 욕을 하고 있었다.“나랑 살기 싫으면 이딴 식으로 시위하지 말고 그냥 이혼해! 애는 나랑 유라가 같이 키울 거니까 걱정 말고.”“아직 젊으니까 이혼하고 너도 새로운 사람 찾아봐.”“아무튼 애는 못 줘.”그의 말을 들으며 웃던 나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이혼? 사람도 다 죽은 마당에 무슨 이혼이야!”“조승연, 내가 아무리 귀신이 됐어도 절대 너 잘사는 꼴은 못 봐.”방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조승연은 거실로 가 세훈이를 보며 말했다.“세훈아, 아빠랑 아줌마랑 같이 살자. 네 방에 미니카도 잔뜩 넣어줄게.”“싫어요, 나는 엄마랑 살 거예요!”조승연은 새집에
아이를 데리고 호텔레스토랑으로 간 진유라는 바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잔뜩 시켰다.“세훈아, 아줌마가 새우 까줄게.”진유라는 온화한 척하며 조승연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있었지만 배가 너무 고팠던 세훈이는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새우는 주는 족족 받아먹었다.세훈이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진유라는 핸드폰을 꺼내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고는 술 한잔을 입에 머금은 채 조승연에게로 다가갔다.입에 술을 머금은 진유라를 보고 문득 아이를 떠올린 조승연이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진유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손으로 핸드폰에 빨려 들어갈 듯 애니에 집중하고 있는 세훈이를 가리켰다.그걸 본 조승연이 바로 진유라의 가슴을 만지며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검붉은 와인이 둘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그 광경에 깜짝 놀란 나는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아이 앞에서 이러는 게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빠로서의 그의 체면만은 지켜주기 위해 소리쳤다.“안돼! 세훈이가 보고 있으니까 제발 그만해!”하지만 키스를 하느라 귀를 막아버린 그들은 세훈이가 일어서서 자신들을 보고 있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아빠와 아줌마가 뭘 하는지 몰라 눈을 크게 뜨던 아이는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이가 없자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밥을 다 먹은 조승연은 진유라와 함께 세훈이를 집에 데려다주었다.“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직도 집에 안 들어온 거야?”여전히 캄캄한 집에 나를 씹어대며 방안으로 향하던 조승연은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보더니 세훈이를 내 옆에 세워두고 말했다.“애 데려왔으니까 잘 좀 보고 있어.”“난 회사에 일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해.”진유라와의 잠자리가 급했던 조승연은 내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할 말만 했다.그는 말을 마치고 나를 흔들어보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냥 아이를 데리고 나간 일로 화났겠거니 하며 말을 이었다.“아무튼 난 애 데려왔으니까 이만 간다.”세훈이에게 일찍
주방으로 달려 들어가 보니 프라이팬에 올려진 계란은 이미 다 타버려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방안에도 연기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그 광경에 나는 조급했지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점점 절망해가고 있었다.내가 죽어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탓에 아이도 나와 함께 죽게 되는 걸까.내가 가슴 졸이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승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자마자 주방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본 그는 나를 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한청아, 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연기 나는 거 안 보여?”빠르게 불을 끈 그가 후드를 키자 안에서 인기척을 들은 세훈이가 달려나가 조승연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엄마는? 너 혼자 집에 두고 시장 간 거야?”“진짜 점점 막 나가네.”화가 난 조승연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나에게 60초나 되는 음성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하지만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 그는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아이가 하도 갖고 논 탓에 이미 배터리가 다 한 내 핸드폰은 진작에 꺼져있었다.“핸드폰을 꺼 놓은 거야? 지금 시위하는 거야 뭐야!”“집에서 잘 먹고 잘 쉬면서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들어온 남편 좀 배려해주면 어디가 덧나?!”핸드폰이 꺼져있다는 안내 멘트를 들은 조승연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화를 끊었다.“승연 씨, 왜 그래요? 청아 씨 집에 없어요?”“어머, 설마 애 혼자 놔두고 나가 버린 거예요? 어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요.”진유라가 가방에서 과자 두 개를 꺼내주자 한동안 굶었던 세훈이는 봉지까지 먹어치울 정도로 급하게 과자들을 삼켜버렸다.“애가 엄청 배고팠나 봐요, 엄마라는 사람이 뭐 하는 짓이래요?”진유라는 아이가 불쌍한지 세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세훈이한테 밥도 안 주는 엄마는 나쁜 엄마니까 아줌마랑 같이 가자. 세훈이 좋아하는 패스트푸드 사줄게.”진유라는 일부러 세훈이를 안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절대 진유라의 품에는 안기지 않았을 세훈이었지만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