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웃으며 말했다.“우리가 소 대표님한테 매수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소 대표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윤하에게 잘 어울려요.”코치 중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소 대표님도 우리 윤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윤하가 주로 만나본 젊은 남자들이 우리 말고는 좋은 남자가 없어서 그래요. 게다가 사장님과 사모님도 얼마나 걱정하세요. 만약 소 대표님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도 반대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소 대표님과 윤하가 잘 지내고 있거든요. 근데 우리 윤하가 왠지 소 대표님께 남녀 간의 정이 없다고 느껴져요. 윤하가 우리를 대한 것처럼 똑같이 소 대표님을 대하는 것 같아요.”정혁주는 코치들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했다.도장에는 여성 후배들도 많지만 유독 정윤하가 정혁주를 무척 걱정시켰다.정윤하는 습관적으로 남자들과 형제 사이로 지냈기에 그들도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다.그들도 정윤하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 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상대방이 무술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리고 소개를 받을 남자들은 정윤하의 “명성”을 듣더니 심지어 몰래 도장에 가서 정윤하를 지켜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막강한 실력을 보더니 정윤하를 다스리지 못할까 봐 걱정하며 결국 투항하게 되었고 다른 맞선남들과 마찬가지로 감히 나서지 못했다.이로 하여 뒷부분의 맥락은 그대로 뚝 끊기게 되었다.정혁주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너희도 사실 소 대표님의 재력에 넘어간 거야. 나조차도 좋게 느껴지는데 너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소 대표님의 재력이 정말 좋은 건 사실이야. 우리도 자기도 모르게 속아 넘어간 거지. 그런데 소 대표님은 꽤 좋은 사람이긴 해. 우리 윤하와도 너무 잘 어울리고. 너희들도 장난치고 있는 걸 알기에 나도 너희들 탓하지 않아. 우리 전부 윤하를 위해서 하는 소리잖아. 내가 소 대표님을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그분이 안 좋은 사람이라면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너희들의 말처럼 윤하 계집
“윤하 씨, 이 꽃다발... 제 말은 윤하 씨가 이 꽃다발을 받고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소지훈은 용기를 내어 정윤하에게 물었다.정윤하는 닭 날개를 다 먹고 또 오징어구이를 먹으며 대답했다.“무슨 생각이요?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누가 키운 꽃인지 정말 아름답고 좋네요. 저 보고 꽃을 키우라고 하면 이 꽃은 이미 죽었을 거예요.”소지훈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정윤하는 눈치도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그리고 꽃다발을 받고 보니 장미꽃 떡이 생각났어요. 갑자기 꽃 떡을 떠올리니 너무 먹고 싶네요. 지금 바로 주문해서 먹어야겠어요.”정윤하는 휴대전화를 꺼내서 인터넷으로 꽃 떡을 사려고 했다.“제가 사드릴게요. 지금 여행 중인 친구가 있는데 꽃 떡 좀 가져다 달라고 하면 돼요. 훨씬 맛있을 거예요.”정윤하가 말을 건넸다.“그들이 현장에서 만들어서 팔지 않는 한 산 것과 인터넷에서 사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을걸요. 현장에서 만든 것이 맛있다고 들어는 봤는데. 내년에 시간이 나면 저도 여행 가서 현장에서 구운 꽃 떡을 먹어봐야겠어요.”소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부하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즉시 청주성으로 날아가서 꽃 떡을 만드는 것을 배워 정윤하에게 신선한 꽃 떡을 맛보게 하라고 지시했다. 단, 정윤하가 여행을 가지 않고도 신선한 꽃 떡을 먹을 수 있도록 반드시 청주성의 맛과 똑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적어도 온라인으로 구매한 것보다 맛있을 테니까.정윤하는 토픽 X 이라는 앱을 즐겨 사용하는 데 정말 싸다고 말했다.소지훈은 그녀에게 그 앱에서 물건을 사지 말라고 수없이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소지훈이 역시 부자답다고 말할까 봐 걱정했다. 그는 일반인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결국 침묵을 선택했고 그녀의 취향과 선택을 존중해주었다.“정말 주문하셨어요?”정윤하는 소지훈이 핸드폰을 내려놓는 것을 보더니 그에게 물었다.소지훈이 대답했다.“네. 주문해드렸으니 받을 때까지 기다리시면 돼요.”그는 먼저 정윤하에게 인터넷으로
정윤하는 그렇게 하면 소지훈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말을 내뱉으려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어 말을 건넸다.“그럼 그때 가서 신세 좀 질게요.”소지훈이 연성에 있을 때 정윤하가 그에게 잘 접대했으니 그녀가 관성으로 가게 되면 소지훈이 잘 접대해 주면 서로에게 빚지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윤하 씨, 꽃 떡 말고도 또 다른 생각은 없었어요?”소지훈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정윤하가 소지훈을 쳐다보니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정윤하가 입을 열었다.“제가 또 무슨 생각 해야 하죠? 아저씨가 저에게 꽃을 선물했으니 저를 좋아한다는 생각 해야 돼요? 아저씨가 저를 좋아하고 저도 아저씨가 좋아요. 우리가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 친구로 될 수도 없는걸요.”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소지훈이 그 정적을 깨뜨렸다.“윤하 씨는 제가 윤하 씨에 대해 좋아함이 우정이 아닌 남녀 간의 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아저씨가 남자고, 저는 여자인데 아저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요? 뭐가 달라요?”“제 말은 윤하 씨, 저는 윤하 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윤하 씨에게 구애하고 싶단 의미에요. 형제 사이가 아닌 윤하 씨 남편이 되고 싶다는 뜻이에요.”소지훈은 단숨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정윤하의 되묻는 물음에 화가 난 것이다.소지훈도 충동적으로 그 뜻을 똑똑히 해석해 준 것뿐인데...그녀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소지훈이 그녀에게 고백해야 정윤하가 그의 감정을 알 수 있다고 소정남이 알려주었다.그가 말하지 않는데 털털한 정윤하가 어찌 알 도리가 있겠는가?목소리가 좀 커진 소지훈은 그제야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웅성거리던 도장은 순간 조용해졌고 다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소지훈은 그들을 쳐다보고는 다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정윤하를 바라보았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점점 붉은 구름이 떠 올랐다.그는 도장이 아닌 단둘이 있는 곳을 찾아 로맨틱하게 현장을 꾸민 다음 정윤하에게
소지훈이 일어나 정윤하를 쫓아가려 하였으나 정혁주가 가로막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정혁주인 것을 확인하더니 성깔 좋게 말했다.“형, 제가 나가 볼게요.”“지금 가지 말고 윤하에게 혼자 생각하게 시간 좀 줘요. 윤하가 지금 소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소식을 소화해야 할 거예요. 윤하는 지금 친구 감정이 아닌 이 남녀 간의 감정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밖이 추운데... 눈이 내리면 추워질까 걱정돼요.”그러나 정혁주는 친여동생의 모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소 대표님은 추울지 몰라도 윤하는 연성 토박이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추위에 익숙해요. 그러나 소 대표님은 아니죠. 당신은 관성에서 왔으니 관성 쪽에는 겨울이 없다고 볼 수 있죠. 윤하가 추워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가서 바람 좀 쐬게 내버려 둬요. 마음을 다잡고 잘 생각해 보게 내버려 둬요. 갑자기 고백하니, 윤하는 심리 준비도 하지 않아 혼란스러워졌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소 대표님도 그래요. 때가 되면 고백하셔야지... 꽃다발 하나로 윤하가 소 대표님 마음을 알 거로 생각하세요?”소지훈은 입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윤하 씨에게 꽃다발을 선물해도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그래서 직접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모를 것 같아서요. 제가 한 트럭의 꽃을 선물한다고 해도 윤하 씨 성격으로는 이 꽃들로 얼마나 많은 꽃 떡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할 테니까요.”정혁주도 공감하며 입을 열었다.“그... 그럴 수도 있겠네요.”정윤하도 분명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를 사랑한다면 확실히 말해야 했다. 그녀가 알도록 명확하게 알려줘야 할 것이다.“형, 윤하 씨가 이렇게 황급하게 나갔는데 정말 저를 피하는 거 아니에요? 윤하 씨는 제가 너무 늙었다고 싫어하지 않을까요? 저는 윤하 씨보다 10세 4개월이나 많은데.”그의 나이는 그녀보다 11살 많다고 말은 했지만 진지하게 계산하면 10년 4개월 연상이다.정
“형, 그럼 제가 뭘 하면 될까요?”정혁주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을 본 소지훈은 그를 자신의 편으로 생각하며 물었다.정혁주가 대답했다.“여기 남아서 지켜보든지, 아니면 돌아가서 우리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든지 하세요. 어쨌든 정윤하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마세요. 저녁에 돌아올 테니까요. 돌아오면 두 사람 다시 얘기해 봐요. 소 대표님이 하신 얘기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만 믿게 하면 돼요.”“네. 정말 감사해요. 그럼 저는 돌아가서 이모님을 도와 요리할게요.”윤미연에게 잘 보이면 정윤하의 마음을 훔치는 이 길은 훨씬 쉬워질 테니까.정윤하는 소지훈의 고백에 놀란 것이 아니라 별로 믿기지 않아서였다. 어떤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도장에서 나와 찬 바람을 쐬고 추워지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정윤하도 밖에서 오래 돌아다니지 않고 곧 집으로 돌아갔다.다행히 도장은 집에서 매우 가까웠다.윤미연은 오늘 밤 샤브샤브를 먹을 요리들을 준비하고 있었다.추운 날에는 역시 샤브샤브를 먹어야 속이 편안할 것이다.집이 난방이 안 되면 그녀도 이렇게 편하게 있지는 못한다.겨울이 되면 윤미연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 장 보는 것도 자식들에게 맡기곤 한다.그녀는 따뜻한 도시에서 정씨 가문으로 시집온 사람이다. 그녀는 너무 추위를 타서 연성에 시집온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겨울만 되면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좋아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문 앞으로 향하던 윤미연은 정윤하인 것을 확인하더니 바로 물었다.“이 시간이면 수업해야 할 시간 아니야? 왜 돌아왔어? 밖에 여전히 눈이 오지? 부엌에 뜨거운 생강차를 끓여놨는데 한 잔 마셔.”윤미연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왜 혼자 왔어? 너희 오빠들은?”윤미연은 바쁘게 일하면서도 정윤하에게 물어보았다.정윤하가 대답했다.“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왔어요. 엄마, 아빠는요?”“네 아빠가 약속 있어서 나가셨어. 저녁에 밥 먹으러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서
소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 정윤하는 소지훈을 보더니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헛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알고 지낸지 오래되면 도장의 코치 선배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고 이내 두근거림도 사라졌고 헛된 생각도 하지 않았다.정윤하는 그녀와 소지훈이 사이도 친구와 같은 사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소지훈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줄은 전혀 몰랐다.정윤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더니 스스로 가볍게 얼굴을 치며 혼잣말을 했다.“정윤하, 부끄러워하는 거야? 어떤 남자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이렇게 기뻐한 거야? 좀 진정해. 진정하자고.”소지훈은 정윤하의 소개팅 상대들처럼 그녀가 나중에 가정폭력을 행사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소지훈은 정혁주까지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무술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남자였다.정윤하조차도 정혁주를 이기지 못하는데.소지훈이 정혁주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소지훈의 무술 실력이 정윤하보다 더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소지훈이 걱정할 게 뭐가 있을까!오히려 앞으로 소지훈과 싸울 때 그에게 터져 맞아 땅에 짓눌리지 않게 정윤하가 걱정해야 할 것이다.정윤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던 정윤하는 자신 있게 웃으며 중얼거렸다.“못생기지는 않았는데! 아저씨가 역시 보는 눈이 있네.”단 정윤하는 자신과 소지훈이 어울리는지 잘 몰랐다.소지훈은 대기업의 대표이고 집안도 재벌가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재력이 강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정씨 가문은 가난하지 않고 연성에서도 부자에 속했지만 소씨 가문과 비교하면 그래도 차이가 컸다.정윤하는 소지훈이 보통 여자들과 다른 자신을 가지고 놀다가 질려버리면 자신을 버리고 딴 여자를 좋아할까 봐 무척 걱정했다.남자는 돈이 있으면 나빠지고 여자가 나빠지면 돈이 많아지게 되는 법!소지훈은 부자인 데다 잘생겼기에 여자에게 심장까지 꺼내어 잘해주면 그 여자는 분명 그에게 퐁
결국, 정윤하는 설탕 생강차가 담긴 잔을 들고 방안의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윤하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윤미연은 정윤하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관심 있게 물었다.“아니요.”정윤하는 윤미연에게 들킬까 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그녀는 생강차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시더니 너무 매워서 혀를 내둘렀다.“엄마, 집에 있는 생강을 다 넣었어요? 너무 매워요. 아! 너무 맵네요. 맛도 없고 마시고 싶지 않아요.”“네 생리통 주기가 이상해서 그래. 생강차 좀 마시고 추위를 좀 쫓아내.”정윤하는 그제야 사실대로 말했다.“엄마, 사실 제가 거짓말한 거에요. 저는 지금 생리 기간이 아녜요.”“거짓말이라고? 이 계집애! 건강 문제로 어떻게 엄마를 속일 수 있어? 엄마는 너에게 몸조리 좀 시키려고 한약까지 지어줘야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어린 나이에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생리 주기가 이상하면 반드시 병원에 가서 몸조리를 잘해야 앞으로 배 속에 아기가 잘 들어서지. 여자들은 생리 주기를 잘 유의해야 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바로바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야 한다니까.”정윤하가 말을 이었다.“엄마, 내가 부끄럼을 잘 타는 사람으로 보여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제가 일찍 돌아오면 엄마가 제가 게으르다고 혼낼까 봐, 아빠한테 제 월급을 깎으라고 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거짓말로 엄마를 속인 거예요.”다행히 윤미연의 행동이 빠르지 않았다.만약 정말로 정윤하에게 이것저것 사주면서 몸조리를 시키고 심지어 병원으로 데려간 뒤에야 아까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면 윤미연은 아마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윤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네가 뻔뻔한 사람이 아니지. 부끄러움 탈 애가 아니야. 그럼 뭔데? 걱정거리라도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봐. 괜찮아. 참, 오늘 지훈 씨는 아직 안 왔지? 평소 이 시간이면 집에 도착했을 텐데.”정윤하는 입을 오므리다가 말을 꺼냈다.“엄마, 아저씨는 회사 대표라서 바빠. 저녁에 약속 잡혔을지도 몰라. 자꾸 걱
“지훈 씨가 회사 대표는 맞지만 신분이 단순하지 않을 거야. 분명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우리에게 말하지 않을 뿐이지.”“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걸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거요.”정윤하가 소지훈의 편을 들어주었다.윤미연은 또 말을 꺼냈다.“잘 생각해 봐. 네가 지훈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싸울 줄 모르는 것처럼 하지 않았어? 네가 도와준 뒤로 은인이라고 떠들면서 너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무척 잘해줬잖아. 엄마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지훈 씨가 처음부터 너를 겨냥하고 너에게 접근한 것 같아. 작전을 세워서 너를 지훈 씨의 은인으로 만들면 당당하게 너에게 접근하면서 잘해줘도 네가 의심하지 않잖아. 어쩌면 네가 지훈 씨를 구해주던 날의 일도 지훈 씨가 꾸민 일일지도 몰라. 지금 관성의 환경이 얼마나 안전한데 건달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몰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거든. 관성의 경찰들이 그들을 나와서 행패 부리게 내버려둘 리가 있겠어?”정윤하는 설마 하는 생각에 다시 말을 이었다.“엄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셔서 생각이 많으신 거 아니에요? 아저씨가 저에게 접근해서 뭐 할 게 있다고. 우리 집은 엄청난 부자도 아니고 저도 우리 도장에서 일하는 일개 직원일 뿐인데. 저의 전 재산을 내놓는다고 해도 아저씨가 하루에 버는 돈보다도 적을 텐데. 저를 겨냥한 건 아닐 거예요. 게다가 아저씨를 도와준 그날 밤은 확실히 제가 아저씨를 처음 만난 날 맞아요. 서로 초면인데 이유 없이 저에게 접근해서 뭐 하게요? 아저씨는 아주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어쩌다가 남의 미움을 사서 복수 당할 수도 있죠. 누군가가 건달들을 시켜 아저씨를 해치려고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정윤하는 소지훈이 그녀를 위해 이런 일들을 꾸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만약 정윤하의 집이 수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소지훈이 무언가 꾸며도 믿을 법도 하다.그러나 그녀는 겨우 200만 정도의 월급쟁이에 집에 재산이 많다고 해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
“전 대표님, 안녕하세요.”도아영은 공손하게 전태윤에게 인사를 건네며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전태윤은 전이혁의 체면을 봐주어 형식적으로 악수를 했다.전태윤 부부는 먼저 도아영을 소파로 안내해 앉혔다.전이혁은 자리에 앉으며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우빈을 안아 들어 무릎에 앉혔다. 그는 자주 우빈을 놀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시선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도아영 쪽으로 향했다.잠시 앉아 있던 전태윤은 호텔 집사에게 들어오라고 지시했고 모두가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하예정은 집사에게서 메뉴판을 받더니 도아영에게 건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도아영 씨, 메뉴를 보시고 주문하세요. 좋아하는 음식 있으면 마음껏 시켜요. 우리 호텔 음식은 관성에서도 손꼽히도록 맛있거든요.”도아영은 메뉴판을 받지 않고 미소 지었다.“하 대표님께서 주문해주세요. 저는 편식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 관성 호텔에 묵고 있어 여기 레스토랑에서 식사해봤는데 정말 맛있더군요. 모든 요리가 아주 전통적인 맛을 내고 있어서 정말 맛있더라고요.”관성 호텔은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외국인들도 무척 많았다. 따라서 레스토랑에는 각 지역의 대표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손님들이 어디 출신이든 전통적인 고향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그럼 제가 주문할게요.”하예정은 매일 남편과 함께 관성 호텔에서 식사했기 때문에 메뉴판 없이도 쉽게 주문할 수 있었다.도아영이 해주 출신이고 그곳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하예정은 몇 가지 매운 요리를 선택했다. 물론 관성 사람들이 매운맛을 잘 먹지 않는 점도 고려해 자신의 가족들에게 덜 매운 요리들도 골라 주었다.“도아영 씨, 술을 마실래요?”도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하 대표님께서 저와 함께 마실 수 있으시다면 두 병 정도 시켜도 좋아요. 하지만 하 대표님은 지금 임신 중이시니 술을 드실 수 없으시잖아요.”“우리 이혁 도련님께서 도아영 씨와 함께 마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내년에 출산하고 나서
도아영은 전이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을 찾아보려 했다.하지만 전이혁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잠시 전이혁을 바라보던 도아영이 입을 열었다.“그랬군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군요. 핸드폰을 안 가지고 다니셨군요. 그런데도 10여 일이 지났는데 그 핸드폰에 배터리가 아직도 남아서 전화가 연결되다니... 전이혁 씨가 쓰시는 핸드폰이 무슨 브랜드인지 궁금하네요. 배터리가 이렇게 오래 가다니.”전이혁은 눈 한 번 껌뻑하지 않고 대답했다.“배터리가 그렇게 오래 가는 건 아니고요. 제가 떠나기 전에 충전기를 꽂아뒀기 때문에 계속 충전이 된 상태였던 거죠.”도아영은 전이혁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더는 따지지 않았다.전이혁이 일부러 변명하려 든다면 도아영이 아무리 물어봐도 그는 얼마든지 핑계를 만들어 낼 테니까.“제 형수님이 제게 여기서 귀한 손님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설마 그게 도아영 씨였나요?”전이혁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도아영 씨는 언제 우리 형수님을 알게 되셨어요?”도아영은 되물었다.“제가 알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그건 하 대표님과 제 사이의 일인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도아영 씨의 말투는 더 날카로워지셨네요.”도아영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랜만에 보니 전이혁 씨는 여전히 뻔뻔스럽군요.”전이혁은 자신의 얼굴을 슬쩍 만지며 말했다.“그런가요?”곧 전이혁은 한발 뒤로 물러나 도아영의 곁에서 오른 손을 내밀며 들어가자는 신호를보냈다.“도아영 씨, 어서 들어오세요. 우리 큰형과 형수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도아영은 전이혁을 뚫어지라 노려본 뒤 그의 앞을 지나갔다.전이혁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가 문 앞에 다다르자 몇 걸음을 빨리 다가가 문을 두드리고는 도아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형, 형수님. 도아영 씨께서 오셨어요.”전태윤은 소파에 앉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하예정은 먼저 전화를 끊고 전태윤에게 말을 건넸다.“우리 도아영 씨가 오신 후에 주문해요.”“응. 그래.”전태윤은 무관심했다.그는 도아영은 전씨 할머니께서 전이혁에게 정해주신 미래의 아내로 될 사람이기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앞으로 그의 제수가 될 사람이니 미리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전이혁이 마지막에 누구를 선택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그건 전이혁의 문제고 그가 스스로 고민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전태윤은 이런 일에 신경 쓰기 귀찮았다.하예정은 먼저 우빈을 데리고 손을 씻으러 자리를 떠났고 전태윤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이혁은 하예정이 또 누구를 초대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는 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빌어먹을 놈, 내가 사고 쳤다고 문자도 씹다니. 내가 너를 말려들게 할까 봐 겁나?’전이혁은 속으로 전우를 욕했다.곧이어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발소리가 어딘가 너무 익숙했다.아마...전이혁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마침 누군가가 떠올랐다.그건 바로 도아영의 발소리와 너무 비슷했다.‘그럴 리가 없지 않나? 아영 씨는 해주시에 있을 테고 형수님을 알 리도 없는데. 형수님이 아영 씨를 초대할 리가 없잖아...’전이혁은 분명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중얼거렸다. 아니면 그 사람의 발소리가 도아영과 비슷한 것일 수도 있고.전이혁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도아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전이혁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바로 그녀, 도아영이었다. 잘못 생각한 게 아니었다.전이혁은 멍하니 도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점점 가까워지는 그녀를 보며 그는 문득 깨달은 듯했다.조금 전에 하예정이 왜 자신이 잘못했다고 했는지, 전태윤이 왜 전씨 가문의 체면을 깎아내렸다고 했는지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분명 도아영 씨가 형수님을 찾아가 고자질을 했겠지? 이 여자가 왜 관성까지 찾아온 거야? 미리 말도 없이... 전혀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다니.’“전이혁 씨
사실, 전이혁은 이미 할머니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할머니도 전이혁 스스로 해결하라고 할 뿐이었다.할머니는 전이혁이 자신이 골라준 상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이혁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해도 된다고 했었다. 다만, 반드시 할머니가 요구하는 인성의 사람이어야 했었다.전이혁은 ‘여우’가 비록 다소 급하고 불같은 성격이긴 하지만, 인성이 나쁘지 않았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녀의 출신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일 다 끝났어요?”하예정 역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편에게 물었다.하예정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전이혁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응, 다 끝났어. 이제 출발하자.”하예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카를 불렀다.“우빈아, 책 정리하고, 이제 밥 먹으러 가자.”“네.”우빈이는 대답한 뒤, 바로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메더니 두 팔을 벌려 전태윤에게 달려갔다.전태윤은 사랑스러운 조카를 안아 올리고 조카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이모부가 안고 가라고?”“제가 더 크면, 이모부가 저를 안지도 못할걸요?”전태윤은 웃으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이모부가 힘이 있을 때 많이 안아줘야겠네. 우빈이가 크면, 이모부도 늙어서 안아줄 힘도 없을 테니까.”전태윤에게 안겨 있는 우빈이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전태윤은 우빈이를 안은 채 한 손으로 하예정의 손을 잡았다.그런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자신이 불청객이라도 된 것 같아 조용히 뒤따라가며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전씨 그룹에서 관성 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곧 호텔에 도착했고, 그들은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전이혁은 형님 부부와 함께 호텔에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한편, 전우는 틈틈이 전이혁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형수님이 왜 밥을 사주신대?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거 아냐? 동생들이 있다는 거 잊어먹지 말고, 좋은 거 있으면 형 혼자 챙기지 말고, 우리도 좀 나눠줘.]동생의 메시지에 전이혁은 한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