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금 걱정돼. 형인이 지금 서현주 말만 고분고분 듣는다니까. 그 계집애도 참 여우 같은 게, 한 번도 형인이랑 잠자리 한번 가진 적 없잖아. 가지지 못할수록 갖고 싶어진다더니 형인이 더 안달 내잖아.""두 사람이 만약 결혼이라도 해서 형인이가 월급 통장을 갖다 바치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 힘든 나날 보내게 될 거야."주서인은 동생이 매달 부모님께 생활비를 주던 것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그 돈을 모두 가정을 돌보는 데 썼고 덕분에 그녀도 적지 않은 이익을 봤다. 이런 좋은 일을 올케에게 뺏길 수 없다 생각한 주서인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됐어요, 그건 형인이랑 하예진 일이니까 부부간에 알아서 하라고 해요.""형인이 계속 하예진한테 숨기고 들키지만 않는다면 나도 굳이 걔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세상에 믿을 남자 하나 없어. 좀 잘난 것 같으면 다 밖에 애인 하나쯤 둔다니까."김은희는 오히려 아들이 능력 있다 생각했다. 애 아빠가 돼서도 밖에서 그렇게 젊고 예쁜 여자애를 만났으니 말이다.어차피 그녀의 자식은 아들이니 어찌 됐든 손해 볼 건 없다 생각했다.하예진은 시어머니랑 형님이 자신의 험담을 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모녀 둘이 형인을 도와 바람난 사실까지 숨겨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얄미운 두 모녀를 떠나보낸 후 그녀는 여동생과 효진에게 얘기했다. "예정아, 효진아. 너희 뭘 또 이렇게 많이 사 가지고 왔어.""효진 언니, 그냥 과일이랑 간식 좀 사 온 거야, 비싼 것도 아닌데 뭘."심효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집에 언니랑 우빈이만 있으니까, 얼마를 사든 어차피 다 둘이 먹을 거니까 많이 샀지. 언니 다 못 먹는 건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천천히 꺼내 먹어."그녀는 주서인이 떠나기 전에 이 물건들을 두 번 힐끔거리는 걸 유심히 봤다.지난번에 하예정 부부가 하예진에게 보낸 물건을 주형인이 자기 부모와 누나에게 주는 바람에 하예진은 화가 나 넘어갈 뻔했었다.하예정은 조카 먹을 것을 챙겨준 후 새 장난감을 건네주면서 옆에서 혼자 놀게
하예정은 짧게 말을 더 보탰다. "나는 그냥 언니한테 주의만 주는 거야. 일자리 문제는 언니도 너무 급해하지 말고."심효진도 말했다. "천천히 알아봐도 돼요. 자기한테 딱 맞는 일자리 찾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우리 가게 나오는 건 어때요? 제가 월급 정산해 줄게요. 아니면... 언니도 가게 하나 차리지 않을래요?"아들이 노는 것을 보며 하예진은 무력하게 얘기했다. "나 가게 차릴 돈 없어... 어떤 가게 열지도 모르겠고. 알잖아, 요즘 장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 거."동생의 서점은 마침 관성중학교 앞이라 가게 장사가 꽤 잘 됐던 거지 만약 다른 위치였다면 잘 될지도 알 수 없었다.관성중학교 문 앞은 작은 가게들은 임대료도 많이 비싼 데다 아무나 빌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인맥이 필요했고, 하예정의 그 가게 역시 심효진 집안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언니, 아니면 내가 그 공예품 땋는 거 가르쳐줄게. 그걸로 언니 인터넷에서 온라인 스토어 하나 열지 않을래? 그러면 언니 이걸로 집에 앉아서 돈도 벌고 우빈이도 돌볼 수 있잖아, 나 지금 스토어 하고 있는데 장사 엄청 잘 돼. 예약 상품이 많아서 예약 주문 되게 많이 들어오거든. 바빠서 정신이 없을 정도야."이번 달에 온라인 스토어로 번 돈은 서점 매출보다 훨씬 많았다. 서점에서 이번 달에 학생들에게 여러 건의 학습자료를 주문해 줬지만 온라인 스토어의 이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예정은 돈복이 터졌다고 생각했다.온라인 스토어도 벌써 몇 년 차 접어들었지만 내내 수익이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가. 이번 달부터 뜨기 시작했고 게다가 리뷰도 모두 호평이었다."나도 온라인 스토어 경영 확장해 보려고, 공예품뿐만이 아니라 헤어 액세서리 만드는 것도 배워보고 싶어. 나 그런 빈티지 액세서리 되게 좋아하거든."심효진은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꽤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하예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예정아, 나는 너처럼 그렇게 뛰어난 상상력이 없어. 네가 땋는
이미 한 달이 지났고 아직 5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다시 싱글로 돌아갈 거고 각자 재혼하게 되면 더는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된다.소정남과 이동명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이동명이 물었다. "너희 전씨 가문 남자는 이혼 못 하지 않아?""나는 예외야."전태윤은 쌀쌀맞게 얘기했다. "나와 하예정의 혼인,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이혼한다 해도 할머니는 나한테 뭐라 못하셔. 다른 사람은 더더욱. 억울한 걸 알 테니까."맞다, 그는 억울했다.할머니의 은혜를 갚아준답시고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나름 관대하게 포용하며 그녀를 이해해 줬지만, 하예정은 어땠던가?말로는 언니 집에 간다고 해놓고, 알고 보니 김진우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질투해 놓고 절대 인정하기 싫었던 전 도련님은 자연스레 심효진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고 심효진과 김진우가 사이가 아주 좋은, 그것도 사촌지간인 것 역시 무시했다.소정남과 이동명은 할 말을 잃었다. "...""앞으로 절대 회장 사모라고 불러주지도 마! 그 사람 그럴 자격도 없어!"소정남이 말했다. "며칠 전만 해도 아내가 사준 옷 입고 회사에서 하루 종일 자랑이더니, 오늘은 왜 태도가 싹 변하냐, 두 사람 혹시 싸운 거야?"전태윤은 소정남을 노려봤다.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소정남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전태윤은 부끄러움에 벌컥 화를 냈다.그는 늘 슈트만 입다가 처음으로 그렇게 싼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건 하예정이 사준 옷이었으니까. 앞으로 파트너로서 한동안 함께 살아야 할 텐데 그녀의 체면도 좀 세워주고 싶어서 그녀가 사준 옷을 입은 것이었다.그런데 뭐람, 온 하루가 지내도록 하예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전태윤은 하예정이 자신이 사준 옷이 어떤 건지 설마 기억 못 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싸울 기력 따위도 없어! 가자, 우리 호텔로 가서 술이나 한잔해, 내가 산다."전태윤은 가뜩이나 기분도 언짢았는데 친구가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더 나빠져서
하예정은 전태윤의 답장을 받지 못한 채 언니에게 말했다. "태윤 씨는 친구랑 재미있게 놀고 있나 봐요.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네요.""내일은 여기 안 와도 돼, 시간을 내서 제부랑 같이 있어."하예진은 자신의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지만, 동생의 결혼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했다.사실 하예진은 전태윤이 마음에 들었다. 동생에게도 잘해 주는 데다 주형인처럼 쪼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로 얼굴을 알고 연애를 한 뒤 결혼까지 한 주형인은, 이제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늘 돈을 아까워하며 자동차 한 대 사주지 않았다.스쿠터도 동생이 사 준 것이었다."알았어, 언니.""맞다, 친가 사람들 아직도 귀찮게 구니? 어떻게 됐대? 할머니는 수술받으셨으려나?"하예진은 친가 사람들에 대해 물어봤다."한 번 합의하러 오고 나서는 다시 오지 않았어. 자기들도 민망한가 봐. 게다가 실시간 검색어는 진작에 내려갔고 일찌감치 잠잠해졌어. 별로 영향도 안 받았으니까 당연히 다시 안 찾아오지."하예정은 전태윤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모르고 친가 사람들이 민망해서 안 찾아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하예진은 그 말에 한시름을 놓았다.해 질 무렵,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하예진은 동생을 집에서 쫓아냈다. 심효진은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예정을 따라 발렌시아 아파트에 가, 하예정이 지금 살고 있는 크지 않지만 아늑한 집을 구경했다."예정아, 너랑 태윤 씨 집 참 넓다. 채광도 좋아서 진짜 밝아. 그중에서 이 베란다가 제일 좋아, 한가할 때 그네에 앉아 책도 읽고 꽃구경도 하면 진짜 마음이 너무 편안할 것 같아. 그네 앞에 작은 탁자 하나 놓으면 차도 마실 수 있고 더 편하겠다!"하예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제안이야, 내일 바로 작은 탁자 하나 사서 여기에 놓을게!""여기에 있는 꽃들 대부분 태윤 씨가 사 온 거고 나머지는 내가 사 온 거야. 태윤 씨가 어느 가게에서 사 온 지는 모르겠는데 꽃은 진짜 크고 예뻐, 되게 잘 폈더라고"하예정은 전태윤의 일 처
전태윤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런 전태윤의 모습에 하예정은 명치가 턱 막힌 듯 아파왔다.누가 신경을 쓰고 싶댔나?그저 부부간에 최소한의 배려 차원에서 물어본 것이다.하예정은 휙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하예정이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자신을 신경 쓰지 않자, 전태윤은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앞으로 잠옷 입은 채로 문 열어주지 마!"하예정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속옷은 입고 있었다고요."하예정은 방금처럼 문을 열어줘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잘 때만 속옷을 벗었다."제가 옷을 어떻게 입는지 태윤 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서로 사생활은 개입하지 않기로 계약서에도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요?."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분명 계약서는 전태윤에게만 유리하고 하예정을 구속하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 오히려 그 계약서가 전태윤을 옥죄는 느낌인 걸까?하예정은 주방에서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았다. 물이 적당히 식었을 때 꿀을 탄 뒤 잘 저어서 전태윤에게 건네주었다.전태윤은 소파에 기대고 있었지만 잠에 들지는 않았다. 하예정이 나온 것을 본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하예정을 쳐다봤다.하예정은 꿀물을 전태윤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윤 씨 많이 취했으니,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꿀물 먹고 방으로 돌아가 씻고 자요."할 말을 마친 뒤, 하예정은 몸을 돌려 방 쪽으로 걸어갔다.전태윤은 손을 뻗어 하예정의 손목을 낚아채 세게 끌어당겼다. 하예정은 막을 새도 없이 전태윤의 품으로 쓰러졌다. 전태윤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매우 민첩했다. 하예정이 정신 차릴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을 돌려 소파에 눕혀 꼼짝도 못 하게 했다.순간 세상이 돌아가는 것만 같았던 하예정은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전태윤에게 잡혀 소파에 눕혀져 있었다."태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여태까지 전태윤은 늘 혹시라도 하예정이 자신을 덮칠까 봐 거리를 두지 않았던가?하지만 지금 전태윤은 하예정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전태윤은 하예정의 두 손을 낚아채 하예정의 머리를 누르며 입을 맞췄다.조금도 부드럽지 않은 그 입맞춤은 마치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입술을 깨물고 뜯는 데다, 강압적이기까지 했다.그런 전태윤에 화가 난 하예정은 참지 않고 전태윤의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자, 밀려오는 고통에 전태윤은 그제야 하예정을 놓아주었다.전태윤이 당황한 사이에 하예정은 전태윤을 넘어뜨린 뒤, 펄쩍 뛰며 도망쳤다. 하예정은 뒷걸음치면서 경계하는 눈빛으로 전태윤을 쳐다봤다.전태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가의 피를 닦았다.안색이 잔뜩 굳어있었다."전태윤! 너 뭐 하는 거야? 술을 몇 잔에 미친 거야?"전태윤은 어두운 낯빛으로 하예정을 노려봤다.전태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정아, 다시 한번만 물어볼게, 너 오늘 진짜 처형 집에 있었어?""나 언니 집에 있었…"하예정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전태윤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왜? 이제야 생각났어? 너 김진우랑 식객당에서 희희낙락하며 밥 먹었지? 음식도 챙겨주고 부부보다 더 가까워 보이더라? 하예정, 계약 결혼 기간 동안, 얌전히 바람피우지 말라고 했었지!""내가 얼마나 더 참아야 해! 한 번만 더 이러면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야!"하예정은 그제야 이유를 깨달았다.어쩐지 술주정을 부린다 했더니, 이제 보니 자신과 김진우가 함께 밥을 먹는 것을 본 것이었다.자신이 김진우로 갈아타려는 것이라고 의심하며 보복하려고 한 것이다.평소에 전태윤은 하예정을 변태 취급하며 신체 접촉을 꺼리더니, 오늘 밤에 이렇게까지 했던 것은 다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이다.하예정은 자기 입술을 매만졌다. 전태윤이 이로 깨문 입술은 아직도 조금 아프게 느껴졌다."태윤 씨, 제가 진우랑 밥 먹는 걸 본 거예요?"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효진이도 있는 거 못 봤어요? 태윤 씨,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요? 저랑 진우를 뭐로 보는 거예요? 전 어렸을 때부터 진우를 봐왔고 계속 동생으로 여기고 있다고요. 누나로서 동생한
전태윤이 물건을 부수든 말든, 어차피 이 집은 그의 것이니 망가져도 손해는 전태윤이 봤다.꿀물을 엎은 전태윤은 방으로 들어가, 정신을 차리려고 찬물을 가득 받아 욕조에 몸을 담갔다.전태윤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완전히 취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제정신이긴 했지만 술을 많이 마셔, 쉽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뿐이었다.거실의 불도, 나중에 하예정이 나와 전기세를 아껴주려 끈 것이었다.그날 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화가 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하예정은 전태윤이 자기를 의심했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전태윤은 자신이 직접 본 것만을 굳게 믿기에 하예정이 김진우와 같이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다. 하예정은 김진우와 안 지 10년이 넘었고 어렸을 때부터 계속 봐왔던 사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하예정이 심효진과 친하고, 김진우는 또 심효진의 사촌 동생이기에 전태윤은 두 사람이 10여 년 동안 알고 지냈다는 말을 믿었다.하예정은 김진우를 동생으로 생각한다지만, 김진우가 진짜 동생인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조금의 혈연관계도 없었다.게다가 하예정을 바라보는 김진우의 눈빛은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고, 김진우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하예정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걸까?뭐가 됐든 전태윤은 마음속의 화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이튿날, 일요일이 되자 하예정은 일찍이 가게로 돌아갔다.평소였다면 주말에는 일반적으로 가게를 열지 않았다.전태윤과 대판 싸우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을뿐더러 무표정의 전태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하예정은 일찍 가게로 나온 것이다.하예정은 차라리 하루 종일 공예품이나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기분이 나빴던 하예정은 심지어 전태윤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지도 않고 자기 것만 만들어 먹었다.전태윤이 배가 고파 깼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넘어있었다.옷을 갈아입은 뒤, 전태윤은 방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나왔다.자신의 집인데, 자기가 왜 하예정을 무서워해야 하지?전태윤이 방에 나왔을 때 하예정은
로열팰리스는 관성의 고급 별장 지역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권세가가 아니면 재벌가들이었다.전태윤이 아직 하예정과 혼인 신고를 하기 전에는 거의 매일을 이곳으로 돌아와 지냈고 가끔씩 본가로 가 어른들 곁에 있었다.이곳은 원래 여러 채의 별장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전태윤인 그곳을 전부 매입한 뒤, 전부 허물고 새롭게 커다란 별장과 앞뒤로 정원을 지었다. 비록 본가만큼 크지는 않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충분히 넓었다.박 집사는 전태윤이 심지어는 배를 곯으며 온다는 것을 알고는 미리 주방에 점심을 준비하라고 일렀다.전태윤은 늦게 일어난 탓에 지금은 아침과 점심을 함께 먹는 셈이었다.자신의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 배불리 먹고 마시니 전태윤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소파에 앉은 그는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소정남은 아직 깨기도 전이었다. 어젯밤, 소정남과 이동명은 목숨을 내놓은 듯 전태윤과 함께 술을 마셔주었다. 전태윤은 주량이 센 탓에 그리 취하지 않았지만 소정남은 직원의 도움이 필요할 지경으로 취했다.주량이 전태윤보다도 좋은 이동명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지만, 술을 마시고 운전할 수가 없어 아예 호텔에 남기로 했다."대표님."소정남은 목소리마저 다 갈라져 있었다."좋은 아침이야."잠시 침묵한 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아침이 아니야. 나 방금 점심 먹었어.""…" 소정남은 답이 없었다.휴대폰을 귓가에 떼고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로 점심이 다 된 시각이었다. 어쩐지 대표 녀석이 전화로 깨우니 배가 아프다 싶었다. 다행히 머리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 머리마저 아팠다면 하루 종일 침대 신세나 지고 있을 게 뻔했다."왜 그래?""오후에 뭐 하는 거 있어?"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소정남은 다시 한번 휴대폰을 귓가에서 떼어서 확인했다. 자신과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그의 상사 겸 친구인 전태윤이 맞았다. 소정남은 웃으며 말했다."전태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야? 네가 먼저 나한테 뭐 하는 거 없냐고 묻다니.
여천우가 바로 거부했다.“누나, 이건 내가 도울 수 없어. 운초 누나의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돈도 전부 운초 누나가 준 돈이니까. 나도 잠시 운초 누나가 먹여 살려줘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운초 누나의 생각을 바꿀 수 있겠어?”설령 여천우는 여운초가 여운별의 정지된 카드를 풀게끔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여천우는 하지 않을 것이다.여천우와 여운초의 의도가 바로 여운별이 함부로 돈을 써서 재산을 탕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천우는 여운별을 궁지로 몰아넣어 그녀 스스로 돈을 벌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그렇지 않으면 여운별은 아마도 여운초에게 평생 눌리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어쨌든 여운별과 여운초는 친자매였기 때문에 여천우도 여운별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너도 운초가 도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 이상 나와 손을 잡고 운초를 상대해야지, 운초의 말에 속아 넘어가 부모님을 만나면 어떡해? 그것도 부모님 재산을 너의 명의로 바꾸라고 한 것도 운초의 생각이지? 운초가 가르쳐준 거지?”“천우야, 운초는 우리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싶을 뿐이야. 내가 어떻게 우리 가문의 재산을 탕진할 수 있겠어? 우리 가문에 사업이 그토록 많은데 우리가 우리 재산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돈은 떼처럼 굴러올걸. 우리 남매 3대가 쓰기에도 충분할 거라고.”이때 여천우가 또 반박했다.“운별 누나. 우리 집은 누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아. 일부 재산은 운초 누나 소유이고 또 우리 부모님 장사는 법을 어기는 장사야. 일찍 압류당하고 벌금도 낸 거 몰라? 합법적인 사업은 얼마 되지도 않아.”여운별이 말을 이었다.“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알아. 우리 집은 돈이 엄청 많다는걸. 엄마가 알려주셨어. 운초 장님이 뭐가 돈이 있다고... 둘째 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서 여씨 그룹의 장사는 줄곧 우리 부모님께서 하고 계셨는데. 그 재산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한 가지만 물
여천우에게 엄하게 대하고, 어려서부터 독립시킨 것은 모두 그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후계자가 독립할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여씨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단 말인가!다만 여천우가 아직 젊어서 추미자 부부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여천우도 성인이 되었고 여운별이 출소하자마자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재산을 위해서라도 추미자 부부는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아들 여천우에게 넘겨주기로 했다.여천우는 여운별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고 여운별이 스스로 돈을 벌어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면 더는 여운별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여운별이 시집가게 되면 여천우는 그녀에게 후한 혼수를 줄 것으로 계획했다.여운초도 그깟 재산을 두고 그들과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여운초가 원하는 것은 단지 공평이었다.“엄마와 아빠는 모두 동의하지 않을 거야.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꿈도 꾸지 마!”사실 여운별도 그녀의 부모님이 동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결국, 추미자 부부가 선택한 사람이 그들이 가장 아끼는 친딸 여운별이 아니라 아들 여천우라는 사실을 믿기 싫었을 뿐이다.정녕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여천우에게 물려주려 했는가!여운별에 대한 사랑은 역시 성별을 초월할 수 없었던 건가!추미자 부부는 한 번도 여운별에게 재산을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여운별은 이 사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의 부모님은 그들이 남자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어릴 때부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었다.그러나 여천우가 원하는 것은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었고 심지어 얻지 못할 때도 있었다.여운별은 추미자 부부의 사랑이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했다.추미자 부부는 여운초를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기를 바랐다.여운별은 그녀의 부모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천우가 아닌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여천우는 여운별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리다가 말을 이었다.“누나, 누나
“여천우, 이 나쁜 놈아! 이제 다 커서 여운초와 연합해 친누나를 괴롭히려고 들어? 난 네가 감옥으로 가서 단지 우리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찾아간 줄로 알았는데, 우리 부모님 재산을 노리고 간 거였어? 엄마 아빠 재산도 내 몫이니까 혼자 차지하려고 하지 마!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사람은 나야. 우리 부모님은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전부 너에게 주지 주지는 않을걸. 그러니까 엄마 아빠 귀찮게 하지 마!”여운별도 면회하러 가서야 여천우가 그날 추미자 부부의 면회를 하러 간 것을 알게 되었다.여천우는 추미자 부부에게 그들이 압류당하지 않은 재산을 여천우 한 사람에게만 물려달라고, 여운별과 여운초에게는 재산을 주지 말자고 제안했다.여운초는 여태웅의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운별은 그녀의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딸로서 자산을 가지지 못 가질 리가 없었다.여운별은 이미 변호사와 만나 여운초에게 소송을 걸어 여운초의 모든 재산을 되찾으려고 계획했다.그러나 남동생 여천우가 독점할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겉모습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평소에는 철이 들고 착한 동생인데 이토록 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니!아니, 여미란과 여미정의 말대로 여운초가 꾸민 짓일 것이다!여운초는 여운별이 정말로 소송을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 소송 때문에 여운초가 현재 가진 재산 일부를 토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추미자가 그들의 재산을 전부 여천우에게 물려준다면, 여운초와 여천우의 두터운 친분으로 볼 때 그 재산도 여천우의 손에 잠시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아주 크다.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은 결국 여운초의 손에 넘어가고 심지어 여운별이 아무리 소송을 걸어도 이길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여운별의 부모님은 현재 살아계시고 또한 부모님의 재산도 그들의 의향대로 지정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리고 여운별도 성인이 다 되었기에 그녀의 부모님도 이제 그녀를 키울 책임이 없다
게다가 우빈이도 장점이 있는 어린이였다.그는 독서와 글씨를 쓰는 데 있어서 용정보다 조금 나은 편이다.용정은 숫자를 많이 읽는다지만 잘 쓰지 못했다. 이 또한 전태윤이 우빈을 칭찬할 때 자주 쓰는 말이었다.그러나 우빈은 전태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전태윤이 어른일 뿐만 아니라 전씨 그룹의 대표였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라고 믿었다.우빈은 이렇게 자신을 설득하더니 더는 입을 삐죽 내밀지 않고 용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가자, 우리 들어가서 뭐 먹자. 배고파.”“나도 배고프다.”두 녀석은 또 즐겁게 팔짝팔짝 뛰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여씨 가문.여운별은 별장 입구에 멀찌감치 서 있다가 여천우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한참 후에야 여천우가 집안에서 나왔다.여천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여운별은 어두운 얼굴로 걸어가다가 손을 들어 여천우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짝!여천우는 여운별이 자신을 보자마자 뺨을 때릴 줄은 몰랐다.그는 단지 여운별이 자신이 곧 학교로 돌아갈 것을 알고 특별히 찾으러 온 줄로만 알았지만 만나자마자 뺨을 때릴 줄은 몰랐다.“누나. 왜 때려?”여천우는 맞은 얼굴을 만지며 여운별에게 물었다.여운별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누나라고 부르지 마. 내가 네 누나가 맞긴 한 거야? 어려서부터 너는 여운초를 좋아하고 나와 가깝게 지내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여운초와 연합해서 나를 상대하려고 해? 여천우! 너 미쳤어? 나야말로 너의 친누나거든! 같은 엄마 배에서 나온 친누나라고. 여운초는 네 사촌 누나일 뿐이야!”여천우도 바로 화를 냈다.“내가 미쳤다고? 누나! 누나는 우리 부모님 밑에서 응석받이로 자라면서 못된 것만 배웠잖아! 내가 미쳤다고? 누나가 미친 거 아니야? 운초 누나는 내 사촌 누나이자 내 친누나야. 운초 누나도 나와 같은 엄마 뱃속에서 나온 친누나야! 영원한 내 친누나라고!”여운별은 화가 나서 또 여천우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여천우가 막을 준비를 하고
우빈이가 툭하면 어린이집에 안 가는 데 익숙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에 명확하게 일러둬야 한다고 하예정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용정이 모처럼 놀러 왔고 또 용정이 관성에서 친구란 우빈이밖에 없으니, 이번만은 응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우빈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을 약속했다.용정도 따라서 말했다.“아주머니, 다음번에는 제가 여름방학 혹은 겨울방학을 하는 틈을 타서 올 게요. 그러면 누구도 휴가를 내지 않아도 되잖아요.”“이모, 지금 당장 엄마한테 전화해서 얘기하면 안 돼요?”우빈이한테는 지금 휴가를 내는 일이 급선무였다.그래야 시름 놓고 놀 수 있을 것 같았다.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전태윤을 째려보았다. 전태윤은 일부러 하예정의 시선을 피하여 고개를 돌려 딴 곳을 쳐다보는 척했다. 하혜정은 속으로 남편이 우빈이의 일을 자신한테 떠밀었다고 투덜댔다.“알았어.”하예정은 마지못해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예진이 전화를 받자 하예정이 말했다.“언니, 우빈이가 할 얘기 있대.”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우빈이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우빈아, 네가 직접 엄마하고 얘기해.”우빈이는 전화를 받아쥐고 하예진에게 휴가를 내려는 사유를 자초지종 말했다.하예진도 하예정과 똑같은 말을 하고 나서 우빈이가 하루 휴가를 내서 모처럼 찾아온 친구랑 노는 것에 응낙했다.그러자 우빈이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돌려준 후 용정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했다. 그러고는 대결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용정에게 말했다.“용정아, 나 요즘 아주 열심히 무술을 연마했어. 우리 한 번 대결해.”용정이 자신만만해서 말했다.“넌 나한테 질 거야. 나한테 져서 화내면 안 돼. 알았지?”지난 여름방학 때 두 사람이 함께 놀 때 우빈이가 항상 져서 기분이 언짢아했었다.용정은 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모연정이 용정이보고 우빈이는 손님인데 왜 양보하지 않았냐고 핀잔했다.하지만 용정은 어떻게 양보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 자연스럽게 져주는 법을 모르
전태윤이 말하면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예준성도 뒤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다행히 평소에 우리 두 집이 서로 가깝게 지냈고 또 앞으로 친척이 될 사이니 말이죠. 그렇지 않고야 제가 미안해서 어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찾아와서 폐를 끼치겠어요.”별장 구역은 아주 조용했다. 가끔 조깅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용정이 모처럼 왔는데 한시 급히 친구와 놀려고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용정의 무술 실력이 아주 많이 는 거 같아요. 아까 차에서 뛰어 내리는 동작과 달리는 속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우리 우빈이는 아무리 용을 써도 용정을 못 따라잡아요.”“사람마다 다 장점과 약점이 있어요. 용정의 약점은 식탐이 많아요. 매번 집에만 돌아오면 준영이를 얼려서 먹고 싶은 음식을 다 해달라 해요. 번마다 배를 두드리면서 먹어요.”“연정 씨는 애가 하도 많이 먹길래 배에 탈이라도 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다행히도 매일 무술을 연습하느라 많은 열량을 뺐지요. 그렇지 않으면 진작 뚱보가 되었을 겁니다.”“애들은 다 그래요. 크면 저절로 다 낫는 법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저도 어린 시절에 먹길 엄청나게 좋아했대요. 하지만 커서 난 식탐 많은 사람으로 취급받은 적 없어요.”커서는 혼자 통제할 수 있으니 제멋대로 먹지 않았을 뿐이었다.예준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제발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식탐 때문에 손해 볼 수도 있어요.”두 어른과 두 어린이는 반 시간 남짓이 달린 후 방향을 바꿔서 집으로 달렸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할 무렵에 하예정은 이미 일어나 마당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빈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대문 입구로 마중 나갔다.“이모!”두 꼬맹이가 먼저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예정을 본 우빈이는 깡충거리면서 뛰어갔다.용정도 우빈이 뒤를 따라 뛰어갔다.“아주머니.”“용정아, 네가 어떻게 왔니?”하예정은 용정을 보고 반색하며 맞았다.비록 마당에 세워진 예준하의 차를 보긴 했지만
전태윤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이러니 두 사람이 친구로 될 수 있는 거네요. 두 사람이 같은 부류의 사람이니 말이죠. 저도 꼭두새벽에 우빈이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나 함께 조깅하러 나가는 중입니다.”“같이 나가는 건 어때요? 같이 산책해요.”전태윤이 예준성 부자한테 함께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했다.예준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럽시다. 어차피 저도 이제 더 잘 수도 없는데요.” 예준성은 용정을 보면서 말했다.“우빈이 데리고 앞에서 놀아야 해.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알았지?”“우빈이더러 용정을 잘 데리고 놀라고 해야죠. 당신들은 멀리서 온 손님이니 응당히 우리가 주인답게 잘 대접해 드려야죠.”두 아이는 진작 손잡고 앞으로 뛰어 가버렸다.예준성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용정은 낯 갈이도 잘 안 하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방 친숙해져요. 기억력도 참 좋아요. 한 번 다녀갔던 길은 절대 안 잊어요. 길옆에 있는 화초까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어요. 걔는 식물 종류도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용정의 스승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의술이 최고인 정 선생님이잖아요.”정겨울은 바빠서 직접 용정을 가르치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용정이 신의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약재의 이름을 기억했다.용정의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용정은 성격이 참 좋아요.”“그건 모르고 하는 얘깁니다. 성격이 좋을 땐 좋아도 녀석이 횡포한 면도 있어요. 금방 집에 데리고 왔을 때는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말도 잘 안 하기에 똑똑하지 못한 먹보인가 했어요.”“정말 잘못 봤어요.”예준성이 겉으로는 양아들의 단점을 말하는 것 같지만 두 눈은 애틋한 눈빛으로 가득 찼다. 용정은 예준성을 약간 어려워하기에 여태 감히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고 아저씨라고만 불렀고 모연정을 엄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신이 모연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모연정을 모 엄마라고 불렀다.전태윤이 웃으면서 말했다.“운이 좋은 줄 아세요.
“알았어요. 제가 지금 태윤 씨 집 앞에 있어요. 집사가 문 열려고 나오네요. 그러면 만나서 얘기해요.”말을 마친 예준성은 전화를 끊었다.전태윤은 멍하니 서 있었다.전태윤이 어리둥절하여 머리를 숙여 우빈이를 쳐다보니 마침 우빈이도 머리를 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이모부, 왜 그래요? 무슨 일 생겼나요?”전태윤은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누군가 우빈이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 아침 일찍 찾아왔단다.”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혹시 예준하와 성소현의 혼사에 문제가 생겨 예준성이 자신더러 로비스트 되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닐지 생각했다. 하예정은 그럴 재주가 있지만, 자신은 로비스트로 될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윽고 예준성이 동생이 평소에 타고 다니던 차를 운전해서 대문을 지나 마당에 세웠다.예준성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뒷좌석의 차 문이 열리면서 작고 탄탄한 몸매를 가진 어린애가 차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리더니 전태윤이 서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뛰어왔다.“우빈아, 우빈아, 내가 왔어!”전태윤이 눈여겨보니 용정이었다.“용정!”용정을 알아본 우빈이는 잡고 있던 전태윤의 손을 뿌리치고 용정이 뛰어오는 방향을 향해 깡충깡충 뛰어갔다.두 꼬맹이는 만나자마자 반갑다는 듯 어른들처럼 상대방한테 커다란 포옹을 해주었다.여름방학 때 작별한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두 아이의 키는 눈에 띄게 컸다.용정은 매일 많은 시간을 들여서 무술을 연마했기에 키가 우빈이보다 훨씬 더 컸으며 신체도 우빈이보다 퍽 탄탄해 보였다.방금 용정이가 차에서 뛰어 내리는 동작을 통하여 전태윤은 용정의 무술 실력이 또 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용정의 무술 솜씨는 우빈이 셋을 합쳐도 못 당할 것이었다. 이 아이는 무술 배우는 방면에서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용정아, 네가 어떻게 왔어?”친구를 만난 우빈이는 기뻐하면서 물었다.“나는 할아버지 따라서 모 엄마와 아저씨 보러 왔어. 사공이 유치원에 일주일 동안 휴가를 신청해
이날 저녁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돌아오는 날은 일요일이었다.휴식날인데 우빈이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우빈이는 일어난 후 곧장 하예정이 자는 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전태윤이 안에서 방문을 열어주었다.“이모부, 이모 일어났어요? 들어가서 이모랑 같이 놀래요.”전태윤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꼬맹이와 화내지 말자고 스스로 가슴을 달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우빈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지? 평소에 어린이집 가야 하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더니 쉬는 날만 되면 아주 일찍 일어나더라.”우빈이가 입을 뾰족이 내밀면서 말했다.“이모부, 나는 한 번 깨어나면 더는 못 자요. 나랑 놀아 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심심해요. 이모 찾아와서 노는 수밖에 없어요.”현재 우빈이는 시 중심에 자리 잡은 전태윤의 개인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 서원 리조트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함께 놀아 주는 어린이들이 있었기에 이모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두 팔로 우빈이를 부쩍 들어 품에 안으면서 말했다.“이모는 아직도 자고 있어. 이모부가 우빈이랑 같이 놀아 줄게. 뭐 놀까?”“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면 좋지 않을까?”우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싫어요. 혼자 놀면 재미가 없어요. 이모부는 장난감도 안 놀 거잖아요.”전태윤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모부랑 같이 아침 조깅하러 나갈까? 이모부가 가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려야 해?”그는 우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려놓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신신당부했다.“침실에 들어가서 이모를 깨우면 안 돼. 알았지? 이모부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우빈이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전태윤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서 먼저 운동복 바지부터 바꿔 입고 우빈이가 그사이에 침실에 들어가서 하예정을 깨울까 봐 걱정되어 웃옷을 입으면서 밖으로 나왔다.우빈이가 조용하게 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야 전태윤은 안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