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의 통화를 마친 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하예정은 남편에게 말했다.“당신의 말대로 할아버지한테 주씨 일가가 다시는 언니를 찾아가지 않게 상대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일이 잘 풀릴진 모르겠지만.”“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겠지만 내 생각엔 분명 우리 생각대로 잘 풀릴 거야.”전태윤은 자신의 제안에 대해 자신만만했다.“여보,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신이 오늘 밤에 어떤 드레스를 입고 어떤 보석을 착용하느냐 하는 거야.”그녀는 남편을 힐끔 쳐다보았다.“왜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오려고요?”전태윤은 자기도취 되어 말했다.“난 뺏을 필요 없어. 내가 있는 자리는 항상 중심이거든. 모든 이의 눈길을 끌고 있지. 정남이는 비교도 안 돼.”“...”소정남이 비교가 되든 안 되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친구의 약혼식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내 드레스는 당신이 사준 게 아니면 이모가 사준 게 대부분이에요. 내가 직접 산 건 몇 번밖에 못 입어봤는데... 당신이랑 같이 있는 자리에서 나절로 산 드레스는 못 입게 하잖아요.”그녀는 고집쟁이 남편을 한번 흘겨보더니 계속하여 말했다.“아무튼, 날씨도 점점 더워지고 있는데, 너무 보수적인 드레스를 입으라고 하지 말아요.”남편이 선물한 드레스는 한 곳도 드러난 데가 없다.이런 보수적인 드레스들은 겨울과 봄에 입기에 적합하다. 이제는 4월에 접어들었는데, 관성의 4월은 매우 덥다. 만약 겨울에 적합한 드레스를 입으면 덥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전태윤은 헤헤 웃기만 하였다.“오늘 밤은 당신 마음대로 골라.”그녀의 말대로 그가 사준 드레스는 하나같이 보수적이니 그녀가 어떤 드레스를 골라 입든 그가 사준 거라면 상관없었다.“아직 이르니 이제 집에 돌아가면 좀 자, 저녁때 내가 당신을 깨울게.”그는 아내의 눈 밑의 다크서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하예정은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하품했다.“우리 같이 자요. 당신은 나보다 더 피곤할 거 아니에요.낮에는 출근해서 일을 처리해야 하고
언니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한 후 그녀는 며칠 동안 계속 잠을 설쳤고 매일 한밤중에 깨어나 조용히 언니의 침대 앞에 가 손을 뻗어 숨을 쉬고 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해야만 안심했다.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어 가족을 잃은 아픔을 맛본 하예정은 하나뿐인 언니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자, 옷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가자.”전씨 집안과 소씨 가문은 친했기에 소정남이 약혼식에 장소민도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 게다가 장소민의 친정과 소씨 가문 사이에도 친분이 있어 그녀의 친정 가족들도 오늘 밤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하예정은 순순히 일어나 시어머니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후, 하예정은 드레스를 갈아입고, 연한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미리 준비한 심효진에게 줄 약혼 선물을 들고 시어머니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전태윤 부자는 식당에서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들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부자는 각자의 사랑하는 아내를 맞이했다.전태윤은 말했다.“여보, 먼저 뭐라도 좀 먹고 가.”점심때 하예정은 많이 먹지 않았다.소씨 집에 가서 먹기만 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가 배가 고플까 봐 걱정했다.하예정은 일찍이 배가 고팠지만 말하기 거북해 말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 남편이 챙겨주자, 배를 곯지 않게 되었다.네 사람은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전이진은 아직도 여운초에게 소씨 집에 같이 가자고 조르고 있다.“운초야, 나 여태 널 많이 도와줬었잖아, 지금 딱 한 번 나 도와달라고 하는데 거절하는 거야? 의리가 없는데?”전이진은 마치 껌딱지처럼 여운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그녀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전이진의 불평을 듣던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서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여러모로 많이 도와준 건 고마워. 하지만 너도 매번 나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밥을 사달라고 했잖아? 이제 우리 사이엔 빚지지 않은 거야. 게다가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너의 여자친구나 와이프가 해야 할 일이야.”전이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네
“이진아, 미안.”여운초는 여전히 완곡히 거절했다.전이진은 그녀의 손에서 호스를 뺏은 후 그녀를 카운터 앞으로 끌고 가 앉히고는 말했다.“일단 앉아봐, 할 말이 있어.”“무슨 말?”전이진은 두 명의 점원이 모두 손님에게 꽃을 배달하러 가고 나서 없는 것을 확인했다. 사실은 전이진이 전화를 걸어 다른 사람들에게 두 개의 꽃다발을 주문하라고 분부하여 점원들을 나가게 한 것이다.꽃필무렵의 장사는 여씨 집안의 두 고모의 소동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내가 왜 너에게 계속 도움을 주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여운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매우 알고 싶었다. 전에는 어떻게 물어도 알려주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가 그녀의 꽃가게에 처음 나타났을 때가 둘이 처음 만난 것이라고 단언컨대 장담할 수 있다.“연후 할머니가 두 장의 사진을 보내왔어. 한 장은 나에게, 한 장은 셋째에게. 나에게 준 그 사진은 너의 사진이었어.”여운초는 그 말에 놀랐다.‘전씨네 할머니가 언제 내 사진을...?’그녀의 사진을 전이진에게 주기까지 하다니, 무슨 뜻일까?여운초는 애써 과거를 회상했지만 언제 전씨네 할머니를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녀는 여씨 집안의 투명 인간일 뿐이었고 전씨네 할머니는 전씨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분일 뿐만 아니라 관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매우 인기 있는 분이셨다.여운초와 할머니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전이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여운초는 잠시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진아, 할머니는 어디서 내 사진을 구한 거야? 내 사진을 너에게 준 건 또 무슨 뜻이고?”그는 한마디씩 알려주면서 그녀의 호기심을 끌어올렸다.이 남자가 그녀에게 잘해주는 건 사실이지만 때로는 아주 못됐다.“맞춰봐.”“못 맞추겠어.”여운초는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알려줬으면 해.”전이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선글라스를 벗기며 말했다.“작은 얼굴에 이렇게 큰 선글라스를 쓰니 얼굴을 가리잖아. 봐
“할머니는 사진 속 여자아이가 자신이 직접 골라준 아내감이라며 1년 안에 사진 속 여자아이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셨어. 안 그러면 집에서 쫓아내겠다고.”“...”‘어떻게 이런 답이 나올 수 있지?’전씨 집안 어르신이 어떻게 자신을 전이진의 아내감으로 찍을 수 있지?그녀는 장님인데.“지금 4월이니까 나에겐 아직 몇 달의 시간이 남았어. 그 시간 동안 너에게 구애할 거고 그다음 순서대로 연애, 약혼, 결혼까지 하면 마무리. 아, 아니지, 할머니한테 쫓겨날까 봐 걱정 안 해도 되... 아니, 잠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자신이 한 말이 여운초로 하여금 그가 단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고 느끼게 할 것 같았다.전이진은 자신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함께 지내는 과정에서 그녀가 점점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되었다. 그에게 속아 넘어갔을 때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어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추미자가 체포되고 여 대표가 조사받은 후, 여씨 집안의 외부 사업은 여운초가 휴대폰을 통해 적절하게 안배하고 있었다.전이진이 그녀가 전화하는 것을 직접 듣지 않았더라면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장님 아가씨는 이미 묵묵히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전이진은 자기가 아직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그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운초야, 난 널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널 내 와이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놀랐다거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도 좋아. 우리 할머니가 하는 일은 워낙 말도 안 되는 일뿐이니까. 어쨌든 나는 이미 널 와이프로 생각하고 있고 너에게 구애할 거야. 이제 네가 날 사랑하게 되면 약혼, 그리고 결혼식을 할 거야. 아직 8개월이 지나야 설을 쇠게 되니까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해.”만약 가능하다면 그는 1년 안에 아이까지 가질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뒤의 말은 여운초에게 쫓겨날까 봐 감히 말하지는 못했다.그녀는 화를 낼 때면
소씨 일가.전태윤의 전용 차량 행렬은 일찍 온 편이었다.그와 소정남은 좋은 친구이자 상사와 부하이며 또한 그는 소정남과 심효진의 중매인이니 그들 부부는 자연스럽게 일찍 도착했다.소씨 집안과 심씨 집안 양가의 어른들은 모두 현장에 있었다.전현림 부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양가의 어른들이 먼저 다가와 맞이하였고 소정남과 심효진이 그 뒤를 따랐다.장소민 부부는 심효진의 부모와 아는 사이가 아니라 소정남의 부모가 심효진의 부모를 장소민에게 소개해 주었다.악수하고 수다를 피운 뒤 심효진의 어머니는 장소민을 쳐다보며 웃으며 말했다.“사모님은 전 대표의 누나 같으시네요. 너무 잘 관리하셨어요.”하예정은 차에서 내린 후 걸어오며 심효정 어머니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을 받았다.“그렇죠? 어머니와 함께 쇼핑할 때면 다들 우리가 자매인 줄 알아요.”장소민은 웃으며 말했다.“참, 칭찬만 해서 쑥스럽네요.”“사모님을 기쁘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사실인걸요. 예정이 이 아이는 제가 보고 자라서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한지 잘 알아요.”하예정과 심효진은 절친한 친구라 그녀는 평소에도 하예정을 잘 보살펴 주었다. 집에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하예정을 집으로 불러서 먹이거나 심효진에게 포장해서 가져다주라고 했다.이 점을 봐서라도 장소민은 기꺼이 심효진 어머니의 체면을 세워주었다.그녀들은 대화가 잘 통했다.소정남의 어머니는 모두를 방으로 안내했다.하예정은 겨우 시간을 내서 친구와 귓속말할 수 있었다.“예진 언니는 좀 괜찮아졌어?”심효진이 먼저 하예진의 안부를 물었다.약혼식 때문에 바빠서 최근 이틀 동안에는 전화로만 하예진의 회복 상황에 관해 물었을 뿐 병원에는 방문하지 않았다.“회복이 잘 돼서 일주일만 더 입원하면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할 수 있을 것 같아. 언니가 부탁해서 약혼 예물을 보내왔는데 너와 정남 씨가 백년해로하고 금실이 좋아지길 바란대.”심효진은 웃으며 말했다.“예진 언니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나와 정남 씨는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정남과 효진 씨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만큼 행복할 거야.”두 집안의 어른들은 전태윤 부부에 대한 고마움을 마다하지 않았다.소씨 집안은 전태윤이 솔로에서 벗어나고도 형제를 잊지 않고 소정남에게 심효진을 소개해 주어 의리가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심씨 일가도 그렇게 생각했다.소씨 집안 어른은 심효진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다. 심씨 집안 어른은 소정남이라는 예비 사위가 생기자, 친아들인 심서준은 아예 옆에 비켜서게 됐다. 심효진도 부모님 앞에서 큰소리로 소정남에게 몇 마디 했다 하면 부모님의 눈총을 받게 되는 정도였다.심효진은 소정남에게 그가 집안에 들어온 후부터 자기 부모님이 다 그의 편을 든다고 불평을 많이 했다.소정남은 기쁘기만 했다.약혼식에 온 손님들은 대부분 차를 몰고 왔지만, 몇몇 손님들은 예외적으로 개인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개인 비행기는 소씨 가문 안주인의 개인 비행장에 세워놓았다.하예정은 호기심에 자기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개인 비행기를 타고 온 손님이 누군지 알아요?”“내 추측이 맞았다면 강성의 고씨 집안의 사람일 거야. 소씨 집안에서 청한 손님 중에 관성의 사람이든 다른 도시의 사람이든 모두 왔는데 강성 고씨 집안은 아직 오지 않았는걸.”강성의 고씨 일가는 돈이 넘쳐나기에 개인 비행기가 있을 만도 했다.전태윤도 자신만의 개인 비행기와 호화 요트를 가지고 있다.“강성의 고씨 집안? 고현 씨의 그 고씨 집안이요?”하예정은 할머니가 지난번 강성 출장 때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아 좋은 구경거리를 못 본 것이 아쉬웠다. 소정남의 약혼식에 강성의 고씨 집안이 축하 인사를 보내올 줄은 몰랐다.소씨 가문의 인맥이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많은 다른 지방과 도시에서 온 손님들은 모두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라 부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쩐지 전태윤이 시킨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알아서 잘 해낸다더니, 바로 소씨 가문의 강력한 인맥 덕분이다.“그래.”전태윤은 아내의 예쁜 코를 살짝 만지고는 사랑스럽다는
전태윤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꼬집었다.전태윤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말했다.“자, 같이 가자.”하예정은 매우 기뻤다.부부는 소씨 집 마당에서 고 대표가 아내와 '아들' 들을 데리고 소씨와 심씨 집안의 안내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군중 속의 전호영은 고 대표 뒤에 서 있는 키 크고 차가운 '남자'를 보고 눈빛이 깊어졌다.그는 강성 고씨 집안의 사람들이 올 줄은 몰랐다.성소현은 와인 한 잔을 들고 하예정 곁으로 가서 전태윤에게 한마디 했다.“태윤 씨, 예정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자리 비켜줄래요?”전태윤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이 여자는 공공연히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한다.성소현은 전태윤이 속으로는 싫지만 더 이상 자기한테 뭐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기뻤다.“여보.”하예정이 달콤한 목소리로 전태윤을 부르자 전태윤은 바로 투항했다.그가 막 돌아서서 두 발짝 걸어가자마자 성소현이 하예정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예정아, 저 남자 정말 잘생기지 않았어? 키가 큰 데다가 얼굴까지 잘생겼지. 분위기도 차도남. 너희 집 태윤이보다 더 잘생긴 남자가 있을 줄 몰랐어.”전태윤은 자리를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는 되돌아와서 산처럼 하예정의 곁에 우뚝 서서 성소현에게 주의를 주었다. 잘생긴 남자를 보면 봤지 하예정까지 끌어가진 말라고.하예정은 성소현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 대표 뒤에 있는 키가 크고 준수한 두 남자를 보더니 다시 자기 남자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내 눈에는 아무도 우리 집 태윤 씨를 따라갈 남자가 없는걸요.”성소현도 전태윤을 바라보며 웃으며 놀렸다.“태윤 씨, 숨어 듣느라 토끼 귀가 다 되겠어요.”“우리 집 예정이만 안 싫어하면 돼요.”성소현은 말문이 막혔다.전태윤은 순식간에 하예정을 품에 끌어안고는 차갑게 성소현에게 말했다.“처형 말다 끝났죠? 손님들이 모두 도착했고 약혼식도 곧 시작하는데... 나와 예정이는 중매인 신분이라 더 이
성소현은 부부가 멀리 간 후 예준하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태윤 씨는 참 인색한 사람이야. 예정이가 고씨 집안의 쌍둥이에게 반할까 봐 급히 데려가는 걸 봐.”예준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소현의 기억에 그는 언제나 온화하고 점잖으며 겸손한 사람이었다.“태윤 씨는 아내 바라기인걸. 고씨 집안의 쌍둥이도 정말 훌륭해. 비록 친하지는 않지만 그들 형제의 일을 들은 적이 있어. 큰 도련님은 고씨 그룹의 총재로서 고 대표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다고. 둘째 도련님은 직접 창업하고 있는데 가업을 이어받는 것을 꺼리고 있대. 듣는데 의하면 고 대표는 고씨 그룹을 첫째가 아닌 둘째 아들에게 넘겨주고 싶어 한대.”성소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고 대표는 왜 이렇게 편애하는 거야? 큰 도련님은 고씨 그룹을 인수할 능력이 충분한데 오히려 작은아들에게 넘기려고 한다고? 형제가 권력다툼으로 서로 원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 아니야? 가족 기업의 발전에 불리할 텐데.”그녀도 두 명의 오빠가 있다. 큰오빠는 성씨 그룹을 인수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둘째 오빠는 사업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아무리 잘 가르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의 부모님도 포기하였다. 하지만 둘째 오빠는 본인이 좋아하는 업계에서 제일 잘나가고 있다.성소현은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했다.부모로서 아이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보고 그중에서 후계자를 골라야 형제자매가 서로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그녀의 큰오빠는 가업을 이어받았고 둘째 오빠는 좋아하는 업계에서 잘나가고 있으니 다툴 것도 없고 원수로 될 일도 없어 그들 형제의 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전씨 집안을 봐도 그랬다.전씨 집안의 가풍은 좋기로 유명하다. 재벌 집안이든 보통 집안이든 전씨 집안처럼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전태윤의 사촌 동생들이 이어받은 업종이 저마다 달랐다. 어른들은 아이들 각자의 취향과 특기에 따라 적합하게 안배하였고 그중 가장 능력 있고 집안의 중책을 기꺼이 떠맡으려 하는 아이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