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경은 윤미라를 쳐다보았다.윤미라는 도우미에게 손은경이 산 물건들을 모두 집안으로 옮기라고 한 후, 손은경을 데리고 집 마당에서 산책했다.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윤미라는 걸으면서 한숨을 쉬었다.“무슨 걱정거리가 있거든 저한테 한번 말해보실래요? 혹시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한숨 쉬지 마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그녀는 손은경의 한쪽 손을 잡고 바라보며 말했다.“은경아, 넌 아주 우수하고 이해심이 많은 여자아이야. 집 살림도 잘하고, 일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아줌마 눈에는 네가 항상 가장 완벽한 며느릿감이란다. 하지만 동명 그 자식이 눈이 멀었는지 하예진을 좋아한다지 뭐야. 우리가 가장 우려했던 일이 정말 일어났어. 글쎄 하예진이 다쳤다고 어젯밤부터 밤새 병원에서 지키다가 내가 직접 찾아가서야 겨우 돌아와 쉬는 거 있지. 아까 돌아오는 길에도 지입으로 인정했어. 하예진이 좋다고, 마음이 끌린다고. 그러니 은경아, 꼭 노력해서 한번 이겨봐. 하예진은 너랑 비교할 수도 없으니, 너 꼭 동명의 마음을 뺏어와야 한다. 어쨌든, 아줌마는 우리 은경이만 마음에 두고 있으니 그렇게 알아둬. 내가 살아 있는 한 하예진이 우리 노씨 집에 시집오는 것을 허락하지 못해!”손은경은 좀 의외였지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그녀는 전에 윤미라와 함께 하예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윤미라는 직접 하예진을 찾아가 떠보기까지 했는데, 전혀 노동명에게 관심이 없었다.“혹시 동명 오빠가 하예진한테 고백했어요?”손은경이 담담하게 물었다.“아니, 그 녀석도 이번에 하예진이 다쳐서야 제 마음을 똑똑히 알게 됐대.”이 말에 손은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셋의 일이니, 우리가 스스로 처리하게 해줘요. 저도 한번 노력해 볼게요.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저도 최선을 다해 제 행복을 추구할 거예요. 그러니 아줌마도 뒤에서 하예진에게 손 쓸 필요 없어요. 전 이겨도 떳떳하게 이길 테니.”윤미라와 한동안 함께 지낸 손은경은, 도도한 윤미라가
전씨 집안의 경호원들은 병실 문 앞에 막아서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예진이가 깼다고 해서 보러 왔어요.”김은희는 미소 띤 얼굴로 경호원에게 말했다.하예진이 의식을 찾은 후에도 하예정은 주형인에게 알리지 않았다.하지만 아이 납치 사건에 관해 연루된 일이 너무 많아 사건 발생 후 모든 사람의 화젯거리가 되었고 모든 관성 사람이 알게 되었다.자연히 하예진의 부상에 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그녀가 위험에서 벗어나 중환자실에서 나왔다는 것도 미디어에서 알게 됐다.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모성애에 감동하여 그녀가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기도했고, 그녀가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안 후 미디어에 보도되어, 주씨 일가가 알게 된 것이다.“사모님께서 말하셨어요, 예진 씨는 아직 안정이 필요해 떠들면 안 된다고요. 위험에서 벗어난 걸 알면 된 거잖아요? 휴식하는 걸 방해할 필요 없어요.”강일구가 말했다.목소리가 큰 주서인이 입을 열었다.“우리는 그냥 예진이를 보러 온 거예요. 한눈만 보고 간다니까요? 방해하지 않는다고요, 비켜요, 들어가게 해달라고요!”“서인아.”주경진이 눈치 주자 그녀의 목소리가 한결 작아졌다.“우리도 걱정돼서 그래요. 나쁜 생각도 없는데 그냥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안 돼요?”이때 병실 문이 열렸다.하예정이 그들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예정 씨.”그녀를 본 주서인은 다급히 말했다.“예정 씨, 당신 언니 좀 볼 수 있을까요? 걱정 마요, 방해되지 않게 그냥 한눈만 볼게요.”하예정의 시선이 주씨 일가의 얼굴들을 스쳐 가더니 주서인에게 말했다.“목소리 낮춰야 얘기해요.”하예진은 병실에서 일찍이 전 시댁 일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참 생각한 끝에 동생에게 들여보내라고 말했다. 못 들어오게 하면 매일 와서 귀찮게 굴 그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알았어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할게요.”주서인은 바삐 그 요구에 응했다.하예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고, 경호원들도 더 이상 주씨 일가의 병실 출입을 막지 않았다.“예
“예정 씨, 이건 내 작은 성의니까 언니를 대신해서 받아요. 우리 지방의 사람들은 병문안을 갈 때 모두 돈을 쥐여주거든요. 이쪽의 지방 습관이라.”주서인은 하예진이 돈을 받게 하려고 지방의 습관까지 곁들어 말했다.김은희도 하예진에게 큰 돈봉투를 건네주었다.하예정이 거절하자 결국 두 모녀는 돈봉투를 우빈에게 쥐여주고는 재빨리 달아났다.주경진도 눈치채고 돈봉투를 돌려주지 못하도록 따라서 달아났다.주형인만이 하예진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예정은 주형인에게 돈봉투를 가져가게 하고 싶었지만 우빈이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꽉 붙잡으며 말했다.“이건 할머니와 고모가 나에게 준 돈이에요!”하예정은 그를 달랬다.“우빈아, 이 돈들은 너희 할머니와 네 고모에게 돌려줘야 해. 우리 이 돈 받지 말자.”“할머니와 고모가 나에게 준 거예요!”우빈은 단호히 거절했다. 할머니와 고모가 그에게 돈을 준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꼬맹이는 돈을 받기만 하면 엄마에게 주어 자기를 도와 저금함에 저축하게 했다.그래서 할머니와 고모가 그에게 준 돈봉투를 무의식적으로 보호하려고 했다.“...”그녀는 조카가 뜻밖에도 돈을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몸조리 잘하고, 시간 나면 다시 보러 올게.”주형인은 하고 싶은 말은 끝내 하지 않고 인사만 하고 떠났다.하예정은 조카의 손에서 두 봉투를 가져와 주씨 일가에게 돌려주지 못하게 되자,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언니를 바라보았다.하예진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동생에게 말했다.“됐어, 이미 준 걸 받지 뭐. 예전에 자주 우빈이에게 돈을 줘서 애가 받는 것에 익숙해져 손에 쥐어주기만 하면 다시 가져갈 생각은 접는 게 좋아.”하예정은 조카를 안고 뽀뽀를 하고는 농담조로 물었다.“우빈이, 벌써부터 미래 와이프를 위해 돈을 모아두는 거야?”“엄마를 도와 돈을 많이 모아서 나중에 큰 집을 사 줄 거예요.”하예진의 미소는 더 깊어졌다.하예정도 웃으며 칭찬했다.“우리 우빈이는 정말 착해, 돈을 모아서 엄마
“고마워요.”여운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다.“형수님.”전이진이 하예정을 불렀다.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여운초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전이진은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놓고 꽃다발은 하예진의 침대 머리맡에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 씨, 이건 운초 씨가 준 거예요. 빨리 낫길 바라요.”하예진은 그에 감사하다고 말했다.그녀는 여운초와 친하지 않지만 동생이 여운초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생도 그녀에게 여씨 집안의 아가씨는 할머니가 전이진에게 택해 준 아내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운초에 대한 전이진의 태도를 보면 할머니의 안배를 받아들인 듯했다.“예진 씨.”여운초는 하예진을 향해 앉았다.“죄송해요.”그녀는 하예진에게 사과했다.“운초 씨가 왜 저한테 사과해요?”하예진은 아직 허약했다. 마취제의 약효가 끝난 후 상처와 수술한 부분이 너무 아팠다. 아픈 나머지 얼굴색이 더더욱 안 좋아졌고 말할 때도 크게 말할 수가 없었다.여운초는 자책하듯 말했다.“처음부터 이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예정 씨는 나를 도와주고, 구해주기 위해 엄마와 관계가 틀어진 거고요. 그래서 엄마가... 엄마는 지금 잡혔으니 꼭 법적 처벌을 받을 거예요. 저는 범죄 용의자의 가족으로서 당연히 예진 씨에게 사과해야죠.”그녀는 일어서서 정중하게 사과했다.“예진 씨, 미안해요.”“사과 받아들일 테니까 자책하지 마요. 이 일은 당신의 잘못도 아니고, 예정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너무 미쳐서 그런 거죠.”하예진은 사실 배후가 누구인지 몰랐다. 여운초가 와서 사과한 후에야 깨달았다.하지만 여운초는 여전히 자책에 잠겨있다.하예정이 어머니와 관계가 틀어진 것은 모두 본인을 도와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예정은 한바탕 그녀를 위로한 후 물었다.“운초 씨 집은 지금 어떻게 됐어요?”여운초의 엄마와 동생, 모녀 둘 다 들어가게 되었다.여운별이 하예정에게 고소당한 후 받은 형은 여씨 사모님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사모님은 원래 딸을 구하
여운초는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부탁할게, 둘째 도련님.”“아니, 아직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너무 낯설게 들리네요. 그냥 이진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운초 씨는 제 친구이고, 이진 씨는 제 시동생인 데다 둘이 나이도 비슷하겠다, 편하게 불러도 좋을 것 같은데요.”전이진은 형수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여운초는 웃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전이진과 단둘일 때는 이미 반말을 사용하고 있다.하예진은 쉬어야 했기에 여운초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이경혜 모녀가 온 후, 그녀는 전이진과 함께 떠났다.“예정아, 우빈이 데리고 전 대표와 함께 돌아가서 밥을 먹고 오후에는 집에서 쉬어. 나와 소현이가 여기에서 네 언니를 보면 되니까. 이제 저녁에 너희 부부가 다시 와서 지키면 돼.”이경혜는 저녁에 지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예정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반면, 조카의 행동이 이해되기도 했다.이경혜의 자녀들은 그녀가 나이가 들어 견딜 수 없을까 봐 걱정했다.하예정은 언니를 쳐다봤다.“이모 말 들어.”하예진이 속삭였다.“지금 네가 초췌한 모습 보는 것도 마음이 아파. 나 괜찮아, 안 죽어. 부모님이랑 우빈이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어. 빨리 우빈이 데리고 가서 쉬어.”전태윤이 밖에서 들어왔다. 방금 하예진의 주치의를 찾아가 부상 상태를 알아보고 후유증이 있을 가봐도 걱정되었다.“이모.”그는 이경혜에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고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이모라고 불렀다.성소현을 대할 때, 그는 항상 잠시 주저한 후에야 처형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이럴 때마다 성소현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전태윤처럼 도도한 사람이 예전 같으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만나기만 하면 고개를 숙이고 비위를 맞추는 말투로 그녀를 처형이라고 부른다.예전처럼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은 더더욱 안 됐다.성소현은 뜻 모를 쾌감을 느꼈다.전태윤은 성소현과 인사를 나눈 후 그의 와이프를 바라보았다. 성소현의 득의양
하예정은 원래부터 사고가 일어났을 때 언니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아이 문제로 검색어에 오른 것까지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그럼 리조트로 돌아가요.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심하게 놀라면 굿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어렸을 때 나도 자주 놀라서 무당에게 부탁하여 굿을 하였다네요.”차에 올라타자 전태윤은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언제부터 그런 걸 믿었는지 몰라. 그 무당 선생, 우리 둘의 팔자도 봐주셨잖아. 우리 둘이 한평생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하여서 할머니가 극구 엮어주신 거야.”“...그런 이유도 있었어요? 전 할머니가 내 인품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무당의 말 한마디에 우리 둘을 맺어주게 된 거였네요.”전태윤은 한 손으로 우빈이를 껴안고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 무당 한 수는 있다니까.”그와 하예정이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그 두 사람은 지금 오붓한 부부로 되였으니.안타까운 건 부부의 인연이 한생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다음 생에도 그녀와 부부로 되고 싶었다.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한 번뿐이니 이번 생을 소중히 보내면 된다.“할머니는 무당에게 집의 풍수 문제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풍수에 관해서는 조예가 깊지 못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따로 모셔 보라고 하셨어.”전씨 일가에서는 딸을 낳지 못하고 있는데, 전태윤은 할머니에게 풍수 문제가 아닐지 얘기했던 적이 있어 할머니께서 비로소 그 무당에게 물어본 것이다.그 무당은 팔자를 보는 면에선 매우 정확했지만, 풍수에 대해서는 깊이 알고 있지 않아 다른 유명한 풍수가를 청했는데, 그 풍수가도 아무런 문제를 보아내지 못했다.하지만 무당이 할머니에게 알려준 바에 의하면 전태윤과 하예정 부부는 아들과 딸을 다 품에 안을 팔자라고 했다.할머니가 즐거운 듯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줬을 때 그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아들딸을 모두 안게 된다니, 누구든 부러워할
한편 전이진은 여운초를 데리고 병원에서 나온 뒤 그녀를 꽃필무렵에 바래다주지 않고 바로 관성호텔로 갔다. 그러고는 여운초에게 말했다.“병원까지 같이 다녀왔는데 점심에 밥 사줘.”일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여운초는 침묵에 잠겼다.‘왜 매번 나보고 밥을 사라고 하는 거지?'여운초는 전이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물었다.“어디 가서 먹고 싶어?”“난...”전이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 표시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번호가 기억에 남았다. 여 대표였다.“큰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어.”그는 여운초에게 알렸다.그녀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내 생각에는 급한 김에 너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것 같아.”여 대표는 정말 급해 났고 두려워 났다.그와 아내는 한 줄에 묶인 사람이라 비록 겉으로는 아내가 죄명을 다 쓰고 있지만 조사를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경찰이 깊이 조사하기만 하면 그는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그들 부부가 큰 힘을 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공든 탑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내가 그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것이 마음속으로 원망스럽기만 했다.아내에게 더 이상 전태윤 부부와 싸우지 말라고 수없이 설득했었다. 그들에게 몇백억의 재산이 있어도 여전히 전씨 일가를 이길 수 없다고.여운별이 형을 선고받으면 받았지, 그들 부부가 밖에서 멀쩡히 기다리기만 하면 딸이 형을 마치고 출소한 후 딸에게 좋은 조건을 마련해 줄 수 있다.여운별이 사람을 고용해 해하려 한 것은 그다지 엄중한 일은 아니었다. 하예정이 무술을 할 줄 알고, 전씨 집안의 경호원이 몰래 그녀를 따라다지만 않았더라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몇 년 형을 선고받았을 뿐이다.딸은 아직 젊어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도 겨우 20대이다. 비록 감옥살이는 불미스러운 일이지만 법을 어긴 데다가 하예정의 양해를 구할 방법이 없어 법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전이진은 여운초에게 한마디 던지고는 그녀가 대답하든 말든 일단 전화를 받은 후 휴대폰을 여운초 앞에 내밀었다.“빨리 받아, 같이 죽는 게 싫으면.”그녀는 마지못해 그의 휴대폰을 받았다.여 대표는 이미 전화 저편에서 말하고 있었다.“이진 씨, 시간 돼요? 제가 밥 살게요.”여운초는 전이진의 휴대폰을 귓가에 갖다 대고 큰아버지의 물음에 침착하게 대답했다.“큰아버지, 이진 씨는 운전 중이어서 전화 받기 불편해요.”“운초? 이진 씨랑 같이 있었어? 그럼 좀 전해줘, 내가 밥 살 테니까 시간 있냐고 말이야. 너도 같이 와.”여 대표는 조카딸의 목소리를 듣고 전이진과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이진 씨, 큰아버지가 밥 사준다고 하는데, 시간 괜찮냐고 묻네.”“당연히 괜찮지, 우리 지금 밥 먹으러 가는 길이잖아. 여 대표님한테 관성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겠으니 빨리 오라고 해.”오늘은 여운초의 돈을 쓰지 못하게 됐다.나중에 다시 써도 마찬가지, 어쨌든 그는 평생의 시간이 있으니까.그녀의 돈을 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매번 그에게 밥을 사줄 때마다 돈을 아까워하는 모습이 웃겼다. 그래서 그녀의 돈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가 아까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여운초: ...누가 너랑 평생을 살겠대?’“큰아버지, 이진 씨가 하는 말 들으셨죠?”여 대표는 전화 저편에서 대답하였다.“알았어요, 지금 바로 관성 호텔로 갈게요.”말을 마친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여운초는 핸드폰을 전이진에게 돌려주었다.전이진은 차를 몰며 농담 조로 말했다.“네 큰아버지가 나에게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아마도 널 나한테 시집보내겠다는 뜻일 텐데, 너 나에게 시집올거야?”“...”“지난번에 너에게 못된 짓을 하려 했던 그 나쁜 놈, 공씨 어르신이 이미 가법으로 혼을 내주었어. 그냥 한번 너에게 알려주는 거야. 네 엄마가 그 사람을 찾은 건 관성에서의 공씨 가문의 명성을 생각해서야. 공씨 가문에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