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초는 하예정이 하는 말을 차분하게 들었다. 그녀는 기억력이 좋아 하예정이 한번 말하면 바로 기억한다.“운초 씨, 방금 말한 노선 기억할 수 있겠어요?”하예정이 관심 조로 묻자 여운초가 온화하게 대답했다.“고마워요, 예정 씨. 다 기억했어요.”“그럼 나 먼저 가요?”하예정은 맨 위층에 올라가 전태윤을 만나야 해서 여운초와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네, 이만 가보세요. 제가 천천히 찾아갈게요. 이진 씨가 딴 사람 도움 받지 말고 무조건 혼자 사무실까지 오라고 했어요.”‘도련님 진짜! 운초 씨 너무 모질게 구는 거 아니야?!’물론 여운초도 똑같은 생각이겠지.대체 전이진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벌을 받는 것인지...전이진은 또 하필 그녀를 모질게 굴면서도 영악하게 미끼를 내던졌다.여운초의 꽃가게 장사가 요즘 줄곧 별로였다. 그날 누군가가 찾아와서 가게의 모든 장미꽃을 싹쓸이해 간 것 외엔 평상시 꽃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전이진이 공씨 일가의 연회 장소 배치를 여운초의 가게에 맡기겠다고 하니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관성 호텔은 규모가 큰 호텔이고 공씨 일가가 그곳에서 연회를 열면 관성 상업계 거물들이 다 참석할 터라 현장에 쓰일 화초가 꽤 많이 필요할 것이다.여운초가 이 주문을 성사하면 이번 달 매출도 달성하고 집세와 두 직원의 월급도 지급할 수 있으며 본인한테도 용돈이 남게 된다.바로 이 때문에 전이진이 아무리 까다로운 요구를 제기해도 앞이 안 보이는 여운초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은 채 바로 대답했다.아침에 외출할 때마다 전이진과 자주 마주치는데 그는 항상 갖은 방법으로 그녀를 차에 태우고 가게까지 실어다 준다.여운초는 그런 그가 나쁜 사람인 것만은 같지 않았다. 하지만 꽃 배달 요구를 들었을 땐 대체 왜 이러는지, 일부러 그녀를 모질게 굴 작정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지 회의심이 들었다.“그럼 나 먼저 가요. 조심히 와요, 운초 씨. 노선이 생각나지 않으면 멈춰서서 주변 사람들한테 여쭤봐요.
부대표님이 대체 왜 시각장애인한테 꽃 배달을 시킨 거지?안내 데스크 직원은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지만, 겉으론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여운초에게 물었다.“여운초 씨, 도움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고마워요, 저 괜찮아요.”여운초는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몇 미터 떨어졌는지 알고 있어 안내 데스크 직원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네, 그럼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희 불러주세요.”직원이 미소 지으며 여운초의 손에 쥔 꽃다발과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훑어보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고 여운초가 멀어져간 후에야 데스크로 돌아갔다.“부대표님 대체 왜 시각장애인한테 꽃 배달을 시킨 걸까요?”그녀가 동료에게 물었다.“설마 여운초 씨한테 호감 있나? 우리 입사한 지도 2년이 다 돼가는데 단 한 번도 부대표님이 여자한테 관심 가지는 걸 못 봤잖아요. 젊은 여자가 부대표님 찾으러 회사 온 적도 없고요.”동료가 웃으며 답했다.“에이 설마요. 부대표님이 여운초 씨가 시각장애인인 걸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죠.”전이진은 전씨 가문 둘째 도련님으로서 신분이 고귀한데 어떻게 시각장애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을까?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대표님의 일이지 그녀들관 상관없다.여운초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는데 안에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숫자 버튼을 더듬으며 한참 손의 촉감을 느낀 후에야 이 엘리베이터가 66층으로 직행할 수 없다는 걸 알아채고 맨 끝자리 숫자를 눌렀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한 후 그녀는 재빨리 안에서 내려왔다.입구에 마침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들이 있어 그분들께 66층으로 직행하려면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지 물었다.여운초의 질문을 받은 사람은 그녀가 말할 때 얼굴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린 걸 보더니 손에 쥔 지팡이도 쭉 훑어보곤 바로 시각장애인이란 걸 알아챘다. 그 사람은 손을 들어 여운초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지만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그제야 시각장애인이란 걸 확신하며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따라오세요, 제가 알려드릴게요.”그
전이진의 비서가 여운초의 손에 든 꽃다발을 보더니 자상하게 말했다.“잠시만요. 부대표님께 전화로 확인하고 올게요.”비서는 아무 소식도 못 받아 전이진의 동의를 구해야만 여운초를 안으로 들일 수 있다.“네.”여운초는 얌전히 서서 비서가 내선전화로 전이진에게 물을 때까지 기다렸다.곧이어 비서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친절하게 말했다.“저 따라오세요.”“고마워요.”여운초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비서를 따라 걸어갔다.부대표이사 사무실 문 앞에 도착한 후 비서가 그녀 대신 문을 두드리고 안에 들어가 대표님께 여운초 씨가 왔다고 먼저 알렸다.“들어오라고 해.”전이진은 업무가 한창이라 머리도 들지 않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비서는 여운초를 사무실 안으로 모신 후 자리를 떠났다.여운초는 비서와 전이진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으며 전이진의 위치를 파악했다.사무실에 들어선 그녀는 바로 그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장애물은 피하면서 아주 천천히 다만 아주 정확하게 전이진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책상 앞까지 다다른 걸 확인한 그녀는 지팡이로 더듬거리다가 전이진의 발을 건드렸고 이내 지팡이를 거두어들였다.지팡이에 발이 찔린 전이진은 그제야 고개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나 곧 있으면 퇴근인데.”전이진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왜 늦게 왔냐고 불만을 드러냈다.여운초는 주위를 더듬거리며 지팡이를 그의 책상 옆에 내려놓고 미안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건넸다.“이진 씨, 제가 앞이 안 보여서 천천히 걸어오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어요. 이건 이진 씨가 전화로 주문한 꽃이에요.”“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한번 말해봐요.”전이진이 꽃다발을 건네받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그는 꽃다발에 관심이 없다. 단지 이걸 빌미로 여운초를 회사에 데려오고 싶었을 뿐이다.“가게 직원이 스쿠터로 저를 전씨 그룹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고 그다음은 스스로 걸어들어왔어요.”“옆에서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요?”“네. 회사 로비에서부터 이진 씨 사무실
“아니요. 우리가 통근 몇 번 봤다고 불편하게 할 리가 있겠나요?”설사 불편하게 했다 해도 전이진은 다 보듬어줄 것이다. 그가 평생 배려하며 살아가야 할 여자니까 절대 그녀에게 사사건건 맞설 일은 없다.“근데 왜 꼭 나한테 꽃 배달을 시키고 딴 사람들 도움도 못 받게 하는 거죠?”전이진이 말했다.“운초 씨는 앞으로 자주 와야 하니까 나 찾아오는 노선을 기억해야 빨리 익숙해져서 쉽게 올 수 있죠.”“...”‘내가 왜 그쪽을 찾아와야 하지? 그것도 자주 와야 한다고?!’“우리 회사 화분들이 꽤 많이 시들었어요. 컴퓨터가 너무 많아 방사선이 많다 보니 식물들도 빨리 죽는 것 같아요. 직원들 새 화분으로 바꿔줄 생각인데...”전이진은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여운초를 쳐다봤다.‘이건 엄청난 오더야!’“좋아요. 다음엔 제가 직접 버스 타고 전씨 그룹으로 찾아올게요. 회사 문 앞까지 도착하면 한번 와봤던 곳이라 노선을 기억해요. 다음엔 더 빨리 찾아올 수 있으니 이진 씨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아요. 이진 씨 회사에서 화분을 새로 바꿀 생각이면 저희 꽃필무렵에 한 번 와보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저희 가게에 사무실에 놓을 화분 종류가 다양하거든요.”전이진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내일 사무실에 놓기 좋은 식물들을 전부 이리로 가져오세요. 얼마든지 가져오는 대로 다 사들일 테니 큰 식물도 좋아요. 로비 앞에 작은 공원이 있어서 거기 놔두면 되니까요.”여운초가 대답했다.“네. 이진 씨...”“우리 편하게 말 놓죠. 운초 씨랑 존댓말 하려니까 살짝 불편하네요.”여운초는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그녀는 소심하게 먼저 말을 놨다.전이진은 두 사람이 아직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무 확 다가가진 않고 일단 일정한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다.“저기 공씨 일가의 연회는 어떻게 됐어?”전이진이 대답했다.“네가 요구대로 꽃 배달을 왔으니까 당연히 약속 지켜야지. 이따가 호텔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너희 가게로
“전이진...”여운초가 의아한 듯이 그를 불렀다.“난 꽃도 안 좋아하고 여자친구도 없어. 너한테 꽃 배달을 시킨 건 나 찾아오는 노선을 기억해서 다음에 더 편하게 오라고 그런 거야.”전이진이 웃으며 해명했다.“근데 너 어리바리한 모습이 꽤 귀엽다? 나 즐겁게 해줬으니까 밥은 내가 살게. 가자 얼른.”여운초가 속으로 구시렁댔다.‘누가 어리바리하다는 거야?’그가 자꾸 예상 밖으로 나오니 여운초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그녀는 겉으론 담담한 척 전이진을 따라 나왔지만 걸어가면서 그의 초대를 완곡하게 거절했다.“어차피 너 돌아가서도 배달 음식 시켜 먹을 거잖아. 그런 거 많이 먹으면 안 좋아. 그냥 내가 밥 살게. 아니면 네가 사도 돼. 내가 너희 가게로 오더 두 개나 내렸는데 당연히 밥은 네가 사야지.”여운초는 말문이 막혀 한참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나 지금 몇만 원밖에 없어. 너 밥 사줄 돈이 안 될 것 같아.”전씨 일가의 둘째 도련님인데 평상시에 관성 호텔 같은 곳에서 밥을 먹겠지, 게다가 거긴 전이진네 집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라 제집에서 밥 먹는 거나 다름없다.사실 여운초도 실명하기 전에 관성 호텔에 가서 밥을 먹은 적이 있기에 그곳의 가격대를 잘 알고 있다. 단돈 몇만 원으론 전이진에게 밥을 사기에 어림도 없다.“괜찮아. 내가 돈 빌려줄 테니까 그 돈으로 밥 사줘.”“...”전이진은 고개 돌려 한심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선택해, 내가 밥 사줄까 아니면 네가 살래?”아무튼 그는 반드시 그녀와 함께 밥을 먹을 생각이다.빨리 친해지면 앞으로도 즐겁게 보낼 테니까.그리고 그녀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알아갈 수 있다.“사실 우리 둘이 먹기엔 음식을 너무 많이 주문할 필욘 없어. 국 한 그릇에 음식 네 개면 돼. 관성 호텔이라고 모든 음식이 다 비싼 건 아니야. 가격이 적당한 요리들도 꽤 많아.”여운초는 그의 말을 듣더니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내가 살게. 네가 우리 가게 장사를 도와줬잖아. 덕분에 주문 건이
“형.”전이진은 전태윤을 한 번 더 불렀다.전태윤은 여운초와 그녀의 품 안에 있는 꽃다발을 훑더니 시선을 다시 동생에게 옮겨서 덤덤하게 응답하고는 하예정의 허리를 안고 한마디 뱉었다.“나는 네 형수랑 먼저 갈게.”동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는 하예정을 안고 자리를 떴다. 하예정은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보았다.전태윤은 손으로 그녀를 바로 세우면서 낮게 말했다.“내가 이진이보다 잘생겼어.”“나 이진 씨 보는 게 아니라 운초 씨를 보고 있었어요. 근데 당신 이 말투 꼭 질투하는 것 같네요.”“여보가 다른 남자를 보고 있는데 아무리 그게 내 동생이라도 질투가 나지.”“앞으로 우리한테 아들이 있으면, 내가 아들한테 잘해줘도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우리 딸 낳으면 나 질투 안 할 거야.”하예정이 웃었다.“나도 딸 낳고 싶어요. 당신네 집은 아들만 낳는다는 전설을 깨고 싶은데 그럴 운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나도 그냥 아들 낳을 준비를 해야겠어요. 당신은 정말, 아들까지 질투한다면 평생을 질투할 각오를 하는 게 좋겠어요.”전태윤은 얼굴이 굳어 있었는데 뭔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앞으로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아들이라면 아내의 관심을 가져가겠는데 하예정이 아이한테 하는 게 자기한테 하는 것보다 더 잘할지도 모른다.전태윤은 생각한다.‘아니면 일단 피임조치를 할까?’계속 둘만의 생활을 즐기고 싶다.“소정남한테 용한 풍수 선생이 없는지 알아봐달라고 했어. 가만히 불러서 우리 집의 풍수를 봐달라고 하려고. 풍수에 문제가 있어서 우리 전씨 가문이 계속 아들만 낳는 게 아닌가 싶어.”전태윤도 딸을 가지고 싶었다. 이건 그 혼자만의 소원이 아니라 전씨 가문 여러 세대의 소원이었다.“그래서 찾았어요?”“아직 못 찾았대. 정말 용한 선생이라면 행적을 찾았더라도 모시기 어렵지. 하지만 돈을 많이 쓰더라도 꼭 모셔서 우리 집을 개조해야겠어. 우리 세대부터 딸을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 보려고.”하예정이 말했다.“내가 듣기로는 이것도 인
자신의 가문이 A 시에 있는 예 씨 가문보다 남자가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한 전태윤은 혼자서 맹세했다. 꼭 아주 용한 풍수 선생을 찾아서 가문의 풍수를 좀 봐달라고 해야겠다고 말이다. 혹시 풍수에 문제가 생겨서 딸을 낳지 못하는 건 아닌지 봐야겠다.“자기, 당신이 보기에 이진 씨와 운초 씨는 지금 어떤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이진 씨가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하예정은 화제를 돌렸다. 자신의 남편이 계속 딸을 낳을 생각만 해서 그녀한테 부담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이다.“어울리는 것 같아. 여운초 씨가 시력을 회복하면 더 어울리지. 이진이가 왜 괜한 고집을 부렸어?”전태윤은 아직 동생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몰랐다. 하예정이 말해줬다.“이진 씨가 꽃집에 전화해서 운초 씨를 콕 집어서 자신한테 꽃다발을 가져와 달라고 했대요. 다른 사람이 운초 씨를 데리고 가게도 하지 못하고 운초 씨 혼자 오라고 요구했대요. 운초 씨가 안 보이는 것에 대해 배려가 없었어요.”“이게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고 뭐에요? 내가 보기에는 이후에 매일 멍청한 짓을 할 거예요.멍청한 짓을 할 일이라, 전태윤은 자신의 이불도 성치 못할 것 같았다. 멍청한 짓 같은 건 자신이 제일 많이 했다.“걔가 괜한 고집을 부려도 걔 일이지 뭐. 나처럼 이렇게 살아있는 교과서가 있는데도 교훈을 얻을 줄 모르니 앞으로는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지 말라고 해야 해.”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면서 킥킥 웃었다. 전태윤은 그녀가 왜 웃는지 몰라서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하예정을 품 안에 눌러놓고 머리를 고정하고 웃지 못하게 입을 막았다.전이진은 형과 형수가 그의 일에 관해 얘기할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형이 금방 형수랑 혼인신고를 했을 때 그도 다른 동생들 앞에서 형과 형수의 일에 대해 많이 얘기했었다. 다들 제일 많이 얘기했던 화제는 형이 형수한테 굴복당하느냐 하는 문제였다.전이진이 제일 아쉬워하는 것은 형제들끼리 그때 내기를 하지 않았던 일이다. 만약 내기했
전이진은 작은 룸을 예약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고 전이진이 고개를 돌려 직원을 보았다. 직원은 알아차리고 얼른 메뉴판을 건네주었다.직원은 마음속으로 둘째 도련님은 매일 와서 식사하는데 메뉴판이 왜 필요한지 의아했다. 전이진은 직원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고 메뉴판을 열어서 메뉴와 가격을 여운초에게 읽어주면서 천천히 선택하라고 했다.“네가 먹고 싶은 메뉴로 주문하면 돼.”여운초는 음식을 대접하는 처지에서 전이진한테 메뉴를 주문하라고 했다.“몇만 원밖에 안 갖고 왔는데 내가 주문한 메뉴가 너무 비쌀까 봐.”여운초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너 나한테 돈 빌려줄 수 있다고 했었지?”전이진이 웃었다.“나는 그렇게 얘기를 했지. 근데 내가 볼 때 너 나한테 빚 지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우리 그냥 비싸지 않은 요리를 주문하자. 양배추 볶음, 닭볶음탕, 고등어구이, 새우구이와 갈비탕.”여운초는 전이진이 주문한 음식들이 다 평소에 흔히 먹는 음식인 것을 듣고 너무 비쌀 것 같지 않아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직원은 두 사람이 주문한 메뉴를 다 받아적은 후 공손하게 말했다.“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전이진은 부드럽게 말했다.“급하지 않아. 저녁에 회식 자리가 없어서 음식이 좀 늦게 나와도 상관없어.”여운초는 속으로 말했다.‘네가 안 급해도 난 좀 급한데.’하지만 자신이 식사를 접대하는 자리이기에 이런 얘기를 하기가 어려웠다.직원이 나가고 전이진이 물었다.“요즘 너희 가게 장사는 잘 돼가?”“그럭저럭.”“사업을 하려면 경쟁이 심해. 너희 가게의 물건은 어디서 들여오는 거야?”여운초가 되물었다.“그건 왜 물어? 꽃집 개업하고 싶어?”“너한테 더 저렴한 공급업체를 찾아주어서 이윤을 더 높여주려고.”“고마워. 지금 공급을 받는 공급업체는 이미 몇 년간 합작하던 사이라 내게 항상 제일 헐값으로 줘.”공급업체는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제일 저렴한 가격으로 주었다. 몇 년 동안 좋은 합작 관계를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
다행히도 이 모든 악몽은 이미 끝났다.하예진은 이미 다시 일어서서 사업을 일으켰다.“호영 씨, 이만 가볼게요. 저도 나가서 일해야 하거든요. 회사를 설립하는 일을 아직 다 마치지 못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회사가 강성에 있어야 다른 회사와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동명 형이 오시는 길일 텐데 더 기다리지 않으려고요?”전호영은 장난치고 싶었다.하예진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야 도착할 거에요. 동명 씨가 먼저 오면 저 대신 먼저 대접해 주세요. 호영 씨와 동명 씨가 더 친하잖아요.”“저도 좀 이따가 고씨 그룹에 갈 거예요.”“알겠어요. 그럼, 제가 빨리 돌아오죠. 미래의 아내가 더 중요한 법이죠. 호영 씨 둘째 형도 혼인신고 했다면서요. 호영 씨가 설을 쇠러 갈 때면 운초 씨는 아마 임신했을걸요. 힘내셔야겠는데요.”전호영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누나, 저도 필사적으로 힘을 내는 중이거든요. 우리 현이 씨는 둘째 형수님보다 따르기가 훨씬 어렵거든요.”여운초는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하얀 꽃처럼 부드럽고 연약해 보였다.여운초가 여씨 그룹을 단단히 장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전호영도 여운초가 계략과 수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끈질긴 열정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요.”하예진은 말을 마치고 일어나 전호영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의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하예진은 마침 이경혜의 전화를 받았다.이경혜와 하예진은 전화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하예진이 떠난 지 30분 만에 전호영은 일을 끝내고 호텔을 떠나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전호영은 이씨 가문의 뒷일을 고현에게도 알려주려고 했다.이번에 전호영은 꽃도, 보석도 사지 않았다. 고현은 비록 여자이지만, 어려서부터 남장을 하고 성격도 남성적이라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전호영은 그녀에게 손목시계를 하나 사줬다.고씨 그룹의 사람들은
“이 대표님께서도 크게 노하셨을 거예요. 정군호 씨는 잘 모르지만, 이윤정 씨는 그날 밤 쫓겨났어요. 한밤중에 정군호 씨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갔다고 들었는데, 이 대표님은 아무도 병원에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정군호 씨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대요.”전호영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하예진은 아직 다 마시지 못한 물잔을 들고 두 모금 더 마시더니 다시 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전호영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어나갈 때까지 기다렸다.전호영이 말을 이었다.“사람을 보내 병원에 가서 알아보게 했어요.”“이모할아버지의 부상 상황은 어떻게 되셨대요? 이모할머니가 벌인 일이래요?”그러자 전호영이 대답했다.“이 대표님께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 정군호 씨가 스스로 그 부위를 자른 거래요.”전호영은 정군호가 벌인 일이 이은화의 핍박이라고 추측했다.정군호는 절대로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이은화가 아마도 정군호에게 두 가지 길을 준 것 같았다.정군호 배후의 정씨 집안은 여전히 이씨 가문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기에 정군호는 절대로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지 않으면 정군호는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없기에 칼을 휘둘러 스스로 그런 짓을 해야만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하예진이가 깜빡이며 의아했다. 그녀는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전호영도 정군호의 부상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냥 말 한마디만 내뱉었다.“정군호 씨는 죽지 않았어요. 정군호 씨의 부상은 알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이 대표님께서 엄밀하게 숨기고 있거든요. 남자들에게는 특히 데릴사위인 정군호 씨에게는 존엄 없는 짓이나 다름없으니까요.”하예진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데릴사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바로 재벌 가문으로 시집가는 여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 아닌가요? 성별이 바뀌었을 뿐이죠.”전호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 전호영이 말했다.“누나, 우리 동명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과거의 일은 지나
하예진이 위험에 처해 사고가 일어나야만 경호원들이 주동적으로 노동명에게 보고했다.“괜찮으면 됐어. 그럼 됐어. 너무 놀랐잖아. 예진아, 내가 이따가 강성으로 갈 건데 아마 오후 2시 전에 도착할 것 같아.”하예진이 대답했다.“전 괜찮아요.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노동명이 외출하는 것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하예진은 늘 그를 걱정했다.“내 두 눈으로 네가 멀쩡한 모습을 보고야 말겠어. 네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야 내가 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저는 정말 괜찮아요. 경호원들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우린 다 괜찮아요. 동명 씨가 외출하기 불편하실 텐데 너무 멀리 오면 안 돼요.”노동명은 기어코 가겠다고 고집했다.“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너무너무 보고 싶어. 네가 괜찮은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하예진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럼 조심히 오세요. 만약 몸이 불편하면 고집하지 마시고. 동명 씨, 우리는 각자가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아시겠죠?”노동명은 부드러운 어조로 나지막이 대답했다.“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몸이 불편하면 외출하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오후에 봐.”“네, 오후에 봐요.”하예진은 전화를 끊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노동명이 하예진에게 주고 있는 것은 전남편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어쩌면, 노동명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주형인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 있었겠지만, 나중에 복잡한 일들이 많이 끼는 바람에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하예진이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은 강성에 있는 전씨 가문의 사업 중 하나이며 전호영이 맡은 부분이다.하예진은 쉽게 전호영을 만날 수 있었다.그녀는 잠을 더 자려고 해도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약을 몇 알 먹은 하예진은 이내 두통이 사라지게 되었고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더니 전호영의 사무
게다가 노동명은 하예진 모자한테 진심으로 잘해줬고 그는 우빈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그녀가 노동명을 거부하고 재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단지 재혼하면 다시 불 구덩이에 빠질까 봐 걱정됐고 또한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노동명은 그녀를 도와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노씨 가문은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녀가 노동명과 결혼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더더욱 필요가 없었다. 노동명은 친아빠인 주형인보다 우빈이를 더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만약 그녀가 다시 결혼한다면 노동명이 가장 적합한 후보일 것이다.“동명 오빠도 언니한테 피해 줄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언니한테 피해보다 행복을 주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언니가 좀 더 기다려줘. 동명 오빠가 곧 일어설 거라고 난 믿어.”“알아. 그래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 사람을 기다릴 거야. 기다리는 동안 내 사업도 열심히 발전시키는 중이야.”지금의 그녀는 관성의 3대 재벌 가문의 투자, 후원 및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익보다도 그 속에서 얻은 경험은 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언니 화이팅! 우리 언니가 최고야. 난 항상 언니가 자랑스러워.”하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가 많이 힘낼게.”“언니, 수다 그만 떨고 얼른 잠 좀 자.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꼭 알려줘야 해. 안 알려주면 걱정만 할 테지만 알려 주면 적어도 우리가 해결 방법을 같이 생각하고 모두가 같이 부담하면 훨씬 더 편해지잖아.”“그래 알았어.”자매가 통화를 마친 후 하예진은 계속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그녀는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뭐 좀 먹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이 시간에 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그녀는 밖으로 나가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아침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하예진은 여전히 머리가 아파서 캐리어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