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내가 다시 의식을 찾자 귀에서 내 친구, 박수정이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조강진, 너 미쳤어? 어떻게 아영이한테 수영을 강요할 수 있어? 너 아영이가 유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몰라?”“허아영이 유산을 했다고? 도대체 언제 임신한 건데? 왜 나한테 말 안 한...”강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그 안에는 깊은 후회가 묻어났다.“넌 눈이 멀었어? 아영이가 최근에 몸이 얼마나 안 좋았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거야? 참, 네 시선은 계속 진가연한테 있어서 우리 아영이를 봤을 리가 없지. 안 그래?” 수정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만약 병원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는 강진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나는 진짜 몰랐어...”강진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네가 그 여우 같은 년한테 집 넘겨주고 차도 사준 건 잘 기억하고 있겠지? 우리 아영이는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유산한 거야!” “나는...”“됐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주변 조용해지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수정은 내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깼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나는 수정을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다 알고 있었어?”수정은 내 이마를 살짝 튕기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조강진과 결혼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네가 진작에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잖아.”과거를 떠올리니 코끝이 시큰해졌다.그때 내가 사랑에 눈이 멀지만 않았다면 부모님은 절대 나와 강진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강진의 집안이 아무리 뛰어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양가 부모님이 처음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화장실에 가던 중 나는 똑똑히 들었다.“원래 예물로 1억을 준비했는데, 강진이 여자친구네 집안이 너무 가난해 보이니 4,000만 원만 줘도 되겠어.”그날 밤, 나는 참지 못하고 이 사실을 강진에게 말해줬다. 그는 어머니의 행동을 비난하며, 사적으로 나에게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그
강진은 스피커를 들고 밖으로 던지려 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분명한 혐오가 묻어 있었다.“정말 짜증 나네. 바로 던져버릴 거야.”스피커가 던져지려는 순간, 나는 손을 내밀어 그를 막은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아.”“여보...”“어차피 너희 둘은 결국 결혼할 거잖아. 이걸 던져버리면 나중에 싸우게 될 거야.”내가 이렇게 말하자 강진은 얼굴이 새파래졌고,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집에 도착하자, 강진이가 말했다.“11월에 에든버러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어.”“당신이 항상 에든버러에서 눈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몸 좀 잘 챙기고, 11월에 가자. 내가 다 준비해 놨어.”예전의 나는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에든버러에서 한 달 정도 살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그러나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강진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왜 그렇게 철이 없는 거야? 그런 생각은 너무 유치하고, 현실적이지 않아.”심지어 1년 전, 여행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내게 에든버러 여행을 같이 가자고 초대했다.강진은 우리의 계획을 듣고는, 내 허락 없이 티켓을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허아영, 넌 왜 이렇게 남에게 항상 민폐를 끼치는 거야? 네 행동이 네 친구한테 얼마나 민폐를 끼치게 될지 정말 모르는 거야?”“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넓은데, 왜 거기까지 가야 해? 넌 외국이 그렇게 좋아?”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진가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강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내가 살고 있는 독립적인 삶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을 보며, 자기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했다.강진은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내 여행 계획을 취소하였다.“나는 이미 계획 다 세웠어. 그쪽에 친구도 있어서, 미리 집도 모두 준비해 놓을 거야.”강진은
그날 밤, 나는 강준에게 우리 부부 사이의 감정을 생각해서라도 이쯤에서 정신 차리고 가연과 연락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그때 강진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가연이 그에게 무엇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강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눈빛은 애정 어린 온화함을 담고 있었다.그리고 곧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허아영, 너는 왜 자꾸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거야? 감정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 너 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어. 네가 날 이렇게 놔주지 않는 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받는지 알아?”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여보, 정말 나를 용서해 줄 수는 없어?”강진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눈시울을 붉히며 애원했다.“좋아.”“정말? 나를 용서해 줄 거야?”“너를 용서해 줄 수는 있지만, 이혼 소송은 그대로 진행할 거니까 법정에서 보자.”그 말을 남기고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떠났다. 강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날 밤, 강진은 늦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며칠 후, 나는 다시 가연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는 나에게 강진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많이 보냈다.며칠 전의 광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자랑하는 뉘앙스만 가득했다.[너한테 다녀온 후, 드디어 깨닫게 된 거지. 내가 가장 좋은 데다가 자기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걸.][이거 봐, 강진이가 사준 다이아반지야. 반짝거리는 게 정말 예쁘네.][참, 우리 11월에 애든버러로 휴가 가기로 했어. 허아영, 그때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줄게.]나는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그럼 빨리 좀 이혼을 진행해 달라고 해. 그래야 너도 얼른 조강진과 결혼할 수 있을 거 아니야.][언제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나 널 대신할지도 모르잖아.]내가 방금 보낸 메시지가 가연의 심기를 건드린 듯, 그녀는 다시 미친 듯이 나를 욕했다.[넌 원래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 년이야. 그러니까 네 남자가 바람을 피우지, 안 그래
“응, 그렇게 추측했었지.”나는 서류를 읽던 손을 멈추고, 문득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혹시 조강진이 그 학생과 먼저 만난 다음 진가연을 내친 거 아니야?”핸드폰 너머로 수정이가 혀를 찼다.[빙고! 바람둥이가 어떻게 한 여자랑만 만났겠어.][정말이지, 너 빼고 조강진이 만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했어. 그 여학생이 조강진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다는데, 예전 진가연의 건방진 모습과 똑같대. 자기가 여왕인 줄 안대.]나는 약간 감탄하면서도 가연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수정아, 진가연이 집을 조강진에게 다시 넘겨주었어?”수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진가연 그 여자도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야. 어떻게 그 집을 조강진한테 다시 넘겨주겠어? 그날 진가연이 벤츠 차 안에 개와 고양이 피를 뿌리고, 그 차를 강진 집 앞에 세워두었대. 덕분에 벤츠 차는 완전히 폐차됐어. 그리고 진가연은 원래 아이한테 관심도 없었어.][조강진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란 건지, 다시는 집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2억짜리 외제차가 이런 식으로 폐차되다니.강진에게는 그게 큰돈이 아니겠지만, 그는 최소한 10일, 아니 한 달은 속상했을 거다.역시, 나쁜 남자는 나쁜 여자가 책임지고 혼내주면 그만이다.월말이 되자, 변호사는 나더러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재판에 참석하라고 했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예상치 못한 일은 강진의 새 여자친구, 방이슬도 따라온 것이다.수정이 말한 대로, 방이슬은 역시나 여우 같은 스타일이었다.겉으로는 순수해 보였지만, 그 눈빛은 아주 섬뜩했다.강진은 나를 보자 후회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는 눈빛을 보였다.방이슬은 내가 자신의 남자를 빼앗을까 봐 겁이 나서, 강진의 팔을 끌어안고 내게 경고하는 듯 말했다.“언니와 강진 오빠의 이야기는 이미 들었어요. 언니가 계속 집착한 것도 모자라, 유산까지 했었다면서요. 그리고 계속 이 일을 언급하면서 피해자처럼 연기하고 계시다니.”“우리 강진 오빠는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오빠가 사랑
강진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생일 케이크 앞에 앉아 미페프리스톤 한 알을 삼켰다.미페프리스톤은 임신 중절 약이다.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나는 미리 케이크를 준비해두고 강진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에게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하려 했다.그러나 저녁 7시가 지나도록 강진은 전화도 받지 않고 내가 보낸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결국, 내가 가연이 올린 등기권리증 사진에 댓글을 달자, 강진이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그는 화가 잔뜩 담긴 목소리로 날 비난하고 있었다.내가 말을 하려는 찰나, 강진은 전화를 끊은 뒤 내 연락처를 모조리 차단했다.그때 배가 서서히 아프기 시작했는데, 유산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강진은 내 식탁 위에 놓인 약과 케이크를 힐끗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 생일이야? 혹시 네 생일?”나는 말없이 약을 정리하며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아무 감정 없이 대답했다.“아니, 친구 생일이야.”강진은 잠시 한숨을 내쉬며, 다소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 생일이 9월 28일인데, 오늘은 9월 8일이잖아.”결혼한 지 5년, 강진은 매년 내 생일을 헷갈렸다. 웃긴 건, 진가연의 생일은 항상 정확히 기억한다는 점이었다.강진은 내 옆에 앉아 작은 곰 인형을 내게 건넸다.“가연이가 너한테 주라고 했어. 오늘 네가 남긴 댓글을 보고 많이 놀란 것 같으니, 당장 전화해서 사과해.”곰 인형에는 벤츠 로고가 박혀 있었다. 아마 벤츠를 샀을 때 준 기념품일 것이다. 그 위에는 기름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싫어.”강진은 내 대답에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쏟아냈다.“너 정말 고상한 척 그럴 거야? 가연이는 너에게 사과하려고 선물까지 줬는데, 넌 사과조차 할 수 없다는 거야?”내가 계속해서 대답하지 않자, 강진은 화가 나서 나를 끌어 일으키며 가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의 손이 나를 강하게 잡았을 때, 내 오른쪽 다리가 차가운 테이블에 부딪혔다
병원에서 두 시간 동안 링거를 맞고 나왔지만, 강진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나는 몸이 많이 아팠기에, 결국 택시를 타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내 핸드폰은 고작 2분 전에 꺼졌었기에, 강진의 말은 분명 거짓말이었다.‘예전엔 그렇게 세심하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차갑게 변해버린 거지...’“당신이 나를 차단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전화를 걸어?”강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화를 내던 표정이 점차 온화해졌다. “네가 배고플 것 같아서 전복죽 만들어왔어.”나는 그가 손에 든 죽을 쳐다봤다.죽 위에는 파만 조금 뿌려져 있었고, 전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가 남긴 음식 같았다.반 시간 전, 나는 진가연이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봤다.그녀가 올린 사진 속에는 강진이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이렇게 좋은 남자가 내 남자라니! 방금 한 손으로 벤츠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모자라, 내가 배고프다고 하니 이렇게 맛있는 죽도 만들어주네.] 나는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숟가락으로 죽을 저어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먹기 싫으니까 가져다 버려.”강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눈빛이 살기를 띠었다.“또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널 위해서 준비한 건데, 먹어보지도 않고 버리겠다고?”“내가 집을 가연이한테 준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난 거야? 어차피 우리가 사는 덴 아무 영향도 없고, 가연이 아이한테도 도움이 되는 거잖아. 가연이도 고마운 마음에 글을 올린 건데 굳이 그딴 댓글을 달아야만 했어? 안 그래도 이 일 때문에 너랑 얘기 좀 나누려던 참이었어.”나는 방금 유산한 데다가 다리까지 다쳤기에 몸은 매우 지쳐 있었다.“당신이 오해한 거야. 난 그 사람이 올린 등기권리증에 적힌 주소가 왜 우리 집 주소인지 궁금했던 것뿐이야...”강진이 짜증을 내며 내 말을 끊었다.“내가 오해한 거라고? 가연이 말이 맞네, 넌 정말 평소에 적성에 안 맞는 일이 생기면 다짜고짜 화를 내는 데다가, 배려도, 이해심도 없는 사람이잖아
“응, 그렇게 추측했었지.”나는 서류를 읽던 손을 멈추고, 문득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혹시 조강진이 그 학생과 먼저 만난 다음 진가연을 내친 거 아니야?”핸드폰 너머로 수정이가 혀를 찼다.[빙고! 바람둥이가 어떻게 한 여자랑만 만났겠어.][정말이지, 너 빼고 조강진이 만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했어. 그 여학생이 조강진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다는데, 예전 진가연의 건방진 모습과 똑같대. 자기가 여왕인 줄 안대.]나는 약간 감탄하면서도 가연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수정아, 진가연이 집을 조강진에게 다시 넘겨주었어?”수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진가연 그 여자도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야. 어떻게 그 집을 조강진한테 다시 넘겨주겠어? 그날 진가연이 벤츠 차 안에 개와 고양이 피를 뿌리고, 그 차를 강진 집 앞에 세워두었대. 덕분에 벤츠 차는 완전히 폐차됐어. 그리고 진가연은 원래 아이한테 관심도 없었어.][조강진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란 건지, 다시는 집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2억짜리 외제차가 이런 식으로 폐차되다니.강진에게는 그게 큰돈이 아니겠지만, 그는 최소한 10일, 아니 한 달은 속상했을 거다.역시, 나쁜 남자는 나쁜 여자가 책임지고 혼내주면 그만이다.월말이 되자, 변호사는 나더러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재판에 참석하라고 했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예상치 못한 일은 강진의 새 여자친구, 방이슬도 따라온 것이다.수정이 말한 대로, 방이슬은 역시나 여우 같은 스타일이었다.겉으로는 순수해 보였지만, 그 눈빛은 아주 섬뜩했다.강진은 나를 보자 후회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는 눈빛을 보였다.방이슬은 내가 자신의 남자를 빼앗을까 봐 겁이 나서, 강진의 팔을 끌어안고 내게 경고하는 듯 말했다.“언니와 강진 오빠의 이야기는 이미 들었어요. 언니가 계속 집착한 것도 모자라, 유산까지 했었다면서요. 그리고 계속 이 일을 언급하면서 피해자처럼 연기하고 계시다니.”“우리 강진 오빠는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오빠가 사랑
그날 밤, 나는 강준에게 우리 부부 사이의 감정을 생각해서라도 이쯤에서 정신 차리고 가연과 연락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그때 강진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가연이 그에게 무엇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강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눈빛은 애정 어린 온화함을 담고 있었다.그리고 곧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허아영, 너는 왜 자꾸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거야? 감정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 너 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어. 네가 날 이렇게 놔주지 않는 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받는지 알아?”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여보, 정말 나를 용서해 줄 수는 없어?”강진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눈시울을 붉히며 애원했다.“좋아.”“정말? 나를 용서해 줄 거야?”“너를 용서해 줄 수는 있지만, 이혼 소송은 그대로 진행할 거니까 법정에서 보자.”그 말을 남기고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떠났다. 강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날 밤, 강진은 늦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며칠 후, 나는 다시 가연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는 나에게 강진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많이 보냈다.며칠 전의 광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자랑하는 뉘앙스만 가득했다.[너한테 다녀온 후, 드디어 깨닫게 된 거지. 내가 가장 좋은 데다가 자기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걸.][이거 봐, 강진이가 사준 다이아반지야. 반짝거리는 게 정말 예쁘네.][참, 우리 11월에 애든버러로 휴가 가기로 했어. 허아영, 그때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줄게.]나는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그럼 빨리 좀 이혼을 진행해 달라고 해. 그래야 너도 얼른 조강진과 결혼할 수 있을 거 아니야.][언제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나 널 대신할지도 모르잖아.]내가 방금 보낸 메시지가 가연의 심기를 건드린 듯, 그녀는 다시 미친 듯이 나를 욕했다.[넌 원래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 년이야. 그러니까 네 남자가 바람을 피우지, 안 그래
강진은 스피커를 들고 밖으로 던지려 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분명한 혐오가 묻어 있었다.“정말 짜증 나네. 바로 던져버릴 거야.”스피커가 던져지려는 순간, 나는 손을 내밀어 그를 막은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아.”“여보...”“어차피 너희 둘은 결국 결혼할 거잖아. 이걸 던져버리면 나중에 싸우게 될 거야.”내가 이렇게 말하자 강진은 얼굴이 새파래졌고,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집에 도착하자, 강진이가 말했다.“11월에 에든버러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어.”“당신이 항상 에든버러에서 눈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몸 좀 잘 챙기고, 11월에 가자. 내가 다 준비해 놨어.”예전의 나는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에든버러에서 한 달 정도 살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그러나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강진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왜 그렇게 철이 없는 거야? 그런 생각은 너무 유치하고, 현실적이지 않아.”심지어 1년 전, 여행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내게 에든버러 여행을 같이 가자고 초대했다.강진은 우리의 계획을 듣고는, 내 허락 없이 티켓을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허아영, 넌 왜 이렇게 남에게 항상 민폐를 끼치는 거야? 네 행동이 네 친구한테 얼마나 민폐를 끼치게 될지 정말 모르는 거야?”“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넓은데, 왜 거기까지 가야 해? 넌 외국이 그렇게 좋아?”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진가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강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내가 살고 있는 독립적인 삶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을 보며, 자기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했다.강진은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내 여행 계획을 취소하였다.“나는 이미 계획 다 세웠어. 그쪽에 친구도 있어서, 미리 집도 모두 준비해 놓을 거야.”강진은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내가 다시 의식을 찾자 귀에서 내 친구, 박수정이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조강진, 너 미쳤어? 어떻게 아영이한테 수영을 강요할 수 있어? 너 아영이가 유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몰라?”“허아영이 유산을 했다고? 도대체 언제 임신한 건데? 왜 나한테 말 안 한...”강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그 안에는 깊은 후회가 묻어났다.“넌 눈이 멀었어? 아영이가 최근에 몸이 얼마나 안 좋았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거야? 참, 네 시선은 계속 진가연한테 있어서 우리 아영이를 봤을 리가 없지. 안 그래?” 수정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만약 병원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는 강진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나는 진짜 몰랐어...”강진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네가 그 여우 같은 년한테 집 넘겨주고 차도 사준 건 잘 기억하고 있겠지? 우리 아영이는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유산한 거야!” “나는...”“됐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주변 조용해지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수정은 내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깼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나는 수정을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다 알고 있었어?”수정은 내 이마를 살짝 튕기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조강진과 결혼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네가 진작에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잖아.”과거를 떠올리니 코끝이 시큰해졌다.그때 내가 사랑에 눈이 멀지만 않았다면 부모님은 절대 나와 강진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강진의 집안이 아무리 뛰어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양가 부모님이 처음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화장실에 가던 중 나는 똑똑히 들었다.“원래 예물로 1억을 준비했는데, 강진이 여자친구네 집안이 너무 가난해 보이니 4,000만 원만 줘도 되겠어.”그날 밤, 나는 참지 못하고 이 사실을 강진에게 말해줬다. 그는 어머니의 행동을 비난하며, 사적으로 나에게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그
성훈은 말을 한 남자를 발로 차며 혼냈다.“화장실 갔다 올게.”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고 싶지 않았고, 서로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강진은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가연을 바라보더니 결국 따라오지 않았다.내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이미 배불리 먹고 나서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가연은 강진 옆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너무나 친밀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한쪽 자리를 찾아 앉았다.이때 성훈은 분위기를 다시 띄우려고 했다.“자, 이제 다 모였으니까 게임을 하자! 진실 혹은 도전 어때?”첫 번째 게임은 강진이 이겼고, 가연은 졌다.가연은 진실을 선택했고 강진은 질문을 쉽게 던졌다.“최근에 뭐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가연은 눈을 깜빡이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강진을 바라보았다.“좋은 남자를 만나 하루 만에 집도 차도 생겼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 나한테 벤츠 한 손으로 운전하는 법도 가르쳐 줬어.”가연은 말이 끝난 후, 나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모두 가연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모두 눈감아주기만 했다. 그러나 가연이가 그걸 공개적으로 밝히자, 분위기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성훈도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다.내가 화를 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성훈은 어쩔 수 없이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자, 자, 계속해! 이제 우리 멋진 형수님 차례예요.”이번엔 가연이가 이겼고, 내가 졌다. “진실이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가연은 술잔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아영 씨, 진실 말고 도전해 보는 게 어때요? 그게 더 재밌지 않을까요?”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진실이요.”“한번 도전해봐요. 저도 너무 어려운 건 시키지 않을게요. 강진의 말로는 수영을 그렇게 잘하신다면서요, 한번 보여주시면 안 돼요?”가연은 내 배를 노려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졌다.나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몸이 안 좋
병원에서 두 시간 동안 링거를 맞고 나왔지만, 강진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나는 몸이 많이 아팠기에, 결국 택시를 타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내 핸드폰은 고작 2분 전에 꺼졌었기에, 강진의 말은 분명 거짓말이었다.‘예전엔 그렇게 세심하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차갑게 변해버린 거지...’“당신이 나를 차단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전화를 걸어?”강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화를 내던 표정이 점차 온화해졌다. “네가 배고플 것 같아서 전복죽 만들어왔어.”나는 그가 손에 든 죽을 쳐다봤다.죽 위에는 파만 조금 뿌려져 있었고, 전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가 남긴 음식 같았다.반 시간 전, 나는 진가연이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봤다.그녀가 올린 사진 속에는 강진이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이렇게 좋은 남자가 내 남자라니! 방금 한 손으로 벤츠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모자라, 내가 배고프다고 하니 이렇게 맛있는 죽도 만들어주네.] 나는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숟가락으로 죽을 저어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먹기 싫으니까 가져다 버려.”강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눈빛이 살기를 띠었다.“또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널 위해서 준비한 건데, 먹어보지도 않고 버리겠다고?”“내가 집을 가연이한테 준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난 거야? 어차피 우리가 사는 덴 아무 영향도 없고, 가연이 아이한테도 도움이 되는 거잖아. 가연이도 고마운 마음에 글을 올린 건데 굳이 그딴 댓글을 달아야만 했어? 안 그래도 이 일 때문에 너랑 얘기 좀 나누려던 참이었어.”나는 방금 유산한 데다가 다리까지 다쳤기에 몸은 매우 지쳐 있었다.“당신이 오해한 거야. 난 그 사람이 올린 등기권리증에 적힌 주소가 왜 우리 집 주소인지 궁금했던 것뿐이야...”강진이 짜증을 내며 내 말을 끊었다.“내가 오해한 거라고? 가연이 말이 맞네, 넌 정말 평소에 적성에 안 맞는 일이 생기면 다짜고짜 화를 내는 데다가, 배려도, 이해심도 없는 사람이잖아
강진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생일 케이크 앞에 앉아 미페프리스톤 한 알을 삼켰다.미페프리스톤은 임신 중절 약이다.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나는 미리 케이크를 준비해두고 강진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에게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하려 했다.그러나 저녁 7시가 지나도록 강진은 전화도 받지 않고 내가 보낸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결국, 내가 가연이 올린 등기권리증 사진에 댓글을 달자, 강진이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그는 화가 잔뜩 담긴 목소리로 날 비난하고 있었다.내가 말을 하려는 찰나, 강진은 전화를 끊은 뒤 내 연락처를 모조리 차단했다.그때 배가 서서히 아프기 시작했는데, 유산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강진은 내 식탁 위에 놓인 약과 케이크를 힐끗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 생일이야? 혹시 네 생일?”나는 말없이 약을 정리하며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아무 감정 없이 대답했다.“아니, 친구 생일이야.”강진은 잠시 한숨을 내쉬며, 다소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 생일이 9월 28일인데, 오늘은 9월 8일이잖아.”결혼한 지 5년, 강진은 매년 내 생일을 헷갈렸다. 웃긴 건, 진가연의 생일은 항상 정확히 기억한다는 점이었다.강진은 내 옆에 앉아 작은 곰 인형을 내게 건넸다.“가연이가 너한테 주라고 했어. 오늘 네가 남긴 댓글을 보고 많이 놀란 것 같으니, 당장 전화해서 사과해.”곰 인형에는 벤츠 로고가 박혀 있었다. 아마 벤츠를 샀을 때 준 기념품일 것이다. 그 위에는 기름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싫어.”강진은 내 대답에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쏟아냈다.“너 정말 고상한 척 그럴 거야? 가연이는 너에게 사과하려고 선물까지 줬는데, 넌 사과조차 할 수 없다는 거야?”내가 계속해서 대답하지 않자, 강진은 화가 나서 나를 끌어 일으키며 가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의 손이 나를 강하게 잡았을 때, 내 오른쪽 다리가 차가운 테이블에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