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칫하던 간석은 이내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마마, 너무 좋은 생각이시지만 태자 저하와 대신들께서 진지하게 논의 중이라 소인이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일단 가서 시도는 해보거라. 만약 태자 저하께서 불쾌해 하신다면 내 뜻이라고 전하거라. 그럼 다음부터 방해하지 않겠다.”소우연의 대답에 간석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마마 뜻이라면 태자 저하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사실 간석은 진작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태자가 걱정이 되었다.조금 뒤, 간석이 떠나자 정연이 소우연에게 물었다.“마마, 소인이 마마께도 다과를 준비해드릴까요? 마마께서도 허기를 조금 채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다과를 조금 먹은 뒤, 장미꽃 꽃잎으로 목욕을 마친 소우연은 이육진도 기다릴 겸, 의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해시가 될 때쯤, 눈이 슬슬 감기던 소우연은 밖에서 들리는 발걸음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그녀가 의서를 내려놓은 순간, 이육진이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방에 들어섰다.“태자 저하, 많이 피곤하십니까?”소우연이 한걸음에 달려가 묻자 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지체되었다. 그런데 부인은 왜 아직도 안 자고 있는 것이냐? 혹시 이 서방을 기다리고 있는 거냐?”“네, 저는… 잠이 오지 않아서 태자 저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우리 합방에 관한 일을 생각하느라 잠이 오지 않은 것이냐?”순간 말문이 막힌 소우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오늘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소우연은 당연히 이육진이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절대 합방과는 상관이 없다!“응?”소우연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육진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정연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소우연이 다급하게 화제를 돌리며 눈앞에 서있는 이육진을 살짝 밀어냈지만 이육진은 피식 웃으며 소우연을 더욱 꽉 잡아당기더니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부인이 조금
“연아, 준비되었느냐?”침대 끝에 앉은 이육진이 고개를 숙여 소우연을 쳐다보며 물었다.소우연은 머리를 들고 그런 이육진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어둠 속에서도 이육진의 아우라가 선명하게 보였다.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소우연은 이내 얼굴이 빨개졌다.이육진은 아무 대꾸도 없는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옷을 벗더니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그러다가 소우연의 손이 이육진의 매끈한 살결에 닿았고 그때부터 그녀의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천장을 바라보며 반듯하게 누워있던 이육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소우연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태자빈, 오늘부터 이 태자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태자빈의 말에 무조건 따를 것이야.”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에 회남 왕비였을 때에도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거나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게 순조로웠던 것 같았다.한편, 이육진의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자 소우연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떨렸다.어둠속에서 소우연은 이육진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때, 이육진이 그녀의 손을 자신의 흔들리는 목젖에 올려놓았다.언젠가 치러야 하는 일이다.“부군, 그럼 합시다!”소우연이 용기를 내서 먼저 말했다.“뭘 한다는 것이냐?”낮게 깔린 이육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뭘 한다니?’입술을 살짝 깨문 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태자 저하,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소우연은 살짝 화가 났다. 분명 이육진이 먼저 그녀에게 합방을 하자고 했고 그녀에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모른 척하다니.“그, 부부 사이에 해야 할 일을 해야지요.”소우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순간, 이육진이 침대 천막을 확 풀었다.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이육진이 고개를 숙여 소우연의 귓가에 귓속말을 했다.“이번에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어.”그렇게 소우연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던 이육진은 그녀의 콧등, 입술
예전에 군대에서 누군가가 춘궁도를 몰래 보거나 스스로 해결하는 행동을 발견하면 이육진은 그자에게 벌을 내리기도 했다.그런데 소우연과 혼인을 하고 나서부터 인간의 본능은 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촛불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방 안은 매우 어두웠다.소우연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덜덜 떨면서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이육진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손에 힘을 너무 많이 준 탓에 손톱이 이육진의 등살을 파고들기도 했다.이육진은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사랑하는 여인이 이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데 자신의 욕구 때문에 강제로 그녀를 품에 안을 수는 없었다.씁쓸하게 웃던 이육진은 고개를 숙여 소우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알겠어. 그만할게. 일단 가만히 있을 테니 네가 조금 나아지면 그때 빼겠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한편,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성의 끈을 꽉 잡은 이육진은 어떻게든 조금 전의 다정한 행위를 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렇게 겨우 마음속에 차오르는 욕구를 억누른 그는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소우연을 꼭 끌어안고 있다가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소우연은 그제야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몸을 일으키고 침대 끝에 앉은 이육진은 소우연의 손을 꼭 잡았다.“죄송합니다. 저…”“연아, 죄송할 것 없다. 나도 네가 아픈 건 싫어. 서로 즐겁고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지 일방적으로 널 희생시켜서 내가 만족하려는 게 아니야.”이육진은 다정하게 위로하다가 이내 소우연의 손을 놓고는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했다.이때, 소우연이 그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괜찮으신 겁니까?”어차피 그녀는 전에도 종종 이육진을 도와 해결한 적이 있었다.“혹시…”“네, 제가 태자 저하를 도와주고 싶습니다.”잠시 고민하던 이육진은 다시 침대위로 올라갔다.밤이 깊어지고 방 안의 분위기는 다시 야릇해졌다.그렇게 30분이 지난 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은 이육진은 촛불들을 다시 밝힌 뒤 간석에게 목욕물을 준
“저하…”입술을 살짝 깨문 채 부끄럽다는 듯이육진을 부르던 소우연은 침을 놓고 있는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앓는 소리를 내던 이육진은 소우연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뭐든 부인이 말한대로 할 수 있지만 이 일만은 안 돼. 우리의 미래를 위해 고려해야지.”두 사람은 이제 진정한 부부로 거듭났고 소우연은 이육진의 자리를 물려받을 아들을 낳고 싶어했다.그리고 이 사실을 이육진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한편, 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이 또다시 침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이육진은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아파, 아파!”“네? 괜, 괜찮으십니까?”괘씸한 이육진에게 벌을 주고 싶었던 건 맞지만 이육진이 이렇게 아파할 정도로 힘껏 찌른 건 아니었다.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아파하지?한편, 이육진은 잔뜩 걱정한 소우연의 모습에 내심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는 손을 뻗어 소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소우연은 표정이 태연해진 이육진을 보며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솔직히 합방이라는 게 이렇게 아픈 일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두운 밤이라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평소에 봤던 이육진 아랫도리의 윤곽이나 가끔 그를 도와 욕구를 해결해줄 때에도 뭔가 남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이육진은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 소우연이 살짝 걱정되었다. 혹시 오늘 있은 일로 안 좋은 기억이 남지는 않았을까?다음날 아침.이육진은 소우연이 깰까 봐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왔다.간단하게 씻은 뒤, 본채를 나선 이육진은 바로 간석을 찾아가 전에 그가 버렸던 책들을 다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한편, 간석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태자 저하와 태자빈께서 이렇게까지 화끈하신 건가? 이제 정상적인 잠자리에 만족하지 못하시고 책의 힘까지 빌려야 하는 건가?’“간석아?”이육진은 간석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요즘 따라 간석이 딴생각을 할 때가 많아진 것 같다.
그러니 이육진이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애써 외면했던 아픔을 명심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얘기했는데 어찌 명심에게 벌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당시 태자의 성격대로 벌을 내렸다면 명심은 겨우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고 해도 어느 외진 마을에 팔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알면 됐어. 앞으로 말 조심하고 분위기 파악하면서 태자빈 마마를 잘 모셔. 그럼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네, 명심하겠습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던 이때, 복도에 간석의 모습이 보였다.간석은 오늘 태자 저하와 함께 궁에 가지 않은 건가?“간 태감님, 어쩐 일로 돌아오셨습니까?”정연의 물음에 간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아직 날도 안 밝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느냐?”“무슨 일이 벌어졌는데요?”정연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간석이 말을 이어갔다.“소씨 부인께서 태자부 앞에서 태자 저하를 기다리고 있었어. 태자 저하를 보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소우희와 소한준 그자를 제발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네.”“그자들은 참 겁도 없네요.”정연이 입을 떡 벌렸다. 예전의 태자 저하였다면 그들이 무릎을 꿇기도 전에 모가지가 날아가거나 어디 먼 곳으로 추방됐을 것이다.간석은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그래도 명색이 태자빈 마마의 친정 사람들이지 않느냐? 나중에 태자빈 마마께서 깨시면 전해드리거라. 태자 저하께서 소씨 부인을 곁채에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다.”“그 분은 대체 뭐 하려고 이러는 겁니까?”명심은 씩씩거리며 말을 하는 와중에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태자빈의 친정 사람들이 태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정연이 언짢은 표정으로 명심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간석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간 태감님. 나중에 마마께서 깨시면 소인들이 바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또한 태자 저하께서는
한참 뒤.젓가락을 내려놓은 소우연은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나뭇가지에 앉아 청아하게 우는 새소리까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오늘 뭐 특별한 일 없느냐? 진우는 어디 있어?”소우연이 물었다. 소한준의 다리가 부러졌고 소우희는 공갈과 협박까지 당했는데 그들 성격에 이렇게 조용하게 있을 리가 없다.어쩌면 진우가 뭔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이때, 정연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안 그래도 소인 마마께 드릴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태자 저하께서 아침 일찍 날이 밝기도 전에 조정에 가시려고 집을 나섰다가 저택 앞에서 소씨 부인을 마주쳤다고 합니다. 태자 저하는 그자가 태자빈 마마의 친정 가족이어서 차마 매정하게 돌려보내지는 못하시고 곁채에서 기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마마께서 아침 진지를 드시고 임씨 부인을 어떻게 처리하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아침 일찍 날이 밝기도 전에 임진숙이 감히 태자부에 찾아왔다고?한편, 소우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는 정연은 간석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간 태감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으로 보면 소씨 부인은 소 장군님과 평춘 왕비 일로 마마께 부탁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어디 한번 만나봐야지.”말을 하던 소우연은 명심이 들고 온 대야에 손을 깨끗하게 씻은 뒤, 정연이 건넨 수건으로 손을 쓱 닦고는 수건을 곁에 있는 바구니 안에 툭 던졌다.“네, 알겠습니다.”소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마당으로 향하자 정연은 명심에게 방 안을 깔끔하게 청소하라고 당부한 뒤, 빠른 걸음으로 태자빈의 뒤를 따랐다.한편, 곁채에서.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소씨 부인은 소우연을 보자마자 미간을 확 찌푸리며 소우연을 아니꼽게 쳐다보았다.“너 이제 태자빈이 됐다고 이 어미도 모른 척하는 것이냐?”소씨 부인의 말에 정연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무엄하옵니다! 태자빈 마마를 보셨으면 인사부터 하셔
입술을 오므리고 있는 임진숙은 귀찮고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소우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소우연과 소우희는 똑같이 그녀의 자식이지만 쌍둥이인 두 아이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왜!소우연의 이목구비는 소씨 가문의 그 늙은이를 훨씬 많이 닮았다!분명 쌍둥이인데 소우연을 낳을 때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쳤고 임진숙은 극심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이와 반대로, 소우희를 낳을 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고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었다.그리고 생김새로 보면 소우연은 갓 태어났을 때 얼굴이 쭈글쭈글한 게 한눈에 봐도 소씨 가문 할망구와 거의 똑같았다.그것도 모자라 하루 종일 울어대서 임진숙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소홍범에게 시집을 가고 나서 지금까지 소씨 가문 노부인이 이 집을 관리하고 있었기에 명문 가문 규수 출신인 임진숙은 이런저런 능력이 뛰어났지만 단 한번도 실권을 손에 쥐여본 적이 없었다.그러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겠는가!하지만 소우희는 달랐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얼굴도 통통하고 눈도 말똥말똥한 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그때 당시 소홍범은 이런 말을 했었다.“우연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아주 복덩이가 따로 없습니다.”소씨 가문 노부인도 환하게 웃으며 소홍범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이 아이는 나중에 나라에 소문난 미인이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너를 많이 닮았구나. 무조건 지혜롭고 선한 아이로 클 것이야.”그렇게 칭찬을 금치 못하던 노부인은 소우희를 보자마자 미간을 확 찌푸렸다.“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생김새는 왜 이렇게 다른 지 모르겠네. 우희는 진숙이를 더 많이 닮았구나.”딸이 어미를 닮은 게 뭐 잘못되었단 말인가!소우희와 소우연은 한 시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소우희는 임진숙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노부인의 예쁨을 받지 못했다.임진숙은 지금 생각해도 분하고 억울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임진숙은 심지어 자신에게 자식이 소우희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으며 소우연은 쳐다보는 것만으
“소씨 부인 당신뿐만 아니라 소홍범 장군, 소현우 장군, 소현준 장군 그리고 소한준 장군, 심지어 소씨 노부인까지 그깟 사기꾼 점쟁이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저를 소외하고 미워하고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조제한 약을 소씨 노부인께 드려도 노부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에게 던지고 가셨지요.”소우연은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소우희가 약을 드렸을 땐 달랐습니다. 노부인께서는 심지어 의심조차 하지 않고 바로 쓰셨지요. 너무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표정이 막연했다. 슬프거나 화가 난 게 아니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똑같은 소씨 가문 딸인데 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유독 그녀만 미워하고 홀시한 걸까?“왜 그런 건지 아직도 모르는 겁니까?”냉랭하고 담담한 표정을 짓던 임진숙은 소우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마마는 소씨 가문의 저주받은 존재이기 때문이지요.”그 말에 소우연은 허허 웃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단아하게 앉아있는 임진숙 입에서 나온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냉정했다.“하긴, 왜 그랬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도 관심이 없거든요. 하지만 소씨 부인께서 오늘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잊으신 건 아니지요?”정신을 번쩍 차린 임진숙은 그제야 냉랭하던 표정이 확 풀리더니 소우연을 쳐다보며 말했다.“예전의 일들은 다 지나갔으니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태자빈 마마께서 우리 한준이와 우희를 도와준다면 진원장군 관저는 여전히 마마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겁니다.”임진숙이 소우연을 아무리 싫어하고 아니꼽게 생각한다고 해도 소홍범과 나머지 소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소우연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한편, 소우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이자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 건가?’진원장군 관저는 예전에도, 앞으로도 절대
자신은 다르다?아이를 낳아줄 수 있다고?소우연은 속으로 코웃음쳤다.이 남자의 역겨운 말에 속이 뒤틀렸지만, 그녀는 얼굴에 내색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이런 기막힌 말들을 소화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그리고 다시 경성으로 돌아갈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내 진심을 믿지 못하겠느냐?”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이민수는 불안해졌다.그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 급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소 씨 사람들이 너를 대신 시집보낸다 했을 때, 나는 그저 말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너를 보낼 줄은 몰랐다. 내 잘못은 그것을 끝까지 막지 못한 것이다. 우연아, 우리 과거는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없겠느냐?”끝까지 막지 못했다고?과거는 잊고 다시 시작하자고?소우연은 생각했다.이민수의 입은 정말 거짓말로 가득 차 있었다.예전에는 그녀를 속이고, 나중에는 소우희까지 속였다.“생각할 시간을 주세요.”소우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당장은 도망칠 방법을 알 수 없었다.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낮에는 대나무 숲과 개울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르지만, 밤이 되자 사방에 모기가 극성이었다. 잠시 마당에 서 있는 동안 얼굴이며 팔이며 목 뒤까지 모두 모기에 물리고 말았다.이민수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자 말했다.“혹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냐?”설마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폐인 이육진이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을 거라 믿는 건가?겨우 일년도 안 된 시간 동안 자신에게 매달렸던 소녀가 이육진에게 빠져버렸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마음이 답답해진 이민수는 더욱 그녀를 빨리 차지하고 싶어졌다.어차피 침상 위에서 이육진 그놈은 남자구실도 제대로 할 수 없지 않는가.남녀의 정은 원래 서로의 마음을 더욱 가깝게 만드는 법이다.일단 자신과 한 번 정을 나누면, 그녀는 자신과 이육진 중 누가 진짜 남자인지 깨닫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소우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
중요하다고?그저 자기의 것을 빼앗겼다는 욕심 때문일 뿐이었다.원작에서도 소우희가 비록 여주인공이었지만 이민수 곁에는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 황제로서 자손이 가장 중요하다는 명목으로 여러 명의 여인을 두고 자식을 많이 낳았다.소우연은 이민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저하께 정말로 많이 상처받았습니다.”이민수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손을 뻗어 소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재빨리 피했다.소우연이 차분히 물었다.“이미 저흰 엇갈렸어요. 오늘 날 납치한 목적이 대체 무엇이죠? 정말 저하를 위해서라면 저를 빨리 경성으로 돌려보내 주세요.”“태자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저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냐?”이민수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직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소우연은 살짝 웃었다.“모르겠어요.”사실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지금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 남자를 당해낼 자신도 없었고, 그가 갑자기 돌변해 자신의 명예를 해칠까 봐 두려웠다.“모르겠다고…”이민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부하가 소우연이 시녀와 함께 걸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순간 그녀를 납치해 숨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녀를 숨겨놓고, 가끔씩 보러 오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이다.바로 그때 농부처럼 생긴 여인이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여인은 이민수를 보고 공손히 말했다.“공자님, 오늘 저녁식사입니다.”저녁…그렇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이제 한 시진 정도만 지나면 어둠이 찾아올 터였다.소우연의 마음이 급격히 조급해졌다.겉보기에 이 마당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는 이민수의 사병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도망갈 길은 없었다.그 여인은 소우연을 힐끗 보더니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물러갔다.“왜 그러느냐, 먹고 싶지 않은 것이냐?”이민수는 소우연이 젓가
이민수가 자신이 도망치려 한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소우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마당을 둘러싼 대나무 숲 안에서만 움직이며 멀리 나가지 않았다.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산세가 깊고 계곡이 흐르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이민수가 말을 달려 꼬박 한 시진이나 걸린 이곳은 이미 경성 근교를 훨씬 벗어난 곳일 터였다.“여기가 어디죠?”소우연은 돌아보지 않고 최대한 먼 곳을 응시하며 물었다.“대나무 오두막.”그런 건 뻔히 보이지 않는가?대나무 오두막이라고?맞다. 이곳은 소설에 등장했던 장소였다. 이민수가 마음이 답답할 때면 조용히 찾아오곤 했던 장소. 그녀가 이곳을 기억하는 이유는 소우희가 대나무 숲을 좋아하고, 계곡을 좋아하고, 작은 다리와 물이 흐르는 풍경을 특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그녀의 눈에 작은 다리가 보였다.이민수는 왜 그녀를 굳이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일까? 이곳은 그의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만약 이번 생에도 그녀가 도망쳤다면, 그녀는 결국 불행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곳에서 이민수와 소우희의 정만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소우연의 마음이 복잡해졌다.어떻게 하면 이민수를 설득해서 자신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 아까 자신을 품에 안던 그의 눈빛을 떠올리면 지금도 두려움이 밀려왔다.만약 그녀가 너무 냉정하고 차갑게 대한다면 그를 자극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었다.이번 생에 그녀는 반드시 이육진 곁에 남아, 이민수와 소우희의 비참한 최후를 봐야만 했다.결심을 굳힌 소우연은 마음속의 증오를 숨기고 침착히 대응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육진이 분명 곧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연노랑 치마를 입은 소녀가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리자 마치 날아오를 듯 가녀린 나비와 같았다.갑자기 그녀가 몸을 돌렸다. 맑고 깨끗한 눈빛으로 웃으며 다가왔다.이민수는 숨이 턱 막혔다.이 얼굴은 예전과 달랐다. 전에는 그녀를 가끔 볼 때면 장군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욱 거칠게 말을 몰아 성문까지 질주했다.소우연은 구조를 요청할 기회를 노렸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남자가 성문 수비병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자, 병사들은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놓아줘! 당신 대체 누구야, 원하는 게 뭐냐고!”소우연은 끊임없이 물었지만 남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산과 물이 어우러진 한적한 곳에서 남자가 말을 세웠다.그는 말에서 내려 그녀를 어깨 위에 거칠게 메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소우연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등을 사정없이 두들겼고, 참다못해 남자의 어깨를 힘껏 깨물기까지 했다.하지만 남자는 작게 신음 소릴 낼 뿐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이렇게 어깨 위에 매달린 채 흔들리다 보니 아침에 먹은 음식마저 전부 쏟아질 것 같았다.한참 뒤, 시냇가의 대나무 숲을 지나자 작은 목조 오두막 한 채가 나타났다.남자는 큰 발로 문을 차 열고 안으로 들어가 소우연을 조심스럽게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소우연은 온몸에 힘이 풀려 일어나려 했지만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바로 그때 남자가 얼굴을 가렸던 천을 내리고 그녀를 뜨겁게 바라보며 말했다.“우연아, 겁내지 마라. 나다.”“이민수!”소우연은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신을 납치한 이가 이민수였음을 깨달았다.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전혀 모르는 낯선 장소였다.대체 이 남자… 뭘 하려는 거지?소우연은 온 힘을 짜내 겨우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서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오두막 안을 살폈다.“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우연아, 흥분하지 말거라. 나는 단지 네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말을 마치자마자 이민수가 그녀를 안으려 다가왔다.소우연은 급히 그를 밀어냈지만 여자의 힘으로 남자를 어찌 막겠는가?머릿속이 하얘졌다.만약 이민수가 강제로 뭔가 하려 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안 돼.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소우희가 죽는 모습을 봐야 하고, 이민수가 황위를
정연은 할 말을 잃었다.한 사람당 하나씩 찹쌀떡을 먹는다니?물론 혼자 장을 보러 나왔을 때 종종 길거리 간식을 사 먹기는 했지만, 태자빈과 같은 귀한 신분의 여인이 길거리에서 이런 군것질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았다.상인이 거스름돈을 내주자 주종 두 사람은 손에 찹쌀떡을 하나씩 들었다.정연은 소우연이 정말로 찹쌀떡을 입에 대는 것을 보고서야 따라서 한 입 베어 물었다.그녀는 말없이 소우연의 뒤를 따르면서 오늘 태자빈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아마 친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사람이란 늘 갖가지 이유로 타인을 상처 주는 일을 한다.시어머니가 미우면 시어머니와 싸울 일이지, 왜 그 날카로운 칼을 자기 자식에게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정연은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자신 또한 어린 시절부터 거간꾼에게 팔려 철저히 훈련받고 여섯일곱 살부터 궁에 들어가 규율을 익혔다.이후에는 이육진의 침소를 돌보는 시녀로 내정되어 이육진에게 하사되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육진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명심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었다.두 사람이 긴 장안거리를 걸어 다리가 점점 아파질 때쯤, 소우연이 돌아보며 물었다.“정연아, 아직 걸을 수 있겠느냐?”정연이 웃으며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마마께서는… 힘드시지 않으세요?”조금 전에는 왜 막지 못했을까. 이미 길을 반쯤 걸어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었고, 진우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내실에서만 지내는 여인들이 어찌 이렇게 긴 거리를 걸을 수 있겠는가?태자빈 소우연도 분명 힘들 텐데.하지만 소우연은 말했다.“나는 괜찮다.”장군부에 살 때 그녀는 매일같이 약초를 손질했다.때로는 바빠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조금만 느리게 움직여도 아버지와 오라버니들, 그들의 병사들이 상처 치료를 못 받아 고생할 수 있었기에 한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그렇게 가족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쳤다.좋
정연과 진규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소우연은 바닥에 깨진 찻잔을 한 번 흘깃 보고 말했다.“나중에 임곽수에게 새 찻잔을 보내주거라.”“예.” 정연이 가볍게 고개 숙여 대답했다.진규가 다시 물었다.“태자빈 마마, 전하께서 여쭤보셨습니다. 소우희 아씨를 어떻게 처리하실지요?”소우연은 관자놀이를 살짝 문지르며 천천히 말했다.“사람을 보내 그 아이의 독이 풀렸는지 확인하거라. 아직 풀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천천히 고통받게 내버려두고, 만약 풀렸다면…”그녀의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번쩍였다.진규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독이 풀렸다면 내가 직접 만나러 갈 것이다.”직접 지옥으로 보내주마!평소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너무 달라, 진규조차 순간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었다.사실 이육진이 진규를 통해 물어본 건 마지막으로 태자빈의 결심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그녀가 정말 소우희를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지 그는 확실히 알고 싶었다.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기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진규가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예, 알겠습니다. 속히 돌아가 전하께 아뢰겠습니다.”“그래.”진규가 나가자 소우연도 정연과 함께 내실에서 나왔다.밖에서는 임곽수와 그의 두 명, 아니 세 명의 제자가 일을 보고 있었다.셋째 제자는 예전에 소부인에게 아버지의 다리를 고친 사람이 태자빈이라고 알려준 그 소년이었다.그 소년이 소우연을 보자 공손히 다시 절을 올렸다.소우연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임곽수가 널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네가 재능과 노력이 있기 때문이지, 내 덕이 아니다.”“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마마께서 아버지의 다리를 고쳐주신 덕에 소인도 만안당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겐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소우연이 미소를 지었다.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나쁘지 않았다.임곽수는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제자와 소우연 쪽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그 역시 소우연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그녀가 아니었다면 벌써 만안당을 떠
진우는 호위무사였다.온몸에 무예를 지닌 사내였으니 소부인이 버티자마자 가볍게 병아리를 잡듯 그녀를 끌고 나가버렸다.정연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옆에 서 있던 진규와 눈을 마주치고는 서로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태자빈 마마도 성질이 있으셨구나, 그저 참고 계셨을 뿐.’태자 이육진도 그리도 강한 사람이거늘, 이육진 곁의 소우연이 어찌 온순한 사람일 리 있겠는가?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나인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소우연은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물었다.“소부인이 말을 안 했으니 네가 말해보거라. 넌 소부인의 곁을 오랫동안 모셨으니 알 것 아니냐?”나인은 망설이며 입술을 떨었다.정연이 재빨리 말했다.“마마께서 말씀하셨는데 감히 숨기겠습니까? 어디 제가 지금 당장 칼이라도 가져와 볼까요?”칼은 또 왜?나인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급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마마, 감히 숨기지 않겠습니다.”“그래, 말해보거라.”소우연은 사실 분노보다 호기심이 컸다.소부인이 자신을 미워한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정말 궁금했다.나인은 몇 번 침을 꿀꺽 삼킨 뒤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그녀의 입을 통해 소우연은 드디어 이유를 알게 되었다.소부인은 자신의 시어머니를 몹시 싫어했었다. 어릴 적 소우연의 모습이 자신의 시어머니와 너무 닮아 그녀까지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허허…고작 그 이유 때문이라니.정말 기가 찼다!나인은 소우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태자빈은 의외로 평온한 표정이었다.진실을 알게 되면 심장이 멎을 것처럼 아플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지금의 태자빈은 어릴 적의 성격과 완전히 달랐다.단단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이 소부인의 막내 여동생과 매우 비슷했다.하지만 그 여동생은 어릴 적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또 다른 숨기는 일이 있느냐?”소우연은 나인의 눈에 언뜻 스친 빛을 정확히 잡아냈다.나인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마마, 정말 없습니다.”“없다고? 방
“왜죠?”소우연은 소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집착은 아니라 해도, 이 이유만큼은 분명히 알아야겠다 싶었다.대체 왜 그녀는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가?“정말 전 소 씨 가문의 사람이 맞나요? 정말 절 낳은 게 맞나요?”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랑받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소부인은 조금 겁을 먹은 듯 말했다.“너, 너는 내 자식이다. 우희와 너는 내 배에서 나온 쌍둥이야.”옆에 있던 나인이 재빨리 덧붙였다.“마마, 당연히 마마께서는 부인의 친자식이 맞습니다. 노비가 직접 보았으니 증언할 수 있습니다.”소우연은 나인을 차갑게 쳐다보고 다시 소부인을 향해 말했다.“그럼 왜 나와 소우희는 전혀 닮지 않은걸까요? 왜죠?”그녀는 손을 뻗어 소부인의 턱을 들어 올리며 똑바로 눈을 바라보았다.“정말 제 친모가 맞으십니까?”“맞고말고. 당연히 넌 내 딸이야.”소부인은 입술을 떨었다.차갑고 싸늘한 표정으로 화를 내는 소우연의 모습이 여동생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동생, 자신은 늘 냉대 받았다.그래서 그때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왜 소우연에게 잘해주지 않았느냐고?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동생과 너무나도 똑같았다.자신이 직접 낳지 않았다면 아이가 뒤바뀌었나 의심했을 정도였다.쌍둥이인데도 이렇게 다른 외모를 가진다는 것이 정말 기이했다.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동생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저주받은 재앙이라고 생각했다.소부인 마음 깊은 곳에서 소우연은 빚을 받으러 온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도 소우연을 미워했던 것이었다.“그래서요?”소우연이 조용히 되물었다.“똑같이 낳은 자식이라면서 왜 저에게만 그렇게 못됐게 구셨죠? 제가 말을 듣지 않았나요? 철이 없었나요? 왜 절 좋아하지 않았죠?”담담한 질문에 소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절대로 소우연에게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소우연은 한숨을 내쉬고 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진우야, 소부인을
진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예, 태자 전하께서 마마께서 내기에서 이기셨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소우연은 마음이 통한 듯 미소 지었다.마치 소부인이 눈앞에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하지만 소부인은 사랑하는 딸과 셋째 아들이 걱정되어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억지로 참고 다시 낯 두껍게 말을 꺼냈다.“우연아, 제발 나에게 우희의 행방과 상황을 좀 알려줄 수 없겠느냐?”소 부인의 얼굴이 온통 초조함으로 가득했다.전에는 그토록 품격 있고 우아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창백한 얼굴로 초췌하기 그지없었다.소 씨 가문에 닥친 일들이 그녀를 정말 피곤하게 만든 듯했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무릎을 꿇으려 했다.소우연은 그런 소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무릎 꿇기를 좋아하면 얼마든지 꿇게 두면 그만이었다.소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늘 소우희에게 편애하고 자신에게 냉정하게 군 것을 후회한 적도 없었다.저 여자가 스스로 떳떳하다는데, 자신이 뭐 하러 모녀라는 이름 때문에 마음을 불편히 해야 한단 말인가?소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부인을 바라보며 무력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저 제 어머니라는 관계 하나를 믿고 이렇게 끝도 없이 저를 괴롭히고 귀찮게 하는군요.”소부인은 입술을 떨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지금 소우연에게 매달리는 것 말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집안의 남자들에게 자기 딸이나 여동생에게 가서 무릎 꿇고 사정하라 시킬 수 있겠는가?상상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소부인은 무릎이 아파지기 시작했고 옆의 나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녀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진규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소부인, 태자빈 마마께 매달려 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차라리 돌아가셔서 소 장군과 상의하는 게 빠를 듯싶습니다.”소부인은 숨이 턱 막혔다.감히 일개 호위무사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원래대로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소우연 앞에서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