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앉아 있던 오빠의 딱딱한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번졌다.나는 여동생이 하교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초등학교 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동생이 우리 집에 왔다.돌아가신 엄마와 사뭇 닮았다고 이유로 오빠는 그녀를 유난히 예뻐했다.그래서 나도 엄마를 닮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최소한 아빠와 오빠가 지금처럼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임리아는 신이 나서 오빠의 차를 향해 뛰어갔다. 새하얀 공주풍 드레스를 입고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는 그녀는 코끝이 살짝 빨개진 채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은 누가 봐도 애지중지 자란 공주님을 연상케 했다.오빠는 물론 아빠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한지라 다른 사람의 호감도 쉽게 얻었다.물론 나처럼 말주변이 없고 겁이 많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왜냐하면 나는 감히 엄두가 안 났다.매번 딴지 걸거나 떼를 쓰면 오빠의 폭언과 폭력은 점점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오빠는 임리아를 끌어안고 허벅지에 앉히더니 볼을 비비적거렸다.“역시 우리 리아가 착하군. 재수탱이 임윤설은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데 말이야. 계집애가 자중할 줄도 모르고.”자중할 줄 모르다니.졸지에 난 방탕한 여자가 되었다.단지 오빠의 생일 파티에서 친구라는 남자가 내 몸을 쓰다듬을 때 무서워서 밀어내고 뺨을 한 대 때렸을 뿐인데...하지만 오빠는 즉시 나한테 따귀를 날렸다.“네 꼬락서니 좀 봐. 친구 말로는 네가 먼저 유혹했다고 하더라. 자중할 줄도 모르고 거짓말까지 해? 임윤설, 너만 보면 역겨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언니는 단지 홧김에 그랬을 거예요. 이게 다 내 탓이에요.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언니도 오빠한테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텐데.”이건 임리아의 필살기였다. 겉으로 순수한 척해도 속에는 여우 한 마리가 들어 있다.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여자가 사진 속 온화한 어머니와 닮았다는 게 납득이 안 갔다.진짜 닮은 거 맞나?“역시 우리 리아는 마음도 넓네. 임윤설이 그렇게 못되게 굴어도 항상 언니 편을 들어주다니.”오빠는 임리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아빠가 유언장에 임윤설과 나한테 재산을 반반씩 나눠준다고 했는데 제정신도 아닌 사람이 어찌 내 동생이 될 자격이 있겠어? 그래서 유언장에 적힌 상속인을 리아로 바꾸려고 해.”이루 형용할 수 없는 울렁거림이 위에서 솟구쳐 올랐다.나는 당장 떠나고 싶었지만 영혼이 마치 이곳에 갇힌 듯 꼼짝할 수 없었다.이내 머리가 어질거렸다.곧이어 귓가에 오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사실 아빠가 응급 처치를 받고 깨어났을 때 임윤설을 보고 싶어 하셨어. 게다가 나한테 여동생을 잘 보살펴 주라고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했지. 아빠는 쉽게 용서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임리아는 오빠의 팔을 껴안고 키득키득 웃었다.해맑은 웃음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유난히 신경이 거슬렸다.나는 티 없이 깨끗한 그녀의 얼굴과 투명한 눈동자에서 악의를 어렴풋이 보아냈다.머릿속에는 그녀가 다른 여학생들을 데리고 학교에서 나를 괴롭히던 장면이 떠올랐다.이내 허리를 숙이고 헛구역질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하긴, 죽은 사람이 토를 어떻게 하겠는가?
임리아가 처음 왔을 때 우리는 꽤 잘 지냈다.적어도 집에서는 아무 문제 없었다.소심한 얼굴로 내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언니’라고 불러주었다.그리고 나를 무시하는 아빠와 푸대접하는 오빠를 발견하고 나서 서서히 돌변하기 시작했다.그제야 나는 임리아가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어느 날 학교 화장실에 나를 막아선 그녀는 다른 여학생들을 불러 내 머리카락을 뜯고, 바닥에 쓰러뜨린 채 옷이 가려진 곳만 찾아서 두들겨 패게 했다.고통은 고통대로 받고 상처는 남기지 않겠다는 의도였다.설령 옷을 벗고 확인한다고 해도 멍조차 찾을 수 없다.“언니, 날 미워하지 마. 굳이 탓하고 싶으면 오빠를 탓해. 언니를 괴롭히는 것도 어느 정도 묵인한 셈이니까. 아니면 수양딸 주제에 어떻게 감히 건방지게 굴 수 있겠어?”하긴, 만약 오빠의 허락이 없었더라면 어찌 감히 대놓고 폭력을 행사하겠는가?오빠는 정말 내가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나중에는 오빠가 나를 구해줄 거라는 기대조차 안 했고, 단지 손만 대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을 뿐이다.‘아파.’나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찍소리조차 내지 못했다.어쩌면 오빠의 여동생으로서 임리아가 더욱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똑같이 잔인하고 매정하지 않은가?
매번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지저분한 옷차림으로 집에 돌아갈 때면 오빠는 무심한 얼굴로 흘긋 쳐다보고는 비아냥거렸다.“임윤설, 또 밖에서 남자 만나고 온 거야? 아직 18살도 안 된 계집애가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니?”나는 눈물을 참고 입을 꾹 닫았고, 몸과 마음이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비록 오빠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임리아와 같은 반 남자애가 내 옷을 벗기고 저질스러운 사진을 찍었다.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무해한 미소가 번졌다.“오빠한테 얘기하는 순간 이 사진을 퍼뜨릴 거야. 과연 이걸 보고도 널 이해해줄까?”사실 말하든 말든 나한테 큰 의미는 없었다.결국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졌다.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나중에 심리상담사를 찾아갔더니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해주셨는데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관심과 배려였다.나는 코가 찡하며 눈물이 흘러내렸다.이런 친절과 걱정은 처음이지 않은가?“윤설아, 넌 아직 어려서 앞날이 창창하니까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을 거야. 만약 가족들에게 털어놓기 힘든 고민이라면 나한테 얘기해.”나는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자해하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를 썼다.사실 칼로 팔과 손목을 베고 싶은 충동이 수도 없이 들었다.하지만 엄마의 목숨과 맞바꾼 생명인데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엄마가 하늘에서 지켜본다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그래서 난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라고 항상 속으로 되뇌었다.나도 공주님 대접이 아깝지 않은 착한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나는 아프고 나니 예전보다 성격이 까칠하게 변했다.임리아와 임기택을 대하는 태도도 사뭇 달라졌다.월말 평가에서 컨디션이 안 좋은 탓에 성적이 조금 떨어졌지만 그래도 임리아보다 시험을 잘 봐서 나름대로 기분은 좋았다.적어도 공부만큼은 내가 더 잘했으니까.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증오로 이글거리는 임리아의 눈동자를 맞닥뜨렸고, 곧이어 그녀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슨 의미인지 눈치채지 못했다.나중에 친구들을 몇 명 데리고 나가더니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에서 내가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쉬는 시간이 끝나서 자리에 와 보니 책상에 죽은 뱀과 독거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책상과 의자는 고장 나서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교체되었다.육체적 괴롭힘은 성에 안 차는지 이제는 정신적 고통까지 줄 작정인 것 같았다.교문을 나서는 길에 임리아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사슴 같은 눈망울에 어떻게 이런 검은 속내가 숨어 있단 말이지?나는 화가 난 나머지 머릿속이 하얘졌다.그리고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에 있던 교과서를 집어던졌는데 마침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임리아는 즉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통곡했다.하지만 나는 왠지 모를 쾌감이 느껴졌다.이 모든 걸 지켜본 오빠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나를 바닥에 밀치고 큰 소리로 호통쳤다. 준수한 얼굴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게 바로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린다는 건가?“임윤설, 왜 이렇게 악랄하게 구는 거야!”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마음이 답답한 게 곧 발작을 일으킬 듯싶었다.이제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맞아요. 나 원래 악녀예요. 임리아를 때려죽이지 못 한 게 아쉬울 뿐이죠.”마치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울분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으면 전봇대 위에 있던 참새들도 깜짝 놀라 도망갔고, 모든 행인의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임기택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리고 주변 사
제일 힘든 시기에 나는 임하늘을 만났다.영혼이 고통받고 몸과 마음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입술은 갈라 터지고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왔으며 듬성듬성 자란 머리카락은 윤기가 없었다.나는 멍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인적이 드문 육교에서 멈추어 섰다.이내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다행히 아무도 없어 소란을 일으킬 정도는 아닐 듯싶었다.나중에 임하늘이 나한테 말했다.“널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이 어찌나 못생겼던지. 물론 외모가 아니라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뜻이야. 사실 넌 얼굴이 예쁜 편에 속하잖아? 마치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는 동물, 또는 호수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의 물고기 같았어.”나는 깔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찰싹 때렸다.“헛소리하지 마. 물고기가 익사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그녀는 대뜸 나를 흘겨보았다.“그런 뉘앙스라는 거지. 온몸으로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나는 문득 정색했다.사실 그날 오후 육교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임하늘에게 제지당했다.“라이터 있어?”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그녀가 나한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내 대답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옆에 주저앉더니 본인의 인생사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고아로 자라 그동안 남자친구를 많이 만났는데 폭행당해 헤어지고 지금은 한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혹시 내 노래 들어보고 싶지 않아?”나는 잠깐 고민했다. 어차피 하루 더 산다고 문제 될 건 없으니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결국 뜻하게 않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임하늘과 함께하는 나날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그녀는 이름처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맑은 하늘을 연상케 했다.적어도 내 삶에서 하늘 같은 존재였다.나는 그녀만 보면 하는 말이 있었다.“언니가 없었더라면 난 일찌감치 죽었을 거야.”그녀는 내 손등을 토닥였다.“날 속인 전 남친이 했던 멘트보다 더 감동적인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임하늘은 머뭇거리더니 내 볼을 감싸 쥐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내 허락 없이 함부로 죽으면 안 돼.”그러나 결국 실언하게 되었다.사실 나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임하늘을 만난 이후로 우울증 증상도 점차 사라졌고, 어느 순간부터 약을 끊기 시작했다.왜냐하면 나를 데리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가고, 생일 때 케이크에 [내 동생, 생일 축하해] 라는 문구까지 새겨주는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가끔은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강변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여주었고, 본인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그러다가 어느 날 진지한 얼굴로 나한테 물었다.“윤설아, 난 가족이 없는데 네가 내 여동생이 되어주지 않을래?”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환하게 웃었다.나한테도 언니가 생기다니!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언니였다.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도 이렇게 애지중지해주는데, 정작 피를 나눈 오빠는 내가 죽기만을 오매불망 바라지 않는가?
내가 죽은 지 5일째 되던 날.오빠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고, 표정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동안 가출해도 길어야 3일이 최대였다.이제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빠의 표정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임하늘을 만난 이후로 그녀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본인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그래서 나는 성적이 급격히 하락했다.얼마나 심각했으면 학교 선생님에게 불려갈 정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기택도 교무실에 찾아왔다.집에 돌아오자 오빠는 역시나 나한테 역정을 냈다.“벌써 18살이나 되었는데 좀 어른처럼 행동하면 안 될까? 성적을 떨어뜨려서 내 관심을 끌려고 하는 걸 모를 줄 알아?”그동안 나는 아빠와 오빠의 관심을 받으려고 심지어 코피가 나는 것도 다행으로 여겼다.적어도 아플 때만큼은 오빠와 아빠가 옆에서 한 번이라도 더 쳐다봐 줬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는 의미가 사라진 이상 단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이다.나는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오빠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침묵으로 일관한 탓일지도 모른다. 침묵이 곧 반항을 뜻이니까.그리고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이때, 임리아가 옆방에서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하얀 손가락에 포크를 들고 접시에는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오렌지가 놓여 있었다.투명하고 반짝이는 과육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오빠, 그만 화 풀어요. 언니가 나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졌을 수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내가 나타나서 언니의 기분을 언짢게 한 탓이죠. 단지 삐져서 성적마저 안중에 없을 줄은 몰랐네요.”말을 이어가는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따로 없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였다.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물론 오빠한테는 제대로 먹혔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화를 버럭 내더니 연신 손가락질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임윤설, 고작 리아한테 화풀이
임리아는 반년간의 학교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뛰어내리기 전, 그때 그 연약해 보였던 소녀가 참으로 강인했다고 생각했다. 그 소녀는 18년 동안 오빠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고, 자신에게 6년간,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학교 폭력을 당했다. 하지만 자살하지 않았고, 결국 차에 치여 죽었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이 소식을 들은 임기택은 비웃듯 한숨을 내쉬었다. “꼴 좋네.” 그리고는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아쉬운 결말이야.”모두가 알고 있는 LS 그룹의 젊고 유능한 대표, 임기택. 그의 집에는 커다란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 사진은 그의 여동생이라고 알려져 있다. 임기택은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자신의 휴대폰까지 찾아봤지만 임윤설의 사진 한 장조차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여동생의 휴대폰을 찾아냈고 거기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의 여동생은 흰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머리엔 공주 티아라를 쓰고 있었다. 그 티아라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는데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여동생은 눈웃음을 지으며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생일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케이크 위엔 ‘여동생, 생일을 축하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건 임기택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온 공주처럼 보였다.LS 그룹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몰락했다. 업계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임기택은 이제 여동생의 옷을 끌어안고 사는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묻곤 했다. “혹시 제 여동생을 보셨나요? 가출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올해 겨우 열여덟 살이에요.”아무도 그의 이후 삶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더 이상 미래가 없을지도 몰랐다.
나는 얼굴에 광기 어린 감정을 드러낸 임기택을 바라보며 약간 의아해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윤설아, 내 동생, 오빠가 드디어 다시 널 볼 수 있게 됐어.”나는 혐오스럽다는 듯 몸을 돌렸다.“임기택.” “내가 말했잖아.” “더 이상 너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을 거라고. 난 더 이상 네 여동생이 아니야.”그의 눈에서 흥분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팔도 점차 내려갔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윤설아, 내가 죽으면 네가 조금이라도 기뻐할까?”그의 목소리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아니.” “만약 가능하다면, 나는 네가...”그는 조용히 내 말을 들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엔 거의 병적으로 보일 만큼의 경건함이 스쳐 갔다.“오래오래 살아서...” “외롭게 늙어가길 바래.”그의 미소가 멈췄다. “윤설아, 방금 뭐라고 했어?”“네가 죽지 못했으면 좋겠어.” “널 보고 싶지 않으니까.” “임기택,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영원토록, 나는 다시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내가 세상을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임시후와 임하늘을 찾아갔다. 그들은 내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나를 추모하며.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그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리 달려갔다. 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였다.
마치 내 마음을 들은 듯, 오빠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내가 살던 텅 빈 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전혀 없는 듯 깨끗했다. 하긴, 임리아가 가진 것들을 나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윤설아, 너 아직 여기 있는 거지? 왠지 네가 아직도 여기 있는 것 같아.”오빠는 넋을 잃은 듯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이때 강 아주머니가 한쪽에서 나와 한숨을 쉬며 말했다.“기택아, 너도 몸 좀 챙겨야지. 윤설이도 네 걱정 많이 했어.”“네가 술에 취했을 때, 그 해장국이랑 죽은 전부 윤설이가 준비한 거야. 네 책상에 있던 눈 보호하는 물건들도, 네 셔츠랑 옷들도 다 윤설이가 다려준 거고.”임기택은 갑자기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방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그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임윤설은 중학교에 막 들어갔을 시기였고, 자신은 회사 일로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그때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던가? 억지로 기억을 짜내려고 했다.“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잖아.” “네가 미워해, 임윤설.”그는 여동생의 맑고 큰 눈에 서서히 차오르는 눈물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고, 그 뒤에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임윤설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방으로 돌아갔고,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책상 위에 놓인 해장국을 보았다. 순간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그때 리아가 뛰어와 그의 목에 안겼다. “오빠, 돌아왔어? 많이 힘들지?”“응, 오빠 힘들었어. 해장국 준비해 줘서 고마워.”임기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거대한 고통이 몰려와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엇이든 좋으니, 다시 한번 여동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그 순간, 문득 그는 죽음을 떠올렸고 다량의 수면제를 삼켰다.그리고 마침내, 허공에 떠 있는 임윤설을 보았다.
임기택은 내가 살아있을 때 겪었던 모든 일을 뒤늦게서야 알아냈다. 그제서야 임리아가 그동안 뒤에서 얼마나 많은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는 정말 몰랐다. 나는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나는 그가 수업 중인 임리아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고, 여학생 화장실로 끌고 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그녀에게 똑같이 되갚았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을 불러 그녀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진을 찍게 했고, 그 사진들을 학교 내의 다양한 익명 게시판에 뿌렸다. 그녀가 예전에 나를 헐뜯고, 사람들을 모아 학교에서 괴롭혔던 모든 일들도 함께. 죄악의 대가는 제법 무서웠다. 임리아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녀가 겪는 고통은 내가 당했던 것의 수천 배, 수만 배였다.임리아는 화장실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임기택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여동생을 미워했던 임기택이 왜 동생의 죽음에 기뻐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그녀가 생전에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걸까? 마치 여동생을 무척이나 소중히 여겼던 것처럼.강간범은 결국 알 수 없는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산에 버려져 짐승들에게 뜯어 먹혀 거의 남은 것이 없었다. 그는 범죄 전과가 많았고 얼마 전에도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나를 치어 죽인 운전자는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어 형벌을 선고받았다. 마치 나를 해친 사람들이 모두 응당한 대가를 받은 듯했다.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임기택.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사람.
임시후는 임하늘과 함께 내 유골을 돌려받으러 임기택을 찾아갔다. 두 사람 모두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나는 사람의 감정이 시간을 기준으로 측정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빠와 18년을 함께 살았지만 오빠는 한 번도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나를 사랑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느낀 대부분의 사랑은 임하늘과 임시후로부터 온 것이었다.나는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가던 그날 밤에 죽었다.“윤설이 유골을 돌려줘.”임하늘의 얼굴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다. “윤설이는 네 곁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을 거야. 윤설이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네 곁을 떠난 거잖아. 안 그래?”임하늘은 내 앞에서 오빠를 욕할 때처럼 노골적이지 않았고 최대한 품위를 지키려 노력했다. 내가 거칠게 말하는 임하늘과 친구라는 이유로 남들에게 무시당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임기택, 너도 윤설이를 미워했잖아. 아니야?”임하늘은 임기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내 유골을 안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긴,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임하늘은 그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아니라면, 왜 네 의붓여동생 임리아와 함께 친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이건 리아랑 아무 상관 없어. 리아까지 끌어들이지 마.”임기택은 무의식적으로 말하며 그녀를 변호했고, 이를 본 임하늘은 냉소를 지었다.“임리아가 학교에서 윤설이를 괴롭히는 걸 오빠인 너라도 막았더라면 윤설이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지 않았을 거야. 설마 네 여동생이 겪은 일들이 너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니?”임기택이 대답하지 않자, 임하늘은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이때 임시후도 앞으로 나서서 유골을 빼앗으려 했다.“더 말해야 돼?”“임기택, 평생 기억해. 네 여동생은 네 손으로 죽인 거야.”‘네 여동생은’‘네 손으로’‘죽인 거야’그 말에 임기택은 온몸을 떨었고 유골 단지마저 땅에 떨어뜨렸다. 단지가 바닥에 닿으며 맑은소리가 울렸다
경찰은 그 이후의 장면을 건너뛰고 도로변 CCTV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다가 차에 치여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이내 동정 어린 표정으로 임기택의 어깨를 토닥이며 아무 말도 안 했다.임기택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멍한 얼굴로 넋을 잃고 말았다.마치 아주 오래전, 열 살밖에 안 됐던 어린 시절처럼.갓 태어난 여동생과 방금 돌아가신 엄마를 마주했을 때보다 결코 충격이 덜하지 않았다.임기택은 금세 내 시신을 찾았다.나는 잠자코 누워 있었다.핏기가 사라진 몸은 이미 차갑고 딱딱하게 굳었다.병원 관계자가 안쓰러운 말투로 말했다.“이제 겨우 18살이라던데 참 딱하네.”이내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글쎄 한참이 지나서야 가족이 찾으러 다녔다니까?”그리고 임기택을 위아래로 훑었는데 아마도 그가 못마땅한 듯싶었다.하긴, 내 삶은 대부분 임기택 때문에 망했고 일부는 임리아의 탓도 있었다.어쩌면 두 남매가 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임기택이 내 시신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윤설아, 오빠가 데리러 왔어. 많이 춥지?”그는 추위에 떨면서도 나를 놓지 않았고, 양손으로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연신 문질렀다.그러고 나서 다시 내 손을 잡았다.“윤설아, 몸이 왜 이렇게 차? 혹시 오빠가 늦게 데리러 와서 삐진 거야?”저 멀리 관계자가 정신이 반쯤 나간 그의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었다.“이제 와서 후회하기 전에 진작에 잘해주지.”비록 목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오빠의 귀에 똑똑히 들렸고, 씁쓸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대뜸 시신을 껴안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이제야 모든 게 실감이 났다.이 세상에서 유일한 가족이자 핏줄로 이어진 여동생이 정말 죽었다.나는 공중에서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하지만 속으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동안 나는 오빠가 조금이나마 살갑게 대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다.이제 죽은 이상 임기택도 나를 원망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는 빚진 게 없었다.
임기택은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만약 그날 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여동생을 찾으러 나갔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하지만 문 앞까지 와서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는 임윤설이 언젠간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아무리 구박하고 욕을 해도 피를 나눈 여동생으로서 이 세상의 유일한 가족이지 않은가?집이 아니면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임기택은 경찰서에 가서 실종 신고했다.경찰은 메뉴얼에 따라 물었다.“실종된 지 며칠 됐죠?”그는 제 발 저린 듯 말했다.“일주일이요.”“친오빠 맞아요? 여동생이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이제야 경찰에 신고하다니?”경찰이 위아래로 훑어보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불길한 예감이 점차 그의 마음속에서 퍼져나갔다.이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귓가에 임하늘의 목소리만 계속 맴돌았다.‘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공중에서 오빠를 지켜보던 나는 무지성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냥 새롭게 느껴졌다.나 때문에 이렇게 초조한 적은 처음이지 않은가?심지어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아니면 오빠한테 붙잡히게 되면 가장 먼저 따귀부터 맞았을 테니까.경찰이 근처에 있는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임기택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그날 밤 나는 오빠와 말다툼하고 나서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와 연락처와 카톡을 차단한 다음 눈물을 닦느라 바빴다. 결국 길에서 수상한 남자가 몰래 미행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곧이어 나는 남자에게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다.경찰 몇 명과 임기택은 내 옷을 뜯겨내는 범인의 모습을 CCTV를 통해 지켜보았다.나는 눈물로 얼룩진 채 집이 있는 방향을 간절하게 쳐다보았다.이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영상이 중지되었고, 한 여경이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정지 버튼을 눌렀다.임기택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임하늘이 떠난 이후로 시종일관 같은 모습이었다.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마음속을 가득 채운 공포가 거센 파도를 일으켜 무방비 상태의 그를 덮쳤다.
하지만 임하늘이 우리 집에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오빠를 진심으로 싫어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날 집으로 데려다주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 외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벌써 일주일째 연락 두절이 되었다.임기택이 문을 여는 순간 쇄골에 새겨진 문신과 개성 넘치는 드레드락을 한 여자를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윤설을 어디에 감금한 거지?”임기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쪽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닌가?”경멸이 담긴 말투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오빠는 나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날 비하할 수는 있어도 친구, 심지어 언니를 모독하는 건 용납이 불가했다.임하늘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안색이 점점 싸늘하게 변했다.“임기택, 당신 사람 맞아? 여동생이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찾지도 않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문고리를 잡고 있던 임기택의 손에 핏기가 사라졌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고 곧바로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일은 무슨, 이참에 그냥 밖에서 살라고 해.”임하늘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질했다.“이런 오빠가 있으니 자살하고 싶어 할 만도 하네.”임하늘은 다 알고 있었다.내가 우울증에 시달린 것도, 그리고 그날 육교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것도...그녀는 괜히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게 아니었다.단지 나중에 노래 불러주겠다고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 때 초조한 얼굴로 애원하다시피 말하는 모습을 내가 간과했을 뿐이었다.“뭐? 윤설이가 자살하다니? 그럴 리가...”하긴, 내가 어떻게 자살할 수 있겠는가?멀쩡히 살아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굴욕과 고문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마땅했다.하지만 나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오빠를 위해 한 번 죽은 이상 두 번은 불가능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느닷없이 집을 뛰쳐나갔다.이내 근처를 샅샅
사망한 지 일주일되는 날.임기택은 처음으로 나를 찾으러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임리아가 그를 막아섰다.“오빠, 언니는 남자친구네 집으로 간 게 확실해요. 지금 찾으러 갔다가 언니 남자친구랑...”그녀는 기가 막히게 치고 빠졌다.임기택은 다시 가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BMW 차 키를 내동댕이쳤다.그리고 날 찾으러 갈 마음을 깔끔하게 접었다.나는 임리아의 입가에 번진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았다.잠시 후, 임기택은 친구한테 연락해서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임윤설이 어디서 뭘 하는지 벌써 일주일째 집에 안 들어왔어.”“아, 한동안 클럽에서 네 여동생을 자주 본 적이 있었는데 주변에 딱 봐도 나쁜 놈들밖에 없던데? 지금쯤 남자의 품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나는 싸늘한 얼굴로 오빠와 친구들이 중상모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동안 날 이런 여자로 생각한 건가?반면, 오빠에게 임리아는 순수하고 때 묻지 않는 존재였다.나는 곧바로 멀리 날아올랐다.아득히 먼 곳에 불빛이 훤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더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이내 머릿속으로 임하늘과 임시후가 떠올랐다.이 세상에는 아직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그러나 곧이어 슬픔이 밀려왔다.만약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가슴 아파하기 마련이다.솔직히 나를 위해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착한 사람은 늘 행복해야만 했으니까.나는 임하늘은 물론 임시후도 그리웠다.하지만 죽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록 만나러 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다시는 앞에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들이 내 사망 소식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