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 우서진이 코웃음을 치며 약간 경멸하며 말했다. “걔 지금 옆방에서 오원영, 그 늙은이랑 같이 있는데. 너희들 그 늙은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군.”오원영은 성남 비즈니스계에서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능구렁이 같은 성격에 교활해 신유리가 벌써 다섯 잔도 넘게 마셨지만 그는 여전히 일과 관련된 얘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유리 아가씨의 명성은 익히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이렇게 아름다우실 줄이야. 서대표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사실 신유리는 주량이 좋지 않아, 외부 접대자리에 도와줄 사람과 함께 다녔지만 오늘은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그녀는 술잔을 막고 싶었지만, 오원영이 기회인 듯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유리 아가씨는 역시 젊어서 피부가 정말 좋으시군요.”신유리는 어지러움을 참고 손을 빼며, 불편한 마음을 참고 일어나 말했다. “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그녀는 술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세면대를 붙잡고 한참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 역겨운 느낌을 억누를 수 있었다.신유리는 화장실에서 나와 긴 호텔 복도를 매우 천천히 걸어갔다.오원영이 그녀의 몸을 보던 시선을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웠다.복도의 방 하나를 지나가는데 문이 갑자기 열려 신유리와 방 안의 사람들의 눈이 마주쳤다.우서진은 신유리를 마주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 몸에서 술 냄새를 맡고는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신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시선이 서준혁에게로 옮겨갔다.그녀가 입을 열어 얘기했다. “죄송합니다.”우서진이 전화를 받으러 그녀를 지나쳐가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길 막지마”문 앞에는 신유리만 남아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다. 발이 바닥에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안에서 누군가 “신유리.”라고 부를 때까지.신유리가 고개를 들어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 닫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말없이 문을 닫
합정의 협력사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을 보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전부터 서준혁은 항상 신유리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책임자는 바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띄고 있었다.송지음은 한쪽에 소외되어 서준혁의 소매를 잡고 하얀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이 회사와는 여러 번 협력한 적이 있어 계약에 관해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신유리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서준혁과 상대측 사장에게 한 부씩 건네고, 습관적으로 송지음에게 지시했다. “식당 예약하는거 잊지마.”송지음은 온몸이 굳은 채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했고, 조금 난감해 하고있었다.게다가 신유리에게 인턴 대우를 받았다.송지음은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서준혁을 바라보며 눈이 빨개지기 시작했다.신유리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생각나서 그녀에게 얘기했다. “미안해, 예슬 씨로 착각했어.”송지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유리 언니.”신유리는 잠시 멈칫하고 그녀를 힐끗 보더니 눈을 들어 뒤에 있는 양예슬을 보고 지시했다. “호텔 예약해요, 조대표님 취향 아직 기억하죠?”송지음의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저녁도 먹지 않고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먼저 호텔로 돌아가 쉬겠다고 했다.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서준혁을 바라봤다. “준혁 오빠, 나 좀 데려다 줄 수 있어?”서준혁은 조대표와 저녁을 먹어야해서, 신유리는 그가 그러지 않을 줄 알았지만 서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데려다 줄게.”그는 고개를 돌려 신유리에게 당부했다. “이따가 올게.”그러나 서준혁은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신유리는 문 앞에서 조대표를 배웅한 후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송지음과 서준혁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합정의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신유리는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다.그런데 어디서 새어나갔는지 그녀와 오원영이 실랑이를 벌이던 그날 밤의 사진 한 장이 떠돌기 시작했다.사진
신유리가 잠시 멈칫했다. “당신이 찍었다고요?”“그때 별 생각없이 찍었어요.” 아무래도 남의 사생활을 침해한 것이기 때문에 청년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게다가 후에 그도 서준혁이 신유리를 객실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다만 사진을 다 보냈기 때문에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최근 신유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듣고서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저는 정재준이라고 합니다.” 그는 귀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 일은 아무래도 저 때문에 피해를 보신 것 같아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신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재준을 바라보며 그날 밤 그녀에게 방문을 닫으라고 했던 남자인 것을 기억해냈다.정재준은 스스로도 오래 머무르는 것이 민망했는지 몇 번이나 사과를 하고 떠났다.신유리는 내내 말이 없던 연우진을 보며 물었다. “또 다른 일 있어?”“괜찮아?” 연우진의 따뜻한 목소리에는 배려심과 관심이 담겨 있었다. “요즘 일이...”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신유리가 말을 끊었다. “나는 아무 상관 없어.”연우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는 약간의 무력함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신유리와 연우진은 접객실에서 있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순간 양예슬이 허겁지겁 달려왔다.그녀는 신유리를 보고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말했다. “유리 언니, 비서실에서 고객이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양예슬은 말을 꺼내기 힘들어 보였고, 신유리가 비서실에 가서야 그 고객이 여자인 것을 알았다.비서실의 여우년이 자신의 남편을 유혹한다면 욕을 하고 있었다.여비서는 욕을 먹으며 얼굴이 빨개졌다 하얘졌다를 반복했고,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여사님, 일단 진정하시고 천천히 얘기하시죠.”하지만 그 여자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로 신유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채 신유리를밖으로 밀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 밀쳐지면서 발목이 꺾여 넘어질 뻔했지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잡아주었다.
양예슬은 망설여졌다. 신유리와 송지음의 관계는 화인 그룹의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신유리는 개의치 않고 서류를 들고 올라갔다.운이 좋게도 올라갔을 때 송지음과 쥴리는 화장실에 가 있었고, 신유리는 서류를 들고 서준혁을 바로 찾았다.서준혁은 그녀일 줄 몰랐는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신유리는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사인이 필요해.”서준혁은 받아서 바로 서류를 펼치고 펜을 들어 서명했다.신유리는 그의 동작을 바라보며 속눈썹을 떨었다.서준혁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첫 번째 수업은 계약서를 꼼꼼히 읽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익숙한 사람이 건네더라도 자세히 봐야 한다.“발목은 좀 어때?” 서준혁은 서명을 하면서 무심코 대화 주제를 찾았다.신유리가 조용히 “괜찮아졌어.”라고 대답했다.“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어?”“응.” 신유리는 그가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건네주는 것을 받아들고 막 떠나려는데 서준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무팀에 가서 청구해. 의료비는 회사에서 처리할 거야.”신유리는 제자리에 서서 서준혁을 바라봤다.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누가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는데, 회사에서 이번 일을 가지고 홍보하려는 것 같아.”그의 눈빛은 매우 담담했고, 신유리에게 조금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신유리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아프냐고 한 마디쯤은 물어볼 줄 알았어.”서준혁은 펜을 든 손을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보상은 두 배로 해줄 수 있고, 유급휴가도 가능해.”“...그래.”신유리가 사무실에서 나오자 돌아오는 송지음이랑 쥴리와 마주쳤다.송지음은 신유리가 서준혁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눈에 담긴 긴장과 경계를숨기지 못한 채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유리 언니, 무슨 일로 올라오셨어요?”신유리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쳤다.송지음은 대답을 듣지 못하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화인의 이번 단합대회는 온천 호텔에서
송지음이 다가왔을 때 신유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유리 언니랑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아까 둘이 같이 있는 거 봤는데.” 송지음은 서준혁 앞으로 달려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떠보고 있었다.서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별 거 아니야.”그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 “등산은 재밌었어?”송지음은 그가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늘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그의 말에 따라 대답했다.신유리를 지나갈 때 걸음을 멈추고 억지로 한마디 했다. “유리 언니, 언니가 산에 못가서 정말 아쉬워요. 엄청 예뻤는데.”저녁이 되자 송지음은 모두에게 진실게임을 하자고 제안했고 사람이 많아서 여러 테이블을 준비했다.신유리는 일부러 송지음과 서준혁이 있는 곳에 가지 않고 가장 끝에 앉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았다.게임이 시작될 때만 해도 다들 수위가 높지 않았는데 중반이 되자 질문이 점점 과해졌다.신유리 차례가 되자 질문을 한 동료는 무슨 생각인지 그녀에게 물었다. “유리 언니, 첫 경험은 언제 누구랑 했어요?”이 질문이 나오자 신유리는 침묵했다.마침 과일을 들고 오던 송지음도 멈칫했다.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개인적인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스무 살, 서준혁.” 송지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유리가 받았다.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너무 조용해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들었다.송지음의 얼굴이 즉시 하얗게 질렸고, 그녀는 황급히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눈시울을 붉히며 자리를 떴다.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신유리는 오히려 담담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도구를 집었다. “계속 할까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재치가 있어서 히히덕거리며 이 상황을 대충 얼버무렸고,신유리는 몇 번 더 하다가 재미가 없어졌다.그녀는 혼자 방으로 돌아가려고 문을 나섰는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뒤에서 따라온 사람에게 가로막혔다.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서준혁은 손을 들다 말고 담담하게 정재준을 바라보면서 웨이터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았다. “몰라.”“그래...” 서준혁의 대답에 정재준은 조금 실망했다.우서진은 구경이라도 난 듯 정재준의 팔꿈치를 툭 쳤다.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다?”“집에서 맞선보라고 하는데 별수 있냐.”신유리는 이곳에서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다. 연우진과 함께 이모를 보러 가고 있는 중이다.연우진의 이모 이연수는 나이가 사십이 넘었는데 무용수라 그런지 관리가 잘 돼 있었다.이연수는 노골적으로 신유리를 훑어본다. “소개가 필요할 것 같은데?”이에 연우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신유리에요.”“신유리 씨는 당연히 알고 있지. 근데 유리 씨는 화인 그룹의 대표와 밀접한 관계로 알고 있는데?”신유리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떠보듯이 물었다. “신유리 씨는 서대표와 같이 오지 않았나?”“동행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준비한 선물을 이연수한테 전해준다. “우진 씨 친구로 참석했어요. 이건 이모님을 위해서 준비한 선물이에요.”이연수는 뼈대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 매우 도도했다. 며칠 전 신유리와 오원영의 사진이 시끄럽게 퍼졌을 때 이연수도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사부인들이 다들 말하기를 신유리가 주제에 맞지 않게 서준혁과 같이 있다고 했다. 이연수도 신유리의 출신을 못마땅해했는데 지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신유리가 건네주는 선물은 보지도 않고 턱을 들며 교만하게 말했다. “여기 놔 둬.”연우진은 이런 이연수의 태도를 눈치챘다. “이모, 유리가 이모 생신 축하해 주러 왔어요.”이연수는 경고 어린 눈빛을 연우진에게 보냈다. “우진아, 너네 부모님 곧 오셔.”연우진과 신유리가 더 이상 엮이는 게 싫었다.신유리는 가지고 온 선물을 놓고 연우진한테 먼저 간다고 말했다.“유리야!” 연우진은 무의식적으로 신유리의 손목을 잡고 사과했다. “잠깐만 기다려 줘. 내가 데려다줄게.”마침 서준혁과 우서진은 이연수에게 술을 따르러 왔다. 비록 업종은 달라도 이연수는 윗사람이었다.연우진이
말할 때 열기가 신유리 목에 닿자 그녀는 참을 수 없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서준혁은 신유리의 팔목을 꽉 잡아 신유리가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그녀의 가늘고 긴 목을 따라서 귀까지 입을 맞췄다.신유리의 귀는 매우 예민해 금세 몸에 힘이 풀렸고 서준혁의 눈빛은 더 그윽했다.그리고 그는 신유리의 허리를 감싸 소파에 누웠다.사실 8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알기에 충분했기에 서준혁은 신유리의 예민한 곳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거실의 창문을 통해 비가 섞인 바람이 불어 커튼이 펄럭이고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닿자 신유리는 정신을 차렸다.신유리는 이를 악물고 손에 온 힘을 실어 서준혁을 소파의 끝까지 밀어냈다이때 서준혁의 머리는 헝클어졌고 셔츠 단추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부분 떨어져 가슴과 복근이 훤히 드러났다.신유리가 입은 잠옷도 나시 끈이 아래로 떨어져 간당간당하게 몸에 걸쳐졌지만 그녀는 나시 끈을 다시 올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서준혁, 똑똑히 봐 내가 누군지. 난 송지음이 아니야.”서준혁이 말하려는 찰나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리면서 송지음한테서 전화가 왔다.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자 송지음의 억울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오빠, 오늘 저녁에 같이 있어주기로 했으면서 왜 아직도 안 와?”“기다려.” 서준혁은 전화를 끊었다.신유리는 소파에 앉아있었고 입고 있던 잠옷은 심하게 망가져 등이 훤히 보였다.그녀는 매우 말라 등 뒤의 날개뼈가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고 피부가 하얘 형용할 수 없는 처량함이 있었다.송지음과 약속한후 서준혁은 곧바로 일어났다.그가 한발 내딛고 나서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바라봤다. “넌 당연히 송지음이 아니지.”서준혁이 떠나고 신유리는 한참을 거실에 앉아있다 방으로 들어갔다.서준혁에게 잡힌 손목이 빨개져 아팠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는 단지 신유리와 자고 싶을 뿐이다.다음날 신유리가 고객을 만나고 회사에 도착하자 양예슬이 다가와서 말했다.“위층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어요.
신유리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서준혁과 송지음이 멀리 가지 않아 신유리가 말하는 내용을 들은 서준혁은 걸음을 멈췄다.신유리는 상황을 알지 못하고 연우진 차에 탔다. 손에는 연우진이 준 도자기 인형이 있었다.“대부분 사람들이 다 재미없다고 생각해서 너도 관심 없는 줄 알았어.”연우진은 생김새가 단아하고 말투도 나긋나긋해서 신유리가 집중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신유리는 도자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괜찮아, 나도 잘 몰라.”“그럼 내가 알고 있는 거 다 알려줄게.” 도자기 전시회는 성남시 북쪽에서 열렸는데 도착했을 때 곧 폐관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신유리는 도자기를 잘 알지 못해 연우진 곁에서 도자기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고풍스러운 꽃병 앞에 멈춰 섰다. 꽃병을 보는 연우진의 눈빛이 무척 부드러웠다. “외할아버지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셨던 작품 중 하나야.”신유리는 연우진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 생각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연우진과 함께 꽃병만 바라봤다. “아름다워.”연우진이 평소에 하는 미소와 달리 오늘은 진심으로 웃었다.“좋아하면 다음 기회에 다른 것들도 보여줄게.”전시회 구경이 끝나자 벌써 저녁시간이 되어 연우진이 밥을 사겠다고 말한 순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난처한 듯 신유리를 바라본다. “오늘 내 친구가 생일인데 이 부근에 있는 바에 있다고 해서 같이 갈래?연우진의 친구지만 신유리가 모르는 사람이어서 거절했다. “난 택시 타고 갈게.”“괜찮아, 잠깐만 있다가 갈 거야. 혼자 가면 술 먹일게 뻔해.”연우진과 서준혁의 친구가 많이 겹치지 않고 두 사람 성격도 완전히 달라 신유리는 바에서 서준혁을 볼 거라고 예상 못 했다.신유리가 어떻게 인사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서준혁이 먼저 물었다. “연우진과 같이 왔어?”“친구 생일이라고 해서. 넌? 송지음과 같이 온 거야?”신유리는 감정을 잘 숨겨 티가 나지 않아 마치 서준혁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서준혁은 신유리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