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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7화

작가: 박혜은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06-03 19:00:00
이 점을 깨닫고 나니 신유리는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다만 서준혁과 같은 차에 탄다는 것이 여전히 조금 꺼림칙했다.

신유리가 말하려고 하자 오혁이 옆에서 낮은 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타세요. 다른 사람들은 이미 출발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택시 타고 가는 게 낫겠어요. 대표님과 부 선생님께서 일을 이야기하는데 제가 차에 같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오혁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신유리에게 말했다.

“방금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듣지 못했어요. 거참, 조수석에 타도 괜찮죠? 뒷좌석은 모두 남자들이라 여성분 혼자서 불편하니까요.”

오혁은 그녀를 위해 많이 고려해 주었다.

뒷줄에 부 선생께서 이미 타고 있었고 서준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 지체하지 마시고 빨리 타죠.”

“유리 씨, 어서 타세요. 쑥스러워하지 마시고 저도 이따가 버닝 스타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요.”

부 선생은 이신과의 관계가 밀접하다고 하니 신유리는 더 이상 거절할 수도 없었고 묵묵히 조수석에 올랐다.

다만 이렇게 되면 난감한 것은 오히려 오혁이었다.

신유리는 조수석에 앉았고 부 선생님과 서준혁은 뒷좌석에 앉았다. 그는 이 두 분과 함께 앉는 것도 쉽지 않았고 누구더러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아마 택시 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좀 불편해서요.”

신유리도 상황을 보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마침 부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마침 가는 길에 연구실로 돌아가서 내가 준비해 놓은 자료를 갖고 와. 이따가 조 선셍과 곽 선생힌테 보여줘야겠다.”

오혁은 대답하고 재빨리 떠났다.

신유리는 조수석에 앉아 투명 인간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다만 이런 상태가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부 선생은 그녀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유리 씨, 방금 대표님께서 화인 그룹과 버닝 스타가 현재 합작하고 있다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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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하며 신유리를 바라보았다.신유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장수영이 배시시 웃으며 서준혁에게 다가와 특별히 신경 써서 한 화장을 거울로 슬쩍 확인하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어머, 서대표님.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모셔다 드리기로.”장수영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지라 말을 할 때 섞여있는 애교는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편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신유리를 보며 웃더니 계속 말했다.“서대표님이랑 아시는 사이세요?”장수영의 말투에는 떠보려는 의도가 가득했고 신유리는 담담히 대답했다.“저희 사무실이랑 서대표님이 협업하는 사이죠.”“그러시구나~”신유리의 대답에 장수영은 말끝을 묘하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어쩐지 서대표님이 유독 챙기시더라고요. 근데 지금 날씨도 안 좋고 외지 사람들은 이런 태풍 부는 날에 적응을 못할 테니 제가 서대표님을 모셔다 드릴게요.”장수영은 에둘러 말하는 것 없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표달 했고 예전의 신유리였다면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절의 의사를 내비췄겠지만 현재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알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서대표님~”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던 신유리의 뒤에선 장수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고 그녀의 목소리와 더불어 진한 술 냄새와 서준혁 특유의 냄새가 주위에 가득 퍼졌다.남자는 어두운 얼굴로 살짝 취한 듯한 목소리를 하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이러지 마시죠, 저 지금 정말 불편합니다.”신유리는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 비춰진 서준혁의 눈빛엔 취기가 가득했고 그 덕에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은 검은 보석처럼 더욱 선명해졌다.서준혁은 단추를 꽁꽁 잠근 셔츠 차림이었지만 하필 눈꼬리 쪽이 빨개지는 바람에 평소 그 냉정하고 도도한 기질 때문에 더욱 더 유혹적이었고 섹시해 보였다.그는 신유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의 체온마저 신유리는 느껴질 것만 같았다신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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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말고 다   제309화

    물수건을 쥐고 있던 신유리의 손에 힘이 조금 실리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 서준혁을 쳐다보았다.서준혁도 신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침대에 앉아있고 신유리는 서있는 상태라 분위가는 더욱 이상해졌다.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는 물수건을 침대 옆의 상에 놓고는 말을 꺼냈다.“내려가 볼게요.”“기억나십니까?”서준혁의 목소리와 공기 중에 퍼지는 은은한 술 냄새는 방안 분위기를 달궈주는 듯싶었고 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그는 신유리를 바라보지도 않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나중에 우리 아이 낳으면 이름을 서유희라고 하자고 했잖습니까.”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서준혁은 말을 할 때 신유리를 보지도 않았고 그 말을 들은 신유리는 굳더니 복잡한 눈빛을 하곤 서준혁을 보며 씁쓸히 아려오는 마음을 달랬다.전에 신유리는 확실히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이름은 서유희라고 하자고 약속했다. 서준혁의 서, 신유리의 유자도 있기에 알 맞춤이라고 생각하며 까르르 좋아하던 일이 엊그제 같았다.신유리는 주먹을 꽉 쥐고 한숨을 푹 쉬더니 단호한 눈빛으로 서준혁을 쳐다보며 말했다.“서준혁씨, 많이 취하셨어요.”“그런가 봅니다, 옛 생각이 막 떠오르는걸 보니.”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리며 담담하게 대답했고 신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물었다.“뭐 좋을 게 있다고 자꾸 생각해요?”방 밖으로 나올 때, 마침 해장국을 가져다주는 카운터 직원과 마주쳐버렸고 신유리는 더욱 더 짜증이 밀려왔다.방으로 도착한 신유리는 베란다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서준혁은 오늘 누가 봐도 많이 취한 사람이었고 신유리도 신경을 덜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서유희라는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마음에서 파도가 치듯 일렁거렸다.신유리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안에 새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신기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베란다에서 돌아가자마자 이석민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인해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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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유리와 주언이 몸을 돌려 올라가려고 할 때, 뒤에서는 신연인지 서준혁인지 모를 시선이 느껴졌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주언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저 방금 제대로 못했죠?”“뭘 제대로 하는데요?”신유리는 말을 하는 주언을 옆으로 힐끔 쳐다보며 되물었고 주언은 얼른 자신의 생각을 말해줬다.“임아중씨가 저보고 서준혁씨 앞에선 특히 더 조심해라고 해서요. 제가 방금 서준혁씨 앞에서 좀 더 친한 척 친밀한척 했어야 했는데...”임아중이 도대체 주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신유리는 얼른 대답했다.“아중이 말... 너무 새겨듣지 마요.”“음, 네.”주언의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는 어색하기 짝이 없어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그의 방은 신유리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에 신유리는 자신의 방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는 바로 내려버렸다.현재 그녀의 모든 신경은 주언이 아닌 신연에게로 쏠려있었고 아까 신연과의 눈 맞춤은 신유리로 하여금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그 사람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많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신유리는 소파에 앉아 한참을 진정하려 애썼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어딘가 불편했다.신기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신유리가 15살 되는 해였다.그때 신유리는 갓 중학교를 졸업해 명문고에 붙은 상황이라 기쁜 마음에 몰래 신기철에게 전화를 걸었었다.하지만 신기철은 원래 기억속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억지로 힘듬을 억누르고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변했었고 전화를 건 신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냐 고만 물었다.자신이 알던 사람과는 180도 달라진 신기철의 모습에 신유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지만 그래도 그에게 자신이 명문고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그것을 들은 신기철은 잠시 당황하더니 얼른 축하의 말들을 건넸었다.그 후 신기철은 아무도 몰래 신유리의 계좌로 5만원을 입금해줬고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연락 이였다.오늘 뜻밖으로 신연을 마주한 신유리는 담담하게 굴었지만 사실 못내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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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말고 다   제311화

    인사를 건넨 부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서준혁에게 말했다.“신유리씨가 방금 저한테 버닝스타도 이번 입찰에 참여한다고 알려주던데, 화인이랑 버닝스타가 또다시 만나 같이 일하게 되는 건가요?”“화인도 참여해요?”신유리가 물었다.“입찰회엔 설계사도 있고 투자자도 있습니다. 꽤나 큰 활동이라고 볼 수 있죠.”어젯밤 몰래 입찰회에 관한 기사들을 검색해본 신유리는 이런 활동이 기타활동과는 달리 국내 모든 자원들이 다 동원하기에 규모가 크고 평범한 회사들이 얻기에 매우 힘든 기회라는 것을 알았고 한번 열면 어마어마하게 성대한 모임이라는 것도 알았다.당연하게도 입찰회 현장에는 수많은 섹션들을 나누어놓기에 매 영역마다 다른 모양들도 준비되어 있었다.버닝스타가 눈독을 들인 것은 바로 성남시와 부산이 합동해서 여는 현장-성명월이라는 전시회였다.대범하고도 도전적인 주제사상과 현대 유행하는 원소들이 더해져 이 섹션은 모든 입찰회중에서 제일로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물건이었다. 신유리가 화인에 대한 이해로는 많고 많은 섹션들중 서준혁이 성명월을 고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부선생이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다.“사실 되게 우연입니다, 선택한 주제들이 비슷비슷해서 정말 떨어진다면 서로 맞춰가는 과정은 생력해도 되니까 좋잖습니까.”서준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얼른 말을 이어갔다.“저도 버닝스타와의 2차 협업, 기대가 많이 됩니다.”부선생이 자리를 떠난 후 신유리는 서준혁을 쳐다보며 아까 그가 했던 말에 대해 물었다.“화인에서 버닝스타랑 또 같이 하고 싶다고는 해요?”그도 그럴 것이 신유리는 방금 서준혁이 한 말을 도저히 믿지를 못했다.필경 미래의 일에 관해서 서준혁은 몇 번이나 버닝스타의 계획을 제쳐버렸으니까 말이다.“그럼 성남에 더 잘 어울릴 사무실이 있기나 합니까?”그의 대답에 반응을 한 신유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서준혁이 버닝스타랑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 싫어도 무조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새로운 사무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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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말고 다   제312화

    장수영은 순간 흠칫하더니 막연한 눈빛으로 신유리를 보며 물었다.“신연씨... 아버지요?”“신연씨 가정사는 저희 대부분 다 몰라요. 지연이도 모를걸요? 근데 그 사람을 보아하니 집안도 그저 그런 것 같더라고요.”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고 신유리는 생각에 잠겼다.지연.이 이름을 듣자 신유리는 바로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밖으론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장수영을 제외하고 연우진마저도 지연이라는 이름을 문득 말했었고 심지어는 그녀가 부산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더러 지연이라는 여자를 보러 가보라고도 말했었다.[지연이라는 사람은 신연... 여자친구인건가?]신유리의 미간을 점점 더 찌푸려졌고 엉킬 대로 엉켜버린 실마리들을 풀어헤치려고 애를 썼다.“신연씨한테 관심 있어요?”신유리의 표정을 본 장수영은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더니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어갔다.“신유리씨 성도 신, 신연씨도 신씨... 둘이 친척 아니에요? 헐?”신유리는 장수영의 오버 섞인 말에 담담히 대답했다.“너무 멀리 갔어요, 저희 둘 서로 모르는 사이에요.”그녀는 그저 한 가지 사실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장수영도 별로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고 지내고 싶어요? 그럼 오늘밤 같이 놀러가요! 지연이도 오고 진송백씨도 온대요. 아마 신연씨도 올걸요?”신유리는 원래 망설이고 있었는데 장수영의 꼬드김에 넘어가 허락해버렸다.어떤 일은 빨리 알면 알수록 좋으니 질질 끌 필요는 없기 때문에.장수영이 말한 놀 거리는 부산에서 술집이 즐비한 골목에 있는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술집이었다.신유리가 그녀를 따라 들어간 순간 첫눈에 보이는 건 마른 몸에 진한 파란색 치마, 하얀 피부를 하고 서있는 인형 같은 여자였다.“지연아!”옆에 있던 장수영이 그 여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신유리의 팔을 잡고 다가가며 소개를 시켜줬다.“이쪽은 내가 너한테 말했던 예쁜 그 언니, 포스 죽이지?”태지연은 신유리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는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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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화분 옆에 서있는 신연은 이제 고작 20대 초반인지라 아무리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앳돼보였다.복도의 따뜻한 조명이 그에게 비춰지자 신유리와 똑 닮은 그의 눈은 더욱 반짝였다.신유리는 앞으로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가 신연을 보며 담담하게 입을 뗐다.“신연.”한자 한자 똑똑히 들리게 말을 하는 신유리는 신연의 성씨를 더욱 강조하며 말했고 그것을 들은 신연은 아무런 기복이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그때 호텔에서 본 눈빛이랑 전혀 차이가 없었다.사람들로 붐비는 복도와 밖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도 불구하고 신연과 신유리 두 사람은 마치 그들만의 세상에 갇힌 듯 고요했고 정적만 흘렀다.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춰졌다.신연은 한참 있다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신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신기철 씨한테서 얘기 자주 들었습니다.”“그래요?”신유리는 그의 말에 흠칫하더니 물었고 신연은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그 사람이 신유리 씨를 많이 사랑하던데요.”신유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킨 채 신연에게 묻고 싶었던 물음을 물어보았다.“처음부터 절 알아보셨나요?”그녀의 물음에 신연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얘기해줬다.“사진 본 적 있습니다.”담담한 그의 말투에서 신유리는 그가 자신을 조금 얕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지만 신연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신분을 확인하려는 목적만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신연의 몸에는 섣불리 다가가기도 힘든 거리감이 느껴졌고 신유리는 신연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물었다.“여기서 절 기다리고 계신 게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닐 텐데요?”정곡을 찔린 신연은 뜨끔하더니 옆에 있는 화분을 길고 큰 손으로 만지더니 별안간 잎을 하나 뜯어서 버려버리고는 대답했다.“아니요, 그냥 뭐 좀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뭘 보고 싶은 건데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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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 나 말고 다   제636화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 나 말고 다   제635화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 나 말고 다   제634화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 나 말고 다   제633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 나 말고 다   제632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 나 말고 다   제631화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 나 말고 다   제630화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 나 말고 다   제629화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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