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를 바라보는 임아중의 눈빛에는 악의는 없이 호기심만 가득했다. 그녀는 신유리를 어떤 거리낌도 없이 초대했다. "우리 다 친구일 텐데, 같이 놀래요?"신유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이신이랑 저는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놀아요. 이제 주말인데 좀 릴렉스 해야죠." 임아중은 매우 고집 있는 성격이었고 신유리의 말에는 아랑 곳 하지 않았다. 그저 신유리가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임아중이 계속 여러 차례 초대를 하니 신유리도 거절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신의 친구이기도 하였다.그녀는 승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무리하지 마.""무슨 소리야? 무슨 우리가 놀자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어렸을 때 같이 학교 다녔던 거 잊었니?" 임아중은 이신의 말을 듣고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다.신유리도 말했다. “아니야. 어쨌든 주말이기도 하고.” 이곳에는 바가 없어 임아중이 GT 라운지 바로 이동해서 놀자고 하였다.주차장에 도착하자 신유리가 말했다.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갈게." 그녀는 더 이상 서준혁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임아중은 힘없이 돌아서서 신유리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면 운전해도 돼."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서준혁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 대표, 신이 친구가 차를 타고 왔어. 우리도 같이 타고 가자. 나중에 술 마시는 걸 생각하면 이게 편할 것 같아."신유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런 뜻은 아니었다.그런데 임아중은 이미 뒷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오늘 긴 다리를 뽐내기 위해 높은 힐을 신었더니 이제 종아리가 아팠다.신유리는 눈썹을 찌푸린 채 서 있었고, 갑자기 그녀의 옆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서준혁은 그녀 옆에 서서 그녀를 거만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신유리는 고개를 숙인 뒤 곧바로 운전석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남자의 차가운
신유리의 표정이 굳어졌고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준혁!” 서준혁은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느꼈지만 여전히 차갑고 조소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건 다 했으면서 뭐가 두려워?"신유리는 가슴에 돌이 박혀 있는 듯 갑갑한 기분이 들어 잠시 서준혁을 바라보다 뒤를 돌아 이신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먼저 나가줄래?"이신은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면 전화해."이신이 룸을 떠나자 신유리는 마음 속 답답함을 견디며 천천히 말했다. "서준혁, 나를 괴롭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이젠 다른 사람까지 끌어 들이려는 거야?""괴롭혀?" 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바라보기 전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가 뭐라고 내가 너를 괴롭혀?"신유리는 눈을 감고 말했다. "그럼 앞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는 그만해줘.""내로남불을 보니 평소 너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서준혁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유리야, 넌 정말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구나."룸에는 여전히 술 냄새가 진동했다. 서준혁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자신을 깔보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서준혁이 자신을 위선적이고, 파렴치하고, 나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게 웃겼다. 서준혁의눈에 자신이 언제 그렇게 변해 있었는지 신유리 자신도 몰랐다.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무력감에 신유리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꾹 참으며 말했다. “정말?”말을 마친 후 그녀는 떠나고 싶었지만 갑자기 룸의 문이 열렸고, 임아중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 뒤에 지인 몇 명이 있었다.우서진이 앞장 서서 들어왔고, 서준혁을 보고 말했다. "임아중이 너 여기 있다고 하길래 안 믿었는데, 진짜 네가 여기 왜 왔냐?" 그러나 이내 그의 옆에 신유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준혁아, 이건 아니다. 소개팅에 비서님을 데리고 갔니?" 그는 서준혁
신유리의 말은 송지음의 체면을 전혀 살려주지 못했고, 그녀의 안색은 바로 굳어졌다. 송지음의 말투도 더 이상 가식적이지 않았다."유리 언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게다가 언니는 이제 화인 그룹을 떠나야 하잖아요?” 신유리는 송지음을 별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송지음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도 줄곧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신유리는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몇 초 뒤, 그녀는 다시 눈을 치켜 뜨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송지음을 바라보았다. "송 비서,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화인 그룹을 떠나는 건 내 선택이지, 내가 해고된 게 아니야.” 송지음은 자신이 정말로 신유리를 화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저절로 몸이움츠러들었다.하지만 회의실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지음은 속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결과는 똑같잖아요?” 신유리는 잠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방금 전에는 정신줄을 놓은 탓에 송지음과 말다툼을 벌일 뻔 했다.“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더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사무실로 오세요.” 신유리는 송지음과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곧장 물건을 들고 회의실을 나갔다. 양예슬은 진지한 얼굴로 그 뒤를 바짝 따라갔고, 신유리는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 “정말 그만둔 거예요?”양예슬이 머뭇거리며 묻자, 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달에 갈 거예요.”“왜요?”양예슬은 눈살을 찌푸렸다.신유리는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화인 그룹을 떠난다는 것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을 것 같았다. 신유리의 속눈썹이 살짝 떨려왔고,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새 직장을 구해서 이직을 하려고요.” 하지만 양예슬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다른 말을 더 하기를 기다렸지만 신유리는 그녀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이것 좀 확인한 뒤에 인사팀에게 전달해
곽정희가 돌아왔을 때, 신유리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이마를 한 손으로 짚으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곽정희는 놀라며 물었다.“서 대표님은, 가셨어?” 신유리는 서준혁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직위를 대신할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후 면접에서 신유리는 마음이 딴 곳에 있었고, 앞에 놓인 이력서를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면접이 끝난 뒤, 곽정희와 감독관이 말을 꺼냈다."여기 면접자들도 다 이력서를 꾸며서 썼네요, 정말 하나같이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신유리는 잠시 앉아 있다가 물건을 집어 들고일어나 사무실로 돌아왔다.그녀는 근심에 잠겨 표정이 좋지 않았고, 사무실 입구에서 오청아와 마주쳤다. 오청아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신유리의 무거운 얼굴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외쳤다."유리 님.” “무슨 일이시죠?”신유리도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고, 기분이 좋지 않아 직설적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그러자 오청아는 무안해하며 말했다.“저, 저는 괜찮아요. 그냥, 유리 님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신유리는 멈칫하더니 오청아를 바라보았다.“회사에서 한 얘기 말이에요, 저희 비서실에서는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청아는 이 말을 한 것을 곧바로 후회를 했다. 신유리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뱉어버렸기에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는 유리 님이 송지음에게 자리를 뺏겨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오청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에 비해 신유리의 얼굴은 차분했다.신유리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양예슬은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바라보았다.“그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를 하던가요?”“뭐가요?” "내가 퇴사를 하는 게 송지음 때문이라고 하던가요? 아니면 서준혁 때문에?
신유리는 단념했는지 이번엔 얼굴에 원한을 품지 않았다.이신은 그제야 시름 놓고 휴대전화를 건네받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물었다."지금은, 밥 먹을 기분 들어? "신유리는 잠깐 멍해지더니 바로 알아챘다. 신유리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이신은 먹고 싶지 않다고 배려했던 것이었다.그는 이신의 공감 능력에 감탄하면서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워했다.신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달했다."고마워."이신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연우진이랑은 너무 가까이하지 마!"신유리는 더 물어보려던 찰나에 아주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신!"이신은 발길을 멈추고 소리 방향을 따라보니 임아중이 한 남자의 팔짱을 끼고 멀리서 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임아중은 남자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 앞에 걸어왔다.그녀는 흥미진진하듯 신유리와 이신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어머, 너희 둘도 밥 먹으러 왔어? "이신은 머리를 끄덕였다.임아중은 워낙 붙임성이 좋아 싱글벙글 웃으며 옆의 남자를 끌어 앞세우며 소개하기 시작했다."인사해, 우리 자기야."지난번 임아중을 봤을 때는 분명히 서준혁이랑 맞선을 보는 사이였다.임아중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신유리에게 물었다."며칠 전, 나 너랑 쇼핑하려고 메시지 엄청나게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해? "신유리는 다소 놀라웠다.그날 캐톡 친구 하자는 얘기가 그냥 예의로 말한 줄 알았다.최근 기분이 안 좋아 임아중의 메시지를 놓쳤을 수도 있다.신유리는 미안한 듯 임아중에게 사과했다."미안, 요즘 너무 바빠서 캐톡 챙겨보지 못했어, 놓친 거 같아."임아중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신유리를 바라보았다."요즘 세대에 캐톡을 안 보는 사람도 있어? ""업무용 캐톡이랑 개인 캐톡은 따로 있어." 신유리가 설명했다.다행히 임아중은 신경 안 쓰는 눈치다. 그녀는 데려온 남자의 팔짱에서 손을 떼고 서준혁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임아중은 그의 반응에 재밌는지 호기심이 발동한 듯 몸을 더 붙이면서 신유리에
어색한 분위기는 얼마 유지되지 못하고 우서진 친구의 인사로 다시 완화되었다.신유리는 가지도 못하고 남아있지도 못해 망설이다가 소파에 계속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두 도련님도 신유리의 기분을 알아채고 다른 자리로 피했다.룸의 분위기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임아중이 술잔을 들고 다가올 때 신유리는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신유리의 곁에 앉았다."유리야, 저쪽에서 포카 놀던데, 왜 같이 놀지 그랬어? 그리고 이신은 왜 아직도 안 와?"룸 안의 등불은 어두컴컴하여 신유리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너희들 재밌게 놀아."신유리는 저녁밥도 먹지 않고 오후 내내 화를 참은 관계로 결국 속이 안 좋기 시작했다.임아중도 신유리가 기운이 없어 보여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술잔을 다시 들어 다른 자리로 갔다.신유리의 시력은 워낙 안 좋아 이 시각 우서진과 서준혁이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하여 마음은 다소 편해졌지만 그래도 한 공간에 있는지라 얼마간 불편함은 있었다.신유리는 한참 앉아 있다가 가방을 들고 화장실 가려 하였다.그녀는 천천히 문 입구에 걸어가서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마침 누군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바로 이신이 휴대전화를 들고 문 입구에 나타났다.그는 신유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왜?"신유리가 인사하려 하려던 참에 이신을 잘 아는 친구들이 가로채고 그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이신, 왔어? 아중이 글쎄 네가 온다고 해서 안 믿었는데, 결국 왔구나."신유리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옆으로 자리를 비켜줬다."나 화장실 갈 거니까 어서 들어와."이신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사실 그는 조금 전 바로 올라오려고 했는데, 고객이 전화를 갑자기 하는 바람에 아래층에서 좀 더 머물러 있었다.신유리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무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메이크업은 여전히 깔끔하나 눈에는 피로감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이신에게
예술품 금융화는 갓 떠오르는 시장 열풍으로 지원받을 기회는 많다.신유리는 서준혁을 올려다보면서, 내심 그의 비즈니스에 대한 탁월한 민감도에 감탄했다.부도에 헤매는 화인 그룹을 되살려낸 능력만 봐도 알 수 있다.서준혁은 테이블을 가볍게 치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미래 쪽은 누가 갈 거야? "미래는 역사가 유구하고 명성이 높은 문화재 예술관이다.이때 신유리는 손에 쥐던 필을 놓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해보겠습니다."신유리는 비서실 직원으로 주로 회의실에서 회의록을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서준혁은 그녀를 돌아보더니 단칼에 거절했다."신 비서가 체험하라고 가져온 프로젝트는 아니에요. "그의 거절은 아주 확실하고 깔끔하여 신유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미래로 갈 사람은 회의가 끝나서도 정해지지 않았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양예슬은 신유리에게 물었다."유리 언니, 언니는 왜 주동적으로 그 일 맡으려고 해요? "신유리는 고개만 저으면서 아무 대답도 주지 않고 탕비실에 들어가 이신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안 되어 이신이 전화를 받자, 신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내가 지금 예술품 금융화 방면의 일을 접촉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이신은 잠깐 멈칫했다가 말했다."예술품의 부가가치는 확실히 이후에 경제 핫 이슈로 될 수도 있지, 게다가 더 많은 전시 열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은 선택이야"그는 말을 끝내고는 신유리에게 되물었다."왜 갑자기 그 얘길 하는데?""회사에 프로젝트 하나가 생겼는데 미래와 손잡을 수도 있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신유리는 조신하게 말했다."나 이 프로젝트 해보고 싶어."이신과의 통화를 끝내고 신유리는 바로 사무실로 돌아갔다.뜻밖에도 송지음이 사무실로 내려와 얌전한 척 신유리 앞에 나타났다."유리 언니, 나 언니한테 배우러 왔어요."어떻게든 신유리의 직위를 가로채려고 애를 쓰는 듯하였다.신유리는 그녀와 엮이기에 싫어 핑계를 댔다. "나 지금 일 있으니까 시간 없
휴대전화의 불이 천천히 꺼지자, 신유리는 뒤통수가 오싹해 났다.왜냐하면 건강검진을 예약한 적 없었던 것이다."유리 언니, 나 물어볼 게 있어요."잠잠했던 심정은 더 이상 통제가 안 되고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메시지를 받은 신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때마침 송지음이 문서를 들고 신유리한테 다가왔다.짙은 화장을 해도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하지만 송지음은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서류를 신유리에게 내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유리 언니, 여기 규격이 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은데 순서를 어떻게 처리할까요?"신유리는 그녀가 내민 서류를 보다가 차가운 말투로 나무랐다."넌 손이 없어? 인터넷을 찾을 줄 몰라? "뜻밖의 차가운 태도에 송지음은 어리둥절해졌다.예전 같았으면 이럴 땐 신유리는 항상 대신 해주겠다고 챙겨줬었다.송지음은 분위기를 짐작하고 잠시 멍해 있다가 바로 당황한 듯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리 언니, 난 그냥 이 부분을 잘 몰라서 물어봤을 뿐이에요."말하면서도 송지음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나약한 어깨는 후들거렸다.예전의 자신이 송지음의 어떤 부탁에도 오냐오냐해줬던 것이 문득 후회가 났다.어떤 요구든 다 들어주니 송지음은 신유리가 만만해 보였을 수도 있었다.신유리는 송지음의 서류를 대충 열어본 후 바로 본론을 말했다."규격이 명확하지 않으면 미래의 홈 사이트에 들어가서 찾아보면 되잖아! 거기에 문물 차트가 기재되어 있을 건데 안 보여? 인턴때 선배들이 안 가르쳐줬어?"신유리의 말투는 아주 거칠고 딱딱했다.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송지음의 기색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눈시울도 바로 붉어졌다.송지음은 이내 불쌍한 척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사무실 사람들의 주의력은 진작에 둘을 향하고 있고 모두 조용하게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워 신유리는 기분을 추스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서류 남기고 가, 검색엔진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기 전엔 찾아오지 마."송지음의 눈시울은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