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강문철은 틀렸다. 강지혁은 임유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강지혁이 기계 장치 가까이에 다다르자 바로 타이머부터 보였다. 타이머에 표시된 숫자는 8이었다.이제 8분이 지나면 폭탄이 터지게 된다.“안 돼! 혁아, 그러지 마!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너희 할아버지는 절대 네가 그런 선택을 하게 내버려 둘 분이 아니야. 누구보다 가문을 중요시했던 분이셨잖아! 네가 죽으면 가문을 이을 사람도 없어지고 회사도 망하게 될 텐데 너희 할아버지가 그것도 생각 못 하셨을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멈추고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 응?!”“유진아, 괜찮아. 겁먹지 않아도 돼. 내가 반드시 널 구해줄 테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치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이내 강문철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콜록콜록... 결국에는 임유진 때문에 목숨을 거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구나. 그런데 네 선택은 틀렸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임유진은 네가 목숨을 걸고서까지 구해줄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콜록콜록... 폭탄을 해제하려면 네 엄지로 빨간색 버튼을 한동안 누르고 있어야만 한다. 폭탄이 해제되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계속해서 누르고 있으면 임유진 쪽 폭탄은 해제되겠지만 이 기계에 설치된 폭탄은 바로 터지게 되겠지.”강문철의 담담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괜히 몸이 오싹해 나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친할아버지라고는 생각을 못 할 얘기였다.“다만 버튼을 누르고 폭탄이 해제되는 시간 동안 너는 언제든지 손을 떼고 이 기계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해제에 실패하고 임유진 쪽의 폭탄이 바로 터지게 되겠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네가 그 여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콜록콜록... 그리고 임유진이 정말 네가 목숨을 바칠만한 여자인지.”강문철의 목소리가 완전히 끊기고 이내 무거운 적막이 찾아왔다.임유진은 자신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어
임유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새어 나왔다.지금 이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남의 행복이나 비는 바보 같은 남자 때문에 그녀는 가슴이 아프고 또 숨이 막혔다.강지혁의 엄지손가락이 결국에는 버튼을 눌렀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있는 차 안 모니터에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그게 폭탄 해제까지 걸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그녀와 강지혁 사이에는 이제 고작 2분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2분이라는 시간 동안 강지혁은 언제든지 손을 떼고 그곳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다.“고 비서님, 당장 혁이를 저기서 끌어내 주세요!”임유진이 고이준을 향해 외쳤다.그 말에 고이준의 몸이 움찔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지혁을 끌어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임유진이 탄 차량 주위에 깔린 폭탄들이 터지게 된다.“내 몸에 손대면 그게 누구든 가만 안 둬!”강지혁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아주 크게 울려 퍼졌다.이에 경호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준은 더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고이준, 유진이가 절벽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면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 그리고 지금 당장 내 곁에서 멀리 떨어져.”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시선을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원해서 하는 거라고?하지만 그게 원해서든 아니든 임유진은 그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사실 그녀에게는 강지혁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임유진은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기어봉에 묶인 손을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어느새 많이도 불룩해진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미안해. 엄마가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정말 미안해... 엄마가 한 선택에 너희를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너희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혁이가 죽는 걸 이대로 지켜볼 수 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엄마 한 번만 봐줘.”임유진은 숨을 한번 고
“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갈래요?”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유진은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쩌면 이 남자가 아무런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남자가 감옥에 있을 때의 자신과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다.그도 아마 그녀와 똑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에 반해, 그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바닥에서 주무시겠어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유진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새 수건과 새 칫솔을 꺼내 건네주었다.“욕실은 저쪽이에요. 남자 옷이 없어서……, 최대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남자가 욕실에 들어가자 유진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그녀가 살고 있는 그리 집은 크지 않은 원룸이다. 기껏해야 5평 남짓한 크기에 따로 주방도 없이 달랑 화장실 하나 있는 게 다였다. 때문에 평소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구비해 둔 인덕션을 사용하곤 했다.남자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물에 젖어있었다.유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건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켰다.“허리 좀 숙여 봐요.”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물기를 닦아드리려고요. 머리가 너무 축축하잖아요, 안 말리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여전히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네.”유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당신을 데려온 이상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그제야 유진은 수건을 그의 머리에 덮고 담담히 물기를 털어주었다.“이름이 뭐예요?”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네, 원해요.”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좋아요.”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가자.”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감옥?”“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임유라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는 망설임도 없이 임유진의 뺨을 때렸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 거로 우리 집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네 인생 망쳤다고 동생 앞날도 망칠 셈이야?”임정호의 눈에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유진 덕에 서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샀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부러움은 모두 비아냥으로 변했고 우쭐대던 그도 체면이 완전히 깎여버렸다.유진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지만,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했다.“어머니 제사 때문에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 ‘집’에는 이제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유진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켠 뒤 그녀를 맞이하는 건 그저 쓸쓸한 적막감뿐이었다.5평 남짓한 방은 아무도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혁이 씨는 간 건가? 결국 또 혼자구나.’유진은 문득 공허함을 느꼈다.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고 몸을 살짝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에 멍해졌다.‘혁이 씨잖아!’그는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꺼운 앞머리가 얼굴을 반 정도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이런 사람이…… 정말 노숙자라고?’그녀는 아무런 친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어쩌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왔어요.”차갑고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듣기 좋은 빗소리와 같았다.
“그야…….”임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한 입 남은 찐빵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예전 같았으면 맛없다고 투정 부렸을 테지만, 지금 그녀에게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배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우리는 많이 닮았으니까?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이잖아. 어쩌면 그 누구도 우리를 원하지 않을 거고, 관심을 주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말을 마친 그녀는 강지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희망과 기대 속에 김장감도 섞여 있었다.“그런가? 하긴, 우리가 비슷한 부류긴 하지…….”진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그의 눈은 마치 덫에 걸린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진혁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가질 수 있는 그에게 삶은 아무런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유진의 말은 꽤 흥미로운 게임으로 다가왔다.“누나.”그는 유진이 그토록 바라던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순간, 유진의 미소는 봄에 핀 꽃들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저녁을 먹고 난 뒤, 유진은 지혁을 데리고 야시장으로 가, 그가 입을 옷을 샀다. 분명 세일하는 싼 옷을 골랐지만 금액은 10만원을 훌쩍 넘었다.하지만 유진은 뿌듯한 마음으로 지혁에게 새 패딩을 입혀줬다.“따뜻하지?”“응.”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자신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아담한 유진을 바라봤다.“사실 안 사줘도 돼. 원래 있던 옷으로도 충분해.”“충분해도 새 옷을 입을 순 있잖아. 물론 돈이 없어서 많이는 못 사주지만, 적어도 너한테 옷 한 벌 정도는 사줄 수 있거든?”“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진혁은 나지막이 물었다.“그야 내가 네 누나니까.”유진은 싱긋 웃으며 지혁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우연히 닿은 차가운 그의 손에 유진은 양손으로 감싸 입김을 불어주며 이리저리 비벼댔다.“손이 너무 차가운데? 이렇게 문지르다 보면 좀 따뜻해질 거야.”스스럼없는 여자의 행동에 지혁은 약간 굳어버렸고
“그딴 영광 필요 없어.”임유진의 말에 하 감독은 술기운을 빌려 그녀에게 달려들어 뺨을 갈겼다.“내가 마시라면 마실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비싼 척은!”이윽고 욕설을 퍼붓더니 옆에 놓인 와인병을 들어 유진의 입에 마구 부어 넣었다.유진은 상대방을 밀쳐내려고 애썼지만, 여자 혼자서 건장한 남자를 힘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임유라까지 옆에서 그를 돕고 있었으니.하 감독은 유라의 눈치 있는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유라 씨, 가만 보면 참 기특하다니까. 내가 유라 씨 분량 꼭 늘려준다. 총감독님한테는 내가 말 잘해볼게.”그 말에 임유라는 더 신이 나서 열심히 옆에서 도왔다.“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저희 언니가 이런 데 좀 서툴러서 그러니 감독님이 이해해주세요.”한편, 유진은 자기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도 몰랐다. 주량이 약하다 못해 거의 알코올 쓰레기라고도 불리었기에 벌써 술에 취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지만 의식이 꺼지지 않도록 본인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나…… 나 집에 갈래…….”“그래, 이따가 데려다줄게.”하 감독은 술에 취해 나른해진 그녀를 얼른 끌어안았다.유진은 화려한 미녀는 아니지만 일전에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다는 것만 생각하면 하 감독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 감독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솔직히 전화를 무시하려고도 했지만, 액정에 뜬 총감독의 이름을 보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수신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총감독은 그의 큰 형인 데다 그가 감독의 자리를 꿰찬 것도 총감독인 형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었다.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급기야 호흡마저 가빠졌다.“그…… 그럴 리가 없어. 이, 이 여자…… 이 여자는 환경미화원인 데다 백도 없다고. 전 남자친구인 소민준과도 헤어진 지가 언젠데, 게다가 지금 소민준은 약혼녀까지 있잖아.”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여자친구가 환경미화원으로 길바닥 청소나 하는
임유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새어 나왔다.지금 이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남의 행복이나 비는 바보 같은 남자 때문에 그녀는 가슴이 아프고 또 숨이 막혔다.강지혁의 엄지손가락이 결국에는 버튼을 눌렀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있는 차 안 모니터에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그게 폭탄 해제까지 걸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그녀와 강지혁 사이에는 이제 고작 2분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2분이라는 시간 동안 강지혁은 언제든지 손을 떼고 그곳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다.“고 비서님, 당장 혁이를 저기서 끌어내 주세요!”임유진이 고이준을 향해 외쳤다.그 말에 고이준의 몸이 움찔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지혁을 끌어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임유진이 탄 차량 주위에 깔린 폭탄들이 터지게 된다.“내 몸에 손대면 그게 누구든 가만 안 둬!”강지혁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아주 크게 울려 퍼졌다.이에 경호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준은 더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고이준, 유진이가 절벽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면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 그리고 지금 당장 내 곁에서 멀리 떨어져.”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시선을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원해서 하는 거라고?하지만 그게 원해서든 아니든 임유진은 그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사실 그녀에게는 강지혁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임유진은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기어봉에 묶인 손을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어느새 많이도 불룩해진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미안해. 엄마가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정말 미안해... 엄마가 한 선택에 너희를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너희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혁이가 죽는 걸 이대로 지켜볼 수 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엄마 한 번만 봐줘.”임유진은 숨을 한번 고
하지만 강문철은 틀렸다. 강지혁은 임유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강지혁이 기계 장치 가까이에 다다르자 바로 타이머부터 보였다. 타이머에 표시된 숫자는 8이었다.이제 8분이 지나면 폭탄이 터지게 된다.“안 돼! 혁아, 그러지 마!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너희 할아버지는 절대 네가 그런 선택을 하게 내버려 둘 분이 아니야. 누구보다 가문을 중요시했던 분이셨잖아! 네가 죽으면 가문을 이을 사람도 없어지고 회사도 망하게 될 텐데 너희 할아버지가 그것도 생각 못 하셨을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멈추고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 응?!”“유진아, 괜찮아. 겁먹지 않아도 돼. 내가 반드시 널 구해줄 테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치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이내 강문철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콜록콜록... 결국에는 임유진 때문에 목숨을 거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구나. 그런데 네 선택은 틀렸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임유진은 네가 목숨을 걸고서까지 구해줄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콜록콜록... 폭탄을 해제하려면 네 엄지로 빨간색 버튼을 한동안 누르고 있어야만 한다. 폭탄이 해제되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계속해서 누르고 있으면 임유진 쪽 폭탄은 해제되겠지만 이 기계에 설치된 폭탄은 바로 터지게 되겠지.”강문철의 담담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괜히 몸이 오싹해 나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친할아버지라고는 생각을 못 할 얘기였다.“다만 버튼을 누르고 폭탄이 해제되는 시간 동안 너는 언제든지 손을 떼고 이 기계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해제에 실패하고 임유진 쪽의 폭탄이 바로 터지게 되겠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네가 그 여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콜록콜록... 그리고 임유진이 정말 네가 목숨을 바칠만한 여자인지.”강문철의 목소리가 완전히 끊기고 이내 무거운 적막이 찾아왔다.임유진은 자신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어
임유진은 자신의 양손이 왜 한쪽은 핸들에 묶여있고 또 한쪽은 기어봉에 묶여있는지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없게 둘 중 하나가 살 수 있게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지금 그녀가 탄 차량의 주위에 얼마만큼의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그걸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만약 파악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폭탄을 건드리면 최악의 결과로 치닫게 된다.정말 두 사람 다 사는 방법은 없는 걸까?임유진은 머리를 최대한으로 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그때 김재호의 말을 전부 듣고 있던 진세령이 표독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어때? 상황이 엄청 재미있어졌지? 이제 강지혁은 어떻게 할까? 나는 강지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널 버릴 거라는 거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데 너는 어때? 혹시 너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얼굴이 그렇게 죽상이 된 거야? 하하하!”임유진은 진세령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강지혁의 얼굴만 바라보았다.그리고 강지혁도 그런 그녀를 똑같이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그의 눈동자에 뭔가의 결심이 섰고 임유진은 그걸 보고는 서둘러 크게 외쳤다.“혁아, 하지 마!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그런데 강지혁은 그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녹음을 켠 후 휴대폰을 입 가까이에 가져갔다.“나 강지혁은 죽은 후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전부 아내인 임유진에게 넘겨주겠다. 이건 그 어떤 외부의 강요도 받지 않은 온전한 내 의지임을 밝힌다.”그는 말을 마친 후 곧바로 휴대폰을 고이준에게 던져버렸다.그리고 고이준은 그의 휴대폰을 받고 그대로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지금 자기 목숨을 희생해 유진 씨를 구하려는 건가? 그래서 유언을 남긴 건가...? 하지만 이대로 대표님이 죽어버리면...’고이준은 그 뒤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강지혁의 유언에 굳어버린 건 고이준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김재호의 얼굴 역시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대표님, 정말 임유진 씨를
김재호가 한 손을 들어 임유진이 타 있는 차량과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저쪽으로 가시면 웬 기계 장치가 하나 보일 건데 거기에 폭탄을 해제할 수 있는 버튼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는 대표님의 지문이 필요합니다.”김재호의 웃음기가 한층 더 깊어졌다.그리고 강지혁은 김재호의 말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이 상황이 단지 지문을 찍고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만약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굳이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까.“인내심 테스트하지 말고 똑바로 끝까지 말해. 너와 여기서 입씨름할 시간 없으니까!”강지혁은 지금 일 초라도 빨리 임유진을 저기서 구해내고 싶었다.“그러죠. 만약 대표님께서 해제 버튼을 누르시게 되면 기계 장치에 설치된 폭탄의 스위치가 자동으로 켜지게 될 겁니다. 즉 임유진 씨를 구하면 대표님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이죠.”김재호는 강지혁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큰 목소리로 말했다.차 안에 있는 임유진에게도 이 얘기가 전달되기를 바라서였다.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임유진은 그의 말을 아주 똑똑히 들어버렸다.임유진은 마치 온몸이 한기에 둘러싸인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어 버렸다.자신이 사는 대가로 강지혁이 목숨을 잃게 될 줄은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왜... 대체 저 남자는 뭣 때문에 이런 짓을 계획한 거지? 단순히 내 목숨이 목적인 거면 내가 기절해있을 때 진세령을 통해 나를 죽이면 됐을 텐데...?’그때 임유진의 의문에 대답을 해주듯 김재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회장님께서 이 판을 계획한 건 다 대표님이 정신을 차렸으면 해서입니다. 임유진 씨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요. 대표님, 임유진 씨를 대체할 여자는 차고도 넘칩니다. 만약 외모 때문이라면 똑같이 성형하게 하면 될 일입니다.”요즘은 의술이 워낙 좋아 완전히 똑같게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임유진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한 음성으로 진세령에게 말했다.“지금이라도 날 풀어주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해줄게. 혁이한테도 널 봐달라고 하고 네 집안이 무너지지 않게 도와주라고도 할게.”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대한 진세령이 혹할 만한 제안을 제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진세령에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인다면 그걸 기회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그런데 진세령은 마치 임유진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건지 자기 할 말만 이어나갔다.“나는 그냥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강지혁이 널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우리 언니가 죽었을 때는 눈물은커녕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았거든. 솔직히 너도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 강지혁이 널 위해서 정말 목숨을 걸 수 있을지 없을지?”진세령의 두 눈은 어느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임유진을 증오했다. 한낱 버러지 같은 여자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으니까.진애령의 사고가 있었던 그때 사실 진세령은 임유진의 곁에서 소민준을 빼앗으며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소민준이 임유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는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을까 봐.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소민준은 아주 손쉽게 임유진을 버렸다. 마치 다 쓴 건전지를 버리듯 너무나도 쉽게 그녀를 버려버렸다.생각해보면 첫사랑의 이미지로 남자들을 홀린 자신이 임유진 따위를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진세령은 강지혁도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소민준처럼 임유진을 가차 없이 버릴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그는 김재호라는 남자에게서 거액의 보수를 건네받은 후 해외로 넘어가 남은 생을 편히 즐기면 된다.그때 검은색 승용차가 연이어 이곳에 도착했다.임유진은 차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연달아 내리는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 중에 강지혁의 모습이 보였다.강지혁은 아슬아슬한 상태로 절벽에 걸려있는 차량과 그 차량의 운전석에 앉은 임유진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바
강지혁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아무리 강지혁이 강문철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강문철이 강지혁을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과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불안감이 극도에 달한다는 것까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김재호에게 실종 놀이를 하게 한 다음 갑자기 나타나게 했다.감쪽같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야 이미 불안도가 잔뜩 오른 강지혁이 직접 김재호를 심문하려고 저택에서 나올 테니까.강문철은 죽어서도 죽은 게 아니었다.게다가 김재호의 말에 따르면 강문철은 강지혁에게 내기까지 하려고 했다. 임유진과 관련된 내기를 말이다.‘유진아, 제발... 제발 무사해 줘!’...임유진의 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예쁜 두 눈이 떠졌다.임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그녀는 차량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한 손은 핸들에 꽉 묶여있고 나머지 한 손은 기어봉에 묶여있었다.그리고 그녀가 탄 차량은 차 앞머리만 간신히 땅을 밟고 있고 뒤쪽은 공중에 떠 있었다. 즉 차량의 절반만이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매달린 상태라는 뜻이었다.만약 이대로 조금만 큰 움직임을 보인다거나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게 되면 이 차는 말할 것도 없이 절벽 아래의 망망대해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상황을 파악한 후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그때 그녀의 눈앞에 영상 통화가 켜져 있는 휴대폰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화면 속에는 진세령의 얼굴이 보였다.“깼어?”진세령이 음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솔직히 생각도 못 했어. 내가 짓밟은 한낱 벌레가 오늘날의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는 말이야.”“진세령!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내면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임유진이 물었다.임유진은 아까 그렇게 강지혁을 보낸 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침실로 돌아온 지 몇 분도 안 돼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졸음이 몰려와 잠시 침대에서 눈을 붙였다.그리고
경호원은 강지혁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게 사모님 방으로 가봤는데 사모님은 그 어디에도 없고 채린이와 이모님만이 바닥에 기절해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CCTV가 없어 밖에 있는 CCTV를 돌려봤지만 사모님께서 침실을 나선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방안에는 지금 미약하게나마 약물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찾아! 지금 당장 저택 전부를 뒤져서 유진이를 찾아!”강지혁은 휴대폰을 고이준에게 던져버린 후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김재호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김재호의 머리를 세게 움켜쥐고 벽에 짓눌렀다.“유진이를 어디로 빼돌렸어! 만약 유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네 사지가 다 찢길 줄 알아!”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재호의 머리가 옆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벽에 세게 부딪혔다.분명히 아플 텐데도 김재호는 오히려 소리 내 웃었다.“지금 당장 저를 죽이셔도 저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까 말했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요.”“유진이를 어디로 빼돌렸는지 말하라고 했어!”강지혁이 살기를 내뿜으며 김재호의 머리를 수도 없이 벽을 향해 박았다.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임유진뿐이었다.한편 고이준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강지혁의 눈빛과 행동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기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 만약 임유진을 건드리게 되면 그건 자기 목숨을 끊어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김재호를 죽이고 말겠어!’고이준은 이 생각에 얼른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갔다.“대표님, 차라리 김재호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가 보는 게 어떨까요? 분명히 김재호는 사모님께서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은 화를 좀 가라앉히시고 손을 멈춰주세요. 이러다 김재호가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묻지 못하잖습니까.”그 말에 강지혁의 눈빛에 이성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차에 실어. 그리고 지금 당장 집으로 간다!”강지혁은 말
“진세령이 탈옥한 걸 몰랐다?”강지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김재호를 빤히 바라보았다.“네, 몰랐습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답했다.“그래, 그렇다고 쳐. 그럼 내가 올 때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겠다는 건 무슨 의도로 한 말이지?”“회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만약 임유진 씨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대표님과 헤어지지 않으면 대표님과 내기를 하나 하시겠다고요.”“내기?”“네. 대표님께서 아버님처럼 정말 여자 하나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빛이 확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지?”강문철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 대체 뭘 지켜보고 무슨 내기를 하겠다는지 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김재호는 강지혁의 의혹 가득한 눈빛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잔뜩 얻어터진 얼굴로 그렇게 웃으니 괜히 섬뜩하게 느껴졌다.“말해!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강지혁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고 눈빛도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졌다.“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김재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회장님께서는 단지 대표님께 자명한 사실을 하나 일깨워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여자를 위해 사느니 마느니 하는 건 결국 대표님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그간 노인네 뒤를 따라다녔더니 스스로가 뭐라도 된 것 같아?”강지혁이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가 김재호의 멱살을 잡았다.“네가 지금부터 입을 열고 해야 하는 얘기는 이거 하나야. 노인네가 너한테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털어놓지 않으면 그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야.”이건 누가 들어도 협박이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의 협박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답했다.“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을 때부터 회장님 뒤를 따랐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도 회장님이시고 저를 지금껏 살게 해준 사람도 회장님이십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 저한테 맡기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
...강지혁은 방에서 나온 뒤에야 옆에 늘어진 손을 꽉 말아쥐었다.아까 임유진이 그의 팔을 잡고 먼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얼굴이 가까이했을 때 그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기대감에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맛본 건 또 한 번의 실망감뿐이었다.믿음을 주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몸은 속일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그렇다는 건 그녀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하지만 뭐가 됐든 임유진은 그에게 거짓말이라도 사랑한다고 해줬고 용서하겠다는 말도 해줬다. 닿는 걸 거부하면서도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열심히 닿으려고 했다.그러니 그거로 된 거다.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아직 시간은 많으니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아이까지 무사히 출산한 후 다시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 나아가면 된다.강지혁은 밖에 있는 이모님과 경호원에게 다가와 임유진의 상황에 관해 몇 마디 당부를 건넸다.그런데 그때 고이준이 다급하게 들어오더니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대표님!”강지혁은 그의 다급한 태도에 사람들을 다 물린 후 고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드디어 김재호를 찾았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흠칫했다.“어디서 찾았지?”“회장님 산소에 있더라고요. 저희 애들을 발견하고 바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잘 잡아뒀습니다. 현재 묘원 옆의 오두막에 있는데 지금 바로 만나러 가시겠습니까?”“그래. 노인네가 대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한번 들어봐야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사실 김재호를 잡은 건 좋지만 이제껏 꼭꼭 숨어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영 석연치 않았다. 게다가 진세령의 탈옥 사건도 신경이 쓰이고 말이다.강지혁은 진세령의 탈옥에 김재호가 크게 엮여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지.”강지혁이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고이준도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