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생각보다 감정에 섬세한 남자라 임유진은 차라리 그가 그녀를 조금 덜 사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무리 지금은 마음이 아파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을 수 있을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이라는 남자와 흰머리로 뒤덮일 때까지 정말 잘살아 보고 싶었다. 예쁜 아이 셋을 낳고 평생 웃으며 행복하게 잘살아 보고 싶었다.그래서 그때 그에게 영원의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평생 그의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말을 했다.하지만 그녀는 그 약속을 이제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겨버렸네...?’임유진은 중력으로 몸이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문득 강문철이 그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강문철은 그녀가 정말 강지혁을 사랑하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내가 혁이를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고 싶으셨나? 그래서 내 손을 기어봉에 묶어놨나? 내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려고?’임유진의 귓가에 강지혁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극심한 고통과 해수가 그녀를 집어삼켰다.“유진아! 유진아!”강지혁은 이대로 임유진의 차량을 따라가려는 듯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고이준은 그런 그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며 이내 경호원들에게 같이 힘을 보태라고 지시했다.그러자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강지혁의 팔과 몸을 잡았다.“놔! 이거 놔! 유진이 구하러 가야 하니까 이거 놔!”강지혁이 눈이 빨개진 채로 목이 부서지라 외쳤다.“사모님께서는 차량과 함께 떨어지셨습니다! 이대로 대표님께서 뛰어봤자 함께 목숨을 잃는 것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모님이 마지막으로 했던 얘기, 대표님도 들으셨잖습니까! 그런데도 이대로 사모님을 따라가실 겁니까?!”고이준이 외쳤다.그러자 그 말에 강지혁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그도 알고 있다. 임유진이 그를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쯤은. 하지만... 그녀가 세상에 없는데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그때 기계 장치 쪽에서 치지직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금 강문철
그리고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강문철의 예상을 벗어남으로써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쟁취했다. 물론 그것도 하늘의 뜻이 어떤지 봐야겠지만 말이다.김재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강문철이 살아생전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만약 임유진이 정말 지혁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그때는... 살려둬. 하지만 지혁이 곁에 두지는 마. 임유진은 지혁이한테 약점밖에 안 돼.”“그러면 차라리 죽도록 내버려 두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김재호의 질문에 강문철은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김재호는 그저 강문철에게 임유진이 만약 바다에 빠졌는데도 살아나면 그때는 그녀를 살려주라는 지시만 받았다.한편 절벽에서 2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작은 오두막 안에 있던 진세령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휴대폰을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예쁜 얼굴이 단숨에 질투와 분노로 무섭게 일그러졌다.“왜! 왜 임유진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왜 살려주려고 하는데! 왜! 왜!”강지혁은 그녀의 언니인 진애령의 죽음 때는 자기와는 아주 조금도 상관없는 사람의 죽음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임유진을 위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버튼을 누르며 죽음을 택했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임유진의 행복만을 빌었다.“임유진이 뭐라고 그렇게 해!”진세령은 결과적으로 임유진이 죽은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는데도 전혀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분명히 속이 시원하고 상쾌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지독한 패배감만 들었다.강지혁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어주려고까지 하는 남자를 그녀는 영원히 얻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강지혁이 미쳐버린 지금 고이준은 자신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싶어 일단 경찰을 불러 바다에 떨어진 임유진을 수색하게 한 다음 강제로 강지혁을 구급차에 태워 병원에 보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보니 그제야 김재호가 그
“이 여자 살려내. 그리고 배 속에 있는 세 명의 아이도.”김재호의 말에 의사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 확언하기 어렵습니다.”“당신이 이 근방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의사라는 거 알아. 그리고 이력서 보니 산부인과에서 몇 년이나 근무한 경력이 있던데 그러면 수술 같은 건 당신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닐 거 아니야.”김재호는 일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사의 이력은 이미 진작에 조사를 마쳤다.“물론 그렇습니다만... 네 명 다 살릴 수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만약 넷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살려내지 못하면 그때는 이 보건소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 반드시 살려내.”김재호가 음산한 얼굴로 협박했다....임유진이 탄 차량은 육지로 건져졌다. 하지만 차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경찰과 강지혁의 경호원들이 바다 근처를 전부 다 수색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72시간의 골든 타임도 이제는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는 정말 죽은 거라고 포기해야 할 때가 왔다.하지만 이곳에는 아직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고이준은 멘탈이 붕괴하기 직전까지 온 강지혁이 너무나도 불안하고 또 걱정됐다. 또한 멘탈이 무너지는 순간 강지혁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몰라 정말 너무나도 무서웠다.고이준은 배 갑판에 가만히 서 있는 강지혁을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요 며칠 강지혁은 거의 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임유진의 행방을 쫓았다. 그는 가끔 시체라도 좋으니 제발 눈앞에 나타나 달라며 외쳤다.하지만 고이준은 오히려 임유진의 시체가 나타나지 않은 이 상황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임유진의 시체를 마주하게 되면 강지혁은 볼 것도 없이 미쳐버릴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의 목숨은 구해주었지만 그 대신 강지혁의 멘탈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대표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세요. 벌써 3일
사실 고이준은 지금껏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임유진은 강지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임유진이 강지혁 대신 죽음을 택했을 때 그 누구보다 놀랐고 그녀의 행동에 탄복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지 모르나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대표님을 사랑하시니까요. 그래서 자신보다는 대표님께서 살기를 바랐던 거죠.”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움찔 떨렸다.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날 사랑한다고... 그래, 날 사랑해서 그런 거야. 유진이는 날...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 그렇게도 확실하게 얘기해줬는데 나는 믿어주지 않았어...”강지혁은 임유진이 아이들 때문에 그를 용서한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용서하는 거라고 했을 때 그럴 일 없다며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는 줄곧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이 그녀의 사랑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임유진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목숨으로 그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줬다.“대표님, 사모님은 아마 바다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대표님 걱정을 하셨을 겁니다. 절대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절벽에서 떨어진 게 아닐 겁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모님을 위하신다면 다시 정신을 차려주세요!”고이준은 강지혁이 홧김에 나쁜 선택을 할까 봐 너무나도 걱정이 됐다.“이준아...”그때 강지혁의 곧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정말 이대로 유진이를 찾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애초에 살아갈 수는 있을까...?”모든 걸 다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가 지금은 마치 모든 걸 다 잃은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저녁 바다를 담은 그의 검은색 두 눈동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탁해져 있었다.고이준은 그런 그의 모습에 순간 만약 정말 이대로 임유진을 찾지 못하면 강지혁은 어쩌면 정말 나쁜 선택을 할지도 모
“아니, 안 죽었어.”윤이의 질문에 대답한 건 탁유미가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은 윤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유진이 이모는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윤이는 아직 이경빈을 용서하지 못한 것인지 그가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탁유미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지켰다.아이는 탁유미가 이경빈으로 인해 험하게 다뤄지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이경빈은 고작 4살짜리 아이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걸 보며 괜히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다정했던 윤이를, 언제나 선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윤이를 가차 없이 버린 건 바로 이경빈 본인이었으니까.그가 멍청하게 행동한 탓에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던 아이와의 정도 이제는 완전히 잡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엄마한테 상처 줄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이경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그도 알고 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속죄뿐이라는 것을.탁유미는 별다른 말 없이 윤이의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경빈은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그러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탁유미의 이름을 불렀다.“유미야, 나한테 뭐 할 말 없어...?”그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돌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유진 씨 찾아주고 있다며? 들었어.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네가 묻는 게 나와 너 사이에 관한 일이라면 따로 할 말 같은 거 없어.”탁유미는 이제 완전히 그와 선을 그으려는 모양이었다.그때 버스가 도착하고 탁유미와 윤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그리고 이경빈은 고통을 삼킨 얼굴로 두 사람을 태운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그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녀는 이제 그와 그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한다.하지만 현재 두 사람의 상황이 어떻든 그녀가 살아 있으니 그
강씨 저택.고이준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강지혁이 있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방안을 들여다보니 S 시의 꼭대기에 군림해있는 남자가 임유진의 옷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는 임유진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까지 한가득 널려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항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대표님...”고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미팅에 이제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결재해주셔야 할 서류들도 있고요. 이대로 계속 손을 놓고 계시다가는...”“유진이 소식은 아직이야?”잔뜩 잠긴 목소리가 고이준의 말을 끊었다. 다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는 상태였다.마치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느끼려는 사람처럼, 마치 지금 눈을 떠버리면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완전히 빼앗겨버릴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네,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임유진을 찾아 헤맨지도 벌써 40일이나 지났다. 긴 시간에 지친 수색대원들은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다며 이 이상 수색해봤자 아무런 가망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고이준은 그 말을 강지혁에게 전할 수 없었다. 전하면 강지혁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유진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얘기 좀 해줘, 응? 제발...”강지혁이 품에 있는 옷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완전히 옷에 파묻었다.“나한테 잘살라고 했지? 그런데 유진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대표님,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사모님께서 하늘에서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 과연 좋아할까요? 오히려 속상하지 않겠습니까?”보다 못한 고이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하지만 그는 말을 내뱉자마자 1초도 안 돼 바로 후회했다. 굳게 닫혀있던 강지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그를 아주 무섭게 노려봤기
“누가 대문 바로 앞에 아이를 두고 갔다고 경호 실장님이 얘기해줬어요. CCTV를 돌려보니 김재호 비서더라고요.”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도련님, 이 아이... 도련님 어릴 때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집사는 갓난아기 시절의 강지혁을 본 적이 있다.당시 강선우는 울고 있는 강지혁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 강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봐서 강문철이 자신의 아내를 받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강문철은 강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선우까지 필요 없다며 아주 단호하게 두 사람을 내쳤다.“이 집 문턱을 넘고 싶으면 그 여자를 버리고 와!”그렇게 강선우는 어쩔 수 없이 아기였던 강지혁을 데리고 다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집사는 그때 강선우의 품속에서 목 놓아 울던 아이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에 경호 실장에게서 아이를 전해 받은 후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강지혁은 굳어버린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서서히 크게 뜨며 마치 신기한 것을 본 듯 말했다.“나와... 닮았다고?”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있었다.“네, 가까이에 와서 한번 봐보세요.”집사의 말에 강지혁은 몸을 살짝 휘청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고이준은 집사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 덕에 간신히 다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집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여전히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핑크색이다 못해 이제는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설마... 유진이가 낳은 아이인 건가? 하지만... 그러면 아이가 세 명이어야 하는데? 왜 한 명이지? 그리고... 유진이는 어디 있지? 왜 아이만 있는 거지?’강지혁의 머릿속은 지금 질문으로 혼란스럽게 휘몰아쳤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은 후 다급하게 강지혁을 불렀다.“대표님, 김재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표님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답니다!”강지혁은 그 말에 발걸음
고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골함이라니... 설마...!’그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강지혁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지혁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김재호의 손에 든 유골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진이는...?”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바로 앞에 계시잖아요.”김재호가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물었다.“유진이는 어디 있냐고!”그러자 김재호가 피식 웃었다.“대표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임산부였던 몸으로 정말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아이 하나 남긴 것도 천운이었습니다.”강지혁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김재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행동을 예상한 건지 김재호가 유골함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유골함이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담긴 임유진 씨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도 괜찮으시면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르세요.”그 말에 강지혁의 주먹이 멈췄다.그는 이를 꽉 깨물며 김재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유골함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유골함이 부서질 듯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유골이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당시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들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순간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드니 그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의 화사했던 미소와 그녀의 달콤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이렇게도 생생한데 이제는 두 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혁아, 사랑해.”“혁아, 나는 너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야 말 거야.”“혁아, 널 용서할게.”“널 용서하기로 한 거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잘 살아.”진지했던 얼굴, 행복해하며 웃던 얼굴, 조금은 힘들게 미소짓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정다연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집안이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가의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강지혁을 노리고 있었고 지금은 정다연이 나서서 임유진의 기를 꺾으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정다연은 임유진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짜 죽음으로 강 회장님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도 얘기해주시겠어요? 듣기로 다른 남자 때문이라던데 어디 한번 제대로 해명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 강씨 가문의 안주인인데 이런 일로 가문에 먹칠하시면 안 되잖아요.”정다연의 의도는 뻔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난 게 사실은 다른 남자 때문이었다는 근거 불분명한 얘기로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연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너도나도 수군거리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지난 5년간 임유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정다연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정다연 씨, 혹시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정다연은 임유진의 입에서 정확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대꾸했다.“그건 말할 수 없죠.”“그래요? 그러면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 나를 깎아내리려고 한 사람이 사실은 정다연 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될까요?”임유진의 말에 정다연이 발끈했다.“그게 무슨!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임유진은 평온하고 또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정다연 씨,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한들 그걸 직접 내 앞에서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엄연한 명예훼손이에요. 좋은 의도로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정다연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움찔했다. 남편 덕에 신분 상승한 여자라 몇 번
백연신이었다.백연신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은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일전 드레스 샵에서 임유진이 제일 먼저 골랐던 그 실버 드레스였다.백연신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임유진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강 회장님 아내분과 아는 사이이지 않았어요? 5년만일 텐데 가서 인사해요, 우리.”그녀는 백연신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그를 이끈 채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죠? 고은채예요.”고은채는 예쁘게 웃으며 먼저 임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임유진은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고은채만 아니었으면 백연신과 한지영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고은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백연신의 옆자리를 노렸을 것이다. 백연신은 사랑보다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을 원했던 남자였으니까.“사모님과는 연이 좀 깊은 것 같아요.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가 바로 사모님 친구분이셨죠?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모님께서 좋은 남자 소개 해주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고은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리낌 없이 한지영의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불빛 바로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아니요. 지영이 친구는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지영이가 날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힘이 돼줄 거고 도움을 청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울 예정이에요. 물론 지영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그럴 거고요.”임유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만약 그녀로 인해 한지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은채는 이에 가볍게 웃었다.“한지영 씨는 든든한 친구를 둬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참,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그때는 연신 씨랑 결혼식에 관해 논의
임유진은 청초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하고 긴 머리를 단아하게 위로 올렸다. 물론 머리를 푼 모습도 예뻤지만 올린 것이 훨씬 더 우아해 보였다.그녀는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강지혁의 옆에 서도 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고 또 분위기 있는 모습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강지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이게 바로 하늘이 내린 한 쌍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젊은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은 평소 연예인도 만나보고 몸매가 예쁜 모델들도 만나봤을 텐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임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오늘의 임유진은 유독 더 예쁘고 단아했다. 단지 옷이 바뀌고 예쁘게 치장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는 그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게다가 그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온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고 그래서 이대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고는 했다.강지혁은 마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임유진을 더 바싹 자기 곁에 붙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아마 5년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있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게 목적이라는 걸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라며 그들에게 임유진을 소개해주었다.임유진과 인사를 나눈 사람 중에는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5년 전에 한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소개해준 대로 인사를 나누다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나 저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왜, 힘들어?”“그건 아니고 힐